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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그 옛날 이야기의 힘 - 목성 밴드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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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10-31 19:42 조회6,7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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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샘에서 길어내는 언어의 힘
 
이성남, 김해숙(목성, 밴드글쓰기)
 
언어 멘붕 시대
 
요즘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무엇일까? ‘왜요?’가 아닐까. 뭔 말이라도 한 마디 할라치면 바로 ‘왜요?’라는 멘탈 없는 질문이 바로 튀어나온다. 물론 진짜로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다. 말하기 싫다는, 혹은 생각하기가 귀찮다는 표현으로 말문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헌데 처음 말을 배우는 두세 살 아기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무엇일까? ‘이게 뭐야?’이다. 아기들은 지치지 않고 묻는다. 하루 종일 ‘이게 뭐야?’ ‘이게 뭐야?’를 연발하며 세상을 배워나간다. 이는 언어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접속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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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언어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보면 유아기 아이들 말의 60-80%가 묻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면 묻는 말이 20%, 3학년쯤 되면 10%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삶을, 세상을, 묻는 건 어른아이를 떠나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특히 아이들의 내면의 질문은 정말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우리 어른들의 답이 시원치 못해서일까? 혹시 언제부턴가 우리는 질문과 답, 즉 이야기를 주고받는 언어 능력을 상실해 버린 탓은 아닐까? 실제로 예전의 할머니들이 구수하게 들려주는 옛이야기 속에는 “얘야, 세상은 이런 거란다.”라는 뜻이 반드시 내포되어 있었다. 옛이야기란 결국 신화와 진배없다. 신이치도 말한다.
 
어떤 형태의 형이상학적 혁명도 일어나기 이전, 특히 국가나 일신교가 발생하기 이전의 인류는(구석기 후반부터) 신화라는 양식을 이용해서 우주 안에서의 자신들의 위치나 자연의 질서, 인생의 의미 등에 대해 깊은 철학적 사고를 해왔다. 신화는 후에 발생한 종교와는 달리, 아무리 환상적인 상황을 상상하고 있을 때라 할지라도, 현실 세계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현실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상실한 적이 없다.......이른바 ‘자연민족’의 전승신화에는 현실세계와의 연결이 결코 단절되지 않는 소박하지만 복잡한 내력을 가진 ‘논리’의 체계가 내재되었다.  (나카자와 신이치,『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동아시아, 10쪽)
 
이야기에는 사람들을 흡입하는 묘한 힘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를 재미나게 잘하는 사람은 시공간을 점유하며 그 순간 그는 헤게모니를 쥘 수 있다. 인디언 사회에서 추장은 말을 잘 하는 자이어야 하고, 동시에 말하기는 그의 의무이기도 했다. 말을 못한다면 절대 추장이 될 수 없었다. 
 
‘백탑 청연’의 리더였던 연암도 언어의 달인이었다. 그의 무기는 유머와 소통이었다.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경계를 두지 않는 그는 교감의 대가라 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좁쌀 한 톨에서도 우주 전체를 사유하는 명랑철학자! 과문(科文)은 죽기보다 싫어했지만 문장에 목숨을 걸었던 지독한 글쓰기 달인이기도 했다. 그의 문장은 역설과 함축으로 가득해 이해하기가 몹시 힘들다. 예를 들어 『사기』를 읽으려면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라 한다. 어린 아이가 나비를 잡으려 하다 놓치는 그 심정을 포착하라고 한다. 알쏭달쏭한 그의 말하기 속에 여러 진실이 중첩되어 수많은 상상과 질문이 잇따른다. 그의 언어가 가진 힘과 능력은 정조가 문체반정의 배후 책임자로 지목할 정도로 파워풀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연암의 글을 아이들에게 재밌게 들려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용의가 있는데! 쩝!  
 
이번 밴드 글쓰기에서 우리는 현대인들의 빈곤한 말하기는 삶을 묻는 능력이 떨어져서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곰샘도 일찍이 설파했다. ‘현대인들의 말은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 같다. 언어를 잃어버려서 정신분열이다. 거의 언어치매 수준이다. 먹는 건 나누고, 밤새 수다를 떠는 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데, 현대인은 이 언어의 마술을 잃어버렸다’라고. 비트겐 슈타인도 말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는 만물의 척도다. 생각도 일종의 언어이다.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고. 언어, 세상에 태어나 눈 감을 때까지 쓰는 언어. 도대체 인간에게 언어란 무엇일까? 현대인들의 간과한 언어능력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인류가 문화 속에 창조해온 언어법을 탐사해 보도록 하자.
 
