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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사람의 필사적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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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6-03 21:17 조회7,51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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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사람의 필사적인 글


조정환(감성2학년)


나라는 사람, 무기력한 사람


스피노자는 이 세상에 무엇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보고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에 신적인 완벽함이 깃들어 있음을 보았다. 니체는 이제는 인간을 지배하던 모든 가치, 즉 신은 죽어야 한다고, 이미 신은 죽었다고 얘기하고 자신의 신을 죽인 사자는 어린아이가 되기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런 이야기는 나하고는 관련이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어떤 글을 읽더라도 이런 식으로 선을 긋고 한발 뒤에서 글을 보았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나와 다른 사람인 것은 당연하다. 그 사실을 잊고서 글을 본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다름이 배우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스피노자나 니체나 공자나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까지는 많은 사유와 경험들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깊이 보려고 하지 않고 단편적인 결론만을 보면서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선을 긋는 것은 공부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공부하지 않고 뻘짓하는 것도 싫. 필사적으로 공부하는 것도 싫고, 그렇다면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지면 만족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싫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도 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은 필사적으로 피한다. 싫어하는 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마음)’을 피한다. 무언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사실 피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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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집착하지만, 돈을 모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왜 그만두었는가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해서, 어느 정도는 돈도 넉넉해졌고, 아르바이트를 7개월이나 했으면 충분하니까, 무엇이 충분하다는 것이지? 노동의 고달픔, 그리고 노동이 주는 삶의 활기도 7개월이면 충분하니까. 나는 절대. 무언가를 지나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말종인간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병에 걸리거나 의심하는 것을 그들은 죄로 여긴다. 그들은 조심조심 걸어 다닌다. 돌이나 인간에게 걸려 비틀거리는 자는 바보일 뿐이다! (중략) 그들은 가난해지지도 부유해지지도 못한다. 둘 다 너무 성가시기 때문이다. 아직도 다스리려고 하는 자가 있는가? 아직도 순종하려는 자가 있는가? 이 둘 다 너무 성가신 것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3p.

 

나는 그 모든 것을 성가셔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지독한 무기력이란 말인가, 나는 절대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신이 죽었다는 말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애초에 단 한 번도 신을 제대로 섬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신의 적을 미워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신을 섬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정신은 낙타, 사자, 어린아이다. 말종인간이 낙타처럼 짐을 지려고 하는가? 이들은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언제나 덜 무거운 짐을 찾아다닌다. 말종인간이 사자처럼 낡은 서판을 부수고 너는 해야만 한다.’라는 이름의 용을 죽이려 하는가? 말종인간은 나는 원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를 편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원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로 자신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 배부름을 느끼고 그것을 유지하려고만 하고 있는 것, 그것이 말종인간이고 나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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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지 못하는 정신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는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확실히 그렇다. 감성 2학년 우리 조의 에세이 초고 발표 때의 일이다. 에세이 초고에서 자신은 블로그에 글을 써서 자신의 생활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게 되었고 그 덕분에 바뀐 생활을 예로 들며 글을 쓰는 이유를 설명한 선생님이 있었다. 조원들이 그것은 모든 방식의 기록에서 얻어질 수 있는 효과지 선생님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블로그에 써낸 글이 감이당에서 말하는 실존적인 글쓰기와는 다르다는 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상황에서,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발끈하고 화를 냈다. 나는 놀랐다. 거기서 화를 낼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미 전부 설명했는데 그래도 자신이 맞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역으로 발끈하며 이야기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나는 지금 누가 잘한 건지 잘못한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핏 보면 별것도 아닌 상황에서 화를 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글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면 그냥 , 그런 것도 같군요.’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글이 맞는데요.’ 한다고 , 그럼 알아서 하세요.’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블로그의 글이 글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화를 낸다는 것은 무언가가 자신의 실존에 혹은 자신이 실존하는 방식에 반()할 때 그것을 배제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누군가 내가 쓴 글을 통째로 부정했을 때 나는 화가 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리 없다. 나는 실존적인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서문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감이당에서 3년 동안 있었는데도 아직 자신의 무기력함에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에 쓴 글을 보면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해서 열심히 쓴 것 같은데 사실 내 무기력함에 대해서 알고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사실 이렇게까지 쓰고 창피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무엇을 숨기리. 그냥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던 때와 똑같이 말할 수는 없다. 이제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가, 화를 내지 못하는 무기력한 정신, 나는 이제 창피하다. 창피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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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라. 무기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뚫어져라 쳐다본 것은 좋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사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에는,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생활이 정신과 마찬가지로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무기력에 자도 입에 담을 리 없다. 당장에 내가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있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틈이 있었을까? 아르바이트하고 있을 때는 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더욱 놀고 싶었다. 겨우 새벽에 잠깐 아르바이트를 뛰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보상심리가 작용했다.


