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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남편'에게 아내보다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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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12-20 13:20 조회7,43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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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남편’에게 아내보다 필요한 것
                                                                           

박 성 옥(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여기, 한 통의 편지로 운명이 바뀐 남자가 있다. 외모는 좀 딸려도 나름 돈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40대 중반의 사내다. 그는 사교계의 꽃처럼 아름답고 순종적인 아내와 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영원한 남편의 주인공 빠벨 빠블로비치 뚜루소스끼. 이만하면 사랑과 행복의 조건을 고루 갖추었다고 할 만한 그의 평탄했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갑자기 아내가 폐결핵에 걸려 죽은 것이다. 
  
문제는 죽은 아내의 서랍 속에서 발견한 편지였다. 그 편지는 아내가 9년 전 남편 몰래 불륜에 빠졌던 정부에게 보내려다 부치지 않은 것이다. 20년 함께 살아온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것도 놀라 자빠질 일인데 편지에는 지금까지 키워왔던 딸이 제 자식이 아니라 그 정부의 아이라는 비밀도 담겨 있었다. 빠벨에게는 아내의 죽음보다 편지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더 충격적이다. 자신이 알아왔고 믿어왔던, 교양 있고 현숙한 아내의 실체는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뜬구름이었던 것이다. ‘한 방에 훅 간다’는 표현이 이보다 적절한 순간이 있을까. 빠벨은 철저하게 상처 입었다. 이제 빠벨은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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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야기하는 많은 일 중에 하나.


 자신에게 속고, 자신을 속이는

사실 이 정도의 남녀상열지사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스토리다. 우리는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서 결혼한 부부가 빚어낼 수 있는 온갖 경우의 수를 볼만큼 봐왔다. 수백편의 드라마보다 현실에서는 더 많은 외도, 배신, 복수와 상처의 사연이 넘쳐난다. 성격 차이든 성적 차이든 불륜은 주위에서 보기 흔한 일상사다. 충격적인 분노, 우발적인 불행, 단 일분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회한, 좌절의 아픔은 예측불가의 가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 그 시간의 밀도가 다음 스텝을 결정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빠벨이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해나가는 지가 궁금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어떤 특별한 사건은 미래만 달라지게 하지 않는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재해석하게 만든다. 지나온 시간은 고정불변의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다. 하나의 계기로 인해 삶의 기억들은 전면 재수정된다. 빠벨은 지나온 기억을 재구성해야 하는 벼랑 끝에 직면했다. 과거의 재구성은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응시하는 일이다. 그제야 자기가 확고하게 믿어왔던 가치와 전제가 근거 없는 허공 위에 세워진 걸 알게 된다. 삶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은 바닥부터 다시 인식의 지반을 다지는 작업이다. 삶의 리모델링이 시작된다. 
  
빠벨은 편지의 주인공을 만나러 뻬쩨르부르그로 간다. 그는 거리에서 아내의 옛 정부 벨차니노프와 여러 차례 마주치지만 못 본 척 회피한다. 한밤중에 몰래 그의 집을 찾아가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다 돌아오기도 한다. 그는 과거의 실체와 직면하기 두렵다. 총을 가지고 가서 쏠 수도 없고 칼로 찌를 수도 없고 독약을 먹일 수도 없다. 그가 하는 소심한 복수란 어린 딸을 꼬집는 일이다. 그는 딸을 호텔방에 가둬두고 문을 잠그고 나와 술에 취하고 거리의 여자와 밤을 지새운다. 아무런 행동도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즉각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가? 니체에 따르면 그것은 도래하는 체험들을 상처에 따라 기억하기 때문이다. 원한의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모든 대상을 모욕으로 느낀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 원한의 인간은 외부의 자극을 내면에 프로그래밍된 ‘상처’를 따라서만 받아들이고 만다. 이것은 원한의 숨 막히는 반복이다. (강민혁, 자기배려의 인문학, 북드라망, 2014년, 195쪽)

상처와 원한에 따라 기억을 재구성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또 다른 상처가 된다.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으려면 먼저 상처를 청산해야 한다. 빠벨과 벨차니노프는 9년 전 아내와 셋이서 저녁독서모임을 같이 하던 절친한 사이였다. 빠벨은 자기 아내와 정분이 난 줄도 모르고 벨차니노프의 수려한 말솜씨와 교양을 존경했었다. 옛 연인의 남편이 찾아오자 벨차니노프는 완전범죄라고 생각했던 애정행각이 들통날까봐 불안하다. “대체 이 남편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내 딸이라는 것도 알고 있나? 알 수 없기에 불안하고, 불안하기에 지옥이다. 벨차니노프가 보기에 빠벨은 어리석은 ‘영원한 남편’의 전형이다. 그 말에는 조롱기가 담겨있다.

