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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적과 함께 가는 새로운 길-3학년 밴드(송혜경, 나선미, 강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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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씨 작성일13-10-28 14:40 조회6,3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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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적과 함께 가는 새로운 길
 
송혜경, 나선미, 강민혁(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길가에 쓰러져 있는 피투성이의 한 유대인. 운수 사납게도 그는 강도를 만나 심한 폭행을 당하고 알몸으로 버려졌다. 아무도, 심지어 성직자와 사제도 그를 못 본 척 발길을 돌려버린다. 그를 구했던 건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유대인에게 멸시받던 자들이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라는 말만 들어도 침을 뱉어 버릴 정도.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망설임 없이 달려가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까운 여관에 데려가 숙박비까지 지불해주고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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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누가 내 이웃인가?”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다. 우리 시대는 여기에 이렇게 화답한다. 서로에게 사마리아인 같은 ‘친절한’ 친구가 되어주자고. 이제는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친구가 되자고 이야기한다. 아프리카의 어린이가 맑은 눈으로 우리에게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민다. 그리고 보험회사나 은행에서도 친구가 되기를 자처한다. 심지어 교사, 부모마저도 이제는 친구이기를 바란다. 이렇게 우정을 희구하는 자들은 넘쳐난다. 우정은 낡아 버린 길에 새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아마도 여기에는 우정에게서 따뜻한 환대와 도움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환대의 악의적인 전제가 강할수록 환대도 거창해지는 것”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책세상, 2004, 289쪽)이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모든 게 우정이라면, 우정이란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사실 아프리카의 어린이는 우리의 경제적 원조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보험회사나 은행은 우리를 고객으로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며, 교사와 부모는 화목한 교실과 가정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우정은 자칫 건조해 보일 수 있는 이 ‘필요’의 관계를 포장하는 그럴싸한 도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자.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1_우리에게 우정은 없다
 
우리는 감이당이라는 새로운 문을 두드렸다. 제도가 아닌 약속, 상품이 아닌 글, 기계가 아닌 몸, 환상에서 벗어난 삶. 따라서 우리를 서로 엮어주는 것은 우정이라는 믿음이 있다. 기존의 시스템과 달리 우리의 만남은 ‘내 마음’과 ‘내 삶’의 차원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쯤은 우리에게 솔직하게 묻고 싶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나의 친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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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그러나 과연 우리는 제대로 출구를 찾았는가?
 
어쩌면 우리는 단지 니체나 푸코, 한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친구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난해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데 도움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학인들의 코멘트만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이유로 연구실을 찾았고 결국 떠난 사람들을 꽤 보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묻는 것이 있었다. “이 공부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시스템을 떠나왔다고 믿었지만, 경제적 교환관계 즉 유용성의 테두리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돌려 우리에게 묻자. 우리는 그렇지 않은가?
 
또 하나. 우리는 사회적 친절과 환대가 공허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대신 우리는 공동체에서 ‘진정한’ 호의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감이당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 글을 써오면 학인들은 오탈자, 잘못 소리 내어 읽는 것, 글자체, 종이의 여백까지 문제 삼는다. 또한 글의 논리 구성, 잘못된 텍스트 해석, 부적절한 제목도 지적 대상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 모든 요소를 삶의 태도와 연관 짓는다. 이런 혹독한 비판과 자신을 질타하는 말을 듣고, 왜 이 공동체는 따뜻하지 않으냐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은 모두 친밀하고 편안한 공동체에 대한 바람에서 비롯한다. 이런 것은 우리가 우정을 호의적인 것으로만 상상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하나. 우리는 연암 그룹의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에 감동한다. 우리는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던 칠두령의 찐한 우정을 가슴에 새긴다. 또 우리는 적마저도 친구로 삼았던 루쉰에게 찬사를 보낸다. 하여, 우리는 그런 우정을 향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술 취해 “백구야!”를 외치며 광교의 새벽길을 웃으며 걸었던 그들(연암 그룹)처럼, 포졸들에게 쫓겨 숨어든 다락방에서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낄낄거리는 그들(칠두령)처럼, 적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 그(루쉰)처럼. 이런 우정을 꿈꾸며, 나름대로 공동체 활동에 관심을 갖기도 한다. 그러면서 공동체에 몸담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우정의 제스처에 도취된다. 혹시 우리는 우정이라는 수사적 담론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더욱 교묘하게 경제적 교환관계나 환대를 바라는 마음을 지적 허영으로 포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경제적 시스템에 의해 가동되고 있는 세계로부터 탈주를 감행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몸은 공동체에 있지만, 우리는 시스템에서 익힌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이 안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허위적 우정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시스템의 끝없는 벽을 느끼며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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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낯선 세계, 새로운 우정
 
