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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위대한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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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5-29 10:52 조회6,803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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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위대한 건강


박준오(감이당 대중지성 2학년)

글은 자신의 몸이다

매일 세 개의 몸을 만난다. 한 몸은 한없이 경직되어 있고, 한 몸은 한없이 이완되어 있으며, 한 몸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앞의 두 몸은 내가 활동보조인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의 몸이다. 한 이용자는 의도치 않게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뇌병변을 겪고 있고, 한 이용자는 근육이 점점 풀어지는 근육병을 겪고 있다. 두 몸은 다르게 작동한다. 식사, 청소, 운동, 말, 여러 것에서 차이가 있다. 뇌병변을 겪는 몸은 언어를 내뱉는 창구가 경직되어 있기에 단답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가끔 그 말은 찌르는 듯하다. 근육병으로 이완된 몸은 그나마 자유로운 입에 많은 에너지를 쓴다. 다소 화려하게 언변을 낸다. 다르게 작동하는 몸은 동일한 것을 인식하는 데에도 차이가 있다. 휠체어를 타는 신체에게 신발은 양말에 신는 덧신이고, 구강이 편하게 움직이지 않는 신체에게 꼭꼭 씹어 먹으라는 말, 하체가 편하지 않은 신체에게 걸으라는 말은 폭력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그들의 몸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몸의 차이가 생각의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생각이 몸을 지배하고 있다고 여기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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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그 생각의 원천, 그 생성의 원천

니체는 우리를 움직이는 더 큰 명령자가 감각이나 정신이 아니라 자기(das Selbst)라고 말한다. “감각과 정신이란 도구이자 장난감일 뿐이다. 그들 뒤에는 자기(das Selbst)라는 것이 있다. 자기는 감각의 눈을 도구로 하여 탐색하며, 정신의 귀를 도구로 하여 경청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52) 그렇다면 자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너의 신체가 바로 자기다.”(앞의 책, p.52) 정신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우리 정신이 갖는 생각은 신체의 강력한 영향 하에 이뤄진다. 차라투스트라는 혹을 떼어내는 기적을 보여 달라는 곱사등이에게 "곱사등이에게서 그의 혹을 떼어낸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서 정신을 떼어내는 것이 된다."(앞의 책, p.228)라고 말하는 구절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흔히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인식 너머의 영역에 니체는 신체를 가져다 놓는다.
 
한의학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의학에서 사람의 정신·의식·사유 활동은 오장에 흐르는 기운(氣)의 운행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장에 흐르는 기가 원활하면 사람의 정신 활동이 원활하고, 오장에 흐르는 기가 원활하지 않으면 사람의 정신 활동에 이상이 발생한다. 오장이 어떻게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장부 내에서 기운을 만들며, 전신에 기운을 순환시키는지, 한의학은 이 기운의 메커니즘(氣機)에 따라 우리의 사유가 구성된다고 말한다. 한의학도 우리의 정신 위에 신체의 기운이라는 명령자를 놓는다. 종합해보면 니체가 말하는 자기(das Selbst)의 작용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신체의 기운작용과 같다. 자기(das Selbst)는 자기(自氣)다. 우리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바로 자기다.
 
우리는 이런 신체와 정신의 깊은 연관을 그저 가벼운 얘깃거리로 치부할 수 있다. 그날의  몸 컨디션이 안 좋으면 기분이 우울해진다는 말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신체와 정신이 얼마나 긴밀히 연동되어 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글쓰기이다. 흔히 글을 머리로 쓴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글을 쓸 때를 떠올려보자. 자기 나름의 생각으로, 어설프게 짠 목차를 가지고 글쓰기의 장에 뛰어든다. 그때마다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글이 튀어나온다. 에세이 마지막 날 모니터 앞에서 도대체 이 글은 누가 쓴 것이지? 하고 허탈해 할 때, 혹 빈틈없다고 자신한 나의 글에서 좋지 못한 습관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때 정신 너머의 무엇이 내 글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글을 발표하고 지적을 받으면서 늘 허투루 쓰고 있는 기운의 패턴이 내 글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글에는 단순히 ‘글을 쓸 때 하루’의 상태가 아니라 그동안 내 삶이 쌓은 리듬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글에 드러나는 몸의 기운을 문체(文體)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글은 하나의 구성체를 만드는 것이기에 흔히 건물 짓는 것으로 비유되곤 한다. 만약 글이 자기 기운으로 하나의 체제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주로 ‘내 몸’이라는 유기적 구성체를 형성하는 신체의 기운은 자연스럽게 내 몸을 만드는 스타일대로 글의 스타일을 구성할 것이다. 곧 문체는 기운(氣)이라는 배치 하에 '글(文)=몸(體)'이 된다. 머리를 포함한 몸의 모든 기운이 글에 드러난다.

