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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을 발휘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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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12-24 17:51 조회8,84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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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을 발휘하는 삶

박시연(감이당 대중지성 1학년)   


산대로 죽는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두목이 조르바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으면서 끝난다. 

유언이 끝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우리가(부인인 류바, 저, 이웃의 장정 몇 사람이) 달려가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열린책들, 443쪽

조르바는 죽음 너머 미지의 세계를 탐험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두발로 선채, 몸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 양기까지 털어내고 떠났다. 어떻게 평생 해본 것만 해보고 살 수 있겠냐며 새로운 일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던 조르바답다. 그는 새로운 일에 뛰어들듯이 죽음에 뛰어들었다. 오르탕스 부인도 삶을 대하던 자세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침대 위에서 부어오른 발을 움직이며 공포에 질린 입술을 실룩거리는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부인이 몸을 뒤척임에 따라 잠옷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반라의 식은땀으로 젖은 몸이 드러났다. 몸은 부어 있었고 이미 녹황색으로 변한 다음이었다. 여자는 목 잘리는 암탉처럼 귀청을 찢는 듯 한 소리로 신음을 토해 내고는 공포에 질린 눈을 그대로 뜬 채 뻣뻣하게 굳어졌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열린책들, 375쪽

오르탕스 부인은 오락가락한 정신이나마 의식이 돌아오면 "죽고 싶지 않아, 살려줘"라며 애원하더니 결국 공포에 질린 눈을 그대로 뜬 채 죽음을 맞았다. 태어난 것은 모두 죽는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생장수장하는 것은 천지만물의 이치다.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기에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삶과 다르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은 너무 애처롭다. 애처로운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그녀의 자세, 즉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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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대로 죽는다. 마치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삶도 죽음도 하나의 길 위에서 펼쳐진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이자 화자인 카잔차키스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니체, 호메로스, 베르그송, 조르바를 꼽는다. 그중에 단 한명을 삶의 길잡이로 선택하라면 주저하지 않고 조르바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삶의 길잡이란 무엇인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고, 그렇게 살아보도록 애쓰게 만드는 존재다. 그래서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배웠다. 조르바가 자신을 옭아매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토가 나올 때까지 처넣는 것이다. 버찌의 달콤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그 방법으로 벗어났다. 두목(카잔차키스)이 미쳐 있는 것은? 두목은 책으로 세상을 배운 사람이다. 크레타로 떠나올 때도 붓다의 원고를 수정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두목은 책으로 책을 정복하겠다고 했다. 질릴 때까지 책을 읽고 쓰겠다나. 

여기서 정말 궁금하다. 조르바와 두목, 혹은 카잔차키스가 만난 것처럼 오르탕스 부인도 조르바를 만났다. 그런데 왜 그녀는 조르바에게 배우지 못한 것일까? 열정적으로 몸을 섞었고, 조르바를 꽁꽁 묶어두려 결혼하자고 졸라대기까지 했으면서도 왜 그녀는 조르바의 열정을 배우기는커녕 발견하지도 못한 것일까. 그녀에게 조르바는 무슨 의미였을까.


숱한 경험에도 알지 못하는 여자, 부불리나

크레타 섬에 도착한 조르바 일행은 오르탕스 부인이 운영하고 있는 여인숙에 자리를 잡았다. 이유는 그녀가 과부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조르바는 오르탕스 부인을 보는 순간부터 대놓고 탐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급기야 부인은 ‘아름다운 파도의 요정이시여, 우리는 난파당했고 바다는 우리를 당신의 영토로 밀고 왔습니다. 세이렌이여’(56쪽)라며 식사를 함께 나누는 영광을 달라는 말에 홀딱 넘어갔다.

오글거리는 작업멘트에도 그녀는 ‘닳아빠진 노란 브레이드가 장식된, 낡았지만 아직은 빛나는 벨벳 드레스’를 입고 매력을 과시하며 나타났다. 준비된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던 그녀는 화려했던 과거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4대열강의 제독과 쾌락의 향연을 벌이던 시절부터 그들 모두에게 버림받음으로 네곱절의 과부가 되어 버린 기구한 사연까지 털어놓는다. 그녀는 울고 웃기를 반복한다. 그녀는 왜 울었을까? 이야기를 들어주는 조르바 일행과 술이 있는데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거의 기억을 안주 삼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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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너무 이완시켜요~~ 조심조심^^


술은 일시적이지만 몸을 이완시키고, 울체된 기운이 풀리게 한다.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답답하게 옥죄었던 것들에서 해방된 기분을 맛보게 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동의보감』에서는 술도 약으로 쓰인다. 가라앉은 기운을 끌어 올려주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 때문이다. 효과가 빠르고 좋은 만큼 중독성도 강하다. 그녀의 증상은 밥과 고기를 먹으면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과거이야기를 한 다음 눈물을 철철 흘리는 술주정을 반복하는 것. 그런 반복이 자신의 과거를 싸구려 술안주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에게 술이란 언제든 과거로 돌아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최면사의 레드썬과 같다. 술이 들어가는 순간 황홀했던 시절로 되돌아가서 하는 말은 신세한탄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를 어디에다 두고 떠나는 거죠? 나는 귀부인 생활과 샴페인과 로스트 치킨에 입맛이 들었는데. 나는 졸병들 경례받는 데 입맛이 들었어요. 그런데 한꺼번에 서방 넷을 잃고 곱빼기에 곱빼기 과부가 되다니! 각하며 제독님네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죠?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열린책들, 62쪽

