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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생존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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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4-12-27 20:21 조회5,82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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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생존 교과서다

김해숙(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삶은 묻는 게 아니라 듣는 것
 
예전에 신화를 읽을 때, 신화는 의문투성이요, 질문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하늘과 땅의 크기도 묻고, 세상의 시작과 끝도 묻는 게 신화였다. 창조신화는 세상에 대한 질문의 답이고, 영웅설화는 인간 존재에 대한 답이었다. 그건 아마도 ‘생소하고 이질적인 신화를 왜 읽어야 하지?’라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소수민족 신화기행을 읽으면서 약간 다른 시각으로 신화가 읽혀졌다. 어쩌면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생존법을 담아내고 있는 ‘텍스트’가 바로 신화 이야기가 아닐까란 생각. 그래서 이번 신화 읽기는 ‘생존 혹은 생명력’이란 키워드로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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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생명들의 오래된 미래

물론 이런 배경에는 현재 우리가 생존 혹은 생명력에 대해 약한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혹시 우리는 이 책에 나오는 사불상(四不像)처럼 되어 버린 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첸족의 학자 우야즈는 지금의 오로첸 사람들은 사불상(四不像)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사불상’이란 만주 지역의 원산지로 알려진 사슴인데, 이미 야생의 ‘사불상’은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동물원이나 수렵보호구역에서 자라는 ‘사불상’의 처지를 오로첸족의 현실에 빗대어 이야기 한 것이다.‘불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오로첸족이 ‘상인도 아니고(不像商人)’, ‘농민도 아니며(不像農人)’, ‘노동자도 아니고(不像工人),’ ‘유목민도 아닌(不像牧人)’, 즉 이 네 가지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 정체성이 모호한 ‘사불상’이라는 것이다. 

-김선자, 『중국 소수 민족 신화기행』 379쪽, 안티쿠스

아주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사불상은 동물원이나 수렵보호구역에서 자라고 있는, 야생성을 상실한 힘없는 존재다. 그렇듯 우리 현대인도 이렇게 생명력이 약한 존재인 건 아닐까? 현대인에게 신화가 필요한 것도 이 지점이 아닐까? 삶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을 듣는 힘을 길러내는 게 생명력이고, 세상은 그렇게 내 힘으로, 내 눈으로 보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몽골지방에서는 무서운 재앙을 ‘조드’라고 부른다. 삶에서 조드를 겪은 후에도 사람들이 다시 살아 갈 수 있는 건, 한 눈먼 소년이 들려주는 ‘신화이야기’의 힘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 몽골지방에 무서운 ‘조드’가 덮쳤다. 수천 명이 떼죽음을 당하는 돌림병이었다. 이 마을의 열다섯 살된 한 소년이 홀로 저승에 갔다. 염라대왕은 소년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제 발로 저승까지 혼자 온 게 신통하여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 때 염라대왕이 지상으로 무엇이든 가지고 가라고 했는데, 소년이 단 한 가지 선택한 것이 바로 ‘이야기’였다.
 
헌데 이 게 웬 일! 세상에 다시 온 소년이 자신의 몸을 찾았는데, 글쎄 두 눈이 까마귀에 파 먹혀버린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소년은 두 눈이 없는 제 몸뚱어리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몽골초원에서는 앞 못 보는 사내가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  많은 감동과 가르침을 받았다.

저는 사람들이 말하는 ‘들판의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의 말을 알아듣고, 땅을 기어 다니는 조그만 동물들의 흔적과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태양의 조그만 빛점들을 읽어 내지요. 저는 사방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과 실바람의 윙윙대는 소리,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제게는 이 모든 것이 말이고 징표니까요. 

-김남일, 방현석,『백 개의 아시아. 2』 아시아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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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없어서 오히려 앞날을 볼 수 있는 사람. ‘들판의 귀’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 바람이 가는 소리와 구름의 발자국으로 삶의 방향을 읽어낼 줄 아는 사람. 그래서 그는 많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었다. 헌데 이 눈먼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하늘에서 가지고 왔다. 신화를 가져왔다는 얘기다. 그래서 신화는 귀를 기울여야 들린단다. 그래야 삶의 ‘조드’를 읽어낼 수 있단다. 삶의 조드를 읽어내는 건 곧 생존력이다.
  
