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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피부(The Skin I Live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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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1-01 01:22 조회7,88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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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피부(The Skin I Live In)

김재영(감이당 대중지성 2학년)

몸에 갇힌 사람들

몸에 대한 불안은 현대의 새로운 전염병이다. 다이어트, 식품, 스타일, 미용성형, 제약, 미디어 등 다양한 산업들이 몸에 대한 불안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몸을 관리하고 통제해야 하는 것으로 대상화시킨다. 성형중독, 식이장애, 비만 등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질병과 늙어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역시 만연해있다.

처음 몸에 대한 자의식을 느낀 것은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발레리나를 보면서 아름다운 몸을 욕망했을 때였다. 초등학교 3학년 여자아이는 '내 몸의 결함 때문에 발레리나가 될 수 없어 슬프다'고 일기에 썼다. 짧은 다리를 몸의 결함으로 인지한 것이다 (백조의 호수가 아니라 산해경을 보았어야 했다). 몸은 내게 결함이라는 이미지로 먼저 다가왔고, 머리보다 떨어지는 부족한 부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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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산해경을 보았어야 했다...


갑오년을 단식이라는 몸에 대한 실험으로 시작했다. 몸을 가벼이 하여 명상 수련시의 통증을 피해보고 싶은 욕심, 술탐과 식탐을 조절하고 싶다는 생각, 좀 더 옷태가 나는 몸을 갖고 싶다는 욕망까지, 이런 내재된 욕망들이 있었다. 단식 후 몸이 가벼워지고, 지병이었던 아토피가 좋아진 것은 잠시, 단식후 부작용으로 체중이 급증하며 역류성 식도염이 생겼다. 불어난 몸무게를 되돌리고 하안거 명상수련 준비를 위해 6개월 후 재단식을 했다. 그런데 첫 단식 때와는 반응이 달랐다. 예상보다 체중이 너무 줄면서 체력이 급저하되더니 아토피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토피와의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토피 탐색 (Quest)

아기 때부터 아토피를 앓아왔다. 먹고 바르고, 온갖 민간요법을 안 써본 것이 없다. 아토피가 지금처럼 흔한 질환이 아닌 70년대 후반, 엄마 손에 이끌려 학교 가는 대신 전국의 명의들을 찾아다녔다. 겪을 만큼 겪었고 다 안다고 생각했다. 지인들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문제 삼지 않을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를 처방해주면서 말하곤 했다. “알아서 먹어.” 그렇게 알아서 관리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이 먹히지 않았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327쪽, 느린걸음 ‘나 거기 서있다’ 중
.

일상의 중심이 피부가 되었다. 진드기 퇴치를 위해 서울 대구 양쪽 집에 세스코 케어를 받았다. 속옷은 순면으로, 침구는 알레르망으로 바꿨다. 습진 치료용으로 제작된 특수실크제품들을 외국에서 주문했다. 어느 날 붉은 발진이 온 몸에 돋기 시작했다. 뭐지 싶었으나 아토피의 변종이려니 했다. 보다 못한 남편이 나를 끌고 병원으로 갔다. 장미색 비강진이라고 했다. 바이러스 감염설도 있으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병이다. 피부의 감기라고 말하는 의사도 있지만 나는 그 말에 분노했다. 비강진은 감기처럼 가벼운 병도 아니고 질병으로서의 진행과정도 다르다. 가려움으로 죽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몹시 괴로운 병증이다. 밤이 되면 다가올 가려움의 고통으로 잠자리에 들기가 두려웠다. 자다 깨보면 긁고 있다. 멈추어야 하는데 멈출 수가 없다. 정신을 차린 후 지그재그 손톱자국과 함께 벌겋게 부어오른 피부를 보면 자아가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었다. 남편을 잡고 울기도 했다. 피부가 극도로 민감해져 160수 면조차도 사포로 미는 듯 따가웠다. 앉기도 눕기도 괴로워 서서 책을 읽었다. 가려움 발작이 한 번씩 지나가고 나면 지쳐서 널브러졌다. 일상이 점점 피폐해졌다.