함께 가는 몸과 정신
 
작년 초부터 이곳에 와서 했던 것은 다른 글을 쓰기 위해 몸을 훈련하는 것이었다. 글에 몸의 기운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체감한 것은 암송을 할 때였다. 작년 감성 1학년에서 매주 암송을 했다. 처음 나의 암송 목표는 한자도 틀리지 않고 똑같이 낭송하는 것이었다. 조사 하나까지 남김없이 통째로 암송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외고 안 외워지면 그 부분을 베껴보고 다시 써보고 또 외웠다. 그렇게 매주 암송 숙제를 넘겼지만 뭔가 께름칙한 것이 있었다. 그러다 작년 말, 낭송단에 소속이 되어 낭송 공연을 해야 했다. 공연을 할 때는 사람들 앞에서 암송의 모범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해왔던 방식으로는 안됐고 뭔가 께름칙한 것을 넘어설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찾은 방법은 글의 리듬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우선 자세를 바로잡고 생각 없이 무조건 읽는다.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에 책이 필요 없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때가 되면 책을 보지 않고 외게 된다. 그리고 글을 몸에 새긴다는 생각으로 구절이 술술 나올 때까지 계속 외운다. 그러다 보면 글의 리듬이 느껴졌다. 그렇게 글의 리듬을 타다 보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몸이 되는 느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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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을 타~ 봅시다!! 호잇~ 호잇~  

이 작업을 통해 암송은 글자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기운을 내 몸에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안 순간 암송하는 순간이 멋지게 느껴졌다. 루쉰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글을 쓸 때 루쉰이 냈던 그 몸의 기운을 내가 다시 뿜어내는 것이 아닌가. 그게 가능한 순간이 암송이었다. 루쉰의 글을 암송하는 순간 나는 루쉰이 글을 쓸 때 그의 육체가 내었던 기운을 내 몸에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순간만이 아니라 기운은 조금씩 몸에 남는다. 암송은 눈으로만 책을 읽었을 때에는 절대 다다를 수 없는 찐한 만남을 이루게 해주었다. 암송할 때 책의 기운과 나의 기운이 섞인다. 그리고 그 후에 나는 다른 몸이 된다. 암송은 몸과 몸의 소통·변용이 이루어지는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내 몸이 생각지도 못한 단어와 문장들의 조합이 만드는 리듬을 내 몸에 새기는 일은 다른 몸, 다른 글을 짓는 밑바탕이 되었다.
 
물론 감이당 글쓰기에서도 ‘글=몸’의 전제하에서 진행되는 수련이 계속되었다. 이곳에서는 글을 쓰면서 몸의 변화를 감지하고 다시 나의 몸의 변화를 글로 쓰는 작업이 필요하다. 작년 첫 에세이 때 14장을 써갔다.(원래 분량 5장) 일단 글의 분량부터 약속을 어겼고, 글에 반복적인 내용이 많은 데다 논지도 부산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수사도 문제였다. 술과 야식으로 화기(火氣)가 망동하고 몸에 잡다한 물기가 많아서 그런 글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전신에 뜬 불기운을 내리고 습(濕)을 없애라는 미션이 내려졌다. 처방전은 1시간의 산책이었다. 글을 못써간 것인데 몸에 병이 났다는 코멘트를 받은 것도 신기했고 몸을 바꾸려는 노력으로 글이 바뀔지도 궁금했다.
 
