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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버나쿨라’다 -(감성3학년 이영희, 이현진, 이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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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수 작성일13-11-05 10:05 조회7,33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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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버나쿨라’다


우리가 만난 책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는 이반 일리히의 12년간의 연설문을 담았다. 뒤표지의 문구처럼 현대의 모든 진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연설문. 이 책으로 한 사람은 교육이 필요한 인간, 호모 에두칸두스가 역사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에 머리가 띵할 정도로 충격을 받고, 한 사람은 생빅토르의 위그의 글 읽기를 통해 자신의 공부법을 성찰하고, 한 사람은 맛배기 연설문에 입맛을 쩝쩝 다시며 후기 저작을 탐독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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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히, 그는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사람들은 그를 일러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상가’라 부르지만 정작 일리히는 ‘자연스러운 삶’을 이야기한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밴드의 생각에 변화를 일으킨 것도 이 차이에서 온 건 아닐까?

‘급진적’이라는 말에는 이 체제가 썩어빠졌으니 바꿔야 한다, 혁명해야 한다는 전복 의지가 있다. 몇 해 전 이정현의 노래 가사처럼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꾸려는 의지. 하지만 일리히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은 이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성찰하려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것, 까먹고 있는 것을 머리가 띵할 정도로 두들긴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는 그 두들김의 결정판이 모여 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일리히가 구사하는 언어에 주목했다. 왜냐? 언어는 그 사람이 구성한 세계니까. 그 세계가 드러난 것이 책이니까. 일리히가 말하는 자연스러운 삶을 드러내는 언어는 과연 무엇일까? 이제 일리히가 일구고 가꾼, 우리에겐 잊혀진 길을 따라 가보자.  



두 개의 배움 : 값비싼 교습 언어와 값을 매길 수 없는 토착 언어

일리히는 언어를 말하기 전에, 인간에게 교육이 필요한가? 묻는다. 교육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아주 먼 사고라고 말한다. 맞다. 우리는 걷기나 숨 쉬는 걸 배운 적이 없다. 그냥 엄마 손을 의지해 몇 발자국, 기다가 걷다가 어느새 걷게 된다. 수천 번의 시도 끝에 이뤄지는 것, 그것도 내 힘으로, 내 의지로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린 어떤가? 우리가 알고 행하는 모든 것을 교육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일리히가 현재 통용되는 교육에 대해서 주장하는 바는 세 가지다.

첫째, 현재의 교육은 인간의 모든 활동에서 배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둘째, 배움을 위한 기회는 그 본질상 희소하게 공급될 수밖에 없다.
셋째, 이러한 배움은 삶과 유리된 별개의 부분이 된다.

그렇다. ‘배운다’는 전제조차 교육받아 온 것일 수 있다. 그것도 희소성이라는 경제적 프레임 안에서 삶과 유리된 채 말이다. 이러한 인간을 일리히는 호모 에두칸두스(Homo Educandus)라 명명했다. 이는 “모두에게 모든 것을 철저하게 가르친다”는 의도로써 정의된 관념이다.

헌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부분이 실은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학교는 마땅히 말해야 하는 대로 말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장소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은 좀 더 부자처럼, 병든 사람은 좀 더 건강한 사람처럼, 흑인은 좀 더 백인처럼 말하도록 가르친다. 교사는 아이의 언어를 향상시키고, 바로 잡고, 풍부하게 하고, 최신 언어로 바꿔준다. 대학에서는 전문 특수용어를 가르치고, 고등학교에서는 전문 용어를 찔끔찔끔 익힌다. 우리는 그 특별한 종류의 언어에 유창한 사람에게 의존하고 돈을 들여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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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 이는 그 사람이 속한 계층(신분)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언어를 일리히는 ‘교습되는 일상 언어’로 표현한다. 산업 시대 이전 문화에서는 선례가 없다는 교습 언어. 직업교사와 언어에 의존하는 우리의 모습은 에너지에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독특하다. 왜냐하면 언어와 에너지 모두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한 개입으로, 필요에 의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습 언어의 대표적인 사례는 표준어다. 현재 우리가 표준어로 표상하는 ‘서울말’은 서울, 경기 지방에서 사용하는 방언이었다. 그러나 표준어로 채택되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권위를 갖는다. 교과서, 신문, 방송 등 우리가 접하는 말과 글의 매체들은 모두 표준어를 중심으로 재편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글은 그만큼 간격이 생긴다. 외국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학원이나 학교에서 단어와 문법을 학습하게 된다. 이때 접하는 언어는 이른바 그 나라의 ‘표준어’다. 이처럼 표준어는 알게 모르게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하게 우리 삶에 개입한다.

