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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진화론의 선물 - 감성 3학년(송미경, 최지영, 류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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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11-07 20:35 조회7,4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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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선물, 변이와 상속
 
 
송미경, 최지영, 류시성(감성 3학년)
 

지금까지 공부를 해오면서도 막막하고 부족한 느낌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겸손한 것은 예의를 차려서가 아니라 진심이다. 미숙한 존재이니까 늘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강박감에 쫓겼다. 그래서 원치 않았지만 경쟁적인 삶을 살아 왔다. 거기에서는 늘 과제가 주어졌고 그 일을 수행하는 것만이 부족함을 채우는 방편이 되었다. 그러다 사회활동을 그만두었다. 특별히 성취할 게 없어졌다. 경쟁 속에서 벗어나면서 잠시 편했지만 곧 이룰 게 없는 일상이 우울해졌다. 몇 개의 동사로 표현되는 일상의 반복이 따분해졌다. 성취의 목표가 없는 삶은 비루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다른 새로운 뭔가를 찾아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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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찾아 나선 일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진지해지기 일쑤다. 언제부턴가는 삶의 의미를 찾는 데는 공부만한 게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잃어버린 의미를 찾기 위해, 존재감을 찾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한다. 공부를 하면서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더 나은지를 또 끊임없이 판단한다. 그래서 늘 무겁고 심각하고 우울하다. 그러다가 ‘지금 이 순간 나는 완성되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라’는 불교의 메시지를 만났다. 나랄 게 특별할 게 없다고 한다. 길가의 풀꽃이나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고. 꿈을 갖지 마라. 꿈에서 깨라.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을 받아들여 나를 보는 시선을 확보하려고 한다. 삶의 무의미와 대면하는 것, 내 꼬라지를 보고 받아들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생각만 그렇게 한다. 삶에서 환상을 걷어내고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보는 것에 번번이 실패한다. 아직도 뭔가 의미 있는 것이 있고, 열심히 하면 더 나아질 것 같고, 잘하면 나를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
 
진화론은 애쓰는 나도, 사로잡힌 나도, 별 볼일 없는 나도 다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 같다. 이대로 좋다. 어떻게 살아도 좋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 같다. 진화론을 통해 이제껏 붙들려 있던 존재에 대한 불만족, 불확실한 미래의 목적에 대한 맹목적 추구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연과 변이만이 거듭된다는 진화론의 세계로부터 우리의 삶을 다른 지점으로 이끄는 아주 멋진 세계관을 선물 받았다. 이제 다윈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신과 진보를 넘어서  
 
1858년. 다윈은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것은 젊은 박물학자 월리스로부터 온 한편의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는 다윈이 발표하지 않고 있던 진화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다윈은 초조해졌다. 주변에선 그러기에 진작 발표할 것이지 왜 미적거렸느냐며 다윈을 채근했다. 그러나 다윈은 진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몰고 올 파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종은 변한다’는 자신의 확신을 전하며 ‘자신이 마치 살인자가 된 기분’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왜 이렇게 진화론을 세상에 내놓는 것을 주저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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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1809~1882년)은 빅토리아왕조 시대(1837~1901년) 사람이다. 이 시기 과학과 신학은 그 경계가 불분명했다. 과학은 자연을 연구하면서 이미 그것이 도달할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 신이 이 세계의 모든 존재와 질서를 만들었다는 것. 과학은 신을 증명할 든든한 후원자였다. 진화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지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전통적인 창조론과 과학적 창조론은 모든 생명의 질서 속에서 신의 존재와 자비로움을 찾고자 했다. 한편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진화론자들은 신의 자리에 인간을 세웠다. ‘진화는 더 고등한 생물 쪽으로 진행된다. 인간은 진화의 정점이다.’ 그들은 생명들 사이에는 위계가 있으며 더 나은 쪽을 향해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은 그러한 논의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윈은 신이냐 인간이냐의 문제를 이탈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생명의 기원이 자연에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 또한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것. 다윈의 주장은 곧바로 수많은 반론들에 부딪혔다. “제발,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제발 그것이 널리 퍼지지 않기를 기도하자.”며 한 주교의 부인은 울부짖었다. 심한 반발과 공격이 있었지만 다윈은 자신의 주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이 스스로 관찰하고 지켜본 자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목사 지망생이었던 다윈은 점차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진화론이 시대의 담론적 지형을 깨버린 것뿐만 아니라 다윈 자신의 삶 또한 변화시켰던 것이다. 다윈은 말했다. “이 세계의 모든 생명들에는 위계가 없다.” 
 