이제 매일 한 시간의 산책과 매주 한 구절의 암송이라는 몸 쓰기를 한지 1년이 살짝 넘어간다. 두 훈련은 더디게 변화하는 과정을 견뎌내는 것이었고, 정신과 신체가 따로 노는 일에서 정신과 신체가 뜻을 맞추는 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 작업은 ‘어른의 목말을 탄 아이’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이라는 아이는 ‘신체’라는 어른의 목말을 타고 마음대로 가자고 외친다. 이리로 저리로 손가락질 하면서 어른의 귀를 잡아당기고 방향을 이끈다. 신체라는 어른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이 같다면 웃으면서 그 방향을 따른다. 하지만 신체는 정신이 가리키는 방향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 그럴 때 정신이라는 아이는 그것을 그저 지켜보거나 귀를 잡아 틀면서 울다가 나자빠진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겪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한밤중에 치맥을 먹는 상황’이다. 신체 앞에서 무력해지는 정신.
 
몸이 우리 생각의 전반을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신의 노력으로 몸을 바꾸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늘 실수하는 것은 정신의 과욕이다. 몸을 생각하지 않고 정신에 전권을 넘겨줄 때 둘 사이에 틈이 생긴다. 하루아침에 자신이 생각하는 건강한 몸으로 탈바꿈할 수 있으리라 자만하는 정신의 과욕이 몸과 연결되어 있던 끈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체험으로 알았던 것은 정신과 신체가 함께 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정신이라는 아이가 아주 섬세하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계속 유지한다. 그러면 어른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그 길을 따르게 된다. 그 섬세하고 부지런한 반복적인 방향설정이 몸이라는 거대한 움직임을 바꿀 수 있는 정신의 기예임을 알게 되었다. 정신의 자만을 버리고 매일매일 끊임없이 세세한 변화를 이루는 노력이 필요하다. 작은 노력이라도 100일 동안 지켜나가는 끈기를 발휘할 때 아이와 어른은 서로의 뜻을 맞추게 된다. 정신과 몸의 소통의 고리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꾸준함이다. 꾸준함, 그것이 몸을 다른 글로 이끄는 법이었다. 나는 감이당에서 으레 진행되는 100일 프로젝트를 통해 그 노력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몸의 습(濕)이 다소 빠졌으며, 치성한 불기운은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글은 5장이 되었다. 좋은 글은 아니지만 다른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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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성은 늘 특이성의 원천이었다.

신체와 정신의 연동은 그 뿌리가 깊었다. 둘의 관계를 알았다면 이제 다음 차례다. 정리해보면 글쓰기는 자신의 몸의 상태를 점검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몸을 잘 쓰는 건강한 신체는 글을 잘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건강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글을 잘 써야 하는가. 그 이유는 생명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나는 한 여행을 통해 그것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

고귀한 생명이 되기 위해
 
태어나 처음 죽은 몸을 보았다. 죽은 몸을 보여준 사람은 나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올해 초 자살했다. 경찰서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연락 받았다. 어머니는 여러해 전 가족 몰래 카드로 대출을 받았고 빚을 지었으며, 결국 담보로 아파트의 절반을 저당 잡혔다. 가족들은 어머니를 내쫓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 빚보증으로 가족들을 고생시켰던지라 더 이상 애정을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섰다. 그러다 얼마 되지 못해 어머니는 넘어져 몸이 다쳤고 일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모에게 근근이 도움을 받으며 살아갔다. 그러나 대안 없는 하루하루는 똑같은 절망의 반복이었다. 어머니는 점점 주변의 연락에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연락 받는다. 가족의 연락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 모든 끈이 끊어졌다고 여긴 어머니는 그 일이 있은 지 보름이 되지 않아 번개탄을 피워놓고 전기매트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었다. 며칠 후, 어머니는 월세독촉을 하러 온 주인에 의해 발견되었고 경찰에 인도되었다.
 
