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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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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5-13 14:26 조회5,789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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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한 여정


오태윤(감이당 대중지성 1학년)
 
나는 이번 에세이 주제인 ‘나는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감이당 대중지성 과정은 왜 들으려 왔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이전의 나의 상황을 먼저 이야기 해야겠다. 작년 7월까지 2년 반 동안 나는 미국에 있었다. 그곳에서의 직업은 생명공학 연구원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UC DAVIS라는 대학의 식물 병리학과에서 벼의 유전자와 관련된 유전 정보들을 분석하여 그 유전자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기능적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는 일이 나의 연구 주제였다. 대략 10년이라는 세월동안 공부를 하고 박사가 된 이후 5년 동안 연구원으로 경력을 쌓고 있었다.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에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했고, 2013년 말 6개월 뒤에 나의 계약이 종료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취업할 수 있는 분야가 다양하고 연봉이나 연구 환경이 좋은 미국에서 직업을 찾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중년 백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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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백수로 돌아오다!

남들이 보기에는 미국 생활에 적응을 못했거나, 연구 결과가 좋지 않아서 또는 잠시 재충전을 위해 휴식을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곳에서의 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었다. 그동안의 노력을 통해 얻은 학위, 유능한 연구자들과 좋은 환경에서의 연구기회 등은 앞으로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는 발판이었고, 아마 내가 원하는 곳에서 알맞은 직업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전까지 바라고 있었던 욕망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 졌을까?

그 때를 회상해보면 너무 지치고 외로운 상태였다. 공동연구를 같이하는 다른 연구자들은 대부분 뉴욕 지역에 있었고, 매주 금요일 오전 전화로 회의를 하는 것이 주된 소통의 통로였다. 그러나 두 시간 동안 미국, 영국, 인도, 러시아, 중국 사람의 영어를 듣다보면 소통은 고사하고 소음을 듣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었다. 그리고 박사를 졸업한 이후부터 다른 사람들처럼 가정을 이루기 위해, 소개팅과 맞선을 여러 번 보기도 했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물론, 그곳에서도 친한 동료들이 있었지만 나의 생활에 대한 것과 내가 느끼는 감정까지 공유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전까지 나는 내 자신을 경제적인 안정, 연구 성과를 인정받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것을 얻었을 때, 일상에서 이야기하고 소통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서 외롭거나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미국의 생활은 주변 환경도 낯설고 말도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 큰 어려움이었다.

미국생활을 접고 감이당으로

그러한 연유로 귀국을 결심한 후, 한국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미숙 선생님의 강연을 유투브에서 우연히 듣고 관심이 생겨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감이당이라는 곳과 대중지성 과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의역학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나의 전공과 연결되는 지점 때문이었는데, 그동안 생명공학 관련 연구를 계속 진행하면서 한 가지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서양의 일반적인 연구 활동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적 호기심만을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사람들에게 이로운 연구만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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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도 이 시대는 다음과 같이 기억될 가능성이 더 높다. 모든 세대가 삶을 빈곤하게 만드는 풍요를 광적으로 쫓느라 자유를 모두 양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정치를 역사상 최초로 복지수령자의 불만을 조직하는 것으로 바꾼 다음에는 전문가 전체주의로 덮어버린 시대였다고.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생명공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그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의 몸이나 자연에 대한 정보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이 정보를 이용하여 의학뿐 만아니라 식량, 에너지와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그 활용도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정보는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전문가에게 집중되어있고, 정작 일반 대중은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임에도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의지할 수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특히, 우리의 몸에 대한 정보는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자산이지만, 그 정보를 활용하기 힘든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전문가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한 목적으로만 기술을 사용한다면 좋겠지만, 황우석 사태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익보다는 이윤추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커다란 피해를 주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의역학을 공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접목하여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고, 이 궁금증이 나로 하여금 감이당 대중지성을 듣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다.

나는 왜 글 쓰는 것을 두려워했는가?

이전까지 나에게 글쓰기는 연구의 최종 결과물이자 경력의 중요한 잣대였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글쓰기는 논문형식의 글쓰기를 말한다. 이렇게 중요하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글쓰기가 매우 싫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쓰는 것이 두려웠다. 글을 쓴다는 것이 두려운 것으로 각인이 된 것은 대학원에 들어간 뒤부터였다. 대부분의 이공계 분야는 배우는 교과서가 영어로 되어있고, 학위논문도 영어로 쓰게 돼 있었다. 하지만, 대학이나 그 이전에 영어로 글을 쓰는 방법을 제대로 배워본 기억이 없었다. 대학원에서도 정규과정에 영어로 글쓰기란 없었고, 단지 졸업을 위한 평가시험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다른 논문에 나온 내용들을 참조하여 짜깁기하는 수준으로 논문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은 나에게 자격지심을 안겨주었고 남들이 나의 논문을 보았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에 더욱 더 글쓰기가 싫어졌다.

