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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의 ‘진실성’에서 ‘진화’를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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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8-06 17:36 조회5,6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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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의 ‘진실성’에서 ‘진화’를 배우다


심남희, 이경숙, 이소민, 장현숙 (수요 대중지성 밴드 4조)


‘진실성’을 밴드 글쓰기 주제로 정하게 된 건 너무나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밴드의 첫 만남. 「여덟 마리 새끼 돼지」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해보았다. 그랬더니 엉뚱하게도 생물의 진화에 대한 내용보다는 굴드의 따뜻함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텍스트에는 온통 사물, 동물, 사람에 대한 굴드의 애정이 잘 드러나 있었다. 우리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부러웠다. 그의 어떤 시선이 이토록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 우리는 굴드의 소소하고 따뜻한 마음이 가장 잘 느껴졌던 4부 ‘진실성’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우리가 굴드로부터 느낀 따뜻함은 그가 말한 ‘진실성’ 때문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진실성은 어째서 우리에게 크나큰 매력을 발휘하는가?”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스티븐 제이 굴드, p337


진실성에 대한 오해 

흔히 ‘진실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다. 정직한 것,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공유하는 어떤 마음 같은 것. ‘참되고 바른 성질이나 품성’이라는 사전적 의미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성’은 아주 추상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인 개념을 가지고는 에세이에 적힌 굴드의 ‘진실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성과 굴드가 말하고 있는 진실성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추상적인 ‘진실’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굴드의 진실성을 이해하려 하니 이야기는 계속 쳇바퀴 돌뿐이었다. 그러다 급기야 굴드의 그 따뜻함은 굴드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찝찝함은 무엇인가? 어디서 어긋났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는 굴드의 진실성을 알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진실성’과 ‘진화’는 어떤 관련이 있기에 생물의 진화를 다루는 에세이들 속에 ‘진실성’이란 별도의 이름으로 굴드의 단상들을 써놓았을까?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쩌면 ‘진실’이라는 말에 꼬드겨 진화의 바다와는 상관없는 멀고도 먼 안드로메다를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방법은 없다. 다시 텍스트를 읽어볼밖에. 이번엔 다 함께 찬찬히 읽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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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스 식당 ‘카운터’에서 생긴 일

문제는 시어스 식당이다. 거기서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평범해 보이는 장면들 속에서 진화생물학자인 굴드는 뜬금없이 ‘용도’의 진실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혼자 도취라도 된 듯 ‘용도의 진실성을 잃지 않은 훈훈한 우정. 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으로 서로 신경 써주는 사람들’(p341)이라며 감격스러워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보기엔 별일이 없었다. 유명한 18개짜리 팬케이크를 먹으러 한번 씩 가던 식당을 그날도 갔을 뿐이다. 하지만 아주 사소해보지만 차이가 있었다면, 평소엔 식당에 갈 때 마다 동행이 있었기에 늘 ‘탁자 자리’에 앉다가 그날은 혼자여서 ‘카운터’에 앉았을 뿐이다. 탁자 자리와 카운터.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사소한 ‘장소’의 차이. 그 사소한 차이에서 굴드는 ‘진실성’을 발견했다.

카운터에 앉은 후, 그는 카운터가 ‘단골들의 영역’임을 알게 되었다. 단골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종업원들은 알아서 단골들의 취향에 맞게 음식을 준비했다. 평소 탁자 자리에만 앉았던 굴드는 ‘카운터’가 이른 아침 출근길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의 영역이라는 것을 몰랐었다. 카운터에 앉아보니 탁자 자리와는 무언가 달랐고, 거기에서는 그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훈훈한 우정과도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같은 식당 안이었지만 앉은 장소에 따라 다른 관계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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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의 ‘진실성’

이제 본격적으로 굴드가 시어스 식당의 카운터에서 발견한 ‘진실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가 용어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진실’이라는 말에 혹해서 우리 마음대로 그 뜻을 생각해 버린 후 굴드가 말하는 의미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진실성은 여러 형태가 있다. 어떤 형태든 진실성이야말로 우리가 진품에서 느끼는 평온한 만족감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이다.”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스티븐 제이 굴드, p338

굴드는 진실성은 ‘진품’에서 느끼는 평온한 만족감을 만들어내는 핵심요소라고 한다. 그러니까 굴드가 말하는 진실성은 ‘진품’과 관련 있는 것이다. 어떤 물건, 장소, 역동하는 현실과 같이 구체적인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영어 단어로 보면 ‘honesty’라기 보다는 ‘authenticity’에 가깝다. 진품, 진짜, 확실성. 이는 우리가 알고 있던 참됨, 바른 성질의 품성이란 의미의 ‘honesty’와는 다른 것이다. ‘진품, 진짜’는 물건이나 장소 등과 같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어떤 것과 관련 있지만 ‘참됨, 바른 품성’은 주로 인간성과 관련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성’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굴드는 진품, 진짜에서 느껴지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는 인간성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니 우리가 어디서 어긋났는지 명확하게 보인다. 