나는 이모와 어머니의 사망사건을 담당한 형사 앞에 앉아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이모는 어머니의 시체를 보기 전까지 그 사람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모와 나는 입관 예식에 들어가서 죽은 어머니의 몸을 마주했다. 사실 두려웠다. 어머니 앞에 가면 벌떡 일어나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죽은 몸은 너무나도 나약했다. 생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아무와도 연락할 수 없는 무기력의 극치인 죽은 몸. 전기장판에 대어 따뜻하게 죽어간 어머니는 며칠의 부패로 상해있었다. 이모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상한 얼굴이 내게 준 감정은 미숙함이었다. 어떤 이도 자신의 얼굴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내버려둔 채로 죽을 수는 없었다.
 
진정되지 않은 이모 앞에서 어머니는 관에 들어갔다. 관을 덮기 전 장의사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하려면 너무나도 많았고 하지 않으려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모는 어머니에게 평생 고생하다 죽었으니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따라할 수 없었다. 그런 곳은 없기 때문이다. 또 좋은 세상에서 조금 먼저 간 어머니를 만나 행복하게 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도 따라할 수 없었다. 그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리라. 관이 닫혔다.
 
천주교 신자인 이모는 나에게 연도문을 읽어주자고 했다. 연도문을 읽다가 “믿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라”는 구절이 나왔다. 어머니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한 텀을 갓 마쳤을 뿐이다. 그때에 알았다. 어머니는 하나의 생명이었다는 것을. 생명이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의 하나가 네트워크가 아니라 네트워크야말로 바로 생명의 본질임을. 가족과 돈이라는 얇은 소통의 허울이 벗겨지자 생명은 고립되었고, 본성을 발휘할 수 없는 생명은 다른 네트워크를 위해 해체되어야 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텀을 만들어내는 준비단계였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불운도 어떠한 우연도 없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조촐한 여행 한 번 보내드리지 못한 아들에게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생명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깜짝 여행을 선물했다. 이렇게 마주침과 깨달음은 느닷없이 오는 것. 정말 좋은 여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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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무언가와 강하게 연결되고 싶다는 열망과도 같다.

화장터에서 그곳에 모인 가족들은 죽음의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 바빴다. 누구는 나의 잘못이 5할이라고 하고 누구는 9할이라고 했다. 그래봤자 똑같았다. 다들 이 사건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이었다. 하나의 사건을 부정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 남 탓이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탓을 돌린다고 해서 어머니의 죽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 모인 모두에게 죽음의 몫은 남았다. 내게도 죽음의 몫은 남았다. 이제 어머니의 죽음을 여러 방식으로 이해해보는 것이 내가 해나가야 할 공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고 공동체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냐고 화를 낼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희낙락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영화를 누려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 왔다.

혼인. 그것을 나는 본인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산출하기 위해 짝을 이루려는 두 사람의 의지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서의 서로에 대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을 나는 혼인이라고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p.113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더 뛰어난 사람을 산출하려는 의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인간인 우리는 ‘하찮은 나’와 ‘초인’ 사이에 묶인 밧줄 위에 놓여있는 존재다. 자기를 극복하여 좀 더 고귀한 존재로 향하는 외줄타기가 바로 우리의 삶이다. 어머니는 먼저 밧줄에 올랐고, 나를 밧줄에 올려 세웠으며 먼저 떨어졌다. 그녀가 떨어진 곳이 내 앞이었는지 내 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혼인의 의미를 생각해봤을 때 그녀와 똑같은 위치에 떨어질 수는 없다.
 
가장 생명력이 낮은 몸은 무엇인가? 두말 할 것 없이 죽은 몸이다. 죽은 몸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는 몸이다. 반대로 가장 생명력이 높은 몸은 누구와도 연락할 수 있는 몸일 것이다. 하나의 생명으로서 사람들은 생명력을 가장 크게 발휘하는 고귀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누구와도 연락할 수 있는 몸이 되기를 원하고, 영원히 연락할 수 있는 몸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모두에게 명령하려는 독재자를 꿈꾸거나 오랜 세월을 살기 위해 불로초를 찾고 냉동인간이 되는 부질없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다른 방법 하나가 있으니 바로 고전을 남기는 것이다.
 