교습 언어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문 발언자입니다. 교습 일상 구어는 뜻하는 대로 말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짜놓은 것을 그대로 읊어주는 사람이 모범이 됩니다. 교습 언어는 다른 사람이 작성한 엉터리 신념을 적은 글월을 낭독하고 대가를 받는 사람들의 생명 없는 비인격적 수사입니다.(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느린걸음, 171쪽)
  
누군가에게 배워야 하는 언어. 배워야 하는 언어는 상품이 된다. 상품이 된 언어는 그것에 능통한 전문가에게 배운다. 우리는 결국 특정 발언자로부터 언어를 듣고 따라하는 앵무새가 된다. 이러한 ‘교습 언어의 앵무새 되기’는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타율적인 삶을 만든다.

그렇다면 교습 언어 이전에는 어떤 언어를 사용한 것일까? 일리히는 ‘토착’이라는 말로 옛 숨결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토착 활동, 토착 언어, 토박이 등등. 토착을 의미하는 vernacular는 영어로는 native, 그밖에 일반 서민의 일상어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사투리를 토착 언어로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일리히가 말하는 vernacular는 그런 말이 아니다.

토착은 ‘뿌리를 내린 상태’나 ‘머물러 살기’라는 뜻을 함축하는 인도 게르만어 어원에서 온 말입니다. 고전 시대에 집에서 담그고 짜고 기르고 만든 것을 가리킨 라틴어 낱말입니다. (…) 발언자의 땅에 다른 사람이 심은 언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발언자가 자기 땅에서 기른 언어를 나타내는 뜻으로 썼습니다. (…) 이 순간 우리에게는 교환과 무관한 동기에서 비롯된 활동의 결실을 가리키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낱말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뭔가를 하고 해결하는, 시장과 관련이 없는 활동을 가리킬 낱말, 욕망을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그 욕망에 구체적 형태까지 부여하는 활동을 가리킬 낱말 말입니다. ‘토착’은 이런 용법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낱말 같아 보입니다.(『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167~168쪽)

사실 토착 언어나 교습 언어의 개념이 생소한 이유는 우리가 표준어라는 하나의 언어를 쓰는 사회문화적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산업 시대 이전 우리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현장에서 배웠다. 일리히도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고, 그만큼 다양한 언어를 배웠다. 이와 같이 토착어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현장에서 배우는 사람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하지만 교습어는 한 명의 대표적인 발언자로부터 배운다. 일리히는 토착어가 교습어에 밀려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그렇기 때문에 ‘토착’이라는 말을 지금, 우리의 현장에서 살리고 싶어 했다.

값비싼 교습 언어는 배우기 위해 경제적 가치를 지불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땅에 “심어준” 것에 불과하다. 그러기 위해 발언자는 단어와 표현이 갖고 있는 맥락이나 뉘앙스들의 풍부함을 제거하고 효율적으로 언어를 재단한다. 언어를 단순히 이해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반면, 토착 언어는 비경제적이다. 이는 경제적으로 재단할 수 없고, 가치평가로 포획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에서 묘한 반전이 일어난다. 값비싼 교습 언어로 채울수록 우리의 언어는 빈곤해진다는 것, 교습 언어로 채워진 삶은 남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삶이라는 것이다. 일리히가 토착 언어를 되살리고 싶어 한 이유는 이것이다. 자신의 언어를 스스로 가꿔가라는 것, 자신의 땅에 스스로 씨앗을 심고 기르라는 것이다.