우리에게 우정은 없다. 우리가 알던 우정은 유용성의 우정, 호의적 우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설령 벗어났다 해도 그것은 허영의 우정일 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낯선 세계로 떠나야만 한다. 매우 낯선 세계, 다른 관계를 상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 장면1
젊은 남자 하나가 벽으로부터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오고 있다. “하푸, 하푸, 하푸!” 그는 마치 괴물 같다. 얼굴은 검게 칠해져 있고, 머리는 깃털로 덮여 있다. 움푹 꺼진 볼, 퀭한 눈. 살아있는 눈빛만이 그의 존재를 말해 준다. 이 젊은이는 얼마 전에 그 벽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그 벽 안에는 식인 괴물이 살고 있다. 추위와 굶주림, 괴물에게 잡아먹힐 것이라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 내팽개쳐진 그. 너무 무섭고 고통스럽다. 살갗은 추위에 터지고 입술은 까맣게 타버렸다. 머릿속은 하얗고 눈앞에 번쩍하고 빛이 보인다. 살을 파고드는 아픔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그는 삼켜지고 있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막상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자신을 이런 곳에 밀어 넣은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적대감까지 생긴다. “아! 나는 괴물에게 잡아 먹혀 죽는다…….” 마침내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체험을 한 그는 지금 막 그곳을 빠져나오고 있다. 그가 잡아먹힌 그 식인 괴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 “먹고 싶다, 먹고 싶다!(하푸, 하푸, 하푸!)를 외치면서.
 
젊은이를 그 벽 안으로 떠민 사람들은 비밀결사의 ‘선배’들이다. 그들은 그에게 며칠 동안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주지 않고 잠도 못 자게 했다. 그러나 그들도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벽 안으로 들여보냈다.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가 죽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벽 안으로 들어간 것은 젊은이의 의지였다. 비밀결사의 일원이 되려는 열망으로 죽음의 위험을 무릅썼던 것이다. 그러나 단체의 멤버가 되기 위한 단순한 훈련과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인다. 그들은 왜 이런 위험한 제의를 치르는 것일까.
 
# 장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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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진을 보면 늘 한쪽 뺨을 손으로 괴고 있다. 그쪽에 혹이 있기 때문이다. 50대 중반의 나이, 그의 얼굴 한쪽에 혹이 생겼다. 그 혹이 여러 개의 작은 종양이 되고 급기야 암이 되었는데도 수술하거나 치료하지 않고 그냥 지낸 이반 일리치. 일리치는 20여 년간 이 혹을 달고 살았다. 어쩔 수 없어서 그냥 지낸 것이 아니다. 현대의학적인 방법으로 수술할 수도 있었고, 대체의학적인 방법으로 치료할 수도 있었다. “이 종양은 너의 신체에 속한 것”(같은 책, 213쪽)이라는 파키스탄 유나니(인도 전통의학) 의사 친구 하킴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일리치는 종양을 없애버려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시련이라고 직감했다. 이것은 ‘균형’을 생각하는 그의 사고방식, 생활방식과도 맞는 것이었다. 
 
일리치는 모든 세계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과 바깥에 존재하는 것 사이에 조응관계가 있다” (같은 책, 76쪽)고 보았다. 그가 말한 균형이란 한쪽의 존재가 다른 쪽의 존재를 포괄하는,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상보성을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특수하게 훈련된 시선을 통해 이 상보성을 알아본다. 이 시선을 인류학자는 문화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보다는 우주를 바라보고 끌어안으며 고통을 느끼고 즐기는 기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같은 책, 213쪽) 의료 문명은 고통에 대한 예술의 필요성을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고통을 겪어내는 고결한 행위를 점차 무미건조하게 만들었다. 결국 삶과 죽음을 갈라 죽음을 삶의 세계 저편으로 몰아내 버린다. 균형의 상실. 일리치의 세계에서 삶은 죽음을 포괄한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제 그에게 질병은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시련’이다. 귀가 잘 안 들리고, 잠을 잘 못 자고, 집중력이 방해받는 것을 그대로 느꼈다. 통증이 심할 때는 침술이나 요가로 고통을 줄이고, 참기 어려울 정도의 심한 통증에는 주변에서 구한 생아편을 피웠다. 병원에 입원하는 대신 친구들과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많은 시간을 쓰고, 유머와 배려로 다양한 삶의 즐거움을 누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3_우정, 적과 함께 가는 길!
 