지구언어, 존재와 존재 사이에 흐르는 法
 
말은 곧 그 사람이다. 말에 그 사람의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의 언어는 담백하고 진실하다. 말을 제대로 하려면 생각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생각과 말이 일치하면 행동은 따라서 나온다. 지혜도 거기서 나온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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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텍스트 『곰에서 왕으로』를 꼼꼼히 살펴보면, 인류는 언어 사용에 있어 유창한 말솜씨 보다 언어 윤리 문제를 더 중요시 한 것 같다. 말을 매끈하게 잘하는 언술 행위는 기술적 측면에 불과하니, 그보다는 윤리적 소양이 있어야 공동체가 순리대로 돌아간다는 사유. 그러한 이유로 각 공동체에는 언어법이라는 나름의 문화를 형성해 온 것이다.『동의보감』에도 ‘언어법(言語法)’이라는 항목이 있다. ‘말 가짐 법’이 일상의 양생법으로 소개되고 있다. 건강에 좋은 말하기 실천법이라지만, 따지고 보면 언어 윤리적 측면과 관련이 깊다. “말을 적게 하면 속에 있는 기를 보할 수 있다.” 즉 말을 많이 하면 건강에 해롭기도 하지만,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나오는 법, 관계맺음에서의 치명타는 건강도 한방에 날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요컨대 언어법이란 관계를 잘 맺어 나도 살고 너도 살릴 수 있는 언어 기준법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언어는 막힌 저수지처럼 흐르지 못하고 있다. 가볍고 무의미한 언어들이 그 위를 부유하고 있다. 진실한 언어란 관계를 파고드는 행위이다. 정면으로 주고받는 언어. 파동도 여기서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정면 승부하는 언어를 어려워하고 있다. 돌려 말하고, 미화하고, 과장하는 언어 습관에 젖어있다. 반면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거의 테러 수준의 언어들이 난무하기 일쑤다. 역사상 이처럼 하이테크한(?) 공간은 없었건만, 멧돼지가 파헤쳐 놓은 땅바닥보다 더 어지럽다. 야만이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이게 우리가 원시인이라 부르는 수렵민들의 유동적 지성이 증발되고만 언어의 현장이다. ‘지구언어’를 잊은 게 벌써 오래전이라는 얘기다. 지구언어란 ‘지구법’을 잘 지킨 수렵민들이 사용한 언어를 말한다. 그들이 철저히 지켰던 ‘지구법’을 나카자와 신이치의 말을 빌려보자.
 
최근에 인간들이 너무 잔인한 짓을 많이 저지르고 있는 건 사실이야.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지구법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고 있지. ‘지구법’이란 지구의 생명권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에게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먹이사슬이나 생태계에 하나의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법’을 말하지. 예전에는 신화가 그런 ‘지구법’의 표현자 역할을 했지.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42쪽)
 
그렇다. 지구법에는 동물과 인간의 위계가 없다. 이들 사이에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사고체계가 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인류 최초의 철학’인 신화를 통해 우리는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를 만날 수 있다. 수렵민들은 보석 같은 지혜의 보고인 신화를 이야기 형식으로 전달했다. 그들은 신화를 들으며 그 속에 담긴 인류의 지혜를 배웠다. 여기에는 ‘법에 어긋나지 않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라는 수렵민의 윤리가 담겨 있다. 신이치는 ‘오직 이것만이 인간에게 가능한 최상의 행동이 아닐까요?’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고 ‘수렵민의 세계에서 이런 지구적인 의미를 가진 법이 지켜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언어능력은 스피치 교실을 다니고, 스토리텔링을 배우고, 언어능력 시험에서 높은 등급을 받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 속에서 언어법을 잘 배우는 것이 먼저다. 우주와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법과 언어법인 ‘지구언어’를. 이 지구법의 표현자가 신화라고 하니, 이를 잘 사용하면 우주와의 관계도 잘 맺게 되는 것은 불 보듯 환한 이치다!
 
