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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마련의 글쓰기 <나는 왜 글을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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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05-10 12:22 조회6,85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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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마련(事上磨鍊)의 글쓰기
 
권순정(감이당 대중지성 2학년)
 
  나는 고정 독자 35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일간 무가지 신문의 발행인으로서 편집, 취재, 기사 작성은 물론이고 인쇄에 배포까지도 혼자 다 맡아 하고 있다. 심지어 아침마다 독자들에게 따끈따끈한 신문을 배달하고 그 자리에서 읽히는 일까지 one-stop 서비스를 한다. 그나마 이주 전 부터는 독자 중 한 명을 발탁하여 지국장으로 삼고 매주 월요판 신문을 맡김으로써 주말마다 감이당 공부를 하느라 지친 심신을 조금이나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권학록.png
 
학급신문 '권학록(배움을 권하는 글)'
 
 

    처음에 학급 신문을 만들면서 신문의 제호를 공모한 결과 시답잖은 몇 개의 공모작들 중 그나마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작품이 있어 이것으로 제호를 삼았다. 권순정 선생님과 학생들의 기록을 줄여서 권학록이라고 이름붙인 것으로 내가 여기에 배움()을 권하는 글()이라는 해석을 가미하여 좀 그럴 듯해 보이도록 했다. 우리 신문의 판형은 A42단 양면으로 규모는 작지만 요즘 독서계, 강연계의 최고 흥행 보증 수표인 박노해, 고미숙 두 분을 외부의 필진으로 영입하여 각각 여는 시명랑인생교본이라는 코너를 맡겨 드렸다. 물론 이분들은 당신의 글들이 서울 외곽의 소도시에 있는 중학교 한 학급에서 소박하게 발행되는 신문에 거의 고정적으로 등장하신다는 걸 알지는 못한다.(오늘 그중 한 분은 알게 되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신문에서 호응도가 큰 코너 중 하나는 ‘10반 열전이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글이기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 코너에는 아이들이 매일매일 두 명 정도씩 돌아가면서 쓴 학급일기가 실리는 데 <사기열전>만큼의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지만 가끔씩 가슴을 울리는 글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예컨대, 거의 모든 수업 시간에 멍 때리거나 졸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 한 아이가 어느 날 쓴 일기에 많은 아이들이 기술 시간에 잠을 잤다. 아이들이 이렇게 자면 선생님의 마음이 얼마나 슬픈지 아이들은 잘 모르나보다. 나는 앞으로 수업 시간에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라는 글처럼.(물론 이 아이는 그 후로도 일관성을 잃지 않고 쭉 멍 때리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다. 오늘 국어 시간에도 깨우면 일어났다가 어느새 또 잠이 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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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마다 '권학록'을 소리내어 읽는 아이들
 
 
이 <권학록>이라는 신문에서 자타가 공인한다고 믿는 가장 Hot한 코너는 ‘담임일기’로 내 에너지가 가장 많이 투여되는 곳이기도 하다. 담임의 내밀한 속내가 담긴 이 글을 나의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주면 아이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귀 기울여 듣는다. 이 안에는 아이들에 대한 나의 칭찬과 감동,때론 실망과 나에 대한 반성이 진솔하게 담긴다. 비록 일기의 형식으로 가장(假裝)되어 있기는 하지만 현재 내 사상마련(事上磨鍊)글쓰기의 거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글을 써봐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고미숙 선생님의 말처럼 이곳에서 매일매일 학교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상을 사건화함으로써 내가 어떤 꼬라지의 인간인지 알게 될 때가 종종 있다.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는 공부, 그것은 바로 이곳에서 내 존재와 삶이 곧 세계이자 우주의 전부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늘 이와 같은 공부의 현장 속에 있다는 것. 양명은 이것을 구체적인 일, 즉 사건이라 불렀다.
문성환, 앎은 삶이다』, 북드라망, 2012, p.134
 
 
 
