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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항하는 전쟁(감성 3학년 밴드 글쓰기)
 글쓴이 : 갱미粳米 | 작성일 : 13-11-11 18:07
조회 : 6,068  
전쟁에 대항하는 전쟁
 
김정안, 도담, 정경미 (감성 3학년 밴드 글쓰기, '전쟁기계' 팀)
 
 
나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때 소리가 많이 난다. 힘이 센 건지 너무 집중을 해서인지. 여튼, 혼자 작업을 할 땐 몰랐는데 도서관 컴퓨터를 이용할 땐 그게 문제가 된다. 내가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다.

전에 도서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정신없이 글을 쓰고 있는데 도서관 직원이 나에게 종이에 이런 말을 써서 건넸다. “자판 소리가 너무 커서 주위에서 민원이 들어옵니다. 자판을 좀 조용히 쳐 주세요.” 나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용조용 숨을 죽여 글을 쓰지만.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또 소리가 커진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씩씩거리며 의자를 쾅 밀며 나가버린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다가 화가 난다. 내 딴에는 조심을 한다고 하는데. 자판에 비닐 카바까지 씌우고 글을 쓰는 소리가 시끄럽다면 당신이 과민한 거 아냐? 그리고 바로 옆에 앉아 있으면서 직접 얘기하면 되지 직원한테 민원을 넣을 게 뭐람?
 
다음부터 나는 그 남자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왜냐. 그 남자 옆자리에 앉는 것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는다. 마우스 위에 하얀 휴지 한 장을 덮고 쓴다. 남자는 이용 시간 중간에 한 번 컴퓨터를 ‘자리 비움’ 상태로 해 놓고 매점에 가서 빵을 먹는다. 남자는 의자를 약간 젖힌 상태로 모니터를 쳐다본다. 자판은 거의 쓰지 않는 것 같다. 컴퓨터를 주로 ‘보는’ 데 사용하니까 옆에서 떠드는 소리를 참을 수 없는가 보다. 남자의 동선을 파악하기 전에 몇 번 도서관 오는 길에, 도서관 복도에서 남자와 마주쳤다.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편함! 알지만 모른 체해야 하는 관계. 우리는 멀리서도 서로를 알아본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서로를 피한다.
 
당신 자판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이 소리가 뭐가 시끄러워? 여기가 당신 혼자 사는 집이야? 남자와 나는 문제가 발생한 바로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놓고 싸워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남자는 제도의 힘으로 나를 응징하려 했고, 나는 은밀한 스토킹으로 남자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물리적인 싸움을 피하려 했지만 마음속에 응어리가 생겼다. 그 마음으로 상대와 심리전을 벌였다. 적 그리고 전쟁. 피하고 싶으나 피할 도리가 없다. <사랑과 전쟁>이라는 TV 드라마가 떠오른다. 드라마에서 성격이 다른 두 남녀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 상대를 죽이려고 한다. 사랑이 전쟁이라니 사랑하기도 참 무섭다. 그러고 보니 전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6.25 전쟁만 전쟁인 것이 아니다. 사랑도 전쟁이고,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것도 전쟁이고,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과 싸우는 살[肉]과의 싸움도 전쟁이다. 그야말로 사는 게 전쟁이다. 유사 이래 전쟁이 없었던 날이 며칠 안 된다고 한다. 국가 간의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안에서도 유형 무형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지겹고 두려운 전쟁의 역사. 혹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도는 없는 것일까?
 
 
원시사회는 평화로웠을까?
 원시부족의 전쟁.jpg
엘만 서비스(E. Service)의 분류에 따르면, 인간 사회는 무리 사회(Band) → 부족 사회(Tribe) → 군장 사회(Chiefdom) → 국가 사회(State)의 과정을 거쳐 변화해 왔다. 지금은 국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이 국가 간의 경계를 해체하고 있지만 그래도 정치 집단으로서 국가가 중요하게 기능하는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국가 사회의 역사는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현대에 1,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크고 작은 내전, 국지전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제국주의 침략전쟁-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다. 현대 이전엔 더욱 말할 것도 없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오죽하면 이름이 ‘전쟁시대[戰國時代]’이겠는가. 오吳나라 월越나라 진晉나라 채蔡나라들이 어제는 적, 오늘은 동지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진秦 제국이 탄생했으나, 그도 15년 만에 망하고, 이어 한漢이 천하를 통일했으나 그 안에 내분의 씨앗은 항상 꿈틀거렸고, 이후 많은 왕조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한 것이 중국 고대와 중세의 역사이다.