가려움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기존에 먹고 바르던 약이나 연고의 효용에 의문이 생겼다.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효과 없어 보이는) 스테로이드를 사용하느니, 양약을 끊고 자연치료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때로는 너무 무식하게 버티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다른 대안도 없었다. 섭생을 엄격하게 조절하면서 몸의 반응을 관찰해나갔다. 술은 혈열하여 몸을 뜨겁게 하니 가려움이 심해졌다. 육 고기는 가장 반응이 큰 음식으로 벌겋게 발진이 우수수 배 부위에 돋았다. 요거트, 치즈 등의 유제품도 비슷한 발진을, 밀가루는 등배 부위에 좁쌀 같은 두드러기를 유발했다. 김밥속의 계란, 어묵, 단무지 등도 먹고나면 가려웠다. 육류, 유제품, 밀가루, 생선회, 공장을 거쳐 나온 모든 가공식품, 술, 고춧가루, 매운 음식. 여기에 히스타민 함유량이 많은 토마토나, 피부 염증을 촉발하는 감자나 가지 과의 채소들, 온열한 사과와 견과류까지 제한해야 했다. 베이킹은 글루텐 프리나 쌀 베이킹으로, 간장 된장 등도 모두 글루텐 프리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별 차도가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도대체 내 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피부에 대해서, 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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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의 어원은 atopos, 영어로는 out of place, odd, eccentric 등 이상하다는 뜻이다. 어떤 원인으로 면역이 항진되어 과도하게 자기방어를 하는 상태다. 아토피 환자의 경우 표피에 존재하는 말초신경의 수가 일반인보다 많다고도 하고, 수분을 함유할 수 있는 표피의 세포막 방어기전에 결함이 있다고도 하지만, 원인이나 기전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가려움의 기전 역시 두드러기(Ig E 증가)를 제외하고는 모른다. 아토피를 비롯하여 다양한 피부과 질환이 있지만 양의학에서의 치료는 대개 같다. 증상 치료(가려움)를 위한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 또는 면역억제제 사용이다. 한의학에서는 아토피를 소장질환으로 본다. 어떤 원인으로 인해 소장 점막이 손상되고, 손상된 점막을 통해 혈류로 투과된 음식의 단백질이나 지방을 면역계가 공격하는 것이다.(1) 양의학에서도 아토피의 원인을 장 누수 증후군(leak gut syndrome)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많은 임상의들이 경험적으로 환자들에게 유산균을 먹으라고 권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으로 추측된다. 한의학에서 아토피의 가려움을 병리증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신선했다. 체표 열독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려는 과정에서 가려움은 피부를 긁게 하여 혈맥에 울체된 열기를 빼내려는 자연반응(2)이라는 거다. 따라서 가려움을 완전히 차단하면 오히려 치유에 역행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쾌락은 하나의 감정이 몸을 지배하는 것으로 이때 몸의 다른 기관들은 소외된다고 스피노자는 말했다던데,(3) 맛의 쾌락을 탐닉하는 동안 소외되었던 몸의 다른 기관들이 피부를 통해서 아우성치는 것이 가려움일지도 모른다. 

몸은 '온갖 이질적인 존재들이 득실거리는 타자들의 공동체'(4)이다. 흔히 면역계는 몸을 지키는 방어전선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몸이 다른 것들과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5)이기도 하다. 아토피는 면역체계가 몸을 공격하는 것이니 불필요한 싸움으로 기운을 빼 내 몸 안의 타자들이 조화롭게 살기 어렵게 만든다. 타자를 받아들이기에는 내 안의 면역계가 너무 민감하게 이질적인 것들을 배척하는 것이다. 피부는 유기체에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이다. 아토피는 이 경계가 더욱 강화됨으로써 나타나는 증상이다. ‘경계가 없는 것이 道’라는데 아토피환자들은 道에 이르기까지의 물리적인 장애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예민해진 신체는 조금이나마 편안했던 대상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고, 여행을 떠나기 힘들어진다. '이질적인 것들을 배척하는 신체, 환경과의 능동적인 접속이 불가능한 신체, 다른 것으로 변이하기를 거부하는 신체'(6)가 되어버린다.