토착어를 쓰는 사람이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 형태의 토착어와 일체감을 느끼는 정도는 그 언어를 온몸의 모든 세포로 살아갈 수 있는 수준입니다. 교습 언어에서는 오직 특출한 시인만이 그 수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181쪽)

『학교 없는 사회』를 출간한 후 일리히는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오해되곤 했다. 하지만 일리히가 고민했던 지점은 ‘앵무새 되기’를 조장하는 교육 제도 자체였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교습 언어와 토착 언어를 이렇게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교습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면서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 것인가, 토착 언어를 사용하면서 내 삶을 스스로 가꿔갈 것인가.



읽고 쓰기의 계보학 : 교습 언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내력

토착적인, vernacular에는 각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행하는 고유성과 특이성이 있다. 일리히는 vernacular야말로 삶의 자연스런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서양 현대 문명을 낯설게 보기 위한 탐사를 시작했다. 거기서 일리히는 12세기 중세의 수도사, 생빅토르의 위그를 만났다. 일리히에게 위그는 자연스러운 삶, 토착적인 삶의 길을 비춰주는 오래된 성좌였다.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공동체 ‘생빅토르’는 수많은 자치도시가 탄생하던 시대에, 늘어나는 도시민을 교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도원이었다. 수도사였던 위그는 ‘수도사들의 글 읽기’를 도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읽는 기술에 관해 서술한 『디다스칼리콘』과 『세 가지 중요한 요소에 관하여』가 있다. 일리히는 위그의 저서를 탐독하고, 그의 시대가 ‘글 읽기의 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판단했다. 위그가 죽고 12세기가 지나자, ‘글 읽기’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배치에 놓였기 때문이다



구술과 필사, 텍스트를 깨우는 몸의 언어

일리히는 ‘글 읽기의 역사’를 세 개의 분기점으로 구분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고대 그리스의 서사적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이행이다. 구술문화는 목소리에 의지하는 문화다. 문자로 기록되기 전, 서양 최고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타고 전해졌다. 시대를 달리하며 이야기는 각색되었고, 새로운 이야기가 첨가되고, 탈락했다. 그 과정에서 서사시는 창작자 호메로스의 ‘원본’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거나, 처음부터 ‘원본’이 없는 수많은 이야기의 파편들이 호메로스라는 기록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호메로스가 말했듯, 구술문화에서 말[words]은 ‘날개 돋은 말’이었다. “이 표현은 말의 덧없음, 말의 힘, 그리고 자유를 암시한다.”(『구술문화와 문자문화』, 127쪽) 말은 특정한 누군가에게 매여 있지 않았고, 일정한 장소에 갇혀있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의 입과 귀가 말의 거처였고, 터전이었다. 구술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장애가 없는 한,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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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들은 이제 어디로 갔을까?

구술문화의 시대는 말을 표기할 문자가 없거나 빈약했기 때문에 목소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자가 확립된 문자시대에도 구술은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구술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통합성의 힘이었다.   

어떤 문화 속에서 쓰기가 사용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은 쓰기에 높은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씌어진 기록에는 입으로 한 말 이상으로 먼 과거의 일들을 확실하게 해주는 힘이 있으며, 특히 법정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보통 문자에 익숙한 현대인은 생각한다. 그러나 문자를 알았으나 그것이 충분히 내면화하지 않았던 이전의 여러 문화에서는 종종 정반대로 생각되었다. 씌어진 기록에 대한 신용의 정도는 확실히 문화에 따라 가지각색이다.(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문예출판사, 155쪽)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3만 년에서 5만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최초의 쓰기는 고작해야 6천 년 전, 최근에야 등장했다. 장대한 기간 동안 인류는 ‘말발’로 살았던 것이다. 당연히 인류의 뇌 구조와 정신구조는 소리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발화자의 목소리는 몸의 내부에서 나온다. 그리고 청자의 귀를 거쳐 청각기관으로 들어간다. 즉, 인간의 목소리는 서로의 몸을 공명체로 삼아 소통하는 것이다. 이처럼 청각은 각각의 사물을 하나로 통합하는 성질을 가진다. 반면 문자문화 이후 특권을 얻은 시각은 대상의 외부만을 파악할 수 있고, 그것도 대상과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가능하다. 게다가 청각이 여러 방향의 소리를 흡수할 수 있는 데 반해, 시각은 하나의 방향만을 분절 할 수밖에 없다.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시각은 사물을 토막 내어 감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자문화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이행은 ‘글 읽기의 역사’에서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청각은 우위를 점했고, 시각은 보조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공존은 일리히가 연구했던 위그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중세초기와 중기의 쪽(책)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운동감각을 동원해야 해독할 수 있습니다. 줄과 줄 사이의 공간에 주석이 끼어듭니다. 이쪽과 그 다음 쪽이 비슷해 보입니다. 문단 나누기는 드뭅니다. 제목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쳐다보고 있는 바로 이 필사본에는 물리적으로 어느 지점으로 돌아가 제가 기억하는 문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글월’ 안에서 시각적 기준을 정할 수 있도록 필서 기법 차원에서 도움을 주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278~279쪽)