우리는 아주 낯선 곳으로 들어섰다. 우정을 찾아 나섰지만, 우리가 진정 우정이라고 할 만한 ‘그 우정’을 발견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의 우정들은 어김없이 경제와 호의의 교환을 위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관계로 환원되기 이전의 관계를 추적했다. 그 길에서 마주친 것이 앞서 제시된 두 장면. 그러나 그곳에서는 공동체가 앞장서서 젊은이를 위험천만한 곳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더욱이 고통스러운 병을 견뎌내며 서슴없이 죽음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찌하여 우리는 이 낯설고 위험천만한 곳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었을까? 이곳에서라면 경제와 허위에 의해 약탈당해 더 이상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우정을 다시 발견하고 복원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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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돌파하기 위해 우선 일리치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 세계에 들어서면 우리는 신체와 병에 대한 일리치의 독특한 시선과 마주친다. 일리치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현재의 육체는 과거에 느꼈던 그 육체와 다르다. 그 이유는 육체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이미 특정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 위로 내려앉은 문화를 통해서만 자신의 육체를 체험한다. 결국 우리가 지금 ‘감각하는 신체’는 삶의 양식인 문화를 경유하여 우리 의식에 도달한 것이 된다. 따라서 자신이 어떤 삶의 양식(문화)에 속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신체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감각하는 신체’는 문화와 육체가 만나 구성한 일종의 복합체인 셈이다. 이렇게 되면 병과 고통의 의미가 뒤집힌다. 고통은 우리가 속한 문화가 만들어낸 감각이다. 병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병 또한 그 문화의 자장 안에서 구성된다. 지금 우리가 아파하는 고통이 과거에는 전혀 고통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여기서 복합체는 달리 말해 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병은 이 공동체의 불가피한 구성원이다. 내가 이 문화, 이 생활양식에 속하는 한 불가피하게 구성되는 고통이고 병이다. 따라서 병은 이 삶의 양식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물론 병을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조차 내가 선택한 삶의 양식이 가르쳐주는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만일 자연을 따르는 삶의 양식을 선택했다면 “고통을 제거하는 시도가 자연에 반하는 범죄가 되는 시점이 있다는 것” (같은 책, 207쪽)을 알아야 한다. 그 시점에선 의술도 죽음을 지켜보며 침묵해야 한다. 만일 선을 넘어서면 그것으로 그가 속한 삶의 양식도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 일리치의 친구, 하킴이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의술이 고통을 제거하고 죽음과 싸우는 활동으로 변해버린다면 우리네 의사들은 서구 기독교 이데올로기의 가장 효과적인 수입상이 되라는 것이지요!” (같은 책, 207쪽) 그 순간 삶의 양식과 함께, 신체 공동체도 함께 무너진다. 결국 그것은 그 신체 공동체가 지향하는 삶과 죽음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문제가 된다. 일리치가 자신의 혹을 바라보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래서 일리치에게 의술은 ‘고통을 제거하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을 겪어내는 기술’이다. 일리치에게 종양은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해야 하는 적’이 된다. 여기서 병은 내가 선택한 삶의 양식 안에서 불가피하게 함께해야 할 것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되면 병은 고통을 제거하려는 범죄적 문화를 깨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은 그런 문화를 깨도록 우리의 정신을 일깨운다. 이제 그것은 다투어야 할 대상, 제거해야 할 대상, 심지어 치료해야 할 대상조차 아닌, 삶의 양식을 가운데 두고 서로의 존재를 거는 관계로서의 병이다. 그것은 나를 죽음으로 몰아갈지도 모를 ‘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결단코 ‘함께해야 하는 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삶의 양식, 공동체 안에 있는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적이지만 적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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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 이르러 병과 우리가 맺는 관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 자신의 삶의 양식을 스스로 구성하고 지키기 위해 함께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병과 대면한다. 이렇게 해서 일리치는 죽음조차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놀랍게도 삶이 죽음을 만나는 것과도 같다. 내 삶을 없애는 것이지만 사는 한에서 불가피하게 만날 수밖에 없는 죽음. 이 둘은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적이지만, 불가피하게 함께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우리와 병, 삶과 죽음. 그 둘은 적이지만 서로의 존재를 걸고 함께해야만 하는 관계로 만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경제와 호의의 관계로 환원 불가능한 관계, 그러니까 우리가 찾으려 했던 그 관계, 바로 ‘그 우정’의 한 형태를 만난다. 병은 여기서 친구가 된다. 죽음은 삶의 친구가 된다. 이제 적은 친구다!
 