인류는 언어를 어떻게 사용했나
 
인류가 문자를 갖기 이전, 인간은 수 백 만 년 동안 구술시대를 살아왔다. 장 자크 루소는『언어 기원론』에서 “최초의 인간들은 우리가 지금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아니라 시와 음악으로 서로 이야기했다”(『곰에서 왕으로』, 97쪽 재인용)고 한다. 루소의 말이 맞다면 3만 년 전 현생인류들은 대화를 할 때 시와 음악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뜻이다. 상상을 해보자. 시와 음악으로 대화를 나누는 구석기시대 인류들을. 몰래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면 오페라나 뮤지컬을 감상하는 착각이 들 것이다. 이런 상상은 구석기인들의 언어가 참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인류가 언어라는 선물을 가지게 된 건 현생 인류가 뉴런 조직의 네트워크에 성공한 덕분이다. 그들은 대뇌구조의 이질적인 영역 간 접합 시도를 자유자재로 하게 되면서 언어 또한 조직화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이른바 ‘유동적 지성’이 발생하면서, 네안데르탈인이 시도하지 못했던 비유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유동적 지성은 무의식의 층위에서 서로 다른 영역으로 흘러 다니며 ‘압축’과 ‘치환’을 자유자재로 한다.
 
상징사고란 서로 다른 분야의 것들 사이에서 뭔가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토대로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겹쳐서 이해하려 하는 지적 능력을 의미합니다.......상징적인 표현은 서로 다른 의미의 장 사이에 통로를 열어줍니다. 자유로이 옮겨 다닐 수 있는 지성의 작용이 없으면 활동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90쪽)
 
신이치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 3만 년 전부터 축적되어온 시나 음악이 ‘신화’라는 형태로 인류의 경험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노자와 부처도 모두 옛 신화 이야기를 즐겨 인용했다.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시나 음악에 풍부하게 표현되고 있는 상징은 유동적 지성의 결과물이다. 구석기인들이 바라본 이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만, 유동적 사고는 서로가 연결된 존재임을 인식하게 한다. 시의 세계로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려한 최초의 음유시인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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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언어가 시의 구조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최초의 인류’만이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의 뇌 속에서도 가장 먼저 시적인 구조가 활동을 시작했다가 일상 언어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셈입니다. 최초의 의식은 시를 감상하듯이 세계를 이해했습니다. 유용성을 중시하기 시작하면 그런 점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세계를 응시하면(루소는 이것을 명상이라고 부릅니다.) 표면적이고 분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을 현실의 심층에서 서로 이어주는 연결기구가 작용하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가 하나의 전체로서 호흡하고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99쪽)
 
수사학의 달인이었던 연암을 떠올려 보라. 역설과 함축의 수수께끼를. 그의 문장은 신화적 사고인 ‘감각의 논리’를 탁월하게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감각적 소재를 이용해 논리를 펼치다니, 자칫 비합리적으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신이치는 ‘감각의 논리’가 얼마나 가치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체적인 감각 소재를 상징적인 ‘항목’으로 삼아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결합시키면 세계의 의미와 인간의 실존에 대해 통찰할 수 있다.” 
 
연암의 글 <상기>를 음미하며 확인해보자. “나는 알지 못하겠다. 캄캄하고 흙비 자욱한 속에서 하늘이 만들어낸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국숫집에서 보리를 갈면 작거나 크거나 가늘거나 굵거나 할 것 없이 마구 뒤섞여 바닥에 쏟아진다.......하늘이 이빨을 준 것이 반드시 구부려서 사물을 씹도록 한 것이라면, 지금 저 코끼리는 쓸데없는 어금니를 만들어 준 탓에 땅으로 고개를 숙이면 어금니가 먼저 닿는다. 이른바 사물을 씹는 것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게 아닌가?” 국숫집 맷돌에서 마구 흩날리는 보릿가루와 흙비 자욱한 태초의 하늘을 연결 지어 우주의 혼돈을 설파하다니. 또 코끼리의 긴 코와 어금니로 우주의 숨은 뜻을 역설하다니 과연 연암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유하는 의미 자체를 거부하고, 연암은 눈앞의 구체적인 대상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가 잡은 생동감 넘치는 소재들의 결합은 신이치가 말한 ‘감각의 논리’를 잘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부분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던 힘. 바로 신화적 사고가 추구하는 유동적 지성을 그의 문장에서 읽을 수 있는 이유다. 그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자유와 해방을 자연 속에서 사유했다. 하여 그의 언어는 살아 움직이며, 흐르고 흘렀다.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언어가 은유의 축(파라디그마축)과 환유의 축(신타그마)의 조합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의 언어는 없는 셈입니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의 징표라고들 하는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비유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징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97쪽)
 