위그가 살던 시기의 텍스트이다. 지금 우리 시대와는 달리 이때의 텍스트는 묵독(默讀) 할 수 없었다. 친절(?)하지 않은 텍스트의 구조상 소리 내어 읽지 않으면 낱말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읽기조차 쉽지 않았다. 따라서 위그의 공부법은 ‘Ars Legendi’ 즉, 소리 내어 읽는 기술이었다. 중세 대학에서 토론할 때, 교회나 성당에서 성경을 읽을 때, 거리에서 떠버리꾼들이 대중들 앞에서 이야기를 읊을 때, 혼자서 책을 읽을 때조차 큰 소리로 낭독했다.

이것은 중세와 근대 초 유럽사회에서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낭독은 책의 구조 탓이기도 했지만, 위그의 시대가 지식을 다루던 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청각을 활용한 낭독은 외부 지향적이다. 글을 아는 사람이 큰 소리로 낭독하면 글을 모르는 사람도 그것을 듣고 지식에 동참할 수 있었다. 낭독은 사회적 활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일반대중의 대부분은 문맹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구술과 귀동냥으로 일반대중도 지식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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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읽어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던 위그 시대의 '텍스트'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낭독은 묵독과는 달리 정적인 활동이 아니라 신체가 긴밀하게 조응해야 하는 동적인 운동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의사가 환자에게 걷기, 달리기, 공놀이와 함께 신체 운동으로 ‘글 읽기’를 권했다고 한다. ‘글 읽기’는 여타 신체 운동에 버금갈 만큼 힘든 고행이었다. 일리히는 ‘글 읽기’를 텍스트라는 포도밭의 이랑 사이를 넘나들며 낱말 포도를 하나씩 맛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싱그러운 포도를 맛보기 위해 여름내 포도밭을 가꾸어야 하듯이, 농부가 논에 물을 대고 김을 매듯이 ‘글 읽기’는 부지런히 글밭을 일구어야 하는 ‘노동’이었다. 하지만 노동의 대가로 얻는 결실은 달았다. 글 읽기는 텍스트에서 단순한 정보를 얻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자신을 갈고 닦는 수련의 과정이었다.

위그는 묵독이라는 새로운 글 읽기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 스스로도 그렇게 읽을 수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독자의 질서가 이야기에 얹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거룩한 글 읽기를 가르친다. 위그에게 책장은 여전히 하나의 토양, 즉 하느님의 본성 속으로 떠나는 여행을 위한 물질적 기질이다. 그 속에서 독자는 빛을 향한 여정을 가며 “존재 의미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피조물”을 만난다. 글 읽기는 타락한 인간의 눈에서 어둠을 털어내고 만물에서 빛나는 빛을 이해할 능력을 되살려주는 “존재론적 치료 기법”이다. (이반 일리히․ 데이비드 케일리, 『이반 일리히와 나눈 대화』, 물레, 258~260쪽)
 
독자는 ‘거룩한 글 읽기’라는 수행을 통해 텍스트를 순례한다. 그리고 목소리로 지면에 고정된 채 죽어 있는 낱말에 생명을 부여한다. 그러면 깨어난 텍스트의 낱말들은 소리를 타고 독자의 내부로 들어와 미망을 걷어내고 신체에 각인된다. ‘글 읽기’가 ‘존재론적 치료 기법’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글 읽기’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신체의 근기(根氣)를 바꾸는 수련이었다. 그리고 텍스트와 사람 즉, 언어와 존재가 하나가 되는 경지였다. 자신의 삶과 앎이 모두 살아 있는 언어, 곧 토착 언어가 된 것이다.