국가 간 전쟁이 없었던 때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국가 사회 이전의 부족 사회나 군장 사회 때는 어땠을까? 그때는 전쟁이 없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설명이다.
인류학자 스털링 로빈스(Sterling Robbins)는 뉴기니 고원지대의 아위야나족 남자들에게 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삶이 더 나아졌다. 어깨 너머로 경계하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고, 아침에 일어나 화살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집에서 나와 소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의 세계』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강주헌 옮김, 김영사, 2013, 221쪽.
원시 사회에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절대적인 수치로 보면 현대보다 적지만 상대적인 사망자 수(총인구에 대비한 사망자 수)는 현대의 세계전쟁에서 겪은 사망률보다 오히려 많았다. 즉 원시 사회에서 전쟁은 항시적이었다. 적이 침입할까봐 어깨 너머로 경계하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없고, 아침에 일어나 화살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오줌을 눌 수 없었다니, 전쟁이 얼마나 일상적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국가를 만들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침략과 약탈을 해야 하고 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러한 항시적인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 계약을 통한 국가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하나의 인격체 안에서 통일된 군중을 국가라고 부르고 라틴어로는 키비타스(Civitas)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위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의 탄생인 것이다.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평화와 방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 ‘유한한 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리바이어던』)

항시적인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것이 국가이다. 그러나 국가 사회 또한 항시적인 전쟁 상태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사망자 수가 적은 국가 사회 안으로 숨어들어 옹졸한 평화를 구가하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원시 사회의 전쟁을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원시 사회의 전쟁에서 혹시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전쟁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곤의 전쟁
 
끌라스트르는 『폭력의 고고학』에서 전쟁의 동기에 대한 설명을 자연주의적 담화, 경제주의적 담화, 교환주의적 담화 이렇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연주의적 담화는 르루아-구랑이 주로 말한 것으로 폭력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래 인간의 원초적 현실에 속한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먹고 먹히는 관계의 사슬이 자연이다. 인간 또한 이 자연의 일부로서 생존을 위해 폭력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자연히 인간 사회도 전쟁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끌라스트르는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담화를 비판한다. 인간은 반드시 먹고살기 위해서만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욕망도 있다!

경제주의적 담화는 19세기 유럽에서 원시 사회의 삶은 행복한 삶이라는 믿음이 해체되기 시작할 무렵 형성되었다. 특정한 누군가의 주장이라기보다 상식에 속하는 이 담화는 원시 경제가 빈곤의 경제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너무 가난해서 전쟁을 해서 빼앗아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물질적 재화의 희소성은 그 재화들을 서로 획득하려는 집단들 사이의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생존을 위한 이러한 투쟁은 무장 갈등으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인류학적 연구들은 원시 경제가 빈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가난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급자족 경제였다. 먹고살기 위해 다른 부족을 착취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공동체의 순환 경제였다. 조금 일하고, 많이 놀고, 모든 것을 나누어 가졌다. 그들은 네트워크로 다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가난해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다. 개인 소유가 없었을 뿐 재화가 늘 순환하므로 사는 데 필요한 물질은 늘 풍요로웠다. 원시 경제는 빈곤의 경제가 아니라 풍부한 경제였다! 따라서 가난해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경제주의적 담화는 설득력이 약하다.