몸의 시계는 천천히 간다

아픈 사람들에게 의료가 제공하는 지배적 서사는 다시 이전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복원(restitution)의 서사다. 삶의 재생을 위해 고대인들은 무당으로 하여금 창조신화를 낭송하게 하는 기원의 신화적 시간을 재현하는 의례를 지냈다.(7) 아픈 사람에게 ‘본래 그대로의 에너지 총체를 가지고 삶을 다시 시작하게’(8) 하는 것이다. 그러나 탐색(quest)의 시각에서 보면 질병의 경험은 일종의 여행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여행을 위해서는 우리가 잊어버린, 다른 시계가 필요하다는 것. 몸의 회복력을 믿고 자연치유를 하려면 몸의 리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외부 자극에 대해 몸이 반응을 보여주기까지의 시간은 (생각보다) 너무 느리거나 예측과 다를 때가 많다. 몸의 시계는 천천히 간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일상을 잠식하면서 사람들은 그 속도감에 익숙해져 있다. 손가락 터치 한 번에 화면이 바뀌기를 기대하고, 클릭 한번으로 데스크탑에서 원하던 결과를 보지 못하면 답답해한다. 이메일과 인터넷을 통한 소통은 즉각적이고 시간 지연이 거의 없다. 반면에 아토피를 비롯한 만성병들은 대부분 타고난 기운을 소진시키면서 진행되고, 그만큼 오래 치료해야 한다. 욕심이 과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빨리 치료해도 빠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법이다. 물론 기대를 내려놓기는 쉽지 않다. 나아질 거야 하는 기대가, 나아져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고통을 더한다.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려움은 가려움일 뿐이고, 내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때 고통이 된다. 그동안 가장 답답(frustrating)했던 때는 내가 고통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클 때,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그리고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였다. 가려움의 원인을 알고 (비강진), 통제할 수 있게 되며(대증요법들), 언젠가는 낫겠지(2달에서 5달이라더라) 생각하게 되면서 내가 느끼는 고통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고통에는 시간적 차원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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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고통을 준다. 고통에 대한 그 동안의 나의 태도는 단순했다: 고통 없이 살기. 고통을 상상하기 두려워했고, 고통스러울 그 순간을 없애기 위해서 미리 두통약과 해열제를 먹었다. 명상수련 전의 단식도 오래 앉아있을 때의 고통을 경감시키고자 함이었다. 가려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가려울  듯 싶으면 아무 생각없이 항히스타민제를 먹어왔다. 가려움은 몸 안에서 염증반응이나 어떤 자극으로 인해 히스타민이 증가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항히스타민제는 체내의 히스타민 수용체와 결합하거나 히스타민 분비를 억제한다. 몸 안에서 어떤 기전으로 인해 히스타민이 방출되었는데, 약으로 히스타민 수용체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가려움은 나타나지 않지만,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겉으로 보이는 증상만을 억누른 상태에서 아토피를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극복이 아니라 무시였고 억압이었다. 질병은 나와 무관하거나, 설령 오더라도 지나가면 끝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올해 가려움 발작을 몇 개월 겪다보니, 이건 단순히 없애야 할 괴로움이 아니라, 몸이 겪어야만 하는 과정인가보다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길 리가 없다 ㅠㅠ). 가려움은 비정상적 상태가 아니라 내 몸이 살아내는 생의 한 과정이었다.


아파서 비로소 ‘보게’된 것들

그만큼 나는 무지했고 또 게을렀다. 무지와 게으름은 환상의 커플이다. 그러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일단 생득적 기운으로 대충 살 만했기 때문이다. 살 만하다,는 게 늘 문제다. 계급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웬만큼 살 만 하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게으른가를 정직하게 볼 기회를 놓쳐버린다. 그래서 아파야 한다. 아파야 비로소 '보게' 된다.

-고미숙,『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5쪽, 그린비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몸을 보게 되었다. 몸의 회복력을 경험하고 나니 몸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질병과 고통에 대해 무조건 회피하고 억누르려 했다면 이제는 일단 겪어보자 생각한다. 가려워서 약을 먹을까 싶다가도, 먹지 않은 다음날 아침, 전날과는 다른 몸을 느낄 때가 좋다. 겪는 고통만큼 몸이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항히스타민제는 졸림과 멍함이 대표적인 부작용인데, 약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몸의 변화에 좀 더 민감해졌다. 몸의 감각이 좀 더 열리고, 가렵지 않은 상태와 가려운 상태사이에 질적으로 다른 많은 양상들이 배치된다. 능동적인 치유에 대한 경험은, 내 안의 생명력과 자기 치유 본능을 확인하는 것과 함께 몸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내려놓게 했다.
  