 

만족하면 넘쳐난다-전통 신화와 현대판 신화의 두 가지 생존법
 
 
여기 생존력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생태계의 윤리를 생활화하여 늘 넘쳐나게 풍요를 누렸던 사람들과 ‘개발 신화’에 취해 ‘녹색창고’를 황무지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오로첸 사람들은 사냥을 해서 먹고 살았지만 그들은 절대 먹을 만큼 이상의 사냥은 하지 않았다. 사냥에서 한 마리를 잡으면 더 이상 잡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끼를 밴 사슴도, 번식기의 동물도, 알을 품고 있는 날짐승도 잡지 않았다. 어미를 잃은 새끼가 있으면 데리고 와서 길러 어느 정도 자라면 숲으로 돌려보냈고, 숲속의 동물들이 너무 어리면 자랄 때까지 잡지 않았다. 날씨가 더울 때는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을 정도가 되지 않는 한 사냥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다싱안링과 샤오싱안링(小與安嶺) 산맥의 숲속에서 사냥을 하며 살았지만 절대 돈과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사냥하는 일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숲속의 생태환경이 보호되었고 사냥감은 언제나 넘쳐났다. 

-김선자, 『 중국 소수 민족 신화기행』 374쪽, 안티쿠스

도덕이나 환경 교과서에 나올 법한 내용이다. 조금 가슴이 뭉클하긴 하지만 너무 지당하신 말씀이라서 크게 재미도 없다. 재미없는 말은 상대방에게 쉽게 스며들지 못한다. 누군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살기란 정말 어렵다, 인간의 욕망의 속성을 잘 모르는 말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라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천신 언두리는 인간을 처음 만들 때 돌로 만들었다. 그런데 돌로 만든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았다. 그들이 숲속의 모든 생물들을 다 잡아먹어 마침내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직 인간만이 남게 되었다. 천신은 고민 끝에 돌로 만든 인간을 모두 없애고 동물의 뼈에 진흙을 붙여 다시 인간을 만들었다. 동물의 뼈와 진흙으로 만든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아봐야 100년이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인간 때문에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책 375쪽

오로첸 사람들은 바로 위와 같은 신화를 어렸을 때부터 귀 따갑게 들어왔다. 어떤 환경교과서가 이렇게 실감나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서술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그대로 철학교과서로 대치될 수도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도 이렇게 말한다. “신화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타산적이 되거나 여론을 의식하거나 하지 않고 인간에게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신화에서는 철학과 윤리가 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야생의 에티카’라 부르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힙니다.”(나카자와 신이치, 『신화 인류의 최고의 철학』, 동아시아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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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에티카, 인간과 자연 그것은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가


그렇다. 신화는 그렇게 고대 사람들에게 인간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한편 그건 생존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요, 전략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간의 기본 욕망인 이 생존력이 다르게 작동하면 어떻게 될까? 위 신화의 주인공 오로첸족은 만주 지역 사람들이다. 만주의 다싱안링과 샤오싱안링 산맥은 예로부터 거대한 원시 삼림 지역으로서, 그들 같은 수렵민족에게는 천혜의 ‘녹색 보물창고’였다. 그래서 청나라 때만 해도 한족의 만주 이주를 나라에서 금했다고 한다.
 
그런데 러시아 세력이 화장되어 남으로 내려오자 청나라 정부는 이주를 금하던 정책을 포기했다. 그때 만주의 ‘녹색 창고’로 들어온 외지인들은 ‘호수의 물고기’*를 함부로 잡고,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고, 동물들을 남획하기 시작했다. 특히 러시아와 일본의 침탈로 숲의 훼손은 가속화 되었고, 이 때 난개발의 현장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도시 하얼빈이다. 이어 1903년에 는 러시아와 중국을 잇는 등청(東淸) 철도가 개통되면서, 다른 대도시도 개발되고, 삼림 자원도 급속도로 대규모로 실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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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룬베이얼 초원을 대표하는 후룬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초원의 말들의 영혼이 물고기로 변해 후룬호에 산다는 믿음 때문에 물고기를 잡지 않았는데,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홀룬 호수의 물고리를 마구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1950년대만 해도 다싱링안 산맥의 원시 삼림은 아직 울창했다. 이 울창한 숲을 파괴당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신화가 탄생된다. 1958년 이후 중국 정부는 ‘베이다황(北大荒)’ 정책을 세워 수많은 지식 청년들을 이곳으로 운집하게 하곤 황무지 개발을 시켰다. 특히 1966년-76년까지의 문화혁명 시기에 더욱 심했다.
 