그런데 이 테제는 부족사회 이니시에이션에서 다른 형태로 발현된다. 중앙아프리카 렐레족 사회는 이른바 ‘비대칭성 사회’이다. 그래서 이들은 적절한 시점에 이르면 ‘천산갑’을 먹고 비대칭성을 해체해버린다. 기성의 원리들이 카오스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아주 묘한 시선이 숨어 있다. 그것은 렐레족이 상정하고 있는 ‘천산갑의 시선’이다. 젊은이들은 천산갑을 단순히 죽여서 먹는 것이 아니다. 천산갑이 스스로 자신을 죽이면서 찾아온다. 천산갑의 죽음을 통해 젊은이는 정신적으로 되살아난다. 이 순간 젊은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원리들이 어쩌면 인공적인 허구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천산갑이 일종의 아포리아인 셈이다. 여기서 천산갑은 적에게 자신의 몸을 바친 꼴이다. 그러나 천산갑의 죽음은 곧 젊은이의 재생이 된다. 젊은이는 천산갑이라는 아포리아를 통해 죽고 다시 살아난다. 천산갑은 잡아먹히고 젊은이로 다시 살아난다. 천산갑과 젊은이는 보이지 않는 믿음 속에서 이 제의를 견뎌낸다. 이 경지에서는 젊은이와 천산갑이 친구이다. 적과 친구가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기이한 형태로 마주치는 것이다. 
 
이는 ‘하마차 의례’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제 거꾸로 바다표범결사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젊은이가 천산갑의 역할을 한다. ‘바푸바쿠아라누푸쉬예(식인괴물)’에게 스스로 잡아먹힘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이 갖고 있던 이름이나 지위를 버린다. 죽음의 체험을 하고서야 비밀결사의 일원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젊은이가 내몰린 상황은 아주 냉혹하고 잔인하기조차 하다. 젊은이나 공동체나 모두 죽음을 무릅쓴 모험이다. 어쩌면 그 벽 안에서 실제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최대치에서 이 모험을 행한다. 이제 여기서 젊은이는 거꾸로 천산갑이다. 젊은이는 공통의 믿음 아래에서 천산갑처럼 죽기 위해 스스로 벽에 들어간다. 따라서 과거의 젊은이는 이 벽 속에서 진정 죽는 것이다. 그런 후에 완전히 새로운 규칙을 지닌 자로서 새롭게 태어난다. 친구는 바로 이렇게 적으로 다가온다. 바로 적이 아닌 적, 뒤집힌 친구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친구는 적이다!
 
일리치와 병, 젊은이와 천산갑, 젊은이와 괴물, 공동체와 젊은이. 이 모든 관계는 삶과 죽음이 대면하는 장소에서 생성된다. 어쩌면 우정은 이 대면에 이르러야 작동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우정은 경제적 희소성에 따라 구성된 가치를 획득하고자 움직이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우정은 그런 통념적 가치를 깨기 위하여 작동한다. 우정은 호의적인 우정을 깬다. 오로지 우정은 서로의 통념을 무너뜨리고 변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친구는 적이다. 이 무너뜨림의 차원에서 분명 적이어야 친구일 수 있다. 때론 우리는 서로에게 병이 되거나, 식인 괴물이 되어야 한다. 또 거꾸로 일리치가 되거나 젊은이가 되어 병과 식인괴물을 견뎌내야 하고, 때론 그것들과 싸워야 한다. 또 어느 순간엔 젊은이를 공포와 굶주림으로 가득한 벽 속에 내몰아서, 식인괴물을 만나게 하는 그 선배가 되어야 한다. 우정은 경제적 관계가 멈춘 자리, 기만적인 호의와 대적하는 자리, 바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라야 살아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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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 다다르면 우리는 우정이 가파른 골짜기, 아무도 보지 않는 낭떠러지에서 자라는 나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정은 그곳에 분명 있지만, 우리 입에 자주 올릴 만큼 그렇게 흔하지 않다. 그래서 우정이 탁월한 자들에게서만 생긴다고 한 모양이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가파른 골짜기로 가지 못하고, 우정을 ‘역량을 교환하는 관계’로만 상상한다면, 감이당 동료이든 아니든 어쩌면 영원히 교환 관계를 우정이라 착각하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로 안다고 될 일도 아니다. 아주 슬프고 처참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일리치의 말대로, 우리는 매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 있다. 그렇다면 매 순간 삶과 죽음이 만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우정은 매 순간 솟아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예수의 사마리아인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친구로 삼을 수 있고, 거꾸로 나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나를 친구로 여길 수 있다.” (같은 책, 238쪽) 예수가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다. 우정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어떤 적이든 친구가 된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적이어야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의 통념은 ‘적의 적’이다. 그 순간 적에 의해 나의 존재가 깨진다. 모든 경제적 관계가 낱낱이 파헤쳐지고 모든 허위가 사라진 이 자리에 가면, 비로소 우리는 매 순간 사마리아인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루쉰처럼 적과 함께 웃을 수 있고, 연암 그룹과 칠두령처럼 유쾌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기존의 우정을 넘어서서 새로운 우정이 꽃 핀다. 그제야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에게 ‘공통감각’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매번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 공통감각이다. 이를 위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적들의 함성만 웅웅거리는 바로 그곳으로 가자. 그곳에서 용기를 내어 친구를 만들자. 친구 없는 곳에서 친구 만들기, 적과 함께 이 길을 돌파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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