급기야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한 번도 닿지 못했던 항구에 이번에는 기필코 닻을 내리겠다는 꿈을 꾸었다. 조르바에게서 평생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는 장례식비용으로 모아두었던 금을 녹여서 결혼반지까지 맞췄다. 아! 정말 못 말리는 부불리나여사의 주책이여.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남자의 세레나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조르바의 할머니처럼 여자는 정말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제독, 선원, 군인, 농부, 유랑 극단 단원, 목사, 신부, 경찰관, 교장 선생, 치안 판사들’ 등 젊은 시절 그녀가 숱한 남자들을 겪었으면서도 그녀가 꾸는 꿈이란 여전히 남자의 사랑, 그리고 결혼이었다. 부불리나는 네곱절의 과부가 된 현실을, 그녀의 무기였던 젊음과 미모는 스러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역설적인 건 ‘원대한 희망(결혼)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며 빛을 발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늙은 세이렌은 매력을 깡그리 상실’(304쪽)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두목이 감탄해 마지않던 그 매력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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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는 어쩌면 인간의 심장과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일까. 인생을 깡그리 써버리고 이 외로운 해안으로 유배된 퇴물 카바레 가수는 이제 이 초라한 방을 신성한 욕망과 여자의 따사로운 정으로 채우고 있지 않은가! 정성을 다하여 푸짐하게 보아 놓은 상, 따뜻한 화덕, 화장하고 꾸민 몸, 오렌지 꽃물 향기……. 이같이 사소한 육신의 즐거움이 어쩌면 이다지도 빨리, 그리고 간단하게 엄청난 정신의 즐거움으로 변하는 것일까. (중략) 나는 비로소, 나 혼자 해변에 남아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성적인 헌신과 정과 끈기를 갖춘 여자가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르탕스 부인은 내 어머니, 내 누이, 그리고 내 아내였다.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나는 갑자기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열린책들, 172쪽

부불리나는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참 없는 여자다. 여자로서 사랑을 갈구하지 않아도 그녀는 대지의 풍요로움을 갖춘 존재로서 빛난다는 것을 몰랐다. 젊은 시절 화려함은 사라졌지만 대신 식탁에 놓인 자기 몫의 접시에 기뻐할 줄 아는 소박함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엄청난 즐거움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두목이 그녀에게 발견한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갖지 못한 것,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하느라 자신의 풍요로움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숱한 남자들을 겪으면서도 쾌락만 탐닉하느라 남자도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조르바와의 만남도 결국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삶의 국면마다 ‘살아버리는’ 남자, 조르바

조르바의 여성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조르바를 만나는 순간에 여자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 그의 행동은 변태적인 구석이 있다. 여자들의 치모를 수집해서 베개 속으로 만들고 다닐 만큼. 그에게 여자란 ‘영원한 사업’이었다. 결혼 한번 못해본 불쌍한 여자들을 위해 제우스 결혼 중매소를 차릴 사업을 구상하기도 한다. 죽을 때까지 그 사업을 그만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영원한 사업을 통해 조르바가 깨달은 바는 이렇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그런데 여자라면……젠장, 눈이 빠지게 울고 싶어집니다요, 두목, 당신은 내가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고 놀리지요.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젖통만 쥐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손을 들어 버리는 이 가엾은 것들을 말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열린책들, 327쪽

처음에는 변태스럽고 허접한 호기심에서 시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자, 혹은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해 나갔다. 크레타 섬의 젊은 과부만 해도 그렇다. 쾌락을 얻으려고 했다면 자신이 젊은 과부를 차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르바는 두목에게 양보했다. 자신의 쾌락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젊은 과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젊은 과부가 마을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됐을 때 과부를 구하겠다고 달려들어 싸웠다. 조르바와의 싸움에서 밀려 망신을 당한 마놀라카스가 원한을 갚겠다며 자신을 찾아왔을 때 맞서 싸우지 않았다. 우리가 뭐라도 떠들고 싸워봤자 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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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는 딱히 어떤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힘들다. 변태인가 싶으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고 있고, 그래서 성자인가 싶으면 여자한테 홀딱 정신을 잃어서 남의 돈까지 홀랑 갖다 바치기도 했다. 사람과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는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조르바를 세 번씩이나 신드바드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르바가 ‘신드바드와 비슷한 유형’이라는 것은 자타가 인정했다. 신드바드처럼 그는 65년 동안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르를 살아버’렸다. 더 재미있는 건 그가 읽은 유일한 책도 ‘뱃사람 신드바드의 모험’이라는 것이다. 단 한권의 책을 읽은대로 ‘살아버릴’ 수 있는 남자, 조르바. 살아버렸다는 말은 나와 삶이 밀착되어 있다는 의미다. 수많은 여자를 만나고, 살인, 방화, 전쟁을 치루면서도 폭력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삶을 ‘살아버렸기’ 때문이다. 매순간 전력투구하는 신체, 그래서 그는 매 순간 다른 신체가 된다. 매순간 살아버렸기 때문에 그는 알았다. 전쟁을, 계집을, 술을, 산투르를. 


