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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위해 관리되는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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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07-19 14:31 조회6,1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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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위해 관리되는 성
-이광수 ‘무정’에 나타난 근대 계몽기의 성담론
 
 
김지현(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물음1. 
작년에 채모 검찰총장이 혼외자녀 문제로 사퇴한 일이 있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혼외 관계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조선일보가 앞장서고 국정원까지 조사에 나서고 혈액검사까지 하는 걸 보고 너무한다 싶었다. 물론 청와대와 검찰, 국정원간의 알력다툼이 있던 시기라서 사람을 더욱 사지로 몰았겠지만, 혼외 자녀를 문제시하는 여론이 그토록 강력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사태가 전개되었을까 싶다.  
   사람들은 불륜에 대해 왜 그렇게 민감할까. 가족과 관련된 일은 사생활, 사적 영역이라고 하면서도 남의 사생활에 그토록 열을 내는 이유가 뭘까. 주변에 보면 결혼하고도 연애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마치 나와 내 주변에는 그런 일이 없다는 듯, 사람들은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불륜에 대해서 격렬하게 비난하곤 한다. 사실 나 또한 그런 행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처럼 나와 이해관계가 별로 없는 사람에게는 너그러운 척 했지만 바람을 피운 사람이 가족이었을 경우, 다른 문제로 다가왔다. 경험상으로 봐도 결혼해서 부부로 한평생을 잘 살 확률이 잘 못 살 확률보다 훨씬 낮은데 왜 그토록 핏대를 세우며 불륜을 비난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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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2. 
  조모임 시간. 그 날은 <연애의 시대>를 읽어오는 날. 한 쌤이 “님은 회양 금성 오리나무 되고 나는 삼사월 칡넝쿨이 되어 그 나무 그 칡이 납거미 나비 감듯 이리로 츤츤 저리로 츤츤......” 하는 사설시조를 암송했다. 그걸 들으며 모두 킥킥대는 와중에 나는 별로 안 웃겨서 가만히 있었더니 한 학인이 나에게 “참, 지현씨는 모르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결혼을 안 했으니 성행위에 대해서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이것 참,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나도 알만큼은 안다고 말하면 왠지 발랑 까진 여자가 될 것 같아서 어물쩡 하는 사이 그 순간이 지나가 버렸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성경험이 없을 거라는 철썩 같은 믿음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성에 관한 얘기를 하면 왠지 단정치 못한 여자가 될 것 같은 이 기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광수의 <무정>은 1917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작품으로,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무정>은 근대 문명에 대한 동경과 신교육 사상, 자유연애 찬양 등을 주된 주제로 삼고 있다.('Basic 고교 문학용어 사전‘ 참조) <무정>이 발표된 시기는 혼전순결을 비롯한 성규범과 자유연애, 자유결혼, 모성, 가족주의 등의 근대적 성 담론이 형성된 시기이다. 이 글은 <무정>에 나타난 근대계몽기의 성 담론을 살펴보며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성담론의 기원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1. 순결, 합법적인 성(性)으로 가는 관문
<무정>의 주인공인 형식은 영채를 칠팔년 만에 만나 영채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기생일까 아닐까’를 추측한다. ‘더럽혀진 여자’는 자신과 결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채와 선형을 각각 매음녀와 선녀로 구분한다. 
 
“형식은 영채에게 대하여 갑자기 싫은 마음이 생긴다. 저 계집이 이때까지 누군지 알 수 없는 수없는 남자에게 몸을 허하지나 아니하였는가. 지금 자기 신세타령을 하는 저 입으로 별별 더러운 놈의 입술을 빨고 별별 더러운 놈의 마음을 호리는 말을 하던 입이 아닌가. 지금 여기 와서 이러한 소리를 하고 가장 얌전한 체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육칠 년 전의 애정을 이용하여 나를 휘어 넘기려는 휼계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선형을 생각하였다. 선형은 참 아름다운 처녀라.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마음조차 아름다운 처녀라. 저 선형과 이 영채를 비교하면 실로 선녀와 매음녀의 차이가 아닐까.”
 