다윈은 자신의 연구가 많은 사람들의 길을 잃게 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윈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방식으로 삶의 길을 내야하는 생명의 원리였다. 그는 신과 진보의 세계를 떠나 이 생명의 원리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그가 느낀 것은 삶의 허무나 무의미가 아닌 경외감이었다. 그의 앞에 펼쳐진 경이롭고 장엄한 세계를 움직이는 생명의 원리. 진화가 보여주는 삶과 죽음의 파노라마. 다윈은 그것을 『종의 기원』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렇다면 『종의 기원』에 담긴 진화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제 그 진화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연선택, 그 자체로 충분하다!
 
『종의 기원』은 생명의 기원을 밝힌 책이 아니다. 제목 그대로 종(자연계의 생물)의 기원을 추적한 책이다. 현재의 구조와 습성을 지닌 종들이 이처럼 다양하고 풍성하게 자연계를 채우게 된 기원을 밝힌 것이다. 자연의 모든 생물들이 ‘신에 의해’ 개별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면 그 생물들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신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생물들이 마구잡이로 생겨나서 시간이 흐르다 보니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고 말하는 일부 진화론자들의 견해는 너무 조야하다. 라마르크가 주장하는 것처럼 구조와 특질이 단순한 하등동물로부터 보다 복잡해지는 고등동물로 나아간다는 식의 진화론은 자연을 제대로 관찰한 바탕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귀항 후 물경! 23년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영국 상류층의 학계 권위자들과 교류를 다져왔을 뿐만 아니라, 비글호의 전리품들을 분석한 과학자들로부터 얻은 결론을 스스로 실험하여 보다 강력한 증거를 확보해 온 터였다. 다윈에게 실로 방대한 데이터로 집적된 자연은 라마르크를 비롯한 숱한 진화론들이 주장하는 모습과 달랐다.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핵심원리에 도달하기에 앞서, 먼저 자연계는 무수한 ‘변이’들이 생성되는 장이라는 사실을 두 단계에 걸쳐 입증해야 했다. 두 단계는 ‘사육재배하’에서의 변이와 ‘자연상태’에서의 변이를 말한다. 다윈의 변이 논증은 이렇게 전개된다. 첫 번째 단계인 사육재배하의 변이에서는 사육장과 정원에서 만들어지는 변종의 사례들이 언급된다. 육종가와 원예가라는 인위적인 선택자, 이들은 ‘신’이 아니지만 가축과 작물을 자신이 원하는 모양과 성질대로 개량하는 일에 성공해 왔다. 다윈 자신도 비둘기 육종가로서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사육과 재배를 통해 다양한 품종(변이)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눈앞에서 ‘종변형’이 빈번히 발생하는 일임을 일깨운다. 이는 가히 육종의 시대라 할 만큼 많은 아마추어 육종가, 원예가, 박물학자들이 활동하던 영국 사회에서 충분히 수긍하고 남을 만한 이야기였다. 종은 고정불변한다는 그때까지의 통념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다윈의 책 첫 장을 읽으면서 종의 변이 가능성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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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단계, 자연상태에서의 변이. 다윈은 앞에서 도달한 모든 원리를 자연상태의 생물에 적용하려면, 그보다 먼저 이러한 생물이 ‘무언가’의 변이를 나타내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간단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연상태에서도 수많은 변이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다윈은 확신하지만, 사육재배의 경우와는 두 가지 점에서 상황이 다르다. 첫째, 변이를 누적시켜 새로운 품종을 생산하는 선택자가 없다. 둘째, 따라서 비교적 단기간 내에 변이가 발생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일생 내 그것을 관찰하기가 불가능한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자연의 현 상황을 놓고 논지를 전개해야 한다. 자, 그럼 자연계에서 종은 변이성을 갖는가 아닌가? 여기에 답하고자 할 때는 변이 판정의 기준이 되는 ‘원종’이 있어야 한다. 이 원종의 특질이 기준이 되어 그것으로부터 무엇이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기형, 변종, 아종 따위로 구분된다. 헌데, 다윈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종이라는 술어에 대한 갖가지 정의”가 있지만 어느 것도 모든 박물학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박물학자들은 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막연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합의된 정의는 없지만 느낌으로 안다는 것이다.(오!) 종의 정의가 이런 지경이기 때문에 다른 것도 대략 느낌으로 정의된다. 이런 식이다.
 