교환주의적 담화는 끌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을 기반으로 하는 주장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연구에 따르면 원시 사회의 존재 방식은 교환이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는 방법도 교환이고, 집단 내 개인의 생존 방식도 교환이다. 무언가를 주고받는 행동을 통해 다양한 관계들이 구성되고 변화한다. 구성원들 사이 순환이 순조로운 상태가 ‘교환’의 상태이다. 순환이 순조롭지 못한 상태가 ‘전쟁’이다. 상호작용을 하는 대상들 사이에 힘의 균형이 깨질 때, 이때 전쟁이 벌어진다.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개인들 사이 관계를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은가. 주고받는 것이 순조로울 때는 관계가 좋다. 뭔가를 보냈는데 기대한 만큼의 반응이 없을 때 싸운다. 전쟁이 벌어진다. 그래서 힘의 균형이 회복되면 관계도 다시 좋아지지만 불화가 불화로 그치면 그 관계는 깨지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교환이 원시사회의 작동 방식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환은 평화적으로 해결된 전쟁이고, 전쟁은 불행한 교환의 결과이다.

끌라스트르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수긍하면서도 “아니다, 그 반대다!”라고 하면서 확 뒤집는다. 끌라스트르는 원시 사회가 교환을 위한 사회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사회라고 한다. 교환이 실패한 결과가 전쟁이 아니다. 전쟁은 원시 사회의 존재 방식이며 삶의 진정한 동력이라는 것. 이는 원시 사회의 본질적 특성에서 비롯된다.
 원시 사회란 무엇인가? 원시 사회는 모두 동일한 원심적 논리에 의해 지배받는 비분화된 공동체들의 다수성이다. 어떤 제도가 그러한 논리의 항구성을 표현하고 또 보장해 줄까?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전쟁은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의 진리이고, 통합화의 구심적 힘에 대항하여 분산의 원심적 힘을 발전시키는 주된 사회학적 수단이다. 전쟁 기계는 사회 기계의 동력이고, 원시 사회의 존재는 완전히 전쟁에 기초하고 있으며, 원시 사회는 전쟁 없이 지속될 수 없다. 전쟁이 더 많을수록 통합화는 반대로 적어진다. 국가의 가장 강력한 적은 전쟁이다. 전쟁을-위한-사회로서의 원시 사회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폭력의 고고학』 삐에르 끌라스트르 지음/변지현 · 이종영 옮김, 울력, 2002, 295~296쪽.
한 사회를 구성하는 힘은 두 가지 방향성을 지닌다. 하나의 힘으로 통합하려는 구심력(求心力)과 다수성으로 분산되는 원심력(遠心力). 원시 사회는 원심적 힘이다. 통합화를 거부한다. 하나의 힘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거부한다. 우두머리가 있지만 권력이 없다. 사회가 한 개인에게 특권이 주어지는 것을,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로 권력의 분화가 일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시 사회에서 우두머리는 ‘사회의 이름으로’ 말을 하도록 되어 있다. 우두머리는 말을 할 때 개인적 욕망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는 공동체의 욕망을 체현하는 존재이다. 그의 말은 비개인적인 법(Loi)의 텍스트이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법의 이름 아래 영토를 통제하는 공동체가 바로 원시 사회이다. 이 공동체는 이웃의 공동체와 대면하여 절대적 차이로, 환원 불가능한 자유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나 폐쇄적인 조직 아닌가? 그렇지 않다. 원시 사회는 자기 자신 속에 닫혀 있기는커녕 극단적 강도 속에서 타자들을 향해 열려 있다. 나무가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아도 그 안에 엄청난 역동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원시 사회의 정학(靜學)은 부단한 동학(動學) 속에 있다. 야만인은 모두와 친구가 되려 하지 않는다. 적과 친구를 분명히 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다”고 하며 친교를 요구하는 타자와 단호하게 싸운다. 전쟁을 통해 적이면 적, 동지면 동지, 이방인이면 이방인 관계를 분명히 한다. 전쟁의 결과 동지가 됐으면 공동체 안에서 그것이 일자(一者)의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늘 경계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집중된 힘을 분산하고 찢어버리는 것이 원시 사회의 존재 방식이다.