(이광수, <무정>, 문학과 지성사, 46쪽)
 
 
 
   
   형식에게 여자는 순결한 여자와 더럽혀진 여자로 나뉜다. 형식은 김현수, 배명식에게 강간당한 영채를 폭력의 피해자로 보기 보다는 ‘더럽혀진 여자’로 여기며 괴로워한다. 반대로 선형의 처녀성 앞에서는 “말할 수 없는 향기로운 쾌미가 전신에 미만하여 피 돌아가는 것도 극히 순하고 창쾌한 듯”함을 느낀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단일한 민족국가를 만드는 것이 지상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순수한 혈통을 물려받은 국민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성을 통제해야 했다. 이를 위해 어떤 식의 성관계가 바람직하고 합법적인 것인지 국민들에게 유포하기 시작했다. 이제 건강한 자녀의 출산이 목적인, 결혼한 부부의 성관계만이 공식적이고 바람직한 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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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외 관계, 동성애, 자위행위 등 출산과 연결되지 않는 성은 비정상적이고 비합법적인 것이 되어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혼외관계는 ‘불륜’ - 윤리를 어긴 것이라 칭해지고(내가 보기엔 가정폭력이 더 심한 불륜인데), 동성애는 에이즈의 원인으로, 자위행위는 도착적인 행동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성’이 단순한 욕망의 차원을 뛰어넘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척도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   
   부부 사이의 성만이 바람직한 성이 되면서 “가정은 사랑과 성애의 특권적 장소가 되었”(고미숙, <연애의 시대>, 북드라망, 127쪽)고, 일부일처제가 가장 바람직한 결혼제도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자본주의적 경제 원리인 사적 소유와도 맞물려 있다. 여자는 결혼 전에 더럽혀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남편의 순수한 소유물이 될 수 있다. 이 소유물을 독점하기 위해서 남자는 결혼 전에는 여자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혼전순결’이란 부부가 서로를 완전하게 독점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인 셈이다.   
 
 
 
2. 성산업과 일부일처제의 만남
    <무정>에서 ‘정조’가 문제시 되는 사람은 여성들뿐이다. 형식은 성경험이 없지만 동경에서 공부할 때 어떤 여자의 대시를 거절한 것을 후회한다. 신우선, 김현수, 배명식 모두 유부남이지만 거리낌 없이 기생집에 드나든다. ‘부부간의 성’이라는 공식규범은 남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남성에게는 출구가 있다. 성 구매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무정>에 여주인공들의 성적 욕망에 대한 기술은 없다. 여성이 성에 관해 하는 고민은 오직 정조를 지키느냐 마느냐 뿐이고 기껏해야 선형이 형식의 외모를 맘에 들어 하지 않는 내용이 전부이다. 근대계몽기에 자유연애를 실천했던 나혜석은 ‘이혼고백서’에서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무정>의 주인공들은 이런 근대의 이중적인 성규범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부사이의 성만 공식적인 성으로 인정받게 되었지만 욕망을 법과 제도의 틀 안에 구겨 넣을 수는 없다. 하기에 통제되지 못한 욕망들을 배설할 공간이 필요하다. 20세기 들어 등장한 자본주의의 성산업은 이러한 욕망들을 모조리 흡수한다.
 
“그(신우선)는 아내라는 것은 대체 이러한 것이니 집에다 먹여두어 아이나 낳게 하고 이따금 가 보아주기나 하면 그만이라 한다. 세상에 기생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이 실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형식과 서로 대하면 이 문제로 흔히 다투었다. 형식은 엄정한 일부일부주의를 고집하고 우선은 첩을 얻든지 기생 외입을 하는 것은 결코 남자의 잘못하는 일이 아니라 한다. 과연 우선으로 보면 첩이나 기생이 아니고는 오랜 일생을 지낼 것 같지 아니하다.”
 
(이광수, 같은 책, 413쪽)
 
 
   형식이 고집하는 일부일처제는 기생이나 첩이 있어야 결혼제도가 유지될 것 같다는 신우선의 사고방식과 일견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형식이 원하는 혼전순결과 일부일처제는 거대한 성산업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근대 이전에 축첩제가 있었다면 이제 그 자리에 공창제가 들어섰다. 양지에서 성에 관한 노골적 표현은 금지되지만 음지에서는 성산업의 증식을 통해 성욕의 배설이 이루어진다. 성산업과 일부일처제는 서로를 든든하게 떠받쳐주고 있는 셈이다.
 
 
 