‘변종’이라고 하는 이름에 정의를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는 그 증명은 거의 불가능하더라도, 우선 일반적으로 유래의 공통이라는 것이 그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또 기형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점차 변종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기형이란 종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유해하거나 무익한 어떤 구조상의 현저한 편차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에 따라서는 ‘변이’라고 하는 말을 …… 생활의 물리적 조건의 직접적인 결과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변이’는 유전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송철용 역, 『종의 기원』, 동서문화사, 60쪽
 
한 세기 넘게 준수되어 온 린네의 생물분류법이란 것도 아무런 지침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분류학자의 테이블이란 게 제대로 만들어진 것인지 몽땅 의심될 만큼 비과학적인 방식이 추종되고 있었다. 즉, 어떤 생물이 종인지 변종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풍부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지닌 박물학자들이 모여 ‘다수결’(!)로 결정한다. 때로는 먼저 기록된 것이 있어서 새로 발견된 것을 종으로 등재하지 못할 경우, 나중에 기록되는 것은 자동적으로 변종이 되는 식이었다. 코미디 같은 상황이지만, 종을 확정짓는 일은 현대 생물학에서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라고 하니, 당시 분류학자들의 애환을 이해해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주먹구구식 분류학의 현실에서 다윈은 독특한 지점을 포착해낸다. 그것은 분류학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종과 변이들(기형, 변종, 아종)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이 자연의 실상이라고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종과 변이들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변이의 발단이 되었을 기형, 혹은 개체적 차이로부터 특징이 현저해지는 방식으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종이 탄생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서로 다른 차이를 지닌 개체들이 하나의 계열을 이룬 것이다. “그러한 계열은 실체적 추이라고 하는 관념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준다.”(같은 책, 70쪽)
 
실체적 추이가 만들어내는 계열을 이행하며 변이하는 생물들. 다윈의 통찰은 실로 대단하다. 단순히 자연에 대한 관찰의 정밀함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시대적 사고의 지평에 갇히지 않는, 사유의 새로운 경지로서 높이 살만 한 정도가 아닌가. 그는 먼저 종의 변이성을 납득시키는가 싶더니, 그런 다음에는 숫제 종을 해체해 버렸다. 종이란 없다. 실체적 추이 속에 변이하는 다양한 개체들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자연은 그런 방식으로 풍성해져 왔다. 다윈이 아는 자연은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연에 변종들만 난무하고, 그 형질들이 유전 및 진화하지 않았다면 생명의 역사는 없다. 지금까지 다윈의 논증으로 자연은 변이가 활발하게 제조되는 공장이 되었다. 사육재배하에서는 인간이라는 선택자(인위선택)가 있어서 변이를 특정 방향으로 누적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럼 자연상태에서는 누가 선택하는가? 흔히 던져질 법한 이 질문에는 함정이 있다. 바로 ‘누가’라는 선택의 주체를 설정하는 것이 함정이다. 그럼 주체가 없단 얘긴가? 그렇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중의 선택자’ 혹은 ‘다층적인 선택작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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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은 자연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런 선택작용이다. 거기에는 생물의 물리적 환경으로서의 자연이 행하는 선택도 포함된다. 그러나 다윈은 “모든 관계 중 생물 대 생물의 관계가 가장 중대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연도 보다 폭넓게 정의한다. 자연은 “수많은 자연법칙들의 복합적인 작용 및 그 소산”이다. 따라서 협의의 자연선택은 ‘유리한 변이를 보존하고 유해한 변이를 기각(제거)하는’ 과정을 의미하지만, 광의의 자연선택은 생물과 자연, 생물과 생물, 종 안의 개체들 사이, 개체의 체제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호작용 전체를 포괄한다. 고로, 이 안에서는 선택의 주체와 선택당하는 개체가 별도로 설정될 수 없다. 개체들은 자연에 비교적 잘 적응된 상태로 있지만 그 상태가 전적으로 자연에 의해 선택당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생물들은 생존여건이 달라졌다고 하여 굳이 적응하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환경의 변화가 생물들에게 언제나 선택압으로서 재깍 먹혀들지는 않는다. 이 같은 논증구조는 종의 유래는 물론, 진화의 메커니즘을 온전히 자연계 안에서 가능한 것으로 설명해냄으로써, 그때까지 제기되어 있던 여느 진화론과는 확실히 다른 차원을 보여주었다. 
 
