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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 자립을 위한 기술 (감성 3학년 밴드 글쓰기)
 글쓴이 : 동철군 | 작성일 : 13-12-08 21:37
조회 : 5,722  

 

정주, 자립을 위한 기술

풍미화, 김동철(감성 3학년)


나는 지금까지 이사를 수십 번 했다. 결혼 전에는 나이 수만큼 이사를 했다. 결혼 후에는 예전보다 이사를 훨씬 적게 했다. 결혼 생활 15년 동안 5번 이사를 했으니 결혼 전에 비해서는 정착한 셈이다. 그러나 먹고 자는 생활 공간을 한 곳에 오래 두었더라도, 몸과 마음의 움직임은 결코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몸이 생활 공간에 있을 때도,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 있을 때가 많았다. 거주지에서는 잠자고 씻고 밥 먹는 생리적인 요구만 해결하고, 다른 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살았다. 그러니 집이라는 거주 공간 밖에 있는 그곳이 나의 진정한 생활 공간이 되는 셈이었다. 하여 집과 일터와 그 사이의 이동공간이라는 이중삼중의 삶의 분리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처해있는 상황이다. 무엇을 진짜 삶터로 규정해야 하는가?

일리치는 정주(定住)를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삶의 기술’로 규정했다. 정주는 인간의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짐승들의 둥지나 자동차가 들어가는 차고와는 층위가 다르다. 즉 정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닌 행위의 문제다. 그렇다면 공간 안에서 어떤 행위가 이어질 때, 정주가 되는 걸까? 일리치에게는 되찾아야 할 시대와 그 시대의 삶의 기술이 있었다.


정주와 삶을 같이 보는 것은 세상이 아직 살기에 적당하고 인간이 그 속에 머물러 살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p74>


그의 말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정주의 기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삶을 사는 기술도 잃어버렸다. 그러면 이제는 거주와 삶을 분리되지 않는 하나로 영위할 수 있는 기술은 다시 찾기 어려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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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치의 ‘정주’, 들뢰즈의 ‘유목’


천막은 날마다 고쳐 써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우고 걷고 했습니다. 농가는 거기 사는 사람들의 상황에 따라 켜졌다 줄었다 합니다. 먼 등성이에서 내려다만 보아도 아이들이 혼인했는지, 노인들이 죽었는지 알아볼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p75>


 일리치가 말하는 정주의 공간은 마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살아 움직인다. ‘하울의 성’은 필요에 따라 내부 공간의 구조를 바꾸거나 다른 시공간과 접속할 수 있다. 이보다 움직임은 느리지만, 일리치의 정주는 생명체와 같은 방식으로 일생에서 일생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 정주의 공간은 늘어나는 삶의 흔적들로 채워지고, 그 흔적에서 삶의 정보를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정주가 남긴 흔적은 삶의 파동을 타고 다양한 삶으로 이어지며 움직인다.

흔적을 남기며 움직이는 삶의 기술이 일리치의 ‘정주’다. 일리치의 ‘정주’는 단지 공간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천막을 매일 고치고 세우고 걷는 행위나, 농가를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맞추어 고쳐 쓰는 행위는 거주 공간을 내 삶의 필요에 맞게 고치는 ‘기술’이다. 이는 집 수리 기술일 뿐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 변이해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삶의 기술이다. , ‘정주’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대한 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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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하는 사람에게 세상의 중심은 그가 살고 있는 장소라고 일리치는 말한다. 그래서 가축을 치는 풀라니족, 절벽에서 살아가는 도곤족, 물고기를 잡는 송가이족, 농사를 짓는 보보족이 살아가는 공간은 서로 이질적이지만 공히 삶의 흔적을 일군다. 이점을 입주 공간의 소비자인 ‘입주민’은 이해하지 못한다. 입주민은 주어진 공간을 점유하는 것 말고는 새롭게 무언가를 생성하지 못한다. 그가 남기는 흔적은 상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흠집일 뿐이지, 세대를 이어갈 삶의 기술로 쌓이지 못한다. 그는 균질화된 공간을 나누기만 했을 뿐, 공간 자체를 새로이 생성하지 못한다. 정주민은 입주민과는 다른 공간을 형성한다. 공간에서의 활동을 통해 공간 자체를 생성하는 것으로 무수한 공간을 향유하고 그 안에 공동체의 공통된 용도를 만들어간다. 다시 말해 일리치의 ‘정주’는 새로운 공간을 생성해내는 창조적인 활동인 것이다.