이곳은 지금 베이다황그룹*의 휘하에 들어가 있는데, 지금 이 지역에서는 옛 문화혁명 시기의 황무지개간 정신을 다시금 되살리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단다. 개발에 대한 향수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대판 신화의 현장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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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1일자 신문에 우리나라의 CJ와 중국 베이다황그룹이 곡물가공합자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베이다황 그룹은 헤이를장성을 기반으로 한 곡물재배전문기업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의 곡물생산기업이다.

거친 대자연 속에서 황량한 땅을 개간하여 옥수수와 콩 등을 재배하는 드넓은 농지로 만든 그들의 노력은 눈물겨웠으나 그것은 엄청난 생태환경 파괴를 가져왔다. 1958년만 해도 3,000명의 관리와 군인들을 보내 완다산 삼림지역에서 10만 세제곱미터에 달하는 지역의 나무를 모두 베어 베이징 시내의 인민대회당을 비롯한 유명한 건축물을 만드는 데 제공했다. 이후 이 지역을 과도하게 개발하면서 수많은 습지와 숲이 사라졌다. 숲과 습지에 살던 동물과 새들이 살 곳을 잃었음은 물론 가뭄과 홍수도 잦아졌다. 마침내 ‘베이다황’은 ‘베이다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될 정도로 중국 곡물 생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8년의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홍수를 겪은 후 1999년 중국 정부는 베이다황의 개간을 전면적으로 중지하고 산림과 습지를 되살리겠다고 발표했다.

-김선자, 『 중국 소수 민족 신화기행』 378쪽, 안티쿠스

근대 이전 ‘녹색 창고’였던 신화의 현장이 ‘개발신화’로 인해 어떻게 황무지로 변했는지 아주 좋은 대비가 된다.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천신 언두리가 ‘돌로 만든 인간’을 다시 해체하여 ‘아무리 오래 살아봐야 100년이면 죽는 인간’으로 만들었던 신화의 그 깊은 뜻을 철저히 외면한 대가를 그대로 받고 있는 현대판 신화의 현장이다. 더 우스운 얘기도 있다. 1996년 1월 23일 오로첸자치기 인민 정부에서는 오로첸족의 사냥을 전면적으로 금지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이른바 야생동물보호란 명목으로. 우습다. 앞서 살펴보았듯 이 다싱안산맥의 삼림을 파괴한 것은 외지 사람들이었는데. 또한 오로첸족의 숲에 대한 윤리는 이들의 신화에 이미 고스란히 담겨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렇듯 신화의 윤리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남는 건 다다익선의 경제 논리뿐이다. 다다익선은 약육강식과도 통한다. 약육강식은 다분히 남성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화 속에서 물씬물씬 넘쳐나는 여성성에 주목 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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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생명력이 있어야 여자지!


조로마마는 어려서부터 호랑이처럼 용맹스러웠고 고운 옷은 걸칠 생각도 안했다.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는 등 무예가 출중했던 조로마마는 사냥 솜씨도 뛰어났으나 사슴만은 절대 잡지 않았다. 사슴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유별났다. 그런데 서북쪽에 살면서 사슴 사냥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몰려와 조로마마 부락의 사슴들을 모두 사냥해갔다. 마을사람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본 조로마마는 18개의 강을 건너고, 99개의 산을 넘어 백두산의 산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술을 연마한 후 마을로 돌아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사냥꾼들과 싸워 이겼다.
 -같은 책, 321쪽