3. 국가를 위한, 자유 없는 자유연애
    형식과 선형은 약혼 전까지 개인교습에서 몇 차례, 그것도 순애와 함께 셋이서 만난 것이 전부다. 둘이서 따로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다. 김장로는 딸의 의사를 살피지 않고 형식과 선형의 약혼을 추진한다. 자유연애, 자유결혼이라고 하면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개인들이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의해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 떠오르는데, 사실 선형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느님 아버지와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가 정해주는 대로 따를 뿐이다. 아버지라는 가부장의 보호를 받던 선형이 또 다른 가부장인 형식에게 인도되는 것은 신부가 아버지 손을 붙잡고 들어가 남편의 손으로 옮겨 잡는 현대의 결혼 절차를 연상케 한다.
   선형의 마음을 확인할 길이 없어 답답해하던 형식은 약혼을 한 후, 처음으로 선형과 단 둘이서만 있게 된 자리에서 선형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자신은 선형을 사랑한다면서 선형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파혼할 수도 있다고 한다. 지아비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당위적인 말만 하며 대답을 머뭇거리던 선형은 결국엔 “예”라고 대답하고, 이 약혼은 서로가 동의한 약혼이 된다. 사실 이 대목에서 빵 터졌다. 자유연애, 자유결혼의 허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형식은 사랑의 신성함을 믿는다. “사랑이란 것을 인류의 모든 정신 작용 중에 가장 중하고 거룩한 것의 하나인 줄을 믿는다”. “사랑을 인생의 전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태도로 족히 인생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광수, 같은 책, 431쪽) 이렇듯 ‘낭만적 사랑’의 외피를 쓰고 있긴 하지만, 사실 형식은 선형이 가진 조건- 결혼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줄 집안의 딸이라는- 에 매료되어서 결혼을 받아들였다.
 
“자유연애나 자유결혼이 주창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철저히 이성적 통제 하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 결혼이 열정이 아니라 치밀한 관찰과 합리적 타산에 기초하는, 근대적 계약의 산물임을 압축적으로 제시해 준다. 그러니 이런 시스템 하에서 예기치 않은 만남, 격정적 이끌림, 그리고 파국 등으로 이어지는 낭만적 사랑이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런 식의 ‘자유연애, 자유결혼’은 여성의 탈성화를 더한층 강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고미숙, 같은 책, 44쪽)
 
 
    형식은 선형의 조건을 보고, 선형은 형식의 조건을 본 아버지의 강권으로, 둘은 약혼을 한다.
   선형과 함께 오른 미국 유학길에 형식은 기차 안에서 영채를 만난다. 그리고 다시 영채와 선형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다가 수재를 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연의 폭력” 앞에 힘없이 쓰러지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상황에서 형식은 선형, 영채, 병욱 모두에게 “같이 손을 끌고 길을 찾아가는 부모 잃은 누이” 같은 애틋한 마음을 갖는다. 구국의 신념은 삼각관계의 질투와 갈등을 일거에 해소해버리고 이들은 의기투합한다. 장장 400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이어온 삼각관계가 30페이지 만에 이렇게 정리되는 것을 보고 성과 욕망, 가족에 관한 담론들은 민족과 국가 속으로 순식간에 용해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오직 생식을 위한 성, 가족을 위한 성, 국가를 위한 성만이 있을 뿐이다. ‘욕망의 거세’를 통한 국민으로의 편입이라는 근대권력의 포획장치가 이런 방식일 터이다,”(고미숙, 같은 책, 43쪽)   
 
 
 
4. 근대 권력의 그물망 안에서 깨어있기
    2년 정도 쉼터에 사는 십대여성들과 친하게 지낼 기회가 있었다. 형식이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선형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대목에서 요즘 십대들의 연애방식이 떠올랐다. 표면적으로는 만남이 더 자유로워진 것 같은 시대에 십대들은 스마트폰 랜덤채팅이나 싸이월드 파도를 타서 연애상대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직접 만나보기도 전에 사귀기로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심지어는 만나보기도 전에 연애가 깨지기도 했다. 연애가 스펙이 되고 ‘모태솔로’가 희귀종으로 취급받는 ‘연애지상주의’ 시대에 연애가 진짜 삶과 만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결혼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언약이라면 반드시 어떠한 제도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키기 어려울수록 더 요란한 형식과 제도가 필요한 법이다. 불륜을 옹호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근대적 성담론의 형성 과정을 알고 나니, 내가 불륜에 대해 “결혼한 사람이 어떻게....?” 라고 핏대 세워 욕할수록 근대의 산물, 자본주의의 산물로서의 결혼제도는 한층 더 공고해져 갈 것 같다. 어쩌면 사람들이 불륜을 그토록 비난하는 건 “평생 행복한 부부”라는 미션이 실현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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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정>이 발표된 시기에 형성된 성담론은 현재까지도 겉모양과 색깔만 다양하게 바뀌어가며 우리의 일상에 퍼져 있다. 여전히 학생들에게 순결사탕을 나눠주는 중학교가 있고, 산부인과에서는 처녀막을 재생하는 수술을 홍보하고 있다. 일부일처제는 건재하다. 성산업은 더 노골적이 되어 TV를 틀면 걸그룹의 현란한 몸짓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난감하다. 업소가 아닌 곳에서 이루어지는 유사 성매매는 확대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나의 성적 실천이 근대권력에 얼마만큼, 어떻게 포획되어 있나, 늘 깨어 있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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