‘정주’와는 전혀 다를 것 같은 말이 ‘유목’이다. 그런데 감이당에서 공부하면서 자주 들었던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은 일리치가 말하는 ‘정주’와 상당히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정주’를 장기, ‘유목’을 바둑으로 설명한다.

 

장기의 말들은 모두 코드화되어 있다. 즉 행마나 포석, 그리고 말끼리의 적대 관계를 규정하는 내적 본성 또는 내적 특성을 구비하고 있다. 馬는 마고, 卒은 졸이고, 包는 포다. … 바둑알은 주체화되어 있지 않은 기계적 배치물의 요소들로써 내적 특성 같은 것은 전혀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직 상황적 특성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천의 고원, p674>

 

이는 공간과 말의 관계를 검토한 내용이다. 장기의 말이 고정된 위치만을 점유하며 움직일 수 있도록 코드화되어 있는 반면에, 바둑알은 상황에 따라 어떠한 위치에도 놓일 수 있는 가능태로서 존재한다. 또한 말끼리의 관계를 보면

 

장기의 말들은 내부성의 환경 속에서 자기 진영의 말들끼리 또는 상대방 진영의 말들과 일대일 대응 관계를 맺는다. 구조적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바둑알은 오직 외부성의 환경만을, 즉 일종의 성운이나 성좌를 가진 외부적인 관계만을 구성하며, 이들 관계들에 따라 집을 짓거나 포위하고 깨어 버리는 등 투입 또는 배치의 기능을 수행한다<천의 고원, p674>

 

장기가 제도화되고 규칙화된 전쟁으로서 모든 것이 코드화되어 있다면, 바둑은 단 한 알로도 하나의 성좌 전체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전략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존재도 장기와 바둑에 있어서 각기 다르게 작용한다. “장기의 경우에는 닫힌 공간을 분배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장기는 최소한의 말로 최대한의 장소를 차지해야 한다. “바둑의 경우에는 열린 공간에 바둑알이 분배되어 공간을 확보하고 어떠한 지점에서도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둑알은 자유로운 생성의 존재이다.

이처럼 바둑과 장기는 전혀 다른 정의와 운동, 전혀 다른 시공간을 갖고 있다. 장기는 ‘홈이 패인 공간’으로, 바둑은 ‘매끄러운 공간’으로. 장기는 말이 움직일 수 있는 방향과 위치가 정해지지만, 바둑은 말 하나가 오직 가능성으로만 남겨진다. 바둑은 외부를 하나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자기 영토를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향해 스스로 탈영토화하는 방식으로 영토화를 이룬다. 그리고 그 길에는 어떠한 코드도 전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둑의 공간을 ‘매끄러운 공간’으로 말할 수 있다. 장기가 정해진 방향과 거리만큼만 움직여가며 공간을 점유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일리치의 ‘정주’나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은 흔적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새로운 변이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닮아있다. 그것이 공간적 변이든 사고의 변이든 홈 파인 공간 속으로 빠져들어가지 않고, 그 사이를 질주하고, 그 위를 가로지르면서 자유롭게 흘러 다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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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민과 정주민