언어 능력은 삶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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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의 공부 목표는 ‘인류 사고의 모든 영역의 답파’였다. 그리고 그는 신화가 ‘이 탐구의 길에서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화가 삶의 능력 신장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도 훨씬 자명해진다. 신화는 ‘자연의 질서와 인생의 의미’를 논리적이고 철학적으로 말해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신기하고, 그럴듯하다. 듣고나면 ‘아! 그래서 그렇게 된 거로구나!’라며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신화가 철학인 이유도 바로 이 ‘논리성’에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논리 찾기!’ 혹은 ‘우리 주변에서 철학 찾기!’ 그렇다면 또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신화는 인류 최고의 철학일 뿐만 아니라 인류 최고의 교육학이라고. 
 
뿐만 아니라 신화는 고전 중에서도 상고전이라 할 만하다. 고전은 五行이 넘치는 텍스트란 말을 곰샘 강의 때 들은 적이 있다. 글 읽는 소리는 모든 소리 중 최고(진리를 읽는 셈이므로)란 말도 함께. 결국 ‘문장의 道’란 아주 보편적 교육법이란 얘기다. 어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고전은 신화의 변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화만큼 우주 질서를 다채롭게 보여주는 텍스트가 어디 있으며, 그처럼 사람살이의 원형을 의미있게 펼쳐보이는 교과서가 또 어디에 있을까? 거듭 말하건대 인류의 보편적 질문에 어떤 모습으로든 대답을 내보여 주는 게 바로 신화가 아닐는지. 신이치도 이렇게 말한다.
 
신화는 대담한 방법으로 우주와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인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사고하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철학적 사고는 전부 신화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나카자와 신이치,『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동아시아, 15쪽)
하지만 신이치는 또 이렇게 탄식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학교 교육에서는 신화에 대해 거의 논의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화는 유치하고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뒤떨어진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신화에 대해 배워보았자 오늘날처럼 과학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는 전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교육 방법이 크게 바뀌어, <古事記>나 <일본 서기>에 나와있는 신화를 가르치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아마존강 유역의 원주민 사이에 전승되어온 신화와 똑같은 내용을 가진 신화가 <기기>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하고도 서로 통합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철학적 사고의 단편들이 거기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게 보입니다. 이렇게 매력적인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나카자와 신이치,『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동아시아, 16쪽)
신화를 들려주지 않게 된 건 우리 사정도 매한가지. 고작 200년도 안된 근대의 지식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 믿으며 가르치는 우리들. 신이치는 철학교육에서도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 철학의 역사도 겨우 2500년 정도. 하지만 ‘최초의 철학’이자 지구인의 보편적 지혜인 신화는 대략 3만 년여에 걸친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단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신화를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을 배우지 않는 것과 같다’고 힘주어 단언한다.
 
이쯤에서 나도 단언할 수 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철학이야기인 신화를 들을 때 어린이들의 눈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데, 그리고 아이들이 얼마나 일상용어에서 잘 써먹는데, 이렇게 매력적인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라고.(이는 지난 몇 년간 아동의 발달 단계에 맞춰 꽤 많은 아이들에게 세계 곳곳의 신화를 들려주면서 실감한 경험담이다. 남산강학원 갑자서당에서도 요즘 중국신화를 들려주고 있다.)
 