위 신화에서 조로마마의 두 가지 덕목이 돋보인다. 첫째, 고운 옷은 걸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둘째, 난관에 봉착했을 때 공부를 연마함으로써 헤쳐 나간다! 고운 옷을 입는 게 여자! 얼굴 예쁘고 마음씨 고운 여성에 대한 표상이 없다. 또 누구에게 기대지 않는다. 밝음이란 이미지는 이런 당당함에서 풍겨 나오게 마련이다. 결국 여성다움이란 외모에 상관없이 내면의 힘인 지혜에 달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싱싱한 지혜. 생명력이 넘실대는 내면의 힘, 같은 것 말이다. 
 
만주족 여신의 이름에는 ‘마마’라는 호칭이 자주 붙는다. 어머니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소리’로 불리는 것 같다. 마마, 엄마, 마미 등등. 이들 낱말에서도 여성의 생명력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토마티는 우주의 근원적인 소리라고 하는 인도의 ‘옴Om’ 소리가 오른쪽 귀에 들리는 뼈의 진동 소리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아이가 처음 배우는 소리는 ‘엄마’이다. 이 엄마의 ‘엄’은 인도의 ‘옴’과 같은 근원을 가진 소리이다. 모두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리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를 통해서 어머니의 존재를 인식한다. 바로 엄마의 ‘엄’이 그런 소리다. 따라서 어머니가 직접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야말로 태아의 발육이나 정서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서정록, 『잃어버린 지혜 듣기』  55쪽, 샘터

결국 ‘엄마’라는 말은 여성의 근원적 힘인 생명력을 듬뿍 가지고 있는 단어다. 만주지역에서  이 ‘마마’는 ‘차가움과 어두움’을 표상하는 남신에 대비돼서 ‘따뜻한 햇볕과 환한 빛’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낱말이다. 추운 지역에서 따뜻함이란 세상 최고의 위대함이자, 세상 최고의 생명력일 것이다. 실제로 만주족의 신화에서 따뜻함과 빛은 선함이나 정의와 동일시되고, 차가움과 어둠은 악함이나 불의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 소수민족 신화에서는 모든 게 이렇게 이분법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만주족 신화의 악의 상징인 예루리는 완전한 남신이 아니다. 바나무허허의 잠을 깨우던 오친 여신은 화가 난 바나무허허가 던진 돌에 맞아 남자 생식기가 생기는 바람에 졸지에 남신의 성격까지 갖게 되었다. 원래 여신이었던 오친이 양성을 가지게 되면서 무서운 예루리가 되었으므로 예루리는 여신의 속성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친이 양성적 존재라는 것은 남성과 여성,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아부카허허가 예루리를 쫒아내고 얻은 평화는 남신인 아부카언두리에 의해 무너지고, 세상은 다시 악과 어둠으로 가득 찼다. 
-같은 책,323쪽

세상을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이렇게 이분법으로만 보지는 않았던 만주족들. 만약 그들에게 이분법이 있었다면 아마도 생명력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었을까. 다른 건 다 용서해도 생존에 방해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차원의 생명력. 이 게 진짜 여성의 힘이요 어머니의 힘 아닐까.   
 
에로스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다. 거기에는 아무 방향도, 목표도 없다. 어디로 튈지, 무엇과 접속할지 아무도 예측 못한다.....사람이든 관계든 어떤 것과도 강렬하게 접속할 수 있는 생명력...

-고미숙, 『몸과인문학』 75쪽, 북드라망

생명력이란 이렇듯 무엇과 만나든 존재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낳는 것. 이게 창조다. 창조성이란 이렇게 어떤 조건에서든 생명을 낳고 기르는 여성성과 거의 같은 말이다. 신화 속 여신들이 창조의 화신으로 읽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리라. 이 점이 지금 우리 시대의 여성성과는 사뭇 다른 점이다. 지금 우리는 에로스를 생명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다만 좋은 상품으로서만 나의 여성성을 부각시켜, 좋은 상품으로서의 남성성과 맞교환하려는 얄팍함만이 횡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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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전사 그리고 야생. 그것은 생명의 지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생존 전략이 필요해진다. 여성성에서 창조성은 나온다는 건 이미 얘기했다. 헌데 창조성은 어떻게 생겨나는 거지? 생명력은 어떻게 기르지? 예로부터 존재가 바뀌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으니, 창조성과 지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게 아닐까?