묵독과 인쇄, 차가운 글 감옥


위그의 시대가 가고, 중세는 ‘텍스트의 역사’에서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 일리히는 이것을 ‘혁명’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일리히가 말한 두 번째 분기점, 12세기 유럽에서 현대적 책의 원형이 등장한 것이다. 책의 각 장에 제목과 부제가 붙었고, 인용표시가 들어갔으며, 문단나누기, 주석, 차례, 찾아보기, 띄어쓰기가 이루어졌다. 텍스트는 이제 지면 위에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단순한 텍스트의 구조 변화가 아니었다. 일리히에 따르면 “새로운 종류의 은유이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심리적 공간을 정의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이제 텍스트는 사람의 목소리로 깨우지 않아도 눈으로 읽을 수 있게 정돈되었다. 텍스트의 포도밭을 거닐지 않아도 낱말 열매를 눈으로 수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2세기 중엽, 새로운 텍스트의 등장으로 묵독은 수도원의 수사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15세기 유럽에서 발명한 활판인쇄는 ‘텍스트의 혁명’에 불을 붙였다. 이미 정돈을 마친 텍스트가 인쇄를 통해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12세기까지 세상에 퍼져 자유롭게 유영하던 ‘날개 돋은 말’은 이제 지면 속에 못 박혔다. 지면은 아주 정연하고 통제된 공간이다. 낱말은 보기 좋게 떨어져 있고, 행은 규칙적으로 놓이고, 그 오른쪽 끝은 가지런하다. 이것은 시각적인 배려가 돋보이는 공간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낭독보다 빨리 텍스트를 읽을 수 있었고, 지식을 내면 깊숙이 간직했다. 시각적인 공간은 닫힌 공간이 되었다. 필사본이 언제든 쓰는 자의 개입이 자유로운 열린 공간이었던데 반해, 인쇄본은 더 이상 수정이 불가능한 폐쇄된 텍스트였다. 수정을 위해서는 새로 인쇄본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우위를 점했던 청각은 인쇄의 등장으로 시각에 자리를 내주었다.

인쇄된 텍스트는 묵독과 속독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광장에서 행해졌던 낭독의 사회적 의미는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바뀌었다. 또한 인쇄술의 보급을 통해 지식을 양화(量化)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책의 사적 소유가 더욱 쉬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언어와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이 출현하고, 올바른 언어 규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이전까지 문법은 죽은 언어에나 적용할 수 있는 것일 뿐 살아있는 언어에는 전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41쪽)했는데도 말이다. 이제 언어는 죽은 ‘사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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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이 된 언어는 누군가에게 귀속된다. 그러자 사람들은 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557년, 작가와 인쇄업자, 출판업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서적 출판업 조합’이 런던에 설립된 것이다. 이어 18세기까지 근대적인 저작권법이 서유럽 전역에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공동으로 공유했던 말은 저작권법에 의해 사적소유로 갈가리 찢어졌다.

말과 더불어 앎도 자연스럽게 폐쇄된 공간에 갇히고, 사적소유로 감각되었다. 구술·필사 문화에서 말을 하고 들을 수만 있으면 앎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교육을 받고 배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역량을 얻는다는 생각은 17세기에 시작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한 것”(『이반 일리히와의 대화』, 79쪽)이었다. 이전에 앎은 교육받는 게 아니라, 삶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쇄와 더불어 교리문답서와 교과서가 등장하면서 앎의 지형은 바뀐다. 이제 앎은 특정한 텍스트에서만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교과서가 그렇다. 피터 라무스(Peter Ramus, 1515~1572)는 교과서라는 장르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학과목에 맞는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엄격한 정의와 분할로 이루어져 있다. 교과서는 피터 라무스의 방법에 따라 제시되고, 이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어떤 의견이나 반박도 실리지 않았다. 앎이 끊임없이 흘러 다니면서 변모하던 과거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 갇힌 앎이 공식적인 ‘교육’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앎도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다. 이제 앎을 얻기 위해서는 광장이 아니라 학교로 가야 한다. 물론 돈을 가지고 말이다.