감이당에 나오지 않는 날에는 무조건 친구를 불러서 놀았다. 거기다 신기하게도 노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자신이 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를 원했고 그런 시간이 1초라도 더 지속되기를 바랐다. 사정이 생겨 놀 수 있는 시간에 놀 수 없게 되면 화가 나기도 했다. 보상 심리든 뭐든지 간에 분명히 지금보다는 활기가 있었다.


올해 들어서 군대에 가라는 말을 많이도 들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것인지 개그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다. ‘내년에 독립해? 군대에 가라.’ ‘대학은 가지 않을 거야? 군대에 가라.’ ‘살이 안 쪄? 군대에 가라.’ ‘밥을 늦게 먹네? 군대에 가라.’ 감이당에 있으면서 공부하라는 소리는 많이 들었는데 예전에는 공부로 약 팔던 사람들이 이제는 군대로 약 파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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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신의 무기력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같은 형식의 대답을 들었다. ‘삶이 무기력해? 군대에 가라.’ 이것은 단순히 개그로 취급하고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군대에 가면 지금처럼 무기력해질 방법이 없어질 것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생활을 지탱하기 바쁜데 무기력할 수가 없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한 활기는 위험하다. 물론 당장 해결책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군대에 가면 거기서 살아남을 생각만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면? 군대라는 환경이 만들어낸 활기를 지속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정말로 군대에 가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군대를 그만두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는다? 아니다. 사실 군대에 가는 것 이외에는 활기를 유지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군대가 포인트인 것 같이 보이니까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무언가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과연 활기찰 수 있을까?


활기차다는 것은 정신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자신이 활기차다고 말한들 그냥 헛소리로 들릴 뿐이다. 다만, 그 일이라는 것이 꼭 돈을 벌려고 직장에 가는 것이나 군대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집안에서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데 활기찬 사람은 사실 하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취미생활로 그림 같은 거라도 그리고 있거나, 집안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어찌 됐든 하는 일이 분명히 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을 때 일을 하고자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는 있겠지만 무언가 일을 하는 것이 무기력하지 않을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다.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나 혼자 아무리 궁리한들 쓸 만한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이번 학기에 읽은 책 중에서는 에티카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인간이 가지는 모든 감정은 외부와의 마주침에서 생기는 것이지만 그 감정들은 모두 자신의 실존을 지키기 위한 노력, 즉 코나투스에 다름없다. 욕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미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욕하는 시어머니를 생각하기만 해도 자신의 정신적 능력과 신체적 능력이 떨어지는(쉽게 말해서 치가 떨리는) 시어머니를 향한 증오의 감정을 적어도 자신보다는 행복해 보이는 시누이를 향한 감정, 즉 타인(시누이)의 행복을 슬퍼하는 감정인 질투가 웃돌았기 때문에 시어머니보다 시누이가 더 미운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투가 증오를 웃돌았다고 해서 시누이를 더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감정의 주체는 자신이라는 것, 욕을 한 사람을 미워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 마찬가지로 욕을 하지 않았더라도 미워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코나투스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 육체를 가진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도록 설계 되어 있다. 오직 육체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어떻게 자신이 느끼는 것 이외의 세상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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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번 정리해 보니까 알겠다. 정말로 스피노자는 긍정의 철학자다. 선과 악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완벽하며 그렇기에 모든 존재의 운동은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을 피하고, 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을 바라는 운동으로 나눠야 한다. 내가 무기력한 상태에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내가 무기력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무기력할지라도 매일같이 감이당에 나오고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아도 꾸역꾸역 책을 읽고 한자를 외워간다. 그것은 당연히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다. 다만, 나는 그것이 작은 완전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피하다고 말한다. 스피노자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이대로도 완벽하니까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언제 스피노자가 완벽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었나? 한 바퀴 빙 돌았지만 뻔한 결론을 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 하는 것과는 다른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감성 2학년 공부를 하는 것도 힘들다고 곧잘 말하곤 한다. 그런데도 무기력한 것은 사실 감성 2학년 공부가 쉬워 죽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어려움이 더는 나에게 활기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한층 더 완벽해지기를 바란다.