‘영원한 남편’이란 오직 장가를 들기 위해 태어난 남자다. 그런 남편 유형에게는 오직 불성실한 아내가 될 목적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이 방탕하고 관능적인 여인이 어울린다. 그러니 ‘영원한 남편’은 아내에게 배반당할 수밖에 없고, 아내가 배신한 사실도 결코 알 수가 없다. (도스또예프스끼, 영원한 남편, 정명자 역, 열린 책들, 2013년,54~55쪽 )

‘영원한 남편’이라는 말은 아이러니다. 영원한 남편이 되기 위해 혼전 성경험이 없는 순결한 아내를 얻은 댓가로 결혼 후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내를 참아내야 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아내의 배신을 알아차리는 순간 ‘영원한’ 이라는 수식어를 떼야 한다. 그래서 ‘영원한 남편’이 되고 싶은 빠벨의 눈에는 아내의 일탈이 보이질 않는다.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사람의 눈에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법이다. 대상은 우리의 생각과 감각이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우리는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믿었던 대상에게 속는다. 뒤집어 말하면 자기 자신에게 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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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자기에서 속는다. 
  
자신에게 속은 걸 깨닫는 인생의 고비를 만날 때 우리는 기이한 존재가 된다. 거울을 봐도 내가 나 같지가 않다. 지금까지 익숙하던 나의 정체성은 유지되지 않는다. 그 때 우리가 선택할 카드는 변신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유의지대로 살아보라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쉽게 다른 존재로 변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는 한가? 우리가 그렇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면 실패를 되풀이 할 리가 없다. 인간은 자유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는 욕망과 정념의 노예다. 그래서 우리는 똑 같은 실패를 거듭한다. 
  
인간이 겪는 또 하나의 어려움은 ‘내 마음 나도 몰라’이다. 사람은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지녀왔던 가치와 판단의 전제는 너무나 확고하게 신체화되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실체를 보려면 그 전제를 깨지 않으면 안 된다.

패턴을 반복하는 타자와의 관계

남편과 정부의 만남. 일촉즉발의 장면은 싱겁다. 한 판 격투를 벌이지도 않고, 복수의 칼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빠벨은 엉뚱하게도 벨차니노프 손에 키스를 하더니 자기에게 입맞춤을 해달라고 한다. 얼떨결에 두 남자는 키스한다. 이 무슨 어이없는 대반전인가. 결투 대신 격정씬이라니. 빠벨에게는 어설픈 용서로 과거를 덮어버리고 빨리 갈등과 타협하고 싶은 초조함이 엿보인다. 하지만 쉽게 덮어버린 과거는 다시 돌아온다. 빠벨이 택한 다음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빠벨은 ‘영원한 남편’에 재도전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청혼을 한 집에는 결혼적령기에 이른 과년한 딸들이 여덟 명이 있다. 하필 빠벨이 고른 신붓감은 여섯째 딸. 아직 책가방을 달랑거리고 다니는 열다섯 살 여학생이다. 어린 소녀는 순결하고 순진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빠벨은 소녀의 일탈 가능성을 엿볼 속셈으로 벨차니노프를 대동하고 그 집에 간다. 벨차니노프는 ‘우유에 피를 탄 것 같이’ 피부가 뽀얗고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세련된 말솜씨와 매너를 지녔다. 일찍이 빠벨의 아내를 휘어잡았던 검증된 실력이다. 벨차니노프 같이 매력적인 남자와 함께 있을 때 소녀가 흔들리는지 빠벨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 나는 소설에서 이 대목이 가장 마음 짠했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면 얼마나 먼 길을 가야 할까. 한 번 실패한 삶의 척도를 버리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게 인생이라면 우리는 언제 삶을 제대로 알게 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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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 된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물음을 생산하게 하는가.