의지하는 신체 vs 살아버리는 신체

부불리나는 조르바를 단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단으로만 대했다. 그녀는 케이블을 사러 읍내에 간 조르바가 편지를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두목에게 달려간다. 부불리나의 간절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두목은 내용을 꾸며 들려주었다. 그녀는 환상 속을 헤매느라 두목이 자신의 집요한 질문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목의 입에서 거짓말이지만 듣고 싶은 말이 나오자 그녀는 ‘이미 남편을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아내가 되어 이것저것 주문을 하고 있었다. 부인은 갑자기 당당하게 결혼한, 유부녀가 된 것’(233쪽)처럼 행동했다. 

그녀가 결혼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겠다. 자신을 대신해서 고된 일을 해 주고,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책임져줄 대리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몸을 덜 쓰고도 편리하게 해줄 도구를 구입하는 심리와 비슷하다. 혹은 자신을 의탁할 대상을 찾는다는 점에서 신을 찾는 것과도 같다. 누군가가 끌고 가주기를 바라는 삶은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생명력이란 능동적인 신체성이다. 조르바에게 자신을 어필할 때 그녀는 ‘시시각각으로 젊어졌다. 얼굴의 주름살도 사라지기 시작했다.’(57쪽) 그뿐 아니다. 조르바와 두목 모두 ‘황홀한 기분’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혼의 꿈을 꾸게 되면서 ‘늙은 세이렌은 매력을 깡그리 상실’(305쪽)했다. 생명력을 상실하면서 급기야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르바는 어떤 상황에서도 맨몸으로 덤벼들고 맞섰다.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해결해 나가면서 그의 몸은 점점 힘을 발휘하고 조절할 수 있었다. 산투르를 배우고 나서부터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는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배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스승을 찾아 나섰고, 몸으로 습득하고 연마하는 과정을 거쳐서 산투르를 다룰 수 있게 됐을 때 큰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다. 산투르를 배우는 과정은 그에게 삶을 연마해 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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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한 걸음씩 싸워서 획득해야 했으며, 삶에 대한 우리의 심정과 
삶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신뢰가 의존하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니체, 『안티 크리스트』


살면서 시련은 피할 수 없다. 세상 어떤 물건으로도, 신의 가호로도 닥칠 일은 닥치고 겪을 일은 겪어야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고통도 삶의 필수조건이다. 그때 조르바는 인간이라면 이런 자세를 취해야하지 않겠냐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밤, 눈으로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는 굉장한 강풍이 일었지요. 내가 자고 있는 오두막을 뒤흔들며 뒤집어엎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작 이걸 비끄러매고 필요한 곳은 보강해 두었지요. 나는 불가에 홀로 앉아 웃으면서 바람의 약을 올렸어요. <이것 보게,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오두막에는 들어올 수 없어. 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겠어. 내 오두막을 엎어? 그렇게는 안 되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열린책들, 417쪽

죽음의 순간 부불리나는 침대 밑에 넣어두었던 흰 뼈로 만든 십자가를 꺼내들었다. ‘오, 예수님, 사랑하는 예수님’을 부르는 그녀의 얼굴은 ‘의외의 생기’가 떠올랐다. 물론 그녀는 마지막까지 의지할 대상을 찾은 것일까. 하지만 죽음의 순간은 누구나 홀로 맞이한다. 살면서 아무리 의지하고 싶어도 혼자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조르바가 한방울의 양기를 태우고 죽었듯이 그녀는 예수님에게 매력을 발산하면서 죽었다. 산대로 죽었다. 그래서 죽은 이후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조르바는 매순간을 살아냄으로 생명력을 키워나갔다. 사는 순간 앎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죽는 순간도 알았을 것이다. 아니 체험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그래서 역시 죽은 이후에도 삶은 계속될 것이다. 조르바와의 만남을 통해 다음 생에는 고통의 순간을 맨몸으로 통과하면서 생명력을 키워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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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님의 댓글

오후 작성일

시연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조르바와 부불리나는 이렇게 다른 신체를 구성하며 살았었군요. '산대로 죽는다'에서 '의지하는 신체 vs 살아버리는 신체'까지 오며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접고, "매 순간 살아내며 생명력을 키워"나가는 조르바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나가야겠다 싶습니다. 제목도 마음에 와닿고, 글도 다시 읽으니 더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