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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신에게 한 방 날리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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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6-04 07:43 조회6,46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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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신에게 한 방 날리는 글쓰기


김영미 (감이당 대중지성 2학년)


감이당에서 스스로 삼가는 것이 하나 있다. 기독교에 관해 일체 이야기하지 않는 것. 여기서 오래 공부하고 살아남으려면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만의 계율(?)은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기독교 세계관의 폐해에 대해서 자주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머리에서 ‘신은 죽었다’고 기독교인들에게 선방(?)을 날리지 않았는가. 머리로는 니체의 주장에 동조하지만 칠정이 상하는 것은 사실이다. 왜 이런 감정이 일어나는지를 공부의 주제로 삼으면 좋으련만 처음엔 수면 밑으로 눌러 버렸다. 이것이 평소 내 삶의 태도이다. 이런 내게 조원들은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살펴보라고 권유하였다. ‘드디어 계율을 깨야 할 때가 왔구나’라는 긴장이 생겼지만 이것이 내게 용신일 거라 믿으며 직면해 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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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로 변신하는 글쓰기

‘신은 죽었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한다. 기독교의 낡은 가치는 사라져야 하고, 기독교가 새로운 가치로 재해석되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라고. 어디까지나 머리로만. 실제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들어버렸다는 것. 그 자체가 나에게 두려움이었다. 절대 들어서는 안 될 금기의 영역에 발을 담근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진짜로, 정말 신이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하는 혼돈과 혼란이 밀려왔다. 세상의 창조자이고 통치자인, 내 삶의 중심에서 나를 움직이게 했던 존재가 없어진다면 나란 존재도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비록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교회를 떠났지만 하나님이 없는 세계를 생각해 보진 않았다.

또한 차라투스트라가 신이 인간을 억압하고 감시하는 존재라고 연설하는 장면도 도전적이었다. 그동안 인간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살지만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예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갈등했다.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그러다가 죄를 지으면 어떡하지, 차라리 매뉴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은총이 아니라 얽매임 같았다. 그동안 의식 밑으로 눌러놨던 고민들이 올라오니 공포 영화 속 끔직한 장면을 본 듯 애써 외면하고 회피했다.

그럼에도 나는 차라투스트라나 곰샘의 강의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며 ‘나도 안다’고 생각했다. 이분법적 사고와 가치, 기독교의 자연과 문명에 대한 이해와 자세, 약함과 자비에 대한 도덕적 태도 등은 이전 신앙공동체에서 배웠던 담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전적인 질문에 봉착할 때면 불안, 혼란, 두려움 등에 휩싸였다. 이런데도 나는 왜 안다고 착각했을까? 생각 따로 정서 따로 인 몸이 하나의 신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사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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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몸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였다. 나는 금욕과 절제의 대상으로서 몸을 이해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묵상하였고, 저녁에는 그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자신을 곧추세웠다. 주일성수, 금주(禁酒)는 물론이고 ‘사탄’의 문화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 기독교인으로서 큰 사명을 감당할 것이고 명예, 사회적 지위, 부 등 모든 영광스런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낙타와 같은 삶이었다.

달콤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청교도적인 신앙생활이 버거웠다. 쾌락은 세속적인 것이고, 기독교인은 하늘에 속해 있으니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라는 명령이 싫었다. 나는 미워하는 사람을 마음껏 욕하고,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콘서트나 공연에서 연기자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이미 무대 위에서 그들과 함께 노래하고 연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이내 지워야 했다. 음욕과 정욕에 사로잡힐 수 있으니까. 나의 몸은 나를 괴롭게 하는 욕망 덩어리 같았다.