삶도 장기와 바둑처럼 전혀 다른 시공간을 가질 수 있다. 일리치는 ‘정주’를 건축가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활동’이라고 말했다. 건축가는 건물을 짓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정주자는 자기 공간 안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흔적을 만들고, 그 흔적들은 쌓여서 하나의 토착을 형성한다. 일리치는 건물이 지어지는 공간과, 정주를 통해 존재하는 토착 공간은 서로 종류가 다른 공간이라고 하였다. 3차원의 균질한 데카르트 공간이 아닌, 균질하지 않은 공간, 즉 각기 다른 질적인 활동이 일어나는 공간이 토착 공간이다. 그러한 토착 공간을 형성하는 정주자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의 공리를 생성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공리를 국가사회로 통칭되는 ‘제도적 공리’와 대비하여 ‘공용’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일리치가 정의한 ‘공용’은 다수의 집안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공용’은 공동체에게 지낼 곳이 되어주며, 또한 일반주민이 남기는 흔적이다. 공용은 공동체의 삶을 위하여 공동체 누구에게나 두루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 자원과는 다르다. 현대인은 집을 자원으로 여긴다. 자원이기 때문에 집은 실질적인 거주공간으로서의 역할 대신, 부의 증식 수단 혹은 매매의 대상으로 거래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리치는 집이라는 공간에 ‘삶의 흔적’이 묻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원의 관점에서 삶의 흔적은 희소성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흠집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새것이 중고품이 되면 가치가 폭락하는 격이다. 따라서 흔적은 깨끗이 제거되어야 한다. 삶의 흔적, 즉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생활하며 만드는 공용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들은 자원으로써 보다 값어치가 나가는 공간으로 계속 이동한다. 일리치는 이들을 가리켜 입주(入住)하는 존재, 선반과 창고에 보관된 물건처럼 삶의 흔적을 만들지 못하는 호모 카스트렌시스(수용되는 인간)라 부른다.

호모 카스트렌시스가 삶의 흔적을 만들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무슨 말인가? 이는 독자적으로 삶을 구성하는 힘이 떨어진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용되는 인간으로서의 입주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거주공간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 그는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고 제공한 상품 리스트를 보고 그저 대금을 지불할 뿐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구입한 상품에 결정권이 없다고 하면 의아한 노릇일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말하는 결정권의 상실이란 다른 사람이 제공한 상품 목록 이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상상력이 부족하고 만들어놓은 것만 취할 줄 아는 사람은, 생산자의 의도에 끌려가는 소비자의 위치에 머문다. 요컨대 홈 파인 공간으로 흐를 뿐, 그 외부를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소비자는 앞에서 언급한 입주자와 같은 부류이다. 일리치의 눈에 이들은 ‘삶의 흔적’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삶의 흔적’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기술, 꿈꾸는 기술,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이하는 기술 등 살아가는 총체적 기술이 저마다 독특하기 때문에 저마다 생활방식이 독특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술은 너무 복잡해서 코메니우스나 페스탈로치 같은 방식이나 교사나 텔레비전이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살아가며 체득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배울 길이 없는 기술입니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p76>

 

일리치가 말하는 ‘삶의 흔적’은 독립성 혹은 개별성이 묻어나는 삶의 양태를 가리킨다. 이는 교사나 TV에서 배울 수 없다. 요컨대 자신의 의도와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삶의 흔적’은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의 실천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규칙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데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환경에 포섭되어 훈육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도와 사회의 의도라는 것이 엄밀하게 구별되기 어렵다. 사회가 주입한 가치는 인간에게 내재화되어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래서 일리치는 어떤 답을 제시하지 않는 대신, 끊임없이 의심할 것을 촉구한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자생적인 것이 아닌, 거슬러 오르면 그것이 탄생한 기원이 있으며 그 기원의 시점에 그것을 기획한 사람들과 특정 집단 혹은 사회가 있다. 이렇게 탐구하다 보면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흔들리게 된다. 그 순간, 삶이라는 것을 원점에서 사유하게 된다. 이때 홈 파인 공간 외부에 주목할 수 있다. 홈 파인 공간 내부와 외부에 어떤 우월한 것은 없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당사자의 몫이다. 그렇게 독자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무르익었을 때를 ‘자립’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치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 것이 아닐까? 그가 강조하는 ‘삶의 흔적’이란 자립하는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공용, 소통과 자립의 흔적