지성은 생존의 전략이다. ‘책을 입에 물어라’

 
아득한 옛날, 하나족 조상들이 원래 살던 곳에서 노마아메로 이주해 올 때였다......비가 많이 내려 강물의 수위가 높아져 있었고, 물살이 무척 거셌다. 사람과 가축 모두는 무사히 강을 건넜으나 문제는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온 문자가 적힌 책이었다. 그 때 문자가 적힌 책을 들고 오던 베이마가 그것을 품에 안고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강물의 신들이 그 책을 빼앗으려고 했다. 첫 번째 강물의 신......두 번째 강물의 신...... 무시무시한 파도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세 번째 강물의 신을 본 베이마는 더럭 겁이 났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지도자가 급하게 소리쳤다. “책을 입에 물어라”......베이마는 지도자의 말대로 책을 입에 물고 강물의 신과 온 힘을 싸웠다. 그러나 강물의 신은 너무 강했다. 마침내 강물의 신이 책을 빼앗으려는 순간 베이마는 책을 꿀꺽 삼켜버렸다......결국 베이마는 물을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책은 뱃속에서 다 녹아버렸다.

-김선자, 『 중국 소수 민족 신화기행』 227쪽, 안티쿠스

비유가 좀 거시기 하지만 언젠가 친정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주부로만 살던 내가 당시로선 거금의 수강료 때문에 강좌 신청을 할까말까 고민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얘야, 돈 쌓아놓은 건 도둑도 빼앗아 갈 수 있지만, 공부는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하느니라.” 결국 그 강좌로 인해 평생교육의 장에 들어서서, 힘든 시기에 밥도 벌었고, 지금까지 공부도 하고 있으니 공부의 힘이 세긴 세다.  
 
헌데 지금 내겐 강물의 신이 자꾸만 자본주의로 형상화해서 보인다.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시대에 따라 강물의 신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 될 것이다. 하지만 험한 세파 혹은 인간 존재로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어떤 운명 또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 신화는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존재가 확 뒤집히고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그 최후까지 인간은 결코 지성을 포기할 순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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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그것 자체가 혁명이다
 
고미숙 선생님도 말한다. “철학을 ‘필로소피아’라고 한다. 소피아는 지혜, 필로스는 사랑이다. 곧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태초부터 인간은 지혜를 사랑한 종족이고, 그 지혜를 얻기 위해 참으로 고단한 행보를 해왔다는 걸 위와 같은 신화가 말해주고 있다. 지혜를 향한 인간의 욕망 또한 대단하다. 그건 지혜에는 그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생존의 조건에 지혜가 한 몫 단단히 한다는 얘기다.
하니족의 문자가 적힌 책은 물에 녹아 사라져버려 그들은 더 이상 문자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베이마는 그 책을 삼킨 덕분에 그 글의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예전보다 더 지혜로워지고 지식이 풍부해진 베이마는 하늘과 땅의 모든 일을 훤히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베이마는 자신의 풍부한 지식을 하니족 사람들에게 전하여, 끝없는 지혜로 사람들을 더욱 똑똑하게 만들었다.
 -같은 책, 228쪽

아, 이래서 신화가 인류 최고(最古)의 고전이 되는 것이구나! 문자보다 더 강한 게 신화란 이야기였구나! ‘책을 삼킨’ 후, 지식이 신체화 되어버린 게 곧 신화였구나! 그렇다. 글의 내용을 ‘신체화’시켜야만 ‘하늘과 땅과 여기의 모든 일’과 ‘어제와 내일과 지금’을 깊고 넓게 조망할 수 있는 거였다. 그래서 신화는 읽는 게 아니고, 몸으로 외워서 전해주는 거였다. 생존력은 그렇게 해서 익혀지는 거였다.



댓글목록

삐돌이님의 댓글

삐돌이 작성일

잘 듣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