 

아직도 솔직하지 못한 것 같다

저 뻔한 결론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정말로 완벽해지기를 원하는가? 왜 완벽해져야 하는가? 아니 생명체는 모두 본능적으로 완벽해지기를 원한다. 기쁨이나 슬픔은 그러한 본성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한가하게 노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내가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이거다. 이미 스스로 (나름)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어렵게 다른 행복을 원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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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에서 말하길, 수동적인 사람은 수동적인 방법으로 기쁨을 추구하고 능동적인 사람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기쁨을 추구하며 이미 슬픈 사람은 그러한 슬픔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이미 기쁜 사람은 기쁜 상태를 지속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글을 급하게 마무리 지으려고 하면서 필사적으로 언급을 피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미 행복한 사람이 과연 다른 일을 시도하려고 하는가? 수동적인 기쁨에 상태에 있는 사람이 수동적인 기쁨을 포기하고 능동적인 기쁨을 얻으려고 할 것인가? 나는 풍족한 의식주에 기쁨을 느끼고 게임을 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또 여러 가지 외적 요인들에 의해 기쁨에 속하는 감정들을 느끼고 있다. 그것들을 누릴 수 없다면 그러한 감정들은 슬픔에 속한 감정들로 바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동적인 기쁨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동적인 기쁨이든 능동적인 기쁨이든 상관없다! 이미 기쁜데 무엇을 바라겠는가. 음식이 인스턴트식품이든 농부의 피와 땀이 들어간 먹거리든 아무런 상관없다. 내가 먹는 밥이 부모님의 돈으로 사 먹는 밥이든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사 먹는 밥이든 아무런 상관없다. 맛있으면 그만. 맛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직 연애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연애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가 말한 바로는 정념적 사랑은 1종 인식, 즉 수동적 인식이다. 그렇지만 연애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쾌감을 얻기 위한 사랑, 독점욕으로 점철된 사랑은 서로의 신체적 역량의 증가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그렇게 수동적인 감정으로 움직이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신체적 능력의 감소를 일으킬 것이니 연애를 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한다면 개무시 당하는 것은 기본이요 구타당하지 않는다면 좋게 넘어간 것이다. 위의 대사의 핵심은 서로를 바라보는 사랑보다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랑을 하라는 것이지만 이미 불이 붙어 눈부시게 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성찰을 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 슬픔은 사람을 쉽게 잠식하지만, 그것은 기쁨도 마찬가지다. 슬픔에 취해 살든가 기쁨에 취해 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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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쓴 결론은 엉망진창이라는 것이다. 내가 무기력함을 벗어나고 싶은 것은 스피노자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무기력한 상태로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책이 와 닿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아도 나는 안 된다. 계속 부모님 등쳐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나는 안 된다. 스스로 집에 처박혀 있는 것이 한심하다고 느껴도 나는 안 된다. 알게 되었어도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나는 무기력한 상태로 있는 것이 좋다. 여전히 무언가에 열성적으로 대하는 것이 피곤하게만 느껴진다. 신체적 능력의 감소를 느낀다!!! 내가 조금 더 활발해지고자 하는 것은 내가 활발한 것에 기쁨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다. 더 완벽해지기 위해서인지도 이제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 누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사람보다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더 완벽하다고 말하는가? 누가 산에 가지 않는 사람보다 매주 산에 가는 사람이 더 완벽하다고 말하는가? 이것들은 모두 필요에 의한 것이다. 내가 활발해지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을 충족하려는 것에, 그리고 내가 세상과 소통하려는 것에 무기력함이 방해되기 때문이다. 단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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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종인간2님의 댓글

말종인간2 작성일

개념을 가지고 놀 수 있다니...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다음에세이도 기대할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