 

일찍이 영혼은 몸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최고의 경멸이었다. 영혼은 몸이 마르고 추해지고 굶주리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여 영혼은 몸과 대지로부터 달아나고자 했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16-17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고민을 안고 청년기에는 주류 교회를 벗어나 공동체 교회로 이적했다. 그곳에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공부하면서 ‘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몸은 나와 분리되지 않았고, 나의 현재를 드러내는 현장으로 어떤 관계 속에서 사는지에 따라 사유와 일상이 달라짐을 알았다. 그래서 몸의 상태를 드러내는 일상을 바꾸고자 단식과 생채식, 풍욕과 냉온욕 등을 꾸준히 실천하였다. 그러나 공동체는 나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전히 관계 안에서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생활방식을 웰빙으로 바꾼 것이지 진정 몸과 마주치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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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몸과 화해하고 마주치는 사건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우선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짐을 부과한 신과 직면해야한다. 이것은 나에게 두렵고 떨리는 일이어서 사자의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사자는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명령과 의무를 지우는 신에게 ‘아니요’라고 외쳤다. 차라투스트라는 낙타가 사자로 변신한 뒤에야 사막의 주인이 되고 자유를 얻는다고 하였다. 자기에게 무거운 짐을 부과한 신과의 정면승부. 이것이 내게 남겨진 숙제이었다.

이번 글쓰기는 내가 낙타에서 사자로 변신하는 과정으로 인도했다. 글쓰기는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려는 나를 붙잡아 앉혀 놓고 직면하게 했고, 생각 따로 정서 따로의 몸으로 살았음을 깨닫게 하였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답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를 만나는 근육이 생기고 나를 둘러싼 껍데기들을 벗겼다. 이것이 나에게 글쓰기이다. 아직은 나를 만나는 근육이 약하지만 조금씩 나를 만나는 힘을 기르고 있다. 

은폐된 욕망에 구역질하는 글쓰기

이번 에세이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내가 어떤 단어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머리로는 알겠는데 정서적으로는 불편해’라는 것이었다. 내가 왜 ‘안다’는 것에 집착했는지가 궁금했다. 몸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굳이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과 부끄러움을 뜻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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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친구 따라 처음 교회에 다녔다. 신참인 나는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겨우 외우고 있을 즈음 주일학교에서 성경퀴즈대회가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에피소드와 인물들에 대한 문제였는데 나만 빼고 모두 척척 맞춰 속상했다. 직장 초년 시절도 그랬다. 동료들은 직장생활에 필요한 매뉴얼을 이미 알는 것 같았고 나만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 같았다. 

열등감인지 어린아이같은 생각인지 모르는 불안에 깔려 있는 밑마음을 보면 욕심과 허영심이 숨어있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달리는 아이와 같아지려는 욕심. 초보이면서 숙련공인 것처럼 보이려는 허영심. 주류 교회를 나와 공동체 교회로 이적했을 때도 빨리 적응하고 싶어서 1년 동안 일요일마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었고 세미나를 했다. 몰랐던 영역을 알게 된 기쁨으로 1년을 한번도 거르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지적 교만이 커졌다.

이것은 말종인간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온갖 지식과 사상으로 온 몸을 장식하며 남보다 멋있게 보이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예리한 지적에 마음이 찔렸다. 나는 공동체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서양철학(중세, 근현대)과 기독교 역사 등을 수강하면서 스스로 진중하게 고민하는 신앙인이라는 우월감과 허영심을 가졌다.

헛된 것을 꿈꾸다보니 오히려 배운 게 칼이 되었고, 나와 타인에게 상처를 입혔다. 아는 만큼 살지 못한다는 자괴감으로 위축되었고, 자아가 위축된 만큼 타인을 감시하고 질책함으로써 심리적 보상을 받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사는 내가 버겁고 배우는 게 무용지물이라고 생각되어 결국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자 공동체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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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나는 해박한 지식을 통해 공동체에서 오피니언 그룹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세상의 이치를 터득해서 타인과 세상을 조정하고 바꾸려는 지배욕. 내가 너희들보다 낫다라는 우월감. 이런 마음으로 공부를 했으니 10년 공부가 도루아미타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직 정직하게 반응해 주는 몸이 있어 다행이다. 생각에 동조하지 않고 슬픔, 놀람, 두려움, 공포 등의 정서적 신호를 보내어 은폐된 욕망을 돌아보게 하니 말이다. 그리고 진정한 앎을 깨닫고 싶다면 되새김질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라고, 정면 승부하여 몸과 마주한 공부를 하라고 권유해 주니 말이다. 결국 신체적 반응만이 진짜임을 깨닫게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도 이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대가 수확한 진리들 중의 하나가 구역질이다. 그대의 어떠한 말도 더 이상 진짜가 아니다. 하지만 그대의 입은 다시 말해 그대의 입에 들러붙어 있는 구역질만은 진짜다. (앞의 책 p447)