글을 쓴다는 것이 두렵고 피하고 싶은 일이 되어버린 나에게 감이당의 대중지성 과정을 듣는다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에세이를 쓰는 동안 ‘왜 글 쓰는 것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고미숙 선생님께서 자신이 대학원 과정 중에 어떻게 글 쓰는 법을 익혔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실 때 한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대학원 시절 논문을 쓰기 위해서 매일 밤새워 열심히 원고지에 글을 쓰고나면 다른 대학원 선배들에게 보여 주었고, 자신의 논문은 빨간 줄로 난도질당해 자신에게 돌아왔다고 하셨다. 그러면, 다시 그것을 일일이 옮겨 적고 지적한 부분을 새로 고치는 지난하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글 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나는 대학원 과정 중에 선생님과 같은 경험을 통하여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연구를 하는 동안 문제가 발생하거나 풀리지 않는 것은 다른 대학원생들이나 교수님과 상의를 했지만, 논문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 스스로의 책임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지도 교수님들께서도 논문을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은지 꼼꼼하게 지도해 주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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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있어서 만큼은 모두 미생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의 문제는 나로부터가 아니라 외부적인 것 때문이라는 탓을 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 설령, 주변의 여건이나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만 있었어도 시작 단계에서는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지금처럼 글쓰기가 두려운 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주 명리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나의 일주는 기토(己土)이고, 사주에 金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어떠한 일을 하던 마무리가 잘 안 되는 것이 항상 문제였다. 글쓰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나에게는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을 모면한 이후에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아니 그 문제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려는 것을 회피했었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의 크기는 점점 커졌고, 나에게는 해결하지 못한 숙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세상에 공부에는 왕도나 비법이 없듯이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온전히 글이 써질 때까지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거쳐 내 몸으로 익힐 수 있을 때까지 그저 열심히 쓰는 수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1년의 과정을 거치면 갑자기 글이 잘 써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이 더욱 커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다가오는 상황을 묵묵히 견뎌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본다. 크건 작건 한 마디를 넘는다는 경험에서 얻어 가는 것이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책을 읽는 즐거움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동안 전공 공부와 관련된 책이 아닌 흥미에 이끌려 읽은 책의 양을 비교하자면, 지난 4개월 동안이 제일 많은 것 같다. 이전의 일상은 학교에서는 연구를 하고, 집에 와서는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는 것이 전부였었고, 주말에는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거나 스포츠 중계방송을 보며 열광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렇기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그러나 지난 4개월여 동안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질문들, 그리고 깨달음을 주는지 알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면, 내가 보는 것들 그리고 그 때의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책을 통해서 낯선 곳에 대한 것을 읽게 되면, 작가의 느낌과 생각까지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갈 수 없는 곳이라면 더 더욱 귀한 체험이 될 것이다. 연암은 백탑에 도착해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느낀 감응이 얼마나 컸기에 이런 느낌이 들었을까? 하는 궁금증과 “사람의 감정이 깊어지면 그 끝은 울음이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는 감정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벗이란 반드시 ‘지금 이 세상’에서 구해야 한다. 만약 벗이 없다면, 누구와 더불어 볼 것이며, 누구와 더불어 들을 것이며, 누구와 더불어 맛을 볼 것이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를 맡을 것이며, 누구와 더불어 지혜와 깨달음을 같이 할 것인가?

-고미숙, 「다산과 연암 라이벌 평전 1탄」,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북드라망, 2014, 56쪽

‘사람은 혼자 살아 갈 수 없는 존재이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만이 지혜와 깨달음을 나눌 수 있다’는 연암의 벗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미국에서의 생활을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되었는지가 더욱 명확해 졌다. 그리고 이전까지 글쓰기에 대한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나에게 이옥의 글(낭송 이옥)과 채운 선생님의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는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일개 유생에 불과한 이옥이 난잡한 문체로 과거를 본 것이 정조에게 걸려 그의 일생이 꼬일 대로 꼬인 사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자신의 인생이 걸려있는데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지엄한 왕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문체를 바꾸지 않은 그 대담함. 그런데 그의 글은 새로운 사상이나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라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사물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여성스러운 문체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니……. 이전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조선이라는 시대상황에서 이옥의 행동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과연 정조의 뜻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대의 이언은 무엇하려고 지었는가?”라는 물음에 이옥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재자가 있어 시킨 것이다. 내 어찌 국풍·악부·사곡을 하고, 나의 이언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채운,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북드라망, 2013, 99쪽