사건 1, 내 꼬라지를 알다
 
아침 신문읽기 시간에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 정현이에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자신을 보면서 아직 미숙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강의가 있는 체험학습에 대해 정현이가 불만을 표현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순간 내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들이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도 좀 떨리고 급기야 강의 듣기 싫으면 혼자 남산 등산이나 하라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 차이가 존중되는 민주주의적 삶의 원리를 말로는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막상 내 생각과는 다른 의견이 나왔을 때, 머리로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아직 나의 수준은 이 정도에 불과하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 더 이상하며, 다양한 생각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걸 입으로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내 눈치를 보느라고 자신의 의견을 떳떳하고 안전하게 말할 수 없음을 느낀다면 아이들과 내가 배움의 관계를 잘 만들지 못한 것이다.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표현의 자유가 많이 위축되고 심지어 언론조차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걸 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를 절실히 느낀다. 그럼에도 이 작은 일상에서 나조차도 다른 생각이 나오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
 
저 유명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야기는 표현의 자유가 억압됐을 때 인간이 느끼는 괴로움이 얼마나 큰 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홍길동전>에서도 길동이가 아버지에게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여 가출을 하는 걸 보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생존권을 위협할 정도로 말이다.
 
오늘 나에게 귀중한 깨달음을 준 정현이에게 감사하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차이도 존중해주는 아주 민주적인 인간이라 자부하며 살았을 거다. 삶이 곧 배움의 과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삶이 배움의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내 감정의 움직임을 직시하고 직면해야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성의 힘으로 삶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고미숙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오롯이 와서 박힌다.
(2014. 03. 25 () 권학록 제17)
 
 
감이당으로 우리반 아이들을 데리고 체험학습을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미 신문을 통해 감이당이 어떤 곳이고, 왜 감이당으로 체험학습을 오고자 하는 지 심지어 부모님께도 가정통신문으로 알렸기에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했는데 불쑥 정현이라는 아이가 던진 말에 내 감정이 심하게 흔들린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밥을 먹고 소화가 안 된 것처럼 찜찜한 마음을 갖고 집에 돌아와서 신문을 만들면서 이 일을 담임일기에 써보았다. 하루 종일 왜 그런 감정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감히 선생님의 말에 반기를 들어? 내가 너희들을 위해 지금 얼마나 힘들게 체험학습을 준비하고 있는데…….’하는 마음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했던 것 같다.
 
 
경험의, 지식의, 기억의 결과인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따라서 우리는 행동하고 변화합니다. 바로 그 중심을 원 상태로 돌려놓고 그 ’, 그 자아, 그 축적 과정을 없애면 바로 거기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 인식에 열중하는 고된 작업이 필요합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정채현 옮김, 크리슈나무르티』, 고요아침, 2008, p.23 
 
크리슈나무르티의 말대로 지금 이대로의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를 알아차리자 내가 행동하고 있는 중심, 생각하고 있는 중심으로서의 나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교사라는 축적된 지식, 생각하고 있는 중심으로서의 나 자신을 알게 되었고, 그 말을 듣던 순간 교사로서 가지고 있던 권위 의식을 이젠 내려놓게 되었다. 그런데 그냥 생각만으로 나를 인식하는 것보다 글로 내 감정을 살펴보다 보니 한결 생각이 명료해 짐을 알 수 있었고, 불편했던 감정도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알아채는 순간, 어느새 사라져버림을 느꼈다. 나는 다른 교사들보다 매우 민주적인 교사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막상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보니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해 말로만 떠들고 있었던 내 꼬라지를 보게 되었고, 차이를 통해 배운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차이 나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에 심히 인색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통해 구체적인 일상을 사건화하고 그 안에서 지금의 나로 하여금 더 좋은 삶을 향해 온 마음을 쏟아내는 것이 공부’(문성환) 라고 한다면 일상을 사건화하고, 통찰하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학급신문에 이 글을 싣고 난 다음날 우연찮게 반장에게서 체험학습비 낸 아이들의 명단을 받았는데 몇 안되는 동그라미가 정현이 이름 옆에 나란히 그려져 있는 걸 보고 내 마음이 정현이에게 전해진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사건 2, 가르침을 내려놓다
 