차라투스트라는 거짓, 위선, 망상, 추악한 것 등을 보았을 때 가차 없이 구역질을 하며 야단친다. 껍데기를 벗겨내고 인간의 본질을 마주하는 심연으로 내려가게 한다. 이번 글쓰기가 나에게 이런 경험을 주었다. 글쓰기를 통해 내가 어떻게, 왜 ‘앎’에 대해 집착했는지를 돌아보았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공부는 가짜임을 알았다. 이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나의 숨겨져 있던 욕망을 드러내는 구역질이었다. 

몰락을 향해 가는 글쓰기

‘신은 죽었다’라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였지만 글쓰기는 내 안의 신을 직면하는 힘과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갇혀 몸을 어떻게 부정하였는지를 보게 했다. 이제 신과 거리를 두고 내 몸과 정직하게 대화하는 시간이 필요함도 알았다. 특히 무시하고 회피했던 정서와 감정들을 긍정하고 면밀하게 관찰하려고 한다. 또한 은폐시켰던 욕망을 끊임없이 드러내어 가볍게 살고자 한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금욕과 쾌락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를 넘어서 내 안의 에로스를 긍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기독교 윤리에서 보면 ‘악’으로 가는 과정일 수 있다. 심연으로 내려가 자기를 만나는 시간은 신을 부정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신의 통치와 명령을 거부하고 대항하는 과정이 반복될 것이다. 이것은 계명을 거스르는 일이고 죄이다. 더불어 신을 부정하는 것은 동시에 나를 부정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하나님과 나는 딱 달라붙은 하나의 신체였으니까. 둘을 분리하여 하나씩 껍데기를 벗는 과정은 몰락의 길이다. 그 자리에서 절대적 우위를 가졌던 신과 대등한 위치에서 마주하고, 의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몰락해 가는 이 길은 다시 살기 위한 과정이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수많은 신들, 특히 기독교의 하나님, 지식 이외에도 가족, 물질과 자본 등 내 안의 신에게 한 방 날리는 시간이 될 것이다. 몰락의 시간은 자신을 찾고, 자기를 넘어서는 과정으로 축복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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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 글쓰기가 있다. 글쓰기를 하면서 더 깊은 심연으로 몰락하고자 한다. 그간 산책하거나 여행하면서 자신을 만나고자 애썼지만 내 몸의 습관을 바꾸기에는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글쓰기가 나에게 강력한 과정임을 이번 에세이를 통해서 깨달았다. 글쓰기는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고, 존재가 가벼워지는 느낌을 갖게 했으니까. 이제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위대한 정오란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길의 한 가운데에 서 있을 때이며, 저녁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길을 최고의 희망으로서 축복하는 때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새로운 아침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몰락해 가는 자는 자신이 저 너머로 건너가는 자임을 알고 스스로를 축복할 것이며, 그때 그의 인식의 태양은 그에게 정오의 태양이리라.  (앞의 책 p136)



댓글목록

key1254님의 댓글

key1254 작성일

맞아요. 글도 샘도 변하신듯 ^^ 저도 잘 읽었습니다~

오우님의 댓글

오우 작성일

자신 만의 글쓰기를 통해 내 안의 '신'에게 한 방 날린 솔직한 영미 샘 글 재미있게 읽었어요^^ 공부를 통해 가벼워지는 샘의 모습이 참 보기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