결혼을 하려면 먼저 소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자기의 매력을 표현할 일이다. 하지만 빠벨은 소녀에게 다정하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겉으로만 빙빙 돈다. 가진 게 돈 뿐이라 팔찌선물을 내밀며 환심을 사려들지만 소녀의 반응은 싸늘하다. 괜히 데리고 간 벨차니노프만 아가씨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테스트는 망했다. 어린 소녀는 교활하고 영악하기 이를 데 없다. 부모 몰래 사귀는 애인도 있었다. 빠벨은 망신만 톡톡히 당하고 청혼은 취소된다. 그 날 밤 빠벨은 잠자던 벨차니노프의 손을 칼로 찌르고 떠난다.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자신의 잣대를 바꾸지 못하고 외부의 대상에게서 해결책을 찾을 때 해답은 없다. 평생 변치 않는 ‘영원한 남편’은 그가 만든 틀이며 고정관념이다. 그 틀을 완성시켜줄 ‘영원한 아내’라는 객관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이 만든 허상을 충족시켜 줄 대상이 있을 리가 없다. 세계는 내가 지각하고 체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어떤 것도 나와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내 눈에 허접하게 보이는 남자도 누군가의 눈에는 죽고 못사는 멋진 연인이다. 대상의 실체는 내가 타자와 어떻게 관계 맺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의 기억과 자신의 기대에 의해 만들어진 표상은 망상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우리는 다른 내가 된다.
  
다시 2년이 지난 후 그들은 우연히 시골 기차역에서 마주친다. 그 새 빠벨은 재혼을 했다. 이번에는 러시아정교회 사제의 딸이다. 15세 소녀를 신붓감으로 선택했던 잣대와 유사하다. 사제의 딸이니 정숙할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아내 또한 벨차니노프를 보자마자 푹 빠진다. 빠벨은 가여울 정도로 초조하다. 그는 ‘침대 밑에 아내의 정부가 숨어있나 수색하는 너무나 조심스러운 남편’이 되어 있다. 일행인 젊고 잘 생긴 청년장교가 그의 아내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한 눈에 빤히 보이는데 빠벨만 모르는 눈치다. 빠벨은 여전히 오쟁이 진 남편노릇을 하며 ‘영원한 남편’으로 산다. 그렇게 소설은 끝난다.
 
함께 이 소설을 읽었던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탄식했다. “인간 참 안 변한다.” “결혼은 답이 없구나.” 이건 정말 자신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본성의 문제인가,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의 문제인가. 나는 빠벨이 특별히 어리석은 남자의 표본이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도 그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영원한 남편, 영원한 아내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직 비밀편지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라면 말이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면서 영원히 자신만을 사랑해줄 상대를 찾아 헤매는 빠벨은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다. 인간본성의 한계도, 사회제도의 한계도 어쩔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태도뿐이다. 능동적인 태도만이 삶의 결을 바꾼다. 

능동적인 인간이란 부정적인 것들로 둘러싸여 있는 이 세계에서 그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경계 끝까지 가볼 줄 아는 자이다. 가치의 전환은 ‘끝까지 가볼 줄 아는 역량’에서 나온다. 이 벼랑 끝에서 나는 병든 자가 되고, 동시에 의사가 된다. (강민혁, 자기배려의 인문학,북드라망, 2014년, 205쪽)

자신의 척도가 틀렸음을 발견하는 지점이 벼랑 끝이다. 사람은 벼랑 끝에 서 봐야 에너지의 밀도가 커진다.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불끈 힘이 솟는다. 이래서 ‘아파야 산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 삶의 경계를 넘어서야 가치의 전환이 일어난다. 빠벨은 벼랑 끝까지 가기를 회피했다. 순결한 어린 소녀와 사제의 딸을 고르고 있는 자신의 욕망도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 진흙탕에서 구르는 인간의 추악함을 마음 속 심연까지 파헤치는 점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매력이다. 그의 소설에는 회개하고 반성하라는 계몽적 시선이 없다. 인간 스스로 극한의 추악함에서 구원을 찾아야지 신은 쉽사리 손을 뻗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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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의 전부다.


벼랑 끝에서 자신의 척도를 바꿔라

나의 경우 이 소설을 읽을 즈음 남편이 출가를 했다. 남편이 사서삼경과 불교에 심취해서 오래 공부해오긴 했지만 머리 깎고 스님이 될 줄은 몰랐다. 온 집안 식구가 깜짝 놀랐다. 시아버님은 눈물 짓고 형제들은 말문이 막혔다. 다들 내 눈치만 봤다.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해봐.” 하면서 남편의 출가를 지지했다. 황당해 하는 딸들에게는 “너희들은 이제 설총이 되는 거야. 나는 요석공주고....” 농을 쳤다. 졸지에 생과부가 되다니 미인박복이라더니 내가 이 정도로 미인이었나? 
 