작년 한 해 학습 연구년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한 후에 내가 가장 먼저 실천한 것은 낮고 차분하게 말하기불필요한 말 안하기이다. 나는 목청이 크고 흥분을 잘 하는 편이라 내가 수업을 하고 있으면 그 양 옆에 있는 교실의 아이들까지도 내 수업을 듣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수업 시간 내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런데 작년 한 해 연구년을 하면서 많은 수업을 관찰한 결과 교사의 말이 적고 낮을수록 아이들의 배움이 더 잘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삼월 첫 날부터 이것을 실천을 해 보았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내 말이 낮아지니까 아이들도 작게 말하고, 아이들이 작게 말하니까 교실은 더 조용해진다. 일방적인 지식 전달을 줄이고, 조별 활동을 통해 과제를 해결하도록 하니 다양한 질문과 답변이 교류되며 더 풍부한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또한, 일체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더니 잡담하는 아이들도 예전에 비해서 훨씬 줄었으며,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다른 친구의 말도 더 잘 듣는다. 덜 가르쳐야 더 잘 배운다는 가르침과 배움의 역설. 마치 신비체험을 하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젠 가르치는 역할을 내려놓고 나도 아이들과 배우는 자리에 서려고 노력한다. 하나의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학문을 강의할 수 있다.’(전습록313 조목)고 생각하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배움이라는 활동만 추구하고자 한다. 지식 축적을 위한 수업이 아니라 스스로 탐구하고 반성하는 경험을 중시한다. 내가 하는 일은 활동 과제를 제시해 주고, 이야기 나눠보게 하고, 조별로 이야기한 내용을 전체적으로 연결시켜주고 교류시켜 주는 것뿐이다. 그랬더니 오히려 내가 아이들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아졌다. 아이들이 텍스트와 만나고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나 혼자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을 이야기가 빵빵 터지며, 수업이 점점 흥미진진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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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으로 이야기 나누며 배우는 아이들
 
그런데, 며칠 전 함께 동학년 국어를 담당하고 있는 50대 초반의 A 선생님. 내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국어 선생님처럼 아직도 국어 책에 빽빽하게 아이들에게 전달할 지식을 써서 수업을 하신다. 말을 많이 하시니까 마이크까지 사용하신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 올해 권선생이라 수업을 하면서 엄청 스트레스 받아. 나 내년에 명퇴도 신청해 놨어. 난 권선생처럼 세련된 수업은 못하겠는데, 수업을 하다가 문득문득 권선생이 가르치는 저 뒷 반 아이들은 세련된 수업을 받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 마다 너무 괴로워~”
 
그러시면서 하신다는 말씀이,
 
시험 문제(요즘은 중간고사 출제 기간이다.)도 너무 수준이 낮아서 창피해서 아직 못 주고 있었어(내가 편집 담당이라서).”
 
나 자신감이 바닥 상태야.”
 
 
이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아이들에게 말을 많이 하는 교사는 불안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특히, 나도 수차례 경험한 바지만 교사가 수업을 열심히 준비하지 않았을 때 말이 많아지고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된다. 이것은 학생에게 투사된 교사의 무의식적 불안감의 소산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불안감을 느끼는 만큼 아이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말을 반복하고 자세히 설명하려 하고 결국은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A 선생님의 불안감은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끌어 모아서 아이들에게 전달해 주시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상하게도 내가 자신감을 갖게 되면 아이들을 믿게 되고, 모든 걸 아이들에게 맡길 수 있다. 올해 내가 아이들을 믿고 모든 걸 맡길 수 있었던 것은 작년 한 해 동안 감이당에서의 공부와 연구년 공부를 통해 지식 축적에 대한 허영과 욕심을 버리고, 교사로서의 나를 많이 내려놓았(고 생각한다.)기 때문이다. 내가 교사라는 정체성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가르치려 하고, 그 때부터 아이들을 믿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우리의 공부는 오직 나날이 줄어드는 것을 추구하지, 나날이 늘어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 푼의 인욕을 줄일 수 있다면 곧 한 푼의 천리를 회복할 수 있다. 얼마나 경쾌하고 깨끗한가!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가!
전습록 99조목
 