너무 흔한, 너무 무미건조한 전자텍스트

인쇄로 인한 대량생산으로 텍스트는 실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수많은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 탄생했고, 책을 열람하기 쉽게 목록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텍스트는 인류의 지혜를 신체에 각인하는 기억의 칼날에서 수많은 참고 자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과거에 비해 텍스트의 위상은 현저히 약해졌지만, 그런 덕분에 우리는 쉽게 텍스트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인쇄의 발달로 작고 가벼워진 텍스트를 가지고 어디서든 묵독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이 대중화된 것이다. 이것은 일리히가 주목한 세 번째 분기점, 바로 문자문화에서 전자문화의 시대로 바뀌면서 급격하게 진행된다.

전자문화의 시대는 컴퓨터가 그 중심에 있다. 컴퓨터는 말을 순식간에 순차적으로 공간화시킨다. 그것은 기존의 인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다. 세상의 거의 모든 말은 컴퓨터에 의해 무형의 텍스트로 온라인을 떠다닌다. 그 덕분에 우리는 컴퓨터 화면을 통해 시시각각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텍스트를 구할 수 있다. 전자책의 경우에는 몇 천권을 작은 전자기기에 담을 수 있다. 그러니 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우리는 텍스트를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텍스트와 정보를 최대한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앎이 되어버린 탓이다.

과거에는 소수의 ‘귀한’ 책을 반복해서 읽었다. 몇 천 번, 몇 만 번을 읽고 스스로 몸에 체화하는 것. 텍스트 속 앎이 곧 내 삶이 되는 지행합일의 단계가 앎을 습득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앎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앎의 사적소유는 앎을 외부의 대상으로 여길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 우리는 앎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덕분에 수많은 앎의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앎을 구성하지 않는다. 남의 것을 빌려서 적당히 쓰다가 버린다. 컴퓨터에서 습득하는 앎은 너무도 무미건조하고, 낱말은 어떤 감성도 주지 못하는 ‘정보단위’일 뿐이다. 학생은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컴퓨터에서 앎을 구한다. 직장인과 주부는 집과 차를 구하기 위해 컴퓨터의 앎을 참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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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언어는 0, 1로만 구성되어 있다.

앎을 생산하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컴퓨터상에서 쉽게 텍스트의 범위를 설정하고 삽입하고, 삭제하고, 저장하고, 합치고, 보관하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과거 문자문화 시대에 행해졌던 필사에 비하면 육체적, 시간적인 노력이 많이 들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글을 쓰고 앎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편한 도구를 사용하면서 텍스트를 존중하지 않게 되었다. 컴퓨터에 글을 쓰면서 새로운 앎을 생산하기보다는 기존의 앎을 재생산하고, 원색적인 감정을 표출한다. 하나의 문장을 제대로 마무리하지도 못하고, 길고 난해한 텍스트를 읽어낼 힘도 없다. 그래서 요약된 텍스트, 파편적인 텍스트만 보게 된다.    
  
1960년 일리히는 문자문화의 시대에서 전자문화의 시대로의 낯선 변화를 느꼈다. 그것은 두 번째 분기점에 버금가는 혁명이었다. 일리히는 컴퓨터를 배척하지 않았다. 전자문화의 시대는 막을 수 없는 사회적 변화였기 때문이다. 일리히도 워드퍼펙트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것이 컴퓨터에 압도되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리히는 너무도 흔한, 너무도 무미건조한 컴퓨터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했다. 12세기 위그는 이런 현실을 타개할 하나의 힌트가 되었다. 일리히는 컴퓨터가 자신의 앎을 생산하고 토착적인 삶을 구성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랐다.