신화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삶을 질문하는 것, 그건 깨달음의 시작이다. ‘깨쳐서 도달’하는 과정의 첫 단추이다. 혁명도 여기서 시작된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어진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갑자기 질문들이 터져 나온다? 이쯤 되면 이제까지의 삶을 더 이상 지속시킬 수가 없어진다. 천문의 이치와 삶의 이치에 대해 탐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카렌 암스트롱(영국의 종교역사학자이자 종교문제 비평가)은 신화에 대해 신이치 만큼이나 재미있는 책을 많이 쓴 사람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 삶의 능력과 언어 능력이 별개의 일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늘 신화를 창조해왔다.......원시인간들은 생명의 유한함을 인식했고 그 사실과 타협하기 위한 일종의 대응 논리를 만든 것이다........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다......쉽게 절망에 빠지는 인간은 애초부터 이야기를 꾸며 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큰 시야를 갖고 삶을 바라보게 하였고, 삶의 바탕에 깔린 원형을 드러냈으며, 아무리 암울하고 무질서해 보일지라도 인생에는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인간 정신에는 또 하나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 곧 상상력이 그것이다......상상력은 종교와 신화를 만든다. 오늘날 신화적 사유는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비이성적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상상력을 이용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기술을 고안하여 우리를 이루 말할 수 없이 능률적으로 만들었다. 과학자들의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로 나가 달 표면을 걷게 해주었다. 옛날에는 신화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신화와 과학은 둘 다 인류의 영역을 확장시켜 준다......신화는 세상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과 기술이나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신화의 역사』, 문학동네, 7-9쪽)
고대인도 철학서인 우파니샤드(upaniṣad)는 ‘가까이에 앉다’라는 뜻이다. 곧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비밀리에 전수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우주와 철학에 대한 비전을 스승과 제자가 무릎을 맞대고 소곤소곤 조근조근 이야기 해준다는 건데, 신화는 이 비전 전수에 아주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다.
 
곰 같은 보살, 신화적 사고를 잃지 않는 이
 
‘유익한 이야기’‘교훈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인류의 욕구는 참으로 뿌리 깊은 것입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167쪽) 
 
나도 한 마디 하고 싶다. ‘신화이야기, 그 五行의 흐름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인류의 욕구는 참으로 뿌리 깊다.’라고. 이 에세이의 주요 텍스트인 『곰에서 왕으로』를 읽다 보면, 인류가 정말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존재임을 잘 알 수 있다. 곰, 샤먼, 식인, 수장에게서 우리는 신화의 보편적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오래된 설화에서부터 최신작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그만큼 ‘신화’는 오랜 인류의 구미에 맞는 이야깃거리라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이야기를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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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통과의례라는 치명적(?)마력 때문은 아닐까. 인생살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이건 영웅신화에서 특히 중요하게 취급되는데, 각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영웅신화는 존경의 대상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들 내부에 있는 영웅적인 기질을 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영웅신화는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준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영웅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영웅이 될 수 없다. 어둠 속으로 하강하지 않으면 높이 상승할  수도 없다. 어떤 형태로든 죽지 않으면 새로운 삶도 없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미지의 것과 마주하는 상황을 맞게 되는데, 영웅신화는 그런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보여준다. 우리는 누구나 마지막 통과의례와 마주해야 한다. 그것은 죽음이다. (카렌 암스트롱,『신화의 역사』, 문학동네, 44쪽) 
죽어야 산다니! 모든 것을 떨구고 벌거벗은 나무가 되어야만 다시 새 잎을 낼 수 있는 나무처럼, 그렇게 겨울을 통과해야만 다시 살 수 있다니!  그렇다면 이 겨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식인’이 된 사람에게는 심오한 인식능력이 부여될 거라는........사회적 에고를 갖고 행동하는 동안은 평범한 수준의 것에 정신을 빼앗긴 상태이므로,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거나 타인을 질투하거나 끙끙거리며 고민하거나 할 겁니다. 그러나 이제 ‘식인’이 된 그는 위력으로 가득 찬 영혼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이름과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를 얻고, 두려울 게 없는 독수리처럼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에고를 버리고 발가벗은 인간이 되어 스스로와 마주했을 때, 비로소 용기있는 개체가 될 수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204쪽)  
결국 삶은 정면으로 부딪혀야 하는 것. 참된 인생을 살려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통과의례를 피하지 말라는 것.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백척간두 진일보와 같은 맥락이다. 신이치도 우리에게 묻는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신석기적 사상이 불교의 사고와 매우 유사하다는 걸 눈치 채셨나요?”라고.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204쪽)
 