홉스는 말한다. 국가는 전쟁에 대항한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의 원시 사회인들의 세계는 홉스가 말하는 ‘사회’가 아니다. 전쟁을 막는 국가가 발생해야 비로소 사회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끌라스트르는 반대로 말한다. 전쟁은 국가에 대항한다! 국가야말로 전쟁광이다. 국가의 전쟁-타율성(exo-nomie)에 대한 단호한 거부, 자율성(auto-nomie)과 정치적 독립성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끌라스트르는 원시 사회의 전쟁에서 발견한다. 전사들의 공동체, 국가의 전쟁과 싸우는 ‘전쟁-기계’의 모습이 원시 사회에 있다는 것이다.

원시 사회의 전쟁을 국가의 전쟁과 대비해서 ‘아곤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아곤(agon) : 그리스어로 서로 동화(同化)되지 않으려는 의식을 뜻한다. 국가의 전쟁은 동일화의 논리이다. 동일한 욕망으로 다수의 위계와 서열을 정하는 것. 올림픽에서 금메달 은메달 순위를 정하는 것, 학교에서 성적에 따라 등수를 매기는 것, 직장에서의 승진 과정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런 비교 경쟁의 레이스(race)에 익숙해져 왔다. 경쟁이 아닌 방식으로 타자를 만나는 경우가 드물다. 길을 걸으면서도 누가 앞에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앞지르려고 한다. 동일화의 논리 속에서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이다. 나이, 키, 학벌, 연봉 등의 척도로 다른 사람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비교해서 우월감에 빠지거나 열등감에 시달린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은 동일화의 논리이다. 너와 나는 관계에서 소외된다. 이것이 국가가 조장하는 전쟁이다.

아곤의 전쟁.gif아곤의 전쟁은 동화(同化)의 상태를 깨고 이화(異化)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나하고 너하고 같을 때(동일화 될 때) 그 안에서 힘의 위계가 발생한다. 이 불균형을 전쟁을 통해 깨뜨림으로써 너와 내가 다른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원시 사회에서 전쟁의 동기이자 목적이다. 원시 사회는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르기 위해 전쟁을 하지 않는다. 전쟁을 통해 지배-종속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원시 사회의 적(敵)은 ‘집중된 권력’이다. 공동체의 내부에 혹은 이웃 부족에 권력의 집중 현상이 생겼을 때 전쟁을 통해 이 현상을 해소하는 것이 원시 사회 전쟁의 목적이다. 전쟁의 결과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게 아니라 힘의 균형 상태를 회복한다. 이때 힘의 균형 상태란 힘이 똑같아지는 상태가 아니라 상이한 힘들이 각자의 독자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즉, 원시 사회에서 전쟁은 국가의 전쟁-안타곤의 전쟁에 대비되는 아곤의 전쟁으로 차이를 생산하는 방식이며 이질적인 존재들이 공존하는 관계의 기술이다. 동일화의 논리 속에서 차이를 만들기 위한 전쟁. 타율성을 거부하는 자율성의 운동. 아곤의 전쟁은 모든 생명의 원초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조직과 제도를 만든다. 그런데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이 도리어 인간의 자율적 생명력을 갉아먹고 제도에 복종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모순. 이때 제도 안에서 생명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운동을 아곤의 전쟁이라 할 수 있겠다.

아곤의 전쟁은 원시 사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요즘 우리 사회에도 있다.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선언한 김예슬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대학 자퇴 선언을 통해 기만적이고 무능한 제도 교육에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했다. <가난뱅이의 역습>을 쓴 마쓰모토 하지메는 조롱과 유머의 전략으로 자본과 국가에 맞선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궁상스러움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여 공공장소에서 찌개 끓이기, 데모 신고 해 놓고 경찰 바람 맞히기, 대기업 쇼핑센터 앞에서 생선 굽기 등등의 행동을 한다. 그의 행동은 자본과 국가의 위압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을 국가에 대항하는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소해서 쿡쿡 웃음이 난다. 하지만 이 웃음이야말로 경직된 세상에 숨구멍을 틔우는 치열한 아곤의 전쟁이다. 이처럼 아곤의 전쟁이 특정한 시기, 특정한 행동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를 거부하는 모든 능동성 자율성의 운동이라면, 이것은 아마도 우리 몸에 내재된 생명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전쟁은 생리다
 