다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별안간 탁 트인 대지 위에 변이들이 모두 소환되어 웅성거린다. 그들은 모두 이행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상호 투쟁도 하고, 협력도 하고, 의존도 한다. 그것은 이행의 스텝마다 필요한 상호작용이다. 그것이 이른바 자연선택이다. 조건에 맞게끔 존재를 변이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선택 또한 단번에 이뤄지는 행위가 아니라 과정이 되는 셈이다. 자연은 다양성의 시공간이다. 그것의 다양성으로부터 모든 것을 도출해야 했던 다윈은 ‘변이와 상속’이라는 생명의 원리를 발견했다. 개체들은 모두 차이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들은 부모세대가 낳은 변이들이다. 변이로서의 생명은 끊임없이 이행한다. 결국 우리는 이 이행의 사이에 존재할 뿐이다. 이 과정은 진화에 자연계 전체를 개입시킨다. 생명들은 그들이 존재하는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변이하며 이행한다. 나 또한 누군가의 이행에 필요한 자연이다. 세계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다윈은 이 상호연결성이야말로 존재를 규정하는, 존재를 변이시키는 동력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선택한다. 신이 우리를, 이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내재성의 장이야말로 자연이자 다윈이 연구하고자 했던 세계였다.
 
진화, 삶을 방랑케 하다 
 
여기에 오면 우리는 진화론이 보여주는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어떤 목적도 방향도 없는 세계. 고정된 것과 완성된 것이라고는 존재할 수 없는 세계. 모든 것을 과정으로만 이해해야 하는 세계. 심지어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건 그것이 우리의 자식들에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세계. 그런 점에서 참 안심이 되고 막 살고 싶어지는 세계다. 허나, 한편으론 이 예측불가능하고 목적 없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마치 바다를 표류하는 것처럼 암담하고 불안한 것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진화론을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학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진화에서 삶의 의미, 목적, 윤리를 끌어낸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진화는 생명이 다양해진 과정과 패턴을 설명하는 이론이지, 삶의 의미를 말해주는 거창한 철학적 체계가 아니다. -제리 코인,『지울 수 없는 흔적』, p.314

 
0000012586_004.jpg그들은 창조론자들과 격렬히 싸우다가도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하면 진화론에서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고 토로한다. 평생을 진화론과 씨름했을 터인데 그 세계에서 어떤 삶의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사실 이게 더 충격적이고 불안하게 다가온다. 한편으론 이것이야말로 진화론이 가져다준 부정적인 효과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암흑 같은 세계. 이 아리송한 세계 앞에서 신이 난 건 창조론자들이다. 그들은 진화가 “도덕적 책임을 모면하게끔 하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곰들도 사랑을 나눈다지, 심지어 낙타들도, 우리도 포유류잖아-그러니 맘껏 즐기자고!” 외친다. 이 점에선 개인적으로 창조론자들의 손을 잡고 싶은 심정마저 든다. 그렇다면 진화가 보여준 세계란 정말 우리에게 도덕적 방종만을 야기하고 어떠한 윤리적 모색도 불가능한 지대를 의미하는 것일까. 
 
다윈은 자신의 연구 전체를 ‘변이와 상속’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언제나 ‘변이와 상속’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공부해야 된다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헌데, 우리는 이 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다윈이 말한 전부, 다윈의 진화론이 구성한 세계를 떠받들고 있는 논리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변이란 무작위로 일어난다. ‘내 뱃속으로 난 놈 가운데 저런 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 그게 변이의 핵심이다. 변이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 불가능함을 환기시킨다. 어떻게든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 그런 점에서 차이는 생명의 출발점이다. 한편 상속이란 자연스럽게 선택되어 내 자식에게 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어떤 것이 선택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유용한 것만이 상속된다. 상속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을 전해준다. 즉, 상속이란 반복을 생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떻게 모순되는 출발이 함께 있을 수 있을까.  
 