고전은 가장 생명력 넘치는 몸이다. 고전에는 어떤 시대에도, 어떤 삶의 순간들에서도 통용되는 지혜가 담겨 있다. 수많은 세월을 걸친 지금에도 마치 오늘의 이야기를 하는 듯 고전은 우리에게 삶의 본질을 생생히 전한다. 조별 토론에서 이곳 공동체 생활에 위기를 맞고 있던 한 학인이 논어 한 구절을 암송했다.

증자가 말했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사람들과 일할 때 진심을 다했는가? 친구와 사귈 때 믿음을 주었는가? 배운 것을 충분히 익혔는가?”

<낭송 논어/맹자>, 북드라망, p.44

그때 증자의 뜻이 2015년 현재 학인의 입을 통해 다시 살아 올랐다. 이것이 고전, 아니 글이 가진 힘이구나 했다. 나, 관계, 공부에 대한 고민. 그 학인이 처한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였다. 증자는 그 학인과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 고민의 결과는 지금도 유효했다. 나, 관계, 공부라는 변함없는 인간의 본질을 건드리는 그 구절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많은 몸들과 연락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기운을 2000년 넘도록 세상과 소통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글이 가진 힘이고 글을 쓰는 몸이 가진 힘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있다. 나를 극복하여 더 뛰어난 몸이 되기 위해서, 오랫동안 세상과 연락하는 훌륭한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 글을 쓰려한다. 닫히고 막힌 몸으로 끝없이 거짓말만 하는 내게 함께 산책하고, 낭송하고, 글을 들어주는 벗이 있어 나의 몸과 거짓을 닦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의 몸은 다른 소통을 위해 해체되겠지만, 어쩌다 삶의 본성을 비춰내어 읽을 수 있는 글을 남기고, 암송할 수 있는 글을 남겨 후세의 사람과 연락된다면 나의 기운은 다른 몸속에서 다시 살아 숨 쉴 것이다. 글쓰기, 이것이 내 몸이 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건강이다. 또한 생명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일이고, 내 몸을 낳은 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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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흐르는물처럼님의 댓글

흐르는물처럼 작성일

글쓰기, 이것이 내 몸이 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건강이다. 또한 생명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일이고, 내 몸을 낳은 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칠 것이다.
이 구절을 암송하고 싶어요.^^

고은비님의 댓글

고은비 작성일

에이구~~~ 이쁜 것!! 
속까지 실해요!!!

도연님의 댓글

도연 작성일

여러모로 찔리는(?) 대목이 많은 글입니다.
몸과 글쓰기.

많은걸 생각하게 해주는 글, 고맙습니다...

후안님의 댓글

후안 작성일

왜 글을 써야 하느지가 아주 잘 나타난 에세이입니다. 좋은 글을 읽고 그냥 지날갈수 없어 이렇게 인사를 남깁니다. ^^

학인님의 댓글

학인 작성일

글 잘 읽었습니다. 준오샘 글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 많은데, 평소에 어떻게 과묵(?)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기도 하고요. ^^
글을 쓰는 것, 몸을 쓰는 것, 관심을 갖는 것, 소통하는 것, 연락을 하는 것... 그걸 하는 데 뭐 대단한 게 필요한 게 아니지만, 결코 만만한 게 아니란 걸 저도 느끼고 있어요. 매일 한 시간의 산책과 매주 한 구절의 암송을 꾸준히~ 해 나가고 있다니. 그 꾸준함에 박수를 보냅니다. 앞으로 공부를 하고 몸을 쓰고 글을 쓰고 함께 살아가는 준오샘을 응원합니다.

도반님의 댓글

도반 댓글의 댓글 작성일

결코 과묵하지 않아요. 글을 보면 아시다시피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