 
왜 한 푼의 인욕을 버리는 것이 그만큼의 천리를 회복하는 일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교사로서 나의 사명은 가르치는 것이다.’라는 고정된 지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 수많은 지식을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아이들에게 더 많이 주입하려는 욕심을 버릴 수 없게 된다. 이 욕심은 필연적으로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가르침에 얽매이게 되면, 자신이 소유한 앎은 더욱 보잘 것 없고, 초라해 질 수 밖에 없는 법. 그러니 불안감을 떨치기 어렵게 되고 더 많은 지식을 끌어 모아 자신의 불안감을 감춰 줄 두터운 안전망을 둘러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안전망이 둘러쳐있는 만큼 소통의 벽이 높아지고 교실은 핏기를 잃어간다.
 
무릇 글을 가르칠 때는 부질없이 많이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밀하게 익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학생의 자질을 헤아려서 200자를 익힐 수 있는 사람은 단지 100자를 가르쳐 주는 것이 옳다. 항상 정신의 역량에 여유가 있게 한다면, 싫어하고 고생하는 근심이 없어지고 스스로 터득하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전습록, 학교의 규약 198조목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200자를 반으로 줄이는 딱 그만큼 아이들이 스스로 터득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100이 빠진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교사가 만들어 놓은 정답에서 포획되지 않은 아이들의 생기발랄한 언어들이다. 아이들의 언어가 교실의 언어로 울려퍼지는 순간, 배움은 고생과 근심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만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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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는 것은 지각, 청소, 분리수거 딱 세 가지이기 때문에 올해에는 개학 첫날 이 세 가지를 당부하고 조회는 학급신문 읽기로, 종례는 보왕삼매론 읽기 이외에 아이들이 잔소리로 받아들일만한 말은 일체 하지 않기로 했다. (내 모든 교육적 실천의 보고는 감이당이다.) 조회 시간 15분 동안 신문을 소리 내어 읽힘으로써 얻은 가장 큰 성과 둘은 15분 동안 서로에게 귀 기울여주기를 하는 것뿐 아니라 아이들이 신문을 바닥에 마구 버리는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신문을 나눠주고 각자 묵독으로 읽힐 때는 잡담으로 소란스럽고, 하루를 생활하다보면 바닥에 신문이 굴러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내가 밤 잠 못자고 힘들게 만든 걸 저렇게 버리다니! 그래서 언짢은 마음이 든 적이 많았는데 지금 아이들은 신문 버리지 말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도 아직까지 교실 바닥에 신문이 떨어져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말로 아무리 윽박지르고 타이르고 협박을 해도 안 되던 것이 신문을 함께 읽고 듣는 것 하나만으로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해결되었다. 혁명은 피를 통해 이뤄지는게 정말 아닌가보다. 종례 시간에도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고 오로지 보왕삼매론만 읽고 마친다. 처음엔 아이들이 혹시 이거 읽는 걸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얼마 전 감이당으로 체험학습 갔을 때 한옥 마을에서 종례를 하면서 자 이제 종례할게.”라고 말했더니 전혀 생각지도 않게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보왕삼매론, 하나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를 소리 높여 암송을 할 정도로(1년 이상을 낭송했지만 아직도 다 못 외는데 아이들은 셋까지는 너끈히 외우고 있었다.) 아이들은 보왕삼매론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혀가는 중이다. 이렇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아이들이 떠나는 배움이라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자 더 큰 배움의 세계가 열렸다.
 
 
무엇이든 자네 자신이 직접 대결하고
자네 자신이 몸소 생각하며
자네 자신이 수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도 자네 스스로 읽고
도리도 자네 자신이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다만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이며 입회인에 불과하다.
의문점이 있으면 함께 생각해볼 따름이다.
- 주자
(감이당 홈페이지에 있는 고미숙 선생님의 글 천지와 인간의 조응을 역설한 주자라는 글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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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님의 댓글

달집 작성일

아이들이 감이당처럼 디귿자 모양으로 앉았네요. 좀 있으면 암송오디션도 하신다면서요? 순정쌤, 대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