그렇다면 신화의 유효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냥 저 멀리 딴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호기심 충족용 혹은 흥밋거리로 저평가 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모방이나 참여로 신화를 우리 인생에 끌어들여야 한다. 우리를 자극하고 변화시키는 방편으로 신화적 삶을 힘써 배워야 한다. 신화학자 카렌 암스트롱도 ‘우리는 신화가 허구이며 열등한 사유 방식을 나타낸다는 19세기의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신이치는 ‘현생인류가 뉴런 조직을 진화시켜 유동적인 지성이 자유로이 흘러갈 수 있는 회로를 만든 덕택에 언어나 신화적 사고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유동성 지성이 흠뻑 함유된 신화를 읽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3-4만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에게 축적돼 있는 지적 자산을 묵혀버리는 것과 같다고 한다. 어찌 보면  ‘신화를 이성의 시대에 도달한 인류가 떨쳐버릴 수 있는 정도의 열등한 사유 방식으로 치부’하는 이 시대에, 우리 안에 내재된 신화적 사고를 다시 살펴보자는 우리의 시도 자체가 식인 행위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모두가 비슷한 집에서,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길을 가는 현대의 이 시대가 어쩌면 유동성 지성이 활발발하던 신화시대보다 더 빈곤한 세상이진 않을까. 고립된 방구석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SNS식으로 말을 거는 이 행위 자체가 오히려 빈곤한 현대 언어 세계임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신화적 사고는 현생 인류의 뇌에 일어난 비약의 순간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인류에게 일어난 최대 혁명의 살아있는 기념물입니다. 감자나 옥수수가 신석기 혁명의 미각적 기념물이며 삼색기나 개선문이 프랑스 혁명의 시각적 기념물이듯, 신화는 뉴런의 새로운 집합 양식의 완성을 의미하는 청각적 기념물입니다. 그러나 그 혁명적 비약의 질로 말할 것 같으면, 그 가치에 있어서 신화(시와 음악)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204쪽)  
신이치의 단언에 따르면 현재의 우리는, 신화적 어법을 잃어버린 우리는, 아주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린 상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멧돼지가 마구 헤집어 놓은 듯한 작금의 언어밭을 다시 일구어보는 건 어떨까. 얼핏 보면 우리가 시도하려는 신화적 말걸기 자체가 백척간두에 서서 진일보하려는 무모한 행위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신화를 잃어버린 이 시대에 팽팽히 맞서 신화의 유효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자체가 곰 같이 미련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이럴 땐 수장의 행동에서 배워보는 것도 좋겠다. 부족 사람들이 듣든 말든, 권력을 갖든 말든, 그저 ‘모두가 바라는’ 가치를 매일같이 되새겨주는 수장처럼. 

허걱! 이 정도면 신화를 믿지 않는 이 시대에 신화를 말하는 행위 자체가 가히 보살행(菩薩行)이랄 수도 있겠다. 신이치는 “원래 空의 개념은 권력과 관계가 있는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사상의 도구로서, ‘자연’이 내장하고 있는 힘의 개념에 고도의 철학적 세련미를 가해서 생긴 셈이므로 그것이 ‘곰’과 유사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곰에서 왕으로』, 245쪽)라면서 신화와 불교를 연결시켰다. 그리고는 ‘곰이 불교 이전부터 이미 인류가 알고 있던 보살의 개념을 체현한 존재 아닐까’라고 추론한다. 
 
보살은 모든 존재에 대해 ‘자비’로 관계를 맺는다. 끝없는 자비는 상대를 결국 무장해제하게 만든다.  ‘요령있게 이야기하는 능숙한 말솜씨에는 대적할 상대가 없는 법’이라고 신이치도 말했다. 요령있게 이야기하는 능숙한 말솜씨를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발달해온 게 수사학이란 학문이다. 신화는 인류 최고의 수사학 교과서이다. 그러므로 신화적 사유는 현재 우리의 빈곤한 언어의 해결책으로 매우 유효하다. 왜냐하면 ‘모든 신화는 서로 다른 인식 영역을 연결시켜, 그런 영역들 사이를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지성활동이라니까.’(『t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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