자립이란 자본이나 사회로부터 벗어난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이 있지도 않겠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자립이 아니라 고립일 것이다. 자립이란 자본과 여러 사회적 관계에 끌려 다니지 않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능력에 가깝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리치는 답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힌트는 남겨두었다. 그것은 바로 ‘공용’이다. 그는 입주와 대비되는 삶의 방식을 정주라 했다. 입주가 획일화된 삶이라면, 정주는 다양한 삶의 흔적 위에 포개진다. 그러면 삶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정주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정주는 공용을 창조함으로써 가능하다. 요컨대 자립의 능력을 기르는 것은 공용을 창조하는 일이 된다.

자립한 사람은 독립적이지만 독고다이가 아니다. 혼자서도 잘하지만, 초점은 혼자 잘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자립’했다는 것은 자신과 이질적인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능함을 가리킨다. 이질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존재감을 발휘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을 포용하고 함께 집단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곧 자립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립(自立)은 타립(他立)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라’는 잠언의 원리와 같다. 자아와 타자가 공존하는 길을 찾을 때 공용이 형성된다. ‘공용’이란 구성원들이 환경을 공동으로 다루는 행위이다. 일리치가 공용을 ‘삶의 기술’이라고 한 것을 이제야 알 수 있다. 공용을 만들기 위해선, 구성원들간에 갈등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상호간에 정교한 ‘소통의 기술’이 필요하다.

 

제인 제이콥스는 전통적 도시에서는 도시가 확장할수록 또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정주 기술 및 공용의 생명력이 증가한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입증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30년 동안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여 지역 공동체의 정주 기술을 강탈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공간이 희소하다는 느낌이 갈수록 더 극심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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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하는 데에는 기술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왜 우리는 소통해야 하고, 어째서 공용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갱신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답을 찾는 고민과 사유를 게을리하면 소통의 이유를 찾을 수 없고, 궁극적으로 공용을 만들 까닭이 사라지게 된다. 공용의 장에서 벗어난 이들은 정주가 아닌, 입주의 삶으로 회귀하게 된다. 입주의 삶에서 고민과 사유의 목표는 달라진다. 입주의 삶은 이미 조성된 삶의 방식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물음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입주자는 삶의 방향을 묻는 대신, 남보다 빠른 속력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정주민은 타인을 앞서나가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주목한다. 다시 말하면 속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속력이 덜 중요하기에 정주민은 말 그대로 ‘정주’, 즉 머무를 수 있다. 그는 머무르며 어디로 향할 것인가를 숙고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에서 부과되는 획일적 삶이 아닌, 자신만의 ‘삶의 흔적’을 일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어디로 빠르게 우르르 달려가도, 그에 동요되지 않고 자신의 의도와 욕구를 명확히 인식하며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또한 홀로 고립되지 않고,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리며 공용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립했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공용’은 특정한 삶의 모델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지반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의 고유성마저 회의하는 자세다. 또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고,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여 공용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다. 이런 삶의 태도에서 자립을 위한 실마리는 생겨날 수 있다.

  

나는 거주지와 삶의 중심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를 고민했다. 어딘가에 중심을 고정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삶의 중심은 순간순간 이동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언제나 현재 처해 있는 곳에서 정주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어떤 곳에서 따로 정주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현재 있는 곳에서 그 순간 공용을 발휘하면 정주가 된다. 자립을 위한 공용의 행위는 나를 앉아서 유목하는 정주민의 마당으로 인도할 것이다. 삶의 공간이 분리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각각의 공간에서 공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정주하면서 또한 유목하는 삶을 살게 되리라. 진짜 삶터는 내가 서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 일리치가 되찾고 싶었던 시대와 삶의 기술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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