몸은 외부와 차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외부와 차별적 항상성을 유지해야만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온도의 예를 들면 자연의 항상성은 대체로 영하 50도에서 영상 50도 사이를 유지한다. 그 안에서 항상성을 유지한다. 몸은 36.5도에서 0.5도 정도의 편차만을 허용할 뿐이다. 몸은 자연과 동화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순환 체계를 유지해야 살 수 있다. 몸은 대자연 속에 포함된 존재이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연 안에서 일자(一者)적 기준으로 위계와 서열을 나눌 수 없다. 그런 점에선 다른 생명들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다른 항상성이 있을 뿐이다.
미생물.jpg
이런 차별적 항상성을 지키기 위해서 몸은 늘 전쟁을 한다. 한의학에서는 ‘사기(邪氣)’, 서양의학 용어로는 ‘미생물’이라는 질병의 인자들이 항상 몸에 들어오고 나간다. 이 과정에서 몸의 정기 혹은 면역계는 외부의 인자들과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정기는 사기와 맞서기 위해 국가 간 전쟁에 견줄 만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한다. 정면으로 맞서서 지칠 때까지 사기와 싸우는가 하면 협곡으로 유인해서 일시에 전력을 퍼붓는 전술을 쓰기도 하고, 때론 화해 협정을 맺기도 한다. 미생물과의 싸움에서도 비슷하다. 물리 ․ 화학적 1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2차 방어선에서 호중구 등 막강한 전투력을 갖춘 면역인자들이 출동해서 미생물들을 해치운다. 만일 침투력이 강한 바이러스가 1, 2차 방어를 뚫으면 몸은 다른 전략을 짠다. 이들의 활동을 무력화하기 위해 항체(抗體)라는 무기를 대량 생산하는 것이다. 이때 만약 몸이 외부의 사기와 싸우지 않는다면, 즉 외부와 동화(同化)된다는 것은 완전한 자연물이 된다는 것-죽음을 의미한다.

몸의 전투 대상에는 사기나 미생물 등 질병을 일으키는 요소뿐만이 아니라 공기나 음식 같이 친숙한 환경도 포함된다. 공기나 음식도 몸 안에서 소화되기 전까지는 낯선 존재이다. 호흡을 통해 몸에 들어온 천기(天氣)는 더 이상 몸 바깥의 공기가 아니다. 그것은 십이경맥(經脈)을 돌면서 오장육부의 활동을 만든다. 또한 섭식을 통해 몸에 들어온 배추는 밭에 있는 배추의 지기(地氣)가 아니다. 그것은 내 몸 안으로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똥이 된다. 이처럼 몸은 외부의 낯선 존재-사기와 맞서 자기 고유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몸 밖의 천기나 지기와 차이를 만들어 외부와 이화(異化)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이 바로 아곤의 상황이다.

몸 안으로 동화된 기운이라 할지라도 또 다시 이질적인 것들로 분화된다. 하나의 기운은 정(精)과 기(氣)와 신(神)으로 나뉜다. ‘정’은 몸의 물질적 토대이다. ‘신’은 이 물질 혹은 육신에 영적 방향성을 제시하며, 신의 벡터에 따라 육신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바로 ‘기’이다. 정 ․ 기 ․ 신 간에 위계는 없다. 정 ․ 기 ․ 신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기운인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본래 자연에서 왔기 때문에 자연과 연대적 관계에 있고, 동시에 자연과 이질적인 특이적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점과 같은 맥락이다. 이 역시도 아곤과 연결된다. 정 ․ 기 ․ 신은 흩어져서도 안 되지만 차별을 두지 않아도 곤란하다. 이들은 본질적으론 하나지만 서로에게 타자로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충돌하고 화합한다. 생명적 에너지는 이러한 타자성을 통해 동력을 갖는다. 애초부터 하나인 것은 동적 잠재력만 있을 뿐이다. 생명은 타자를 통해 실질적인 동적 에너지를 작동하게 된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몸에서 공생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미생물 또는 기생충 등이 서로 타자가 되어 싸우고 화합하면서 존재하는 것. 그 이질성의 세계가 바로 나의 몸이고, 거기서 일으키는 전투가 나의 본능이다.
 
