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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성이라는 자유에 이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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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5-07 08:40 조회5,109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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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성이라는 자유에 이르는 길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장현숙(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다시 돌아온 질문

작년 이맘때도 ‘나는 왜 글을 쓰는가?’란 주제로 에세이를 썼던 기억이 난다. 감이당에서 공부를 시작한 후 처음 맞이하는 에세이에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무엇보다 주제가 주는 황당함이 컸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니. 에세이 과제이므로 당연히 써야 하는 내 입장으로서는 질문 자체에서 황당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을 쓰라 해놓고 왜 쓰는가라고 묻는 그 짓궂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안 쓸 수만 있으면 안 쓰고 싶은 사람에게 왜 글을 쓰는가? 라니. 

그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1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똑 같은 모습으로. 그래서 그런지 1년 전 보다 더 당황스럽다. 작년에 최선을 다해 글을 써냈는데 이번엔 또 무슨 말을 쏟아 내야 하는가.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마치 준비라도 했다는 듯 ‘에세이 과제’니까 하는 생각만이 드는데. 그런데 곤란한 것은 에세이 과제이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으론 방대한 에세이 분량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난 또 머리를 짜내야한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도대체 나는 왜 글을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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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적합한 원인에 대한 인식 수단

그런데 곤란한 일이 발생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해야 하는데 질문의 방향이 자꾸 다른 쪽으로 향한다. 처음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가하고 생각했다. 다음엔, 에세이를 쓰기 싫은 내 마음이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교묘하게 관심을 돌리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함은 목까지 차오른다. 그래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가?’이다. 그래 왜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가.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에세이 주제다. 논어 맹자에, 장자에, 한비자에,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에, 니체 그리고 스피노자까지 읽지 않았는가. 그 책들 속에서 작년과 다른 에세이 주제 하나 고르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하필이면 왜 작년과 똑같은 질문인가. 
 
결과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적합한 원인이 우리의 관념 안에 생겨나지 않을 때, 혹은 우리의 본성이나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그 결과를 이해하고 발생시킬 수 없을 때 우리는 수동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이수영, 오월의봄, 232쪽

에티카를 읽다가, 목까지 차오른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주는 한 구절과 대면했다. 현재 행위(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적합한 원인에 대한 인식이 우리 안에 생겨나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나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과, 적합한 원인에 대한 인식, 수동적 존재, 우리의 본성. 알듯 모를듯하지만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듯 했다. 지금 하고 있는 결과적 행위로서의 ‘글을 쓴다’를 적합한 원인인 “왜”라는 이유와 연결시켜 보면서, 우리의 본성이나 능력만으로 그 결과를 이해하고 발생시키고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질문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글을 쓰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것을 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든다. ‘에세이 과제’라는 이유는 ‘글을 쓴다’라는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적합한 원인이 되지 못하는가. ‘적합하다’는 ‘일이나 조건 따위에 꼭 알맞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적합한 원인’이란 ‘결과에 꼭 알맞은 원인’이라는 뜻이 된다. 뜻을 알아보고 나니, ‘에세이 과제’라는 이유는 더욱더 적합한 원인으로 보인다. 그렇다. 언뜻 보기엔 그래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빠뜨렸다. ‘외적으로’ 원인이 주어져 ‘수동적’으로 글을 쓸 때 그 원인은 적합한 원인인가 하는 것이다. 
  
적합한 원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이수영, 오월의봄, 231쪽

글을 쓴다는 행위가 외적 원인에 의해 지배되어 수동적으로 행해질 때 우리는 그 원인을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의 본성만으로 어떤 것을 생성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것 그것이 적합한 원인이다. 그러므로 나는 ‘글을 쓴다’를 나의 본성으로 인식했던 처음의 시간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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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자 했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원인으로서의 ‘신체 경험’

재작년 가을,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전에도 나는 많은 책들을 읽었었다. 하지만 재작년 가을에 읽었던 한 권의 책을 언급하는 것은 ‘쓴다’는 행위를 생각하게 한 최초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북드라망, 고미숙)라는 제목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어렵게 손에 들게 된 책이었다. 굳이 ‘어렵게’ 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책을 구입하기 어려워서라기(알라딘에서 클릭 한번으로 그 다음날 집으로 배송되었다)보다, 이전에 읽던 책들이랑 너무나 다른 종류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지인의 강력한 소개가 아니었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종류의 책. 그 즈음 인문학이란 나에게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어쨌든, 마지못해 책을 들게 된 나였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며칠 동안 열병을 앓아야 했다. 너무나 황당하게도, 200년 전 남자, 연암을 사랑해버린 거였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책을 덮고도 연암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형수와의 대화는 마치 내가 그 형수라도 된 듯 생생했다. 역사 책 속에 ‘북학파 박지원’이라고 화석처럼 박혀있던 남자 하나가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듯 했다. 도대체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때 처음으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쓰고 싶다’라는 생각. 아니 ‘생각을 했다’ 라기 보다는 ‘그 본능을 알아챘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쓴다’, ‘하고 싶다’, ‘저렇게’라는 식으로 나열되는 생각이 아니라 정신차려보니 열망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신이 형성하는 관념은 오직 우리 신체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것들일 뿐이다. 신체가 경험하는 것들, 신체가 경험하는 것들의 폭, 그것에 의해 우리 정신이 결정되는 것이다.