남편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던 인도의 붓다가야에서 동안거에 들어갔다. 1년 출가코스라지만 진리의 길을 찾는 구도의 맛을 본 사람이 쉽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1년만 공부해볼까 생각하고 감이당에 왔던 나도 곧 3년차에 접어드니 말이다. 마누라는 감이당의 모토대로 ‘세속에서 출가하기’고 남편은 본격적으로 출가하는 거지 뭐.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혼자서 맞이하는 결혼 30주년 기념일은 쓸쓸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나도 빠벨이 아내의 진주자개 박힌 흑단함을 열었던 심정 같았다. 나도 ‘영원한 아내’가 될 수 있었는데 억울하게 먹물이 튄 것처럼 얼굴이 찌푸려졌다. 남들에게 남편의 출가를 말하기가 주저되고 부끄러웠다. 실패한 결혼처럼 보일까봐 그랬을까? 그랬을 거다. 동창생이 구도의 길을 간다고 하면 장하다고 격려하면서 내 남편만은 안 된다는 이중잣대를 내게서 발견했다. 나는 정상, 비정상을 나누는 가치기준부터 깨부숴야 하는 경계 끝에 섰다. 결혼에 성공이 어디 있고 실패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저 사람마다 저마다의 스타일대로 살아가는 형식에 불과한데. 그 다양성을 획일적인 틀에 넣으려 했던 전제는 얼마나 허술하던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외부의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안간힘은 또 얼마나 초라하던지. 
   
산전수전 시련을 많이 겪었다고 저절로 삶에 도통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벌써 철학자가 되었을 거다. 인간경험이란 ‘구조적이며 변형적인 과정을 일으키는 체험’이라고 했다.(프란시스코 바렐라,<몸의 인지과학>,김영사, 2013년, 419쪽) 구조적 변화가 있으려면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이 삶의 가치를 변화시킨다. 번뇌의 불구덩이에서 능동적으로 가치를 전환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자기배려의 힘이다. 이런 점에서 ‘영원한 남편’에게 필요한 것은 순결한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척도를 바꿀 수 있는 자기배려이다. 

자기배려는 자기 자신을 돌보기다. 푸코가 말하는 자기배려는 주체의 변형이다. 자기를 해체하고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는 실천이다. 그것은 너무나 전투적인 실천을 요구한다. 어줍잖은 힐링이나 자기계발로는 변신이 되지 않는다. (강민혁, 위의 책, 6쪽)

자기배려는 자기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이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과 전투를 해야 한다. 이 싸움은 회피할 수도 없고 타협할 수도 없다. 반드시 겪어내야 하는 싸움이다. 아프고 힘들다고 자신을 위로하는 달콤한 격려는 진정한 자기배려가 아니다. 그건 잠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카페인에 불과하다. 약발은 곧 떨어진다. 중독성이 있어서 은근히 의존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몸에 체화된 습관은 다시 돌아온다. 신세 한탄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끝없이 다른 사람을 선망하고 다른 이의 삶을 모방하려드는 무한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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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남편’이라는 잣대를 버릴 수 없었던 빠벨은 자신을 해체하는 과정을 건너뛰었기 때문에 그 쳇바퀴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기배려는 내가 가진 척도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틀린 척도를 고집하려는 자신과 끝장 싸움을 하고, 전혀 다른 자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자신을 고요하게 들여다보며 성찰하는 시간으로 자기배려를 시작하려 한다.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 끝에 삶의 지반을 바꾸는 날 만나게 될 나, 상상만 해도 설레고 궁금한 얼굴이다.


댓글목록

양파님의 댓글

양파 작성일

샘 덕분에 영원한 남편이 다시 보이고 저 자신이 다시 보여요. 감사합니다. ㅎㅎ

단지님의 댓글

단지 작성일

저도 열심히 공부하면 이렇게 잘 쓸 수 있는거죠?  너무 잘 읽었습니다.

필벽성옥님의 댓글

필벽성옥 댓글의 댓글 작성일

어휴 - -;;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