자신이 쓴 이언에 대한 그의 대답을 읽고 나니,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옥은 자신이 쓰고 싶어 쓰는 것이 아니라, 주재자가 있어 쓰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가 말하는 주제자는 천지만물을 말한다. 그는 거미와 벼룩, 벌레, 목화 꽃과 밭 한 뙤기까지 모든 사물들에 대한 감응을 표현하였고, 군신간의 도나 효에 대한 것이 아닌 남녀 간의 정에 관해 글을 썼다. 즉, 왕의 명을 거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문체를 유지한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대할 때 일어나는 감응에 따라 그저 솔직하게 쓴 것뿐이다. 그가 말했듯이 솔직하게 쓴 글은 그 글을 읽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생생하게 전달된다. 특히, 결혼한 여인의 비애를 이야기한 부분에서는 그 여인의 일생이 너무 가엾고 슬퍼 내 마음까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내 안의 욕망, 글쓰기

‘글을 쓴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이라고 한다. 또 ‘쓰는 것’은 ‘삶’ 그 자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왜 글쓰기의 욕망이 없었을까? 나는 욕망이 부정적인 것이고 이기적인 것이라서 가능하면 이성적으로 욕망의 분출을 차단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욕망은 살아있고 또 움직이려는 힘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는 욕망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앞의 문장을 접하게 됐을 때, 그 동안 내가 알고 있던 욕망의 개념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만약 글쓰기가 인간 본연의 욕망이라면 나 또한 글쓰기의 욕망이 분명히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단지 내 안의 욕망을 들여다보지 않았거나, 자의식이 글쓰기라는 욕망과의 접속을 원하지 않았기에 글쓰기의 욕망이 없다고 단정 지어 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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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누구나 한 가지 새로운 결심을 하듯이 나도 다시 일기를 쓰기로 했다. 기존에는 그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잘못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 주된 래퍼토리였다. 그러나 융의 책을 읽고 난 뒤부터는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에 대한 느낌이나 그 당시에 갖게 된 감정에 대해 쓴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었는지를 쓰면, 글을 쓰는 순간 그 사건이 생생히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 것이 혹시 나의 욕망은 아닐까? 그렇다면, 일기를 쓰는 것이 나의 욕망과 만나는 순간일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쾌락이란 몸이 욕망을 계속해서 흐르게 할 만큼 건강하지 못할 때 그 흐름을 중단시켜 버린 결과’라고 말한다.
 
욕망이 가장 충만해지는 순간은 그것이 바로 ‘중단되지 않은’ 때다. 즉, 외부와 계속 접속할 때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욕망이 흘러가느냐, 멈춰 있느냐? 탈영토화하느냐 지층으로 재영토화 되느냐? 욕망이 흐르면 흐를수록 삶은 점점 풍요로운 다양채로 변해간다.

-김해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 북드라망, 2014, 110쪽 

나는 앞 문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 동안 욕망이 흐르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내 안에 글쓰기의 욕망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글쓰기는 심해(深海)와 같은 내 안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은 나의 본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이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이라는 것이 새로운 언어라면 나는 지금 말을 배우고 있는 아기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표현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아기는 이야기의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보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솔직히 말한다. 꾸미거나 있지도 않은 것을 보태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아기처럼 글을 쓰고 싶다. 이전까지의 의무감이나 연구실적을 위한 글쓰기가 아닌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감응을 글로써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것을 어느 누군가 나의 글을 읽고 공감한다면 기쁠 것이다.


댓글목록

나그네님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경력과 학력 등의 목표를 성취하시고도 백수를 택하셨다니... 슈퍼갑처럼 느껴지네요.

삐돌이님의 댓글

삐돌이 작성일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글!

파랑소님의 댓글

파랑소 작성일

선생님~ 아기처럼 솔직한 글 잘 읽었습니다 ;-) 질문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힘! 배워야겠습니다

바다님의 댓글

바다 작성일

와, 멋져요 태윤샘! 여기서 이렇게 읽으니 훨씬 글이 진중하고 잘 읽히네요. 축하드려요~

승연님의 댓글

승연 작성일

와우!  태윤샘... 1학기동안 같은 조에서 공부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여기서 읽으니 또 다른 느낌이네요.. 글쓰기가 심해와 같은 내안의 욕망을 들여다 보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본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도록  함께 재밌게 공부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