    -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이수영, 오월의봄, 180쪽

신체의 경험, 그 경험의 폭. 읽는다는 경험, 그 경험의 강렬함. 책을 읽는다는 신체의 경험 후 나의 정신은 그 읽은 경험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본능을 명료하게 알아챈 건 아니었다. 처음엔 뭔지 모를 아쉬움에 책을 뒤적거리며 다산과 연암의 연보를 보기도 하고, 작가의 이력을 읽어보기도 할뿐이었다. 그러다 작가 소개란에 쓰여 있는 ‘감이당’이란 곳이 눈에 띄었다. 아주 작은 글자였음에도 홈페이지를 찾아냈다. 그 즈음 관심 있었던 사주명리와 주역, 그리고 평소 공부하고 싶었던 동의보감을 함께 공부한다니, 나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였다.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찮았다. 남편을 설득할 수 없었다. 평범하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평범할 수없는 전업주부가 창원에서 서울까지, 그것도 매주, 공부하러 가겠다니. 사실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남편을 설득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했다. 이걸 해서 뭔 영화를 보겠다고 서울까지 라니 하는 생각이 스스로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그냥 침묵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없는 슬픔이 쌓여갔다. 그러면서 하나의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왜 안 되는가?’ 아니, ‘나는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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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적 정념에서 능동적 인식으로의 전환 

오류는 부재하는 것에 대해 그 현존을 믿는다는 사실, 더 정확히는 상상적인 사물을 배제하는 관념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이수영, 오월의봄, 206쪽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사물을 현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안 된다’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려면 ‘안 된다’는 사물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안 된다’는 사물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안 된다’는 분명 관념이 아닌가. 관념의 하나임이 분명한데도, 어떤 상황, 어떤 사람에게 현존하는 사물처럼 작용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배우고는 싶다 그러나 안 된다. 무언가를 원할 때, ‘안 된다’에 제일 먼저 영향 받는 신체라니. 이 얼마나 무능력한가.  

자유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코나투스(욕망)를 결정하는 변용의 방법을 바꾸는 것, 즉 수동(정념)에 의해 촉발된 코나투스가 아니라 능동에 의해 촉발된 코나투스로 전환하는 것이다. 수동이 우리 신체에 나타난 결과에 집착하는 인식이라면 능동은 결과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파악하고자 하는 이성적 노력이다.
-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이수영, 오월의봄, 272쪽

알 수 없는 슬픔이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변해갔다. 내가 살아가고 있던 평범한 일상이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이 남편 탓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참 황당했다. 남편은 이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나 혼자 슬펐다 미웠다 하는 것이었다. 상의라도 해봐야하는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해선 이것이 정말 ‘현실적으로’ 안 되는 일인지 먼저 알아봐야 했다. 시간 내에 서울을 오가는 차편은 있는지, 등록비와 차비를 감당할만한 경제적 사정은 되는지, 체력적으론 문제가 없는지 그리고 가족들이 과도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 등이었다. 막상 알아보니 생각보다 모든 게 수월했다. 시간 내에 오갈 수 있는 차편이 봄부터 새로 생겼고, 조금만 절약하면 등록비와 차비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상황이었고, 신체적으론 특별한 이상이 없었으며, 딸아이는 흔쾌히 엄마의 공부에 동의했다. 난 도대체 왜 ‘안 된다’라고 생각한 걸까. “인간의 환상은 정말 뿌리 깊다”(같은책, 158쪽)더니. 이제 남편과 상의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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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굳어진 남편의 표정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 얼굴이 굳어졌다. 그 표정을 마주 대하니 말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더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상의고 뭐고 우기기 시작했다. 미리 생각해놓은 경제적, 체력적인 부분들은 남편의 논리에 한순간에 무너졌다. 원망하며 화를 내다가 급기야 울어버렸다. 속절없이 눈물이 나왔다. 남편은 생각해보자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가 버렸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나는 왜 자초해서 이 일을 겪고 있는가. 그저 한권의 책을 읽었을 뿐인데.

그 후 며칠 동안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과 살고 있기라도 한 듯 슬펐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건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 없이 평화로웠을 텐데 하고 나를 자책하기도 했다. “수동적 정념은 타인의 본성에 대한 증오, 그리고 자기 본성에 대한 증오, 결국 삶 전체에 대한 증오를 초래 한다”(같은 책 208쪽)했던가. 그러다 문득, 남편으로선 당연한 반응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당연하다. 남편으로선 당연하다. 그리고 나로서도 당연하다. 이런 과정 없이 그저 얻어 질 것이라 생각한 그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하고 남편이 생각을 정리할 동안 기다려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 남편으로부터 공부해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20년 넘게 같이 살아오면서 내가 무언가를 그렇게 원하는 건 처음 봤단다. 그렇게 나는 이곳 감이당으로 왔다. 