머리 따로 몸 따로, 몸 따로 욕망 따로였던 생활을 본다. 욕심으로 시작된 단식, 단식으로 인한 체력저하와 음혈부족에 따른 아토피의 악화, 스트레스로 인한 비강진 감염, 치료과정에서의 조급함. 돌아보니 올 한 해 내 몸은 겪어야 할 일을 겪었을 뿐이구나 싶다. 가렵지 않고 신경과민(irritable)하지 않은, 아무 일없는 평온한 일상이 감사하다. 아무 맛없는 물처럼 밋밋하고 심심하게 사는 게 좋다(9)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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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질병을 고친다는 건 곧 일상을 재구성하는 것이다.(중략) 거꾸로 생각하면, 병이란 바로 환자의 생활과 습관, 정서적 활동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질병이란 몸이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에 해당하는 셈이다. 생각을 고쳐먹으라는 혹은 일상과 관계를 다르게 구성하라는. 그런 점에서 질병과 몸은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삶을 다르게 살도록 추동해주는 스승이요, 친구인 것이다.'

-고미숙, 위생의 시대, 171쪽, 2013
 
'병이 낫는다는 건 "원상태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출현"(10)이다. 술을 끊어야 하는데 달달이를 끊어야 하는데 하던 생각은 모두 사치스러운 고민이었다. 먹으면 아프니 고민이 필요 없었다. 결심이나 다짐없이 그냥! 술과 밀가루를 끊고 비건(vegan)이 되었다. 이제는 감각이 예민해져 고기 누린내가 역하고 생선의 비릿함과 질감이 낯설다. 잎채소들의 서로 다른 향긋함과 뿌리채소들의 미묘한 단맛을 느낄 수 있는 건 좋다. 그러나 아직은 변화(transformation)하는 중이다. 아픈 게 조금 나아지니 기존의 습이 자꾸 새로운 몸과 충돌한다. 일상의 재구성, 새로운 질서 역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면서) 생각하는 대로 (욕망에 끌려) 사는 것 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는 (욕망과 신체사이에 간극이 없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질병은 삶의 부작용이 아니라 본질이다. ‘욕망과 신체 ‘사이’, 나아가 욕망과 생존 사이에 간극이 없게 되기’(11)를 바란다.

달마시안처럼 얼룩덜룩한 거울 속의 몸이 낯설다. 몸은 인생이 체현되어 가는 과정이다. ‘몸은 시선의 변화가 있어날 때마다 새롭게 탄생한다’(12). 나는 다른 몸이 되었는가? 고통을 계기로 한 존재의 형질전환 중에 있다고, 존재의 탈영토화를 향한 한 걸음을 딛고 있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가려움의 변주가 나의 삶이다. 가렵지 않은 날을 기대하지 말자. 날마다 조금씩 다른 몸의 이야기, 아토피와 함께 담담하게 살아간다. 


[참고 문헌 및 출처]

(1) <건강해지는 9가지 방법:한의사 손영기의 음혈론> (손영기, 이담북스, 2011) 

(2)<먹지마 건강법>(손영기, 북라인 2001, 229쪽)

(3)<구운몽 강의록> (고미숙)
(4)<위생의 시대> (고미숙, 북드라망 2013, 7쪽)
(5)<몸의 길, 몸의 노래(경락 강의록)> (류시성)
(6)<위생의 시대> (고미숙, 북드라망, 2013, 53쪽)
(7)<성과 속> (엘리아데, 한길사, 1998, 98쪽)
(8)<성과 속> (엘리아데, 한길사, 1998, 115쪽)
(9) 정화스님 말씀
(10)<건강은 없다: 복잡성의 진화의학> (강신익, 휴머니스트, 2008, 19쪽, 동의보감 고미숙 132쪽에서 재인용.)
(11)<길 위의 인문학> (고미숙, 북드라망, 2014, 215쪽)
(12)<몸의 길, 몸의 노래>(경락 강의록, 류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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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님의 댓글

오후 작성일

재영샘, 잘 읽었습니다. 에세이 발표 시간에 들었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에요. 질문과 후기의 압박없이 그저 읽으니 어려움을 만난 자리에서 문턱을 넘어가고 계시는 샘의 모습이 더 가깝게 느껴지고, 겪으면서도 배우지 못하는 제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