다윈에 따르면 이 세계는 모든 것을 과거로부터 받는다. 삶의 출발점이 과거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거가 우리에게로 상속될 때는 전환이 발생한다. 일단 부모로부터 받은 것들부터 생각해보자. 부모가 나라는 존재를 낳기 위해선 생식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부모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세계 ‘전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질 때 그 전체는 일종의 가능성의 형태로 전환되어 전해진다. 그것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것을 둘러싼 세계와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전까지의 세계 전체가 하나의 씨앗의 형태로 압축되어 전달되고 다시 전체적인 세계와 관계를 새롭게 형성해야 하는 ‘나’라는 존재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관계망을 압축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상속에는 본질적으로 변이가 수반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상속은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가치와 관계망을 떠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윈은 이것을 우리의 삶 혹은 생명의 기본적인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그렇기에 생명은 늘 새로운 방식으로만 도래한다. 아니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생명은 부모 혹은 과거 전체를 변용시켜서 자신의 현재에 적응해나간다. 과거 전체를 자신의 현재에 맞게끔 고치고 다듬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과거의 것에서부터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으로써만 현실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다. 과거의 것이 어떤 방식으로 변용될 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지금-여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여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유되며 향유될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과거, 역사,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 우리를 속박하는 힘이 아니라 단지 원료이자 재료일 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현재적 삶이란 이 재료들을 어떻게 절단하고 조합할 것인가에 의해 늘 새로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엔 어떤 매뉴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오직 현재만을 그 길잡이로 삼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직 현재에서만 길이 찾아진다는 것, 그 길찾기에 완성된 것도, 완전한 것도, 본질적인 것도 없다는 것. 이러한 다윈의 사유는 마치 삶을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에 적응하며 산다는 의미처럼 다가온다. 술고래로 살아가건, 공부하며 살아가건, 어떤 식으로 살아가건 그것은 자신의 현실에 적응하는 하나의 방식인 셈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세계야말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도덕적 방종으로 가득 찬 세계일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부정적 상상 혹은 환상이다. 아니 그 기저에는 세계가 조화롭고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언제나 경쟁과 도태, 일탈과 불안만을 떠올린다. 그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없앤 곳, 그곳에서의 삶만이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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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세계에선 두 힘이 늘 같이 작동하고 있다. 생성과 소멸, 삶을 위한 투쟁과 협력. 이것들이 반복되지 않는 자연, 역사, 삶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오면 삶의 의미를 말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향해 다윈이 되풀이했던 말을 이해하게 된다. 변이와 상속만이 영원하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시비선악, 더와 덜,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어선 삶 자체였다. 다윈은 이 원리로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기에 그 원리를 통해 우리의 삶을 보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삶의 모습과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답을 구할 수 있다는 것. 다윈이 진화론을 연구하며 도달한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우리의 온갖 전제들을 내려놓고 생명의 세계를 볼 때야 비로소 삶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 여기서 생명은 자유로워진다.
 
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한 예술가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 개, 나무 한 토막을 주어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친다. 그가 그렇게 합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어울리게 연결해 놓은 부분들이나 형태들로부터 온갖 복잡한 형태들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며 그저 자연스럽게 표류하는 가운데 생겨났을 뿐이다. -근영쌤 강의안, 『앎의 나무』, p.135 재인용
 
생명은 방랑한다. 목적도 방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무나도 잘 살고 있다. 우리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마치 어떤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엔 목적과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음을 느낀다. 때론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순간 삶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다윈은 이러한 삶을 그냥 그대로 잘 지켜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여기에 어떤 식으로든 인간적인, 목적론적인 세계관이 끼어들 때면 다윈은 늘 생명의 원리를 되풀이했다. 인간을 넘어 생명의 원리로. 다윈은 이 철저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야 비로소 수많은 생명들과 삶을 공유하는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세계는 두려움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다. 이미 우리 안에 현재와 과거 세계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여기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알려주는 유일한 낙원이 아닌가. 오직 여기에서 삶의 환희와 긍정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반드시 답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뭔가를 모르는 것, 아무런 목적 없는 신비로운 우주에서 갈피를 잃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내가 아는 한 우주는 틀림없이 그런 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두렵지 않다.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p.324 리차드 파인만의 말 재인용
 
나가며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이토록 다양한 생명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었는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나무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윈의 나무라고 부른다. 공통선조에서 뻗어 나와 수없이 많은 종의 가지를 치고 있는 생명의 나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가운데 우연히 만들어진 나무. 모든 존재가 가진 관계성을 다 보여준다.
 
여기에는 지금은 소멸해버린 99.99%의 생명의 흔적까지 남아 있다. 상속을 멈춘 가지들이 그 생명들의 기록이다. 줄기로부터 가지가 뻗어 나오듯, 누군가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이전 종의 사멸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종들의 삶의 재료가 되고, 현재의 종도 죽음으로써 나중 종의 재료가 될 것이다. 곧 나의 생명은 누군가의 선물 받음으로써 가능하고, 나 역시 기꺼이 누군가의 선물이 될 것이다. 삶도 죽음도 선물이 되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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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진화한다. 진보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윈은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뜻으로 진화를 이해해달라고 호소했다. 생명은 끊임없이 나아갈 뿐이다. 여기엔 목적이 없다. 나아갈 길도 우연적으로 결정될 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 세계, 내 삶을 만들었다. 나는 바람과 비와 햇볕과 함께 이 세상에 왔다. 그것들이 아무런 목적도 방향도 없이 몰아치듯이. 그리고 예고도 없이 그치고 사라지듯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나는 이제 그것이 두렵지 않다.
 
이런 세계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최초에 소수의 형태 또는 하나의 형태에 갖가지 능력을 지닌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졌다. 행성이 고정된 중력의 법칙에 따라 영원히 돌고 도는 동안, 이토록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무한한 형태가 진화해 나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p.15 다윈의 말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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