필연성이라는 자유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 때문에 처음 감이당을 알게 된 재작년 가을까지 다녀왔다. 책을 읽은 그 경험은 그 이후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의 추동력이 되었다. 마치 쇠 조각이 자석에 이끌려 그 움직이는 방향이 정해지듯 그 이후 일들은 그렇게 저절로 방향이 결정되었다. 세상에 우연한 일이란 없다했는가. 그렇다면 그 일은 너무나 명백히 필연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내 삶에 그렇게 선명한 자국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자유인의 삶, 그것은 오직 적합한 관념의 획득을 통한 능동적 변용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어렵고 드문 일인가.

-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이수영, 오월의봄, 273쪽

‘그 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면 참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남편의 허락은 이후 모든 과정을 온전히 내 몸과 내 책임으로 겪어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집안 살림만 할 때는 조금만 피곤해도 드러눕기 일쑤였는데 공부를 시작하고부터는 그러지 않았다. 일상의 모든 것을 공부하기에 적합한 상태로 바꾸어야만 했다. 체력적으로 힘든 건 현실적인 힘듦이었다. 평소 운동이라곤 안하는 몸에게 매주 창원과 서울을 오가는 일정은 상당히 무리였다. 처음 몇 달은 공부를 하는 건지 정신이 나간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지낼 정도였다. 그러나 체력적인 것 보다 더 힘든 것은 ‘무슨 영화를 보려고 이 나이에 이 고생인가’하는 정신적 회의였다. 그리고 ‘매주 서울까지 오가는데 남들 보기에 번듯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나’하는 초조함이었다. 소위 ‘대책 없는’ 날들이었다. 겪어내는 것 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한 주는 회의감에 시달리고, 다른 한 주는 초조함에 시달려야 했다. 

어떻게든 딱 일 년만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내가 변하던지 포기하던지 둘 중 하나겠지.  하지만 회의와 초조함만 있었던 건 아니다. 매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느꼈던 배운다는 기쁨, 같은 길에서 만난 도반들과의 수많은 수다, 나만을 위해 온전히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들. 앎이 자랄수록 매주 조금씩 명료해지던 내 삶에 대한 인식들. 그것들이 주는 기쁨은 피로와 회의감 그리고 초조함을 감당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자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에게 어떤 제약도 가해지지 않은 상태 속에서 행해진 작용이 아니라, 그 행위가 행위 주체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냐는 점이다. (중략) 비록 나무나 여러 자연적 조건의 제약이 있음에도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은 오직 거미의 본성에 따른 행위이므로 그것은 자유이자 필연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는 필연성, 그것이 곧 자유이다.

    -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이수영, 오월의봄,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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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년 한 해 동안 감기를 한 번도 앓은 적이 없음을 알았다. 매년 겨울 며칠 씩 심한 감기로 몸져눕곤 했는데, 몸살 한 번 없었다. 아주 건강한 건 아니었지만 대견 하리 만큼 잘 해나갔다. ‘아프다 하면 공부하지 마라 할까봐 아프지도 않았네’ 했더니 남편이 웃는다.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 

자신의 본성이 끌리는 대로 살 때 사람은 어떻게 기쁜지 알 것 같다. 매일의 기쁨이 그 다음날의 디딤이 되고 그 기쁨 속에서 낯선 자유로움을 느낀다. 어떤 제약도 가해지지 않은 상태 속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이 아니라 내 모습 그대로 살아낼 때 느끼는 담백한 자유로움. 그래서 그런지 더 강해진 것 같다. 정신적으론 단단해졌고 육체적으론 공부와 생활을 지속시킬 수 있는 리듬을 익혔다. 다른 리듬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신체를 소유함이라 했던가.

그러니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내 본성 그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다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원인이 되지 않고 오직 내 모습 그대로 원인이 되어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삶의 적합한 원인이 나 자신의 본성이 되는 필연성의 자유. 그 자유로움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나무가 땅 속 깊이 뿌리내리고 하늘 향해 가지를 뻗을 때의 그 당당한 기쁨 말이다. 


댓글목록

피오나님의 댓글

피오나 작성일

에세이를 읽으면서 절로 울컥해서 울면서 읽었네요. 배우고 싶은데 혼자서 '안된다'라고 생각했다는 구절..그리곤 계속 슬픔이 밀려왔다는 구절에서....저도 그랬나봐요...전 그러고 그냥 살고 있었는데...ㅜㅜ..우린 자유인이라는 거...

오리날다님의 댓글

오리날다 작성일

에세이를 읽으며 눈가가 촉촉해지네요. 그런 끌림을 느끼고 새로운 리듬에 몸을 맡기셨다는 것 멋지고 부럽습니다. 감동입니다.

삐돌이님의 댓글

삐돌이 작성일

"매일의 기쁨이 그 다음날의 디딤이 되고 그 기쁨 속에서 낯선 자유로움을 느낀다."

땅 속 깊이 뿌리내려 당당히 선, 하늘 향해 활짝 벌린 장현숙님의 두 팔을 보는 듯한 에세이 잘 들었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처럼 현숙님의 독립 만만세!! ^^

단지님의 댓글

단지 작성일

완전 멋진 에세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