토착 언어-되기 : 우리 몸의 자율성을 깨운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저자 월터 옹은 이러한 전자문화의 시대가 과거의 구술문화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고 말한다. 앞서 살펴봤듯 구술문화는 목소리, 즉 청각에 의지한다. 청각은 구술의 보편적인 성격 덕분에 누구나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쉽게 전파되는 특성을 가진다. 이것을 월터 옹은 ‘일차적 구술성’이라고 하는데 전자문화도 이와 비슷한 성질 즉, ‘이차적 구술성’을 지닌다고 한다. 스마트폰, 컴퓨터는 물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문자를 토대로 하지만 기본적으로 구술적인 성격을 가진 도구들이다. 선명한 플레이어와 다양한 시각자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구술’이 흘러 다니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것은 일차적 구술성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위력을 지닌다. 과거의 구술성은 하나의 지역, 나라, 문화권을 넘어서기 힘들었지만 요즘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퍼진다.

덕분에 우리는 인류 최초로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이 공유한 앎을 절단·채취해서 나의 앎을 구성할 수 있는 도구를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도구를 선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일리히가 염려한 컴퓨터의 유혹보다 치명적인 스마트폰 중독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독은 술이나 마약 같이 지나치게 그것에 의존하는 생활로 빠진 상태를 말한다. 스마트폰 중독은 우리 몸과 정신이 스마트폰에 의해 움직인다. 우리 몸의 자율성은 온데간데없고 스마트폰이라는 타율에 의해 조종당한다. 이렇게 꼭두각시로 살면서 자신의 앎과 삶을 구성할 수는 없다.

일리히는 자신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했던 컴퓨터라는 도구가 야기할 현상을 탐구하기 위해  12세기의 수도사 위그를 만났다. 위그의 시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구를 단순히 기술의 발전에 따라 등장하는 소모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도구는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이기 때문이다. 도구의 사용에 따라 인간의 정신구조와 생활 형태는 판이하게 바뀐다. 지금까지 살펴봤던 구술문화[구술], 문자문화[문자], 전자문화[컴퓨터, 스마트폰]의 도구들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특히 근대 이후에는 텍스트에 박제된, 특정한 곳에 귀속된 언어가 의례나 제도와 같은 특권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 언어를 통해서 지식과 권력을 얻기 위해 그것을 교습 받았다. 도구가 사람을 압도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인간이 바로 호모 에두칸두스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언어조차 교육받아야 하는 인간. 따라서 타율에 의해 모든 것을 철저하게 교습 받아야 하는 불완전한 인간. 우리는 호모 에두칸두스의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도구가 삶을 속박하는 교습 언어-감옥이 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삶과 앎을 창안하는 토착 언어-되기가 될 것인지. 그 실천으로 위그의 ‘글 읽기’와 ‘스스로 배우기’를 해보자. 낭독과 필사, 기억술을 몸으로 익히기. 전자문화의 도구를 활용해 돈 한 푼 안 들이고 자기 힘으로 배우기. 이것이야말로 호모 에두칸두스에서 호모 쿵푸스로의 인생역전이 아닐는지.

누군가에 의한 교육이 필요하고, 앎을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한, 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 없다. 그런 인간은 스스로 그러한 자율성을 파괴한 자다. 일리히와 위그는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다. 삶은 근원적으로 토착 언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하리라. 우리 삶은 토착 언어라고.

(타율을) 버리고, (일상을) 나누고, (서로에게) 쿨하고, 라이브한 삶.
버·나·쿨·라!
우리 삶은 ‘버나쿨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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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버나쿨라!!

댓글목록

나디아님의 댓글

나디아 작성일

인쇄해서 꼼꼼이 읽어보았습니다. 입으로 소리 내서. ^^
읽다가 이윤기씨의 번역 일화가 생각났어요. 그리스인 조르바 원문에선 조르바가 카잔차키스를
'주인님'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윤기씨는 그걸 펄떡이는 입말로 바꾸기 위해 '두목'이라는 단어로 바꿨다죠~~
여튼 낭독과 필사, 기억술을 저도 온몸으로 익혀야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