  
허쉬파피에게 배운다
 
영화 <비스트>는 ‘욕조’라는 섬을 배경으로 한다. ‘욕조’는 남극의 빙하가 녹아 땅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아 놓은 제방 바깥에 있는 섬이다. 거기에 주인공 소녀 ‘허쉬파피’가 물가 늪지 오두막에서 아빠-윈키와 함께 산다. 섬에는 몇몇 이웃들이 있다. 이들은 물에서 메기와 게를 잡고 숲에서 열매를 따먹으며 산다. 윈키는 허쉬파피에게 비스트가 되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힘으로 세상과 맞서 싸우는 방법을 가르친다. 윈키는 허쉬파피를 ‘대장’이라 부른다. 아빠에게 의존하는 유약한 딸이 아니라 혹독한 환경에서 같이 살아가는 동지로 대하는 것이다. 제방 너머의 도시에서 때때로 소리친다. 거기는 사람 살 곳이 못 돼요. 빨리 도시로 들어오시오. 그러나 이들은 섬을 떠나지 않는다. 섬에서 먹고살고, 잔치도 벌이고, 공부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에서 욕조 섬에 사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난민보호소에 수용한다. 거기서 옷을 갈아입히고 병원 치료를 받게 한다. 그러나 윈키와 허쉬파피를 포함한 몇몇 주민들은 탈출해서 다시 섬으로 돌아간다.

도시 사람들은 제도의 안전망 안으로 들어오라고 허쉬파피에게 손짓한다. 그러나 그 안전망 속에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제도에 의존하면서 사람들은 자생력을 상실하게 된다. 허쉬파피는 천재지변이나 동식물의 위협에 알몸으로 노출되어 있다. 살아 있는 매순간이 생생한 전쟁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서는 몸의 자생력이 최대화된다. 제도의 안전망 속에 있는 도시인은 전쟁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면 허쉬파피는 제도의 안전망이 없기 때문에 바로, 전쟁에 대한 공포 없이 바로 전쟁과 직면한다. 어떤 선입견이나 표상 없이 삶과 직면한다. 우리가 영화에서 감동하는 것은 바로 이런 야생적 생명력이다. 도시 생활에 길들여져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생생한 실감을 허쉬파피는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영화 허쉬파피.jpg
허쉬파피는 물고기를 맨주먹으로 때려잡고, 딱딱한 게 껍질을 우지끈 부숴뜨려서 뜯어먹는다. 필요 이상의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맨몸으로 상황에 부딪친다. 조금만 아파도 진통제를 먹고, 스마트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현대인들의 나약함과 비교되는 전투력이다. 물론 허쉬파피 만큼의 전투력을 도시인이 갖추긴 어렵다. 그러나 편리와 서비스에 길들여진 수동적인 습관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을 할 수는 있다. 물론, 제도와 매너를 벗어났을 때 감수해야 할 것이 있다. 공권력의 위협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그렇다고 그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안락과 편리함의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다면, 시멘트로 둘러싸인 답답한 아파트에 사육되는 애완동물 신세가 될 것이다. 길들여질수록 무기력해진다. 무기력할수록 외롭고 두렵다. 어쩌면 현대인의 우울증과 무기력이 이러한 전투력 상실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전쟁을 피하려 할 게 아니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매순간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싸우다 보면 두려움도 우울증도 사라질 것이다. 원래 싸울 땐 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만 현장에만 집중할 뿐이다. 이 현장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을 불교에서는 ‘위빠사나’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싸움은 수행이나 다름없다. 동일한 욕망에 예속되지 않고 아곤의 자유를 얻으려면 그 정도 수행은 각오해야 한다. 오히려 그 수행과 같은 전쟁을 통해서만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어디를 가든 힘의 규모와 관계없이, 그 동질적이고 수동적인 욕망에 속박당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싸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안정과 발전이라는 미끼로 나를 휴전이나 종전으로 유혹하는 모든 타협과 합리화에 대항하여.

혹시 지금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싸울 때이다. 지금 싸우고 있는가.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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