굴드에 따르면 진실성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한다. 사물의 진실성, 장소의 진실성, 용도의 진실성이 그것이다. 먼저, 사물의 진실성이란 ‘진품, 진짜인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어떤 물건이 ‘진품’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 물건의 물리적 측면만을 말하지 않는다. 물리적 측면만을 말한다면 똑같은 재료로 만든 똑같은 모양의 물건은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든 진품이 되어 버리니까. 우리가 진품이라고 할 때는 그것이 만들어질 때의 시간, 공간을 모두 포함하여 말한다. 하나의 그림이 진품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림을 이루고 있는 물질(캔버스, 물감)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린 사람, 그려진 시대, 그 그림이 그려진 물리적 공간을 모두 포함하여 생각한다. 그러니 진품에는 외형적으로 보이진 않을지 몰라도, 그것이 만들어 질 때의 시공간을 담고 있다. 

굴드는 사물의 진실성에 관한 사례로 워싱턴의 국립항공우주박물관을 방문한 맹인 단체 관람객의 이야기를 한다. 큰 홀의 천장에 걸려있는 진품을 볼 수 없는 맹인들의 상황을 배려하여 축적 모형을 제공하겠다고 했을 때, 이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원본 바로 아래에 모형을 배치해 달라고 했다. 원본을 볼 수는 없지만, 그 원본이 담고 있는 진실성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우리는 한때 정말 공룡이 살을 입고 있었던 뼈에서는 경외감을 느끼고, 동일한 겉모습의 유리섬유에는 약간의 흥미만을 느끼”(p338)는 것도 바로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 진품은 그것이 만들어질 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진품이 담고 있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진실성’이란 이름으로 ‘평온한 만족감’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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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굴드는 맥락과 배경에서 떼어져 나온 진품들은 흥미를 자아낼지 몰라도 영감을 일으키기는 어렵다’(p339)고 하며 장소의 진실성을 설명한다. ‘맥락과 배경’이란 어떤 의미일까. 장소의 진실성의 예로 든 ‘런던브리지’를 보자. 런던브리지는 영국 런던 템스 강 위에 놓여있는 다리로 런던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런던브리지가 ‘런던브리지’라는 관광명소가 되기까지는 그 ‘장소’에 존재하면서 겪어낸 시간이 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지나거나, 초등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지나가거나, 런던브리지는 그 자리에 있었다. 런던브리지에는 그것의 배경과 그 장소가 함께 하여 하나의 맥락을 이루는 세월이 담겨있다. 런던의 기후, 런던의 사람들, 지리적 배경과 그 장소가 맺은 맥락 속에서 ‘런던브리지’가 되었다. 굴드는 질문한다. 런던브리지를 해체하여 미국에서 재조립한다면 그것을 ‘런던브리지’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 될 뿐이다. 런던, 템스 강 위에 있을 때만 ‘런던브리지’일 수 있다. 그 장소가 가진 독특한 맥락이 장소의 진실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굴드는 ‘용도’의 진실성을 말한다. 용도의 진실성은 앞에서 설명한 사물, 장소의 진실성보다는 추상적이다. 사물이나 장소와 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무언가가 없으니 헷갈린다. 일단, 굴드의 말을 들어보자.

“적절한 장소에 놓인 진품이라 해도 용도가 변경되면 평가가 절하된다.”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스티븐 제이 굴드, p339

적절한 장소에 놓인 진품이지만 ‘용도가 변경’되면 평가가 절하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든 원래의 용도가 있다는 뜻인데, 원래의 용도란 무엇인가? 굴드는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를 언급한다.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는 만들어진지가 무려 142년이나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시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이 이용하는 케이블카이다. 굴드는 관광객들과 케이블카를 타는 것보다 ‘7시 반에 케이블카에 올라서, 케이블카를 일터로 향하는 대중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는 샌프란시스코 주민들과 함께 여행’(339)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이른 아침 케이블카’를 좋아하는 이유는 케이블카가 ‘대중교통수단’이라는 ‘원래용도’로 사용되고 있을 때 가장 케이블카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라는 물건이 샌프란시스코라는 장소와 함께하면서 시민들의 원래의 용도로 사용될 때 가장 케이블카답다는 것이다. 용도의 진실성. 굴드는 케이블카와 함께 그날 아침 시어스 식당의 카운터에서도 용도의 진실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용도의 진실성에서 진화생물학자인 굴드는 ‘진화’와 관련된 어떤 힘을 발견했다.   

‘용도’의 진실성, 세 가지 구성 요소

이제 다시 시어스 식당의 ‘카운터’로 가 보자. 굴드는 평소 탁자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다가 카운터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카운터의 느낌은 달랐다. 그곳은 단골들의 영역이었다.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복잡함을 피해 이른 시간 식당에 들렀는데 그 시간은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출근 시간이었다. 단골들과 종업원 사이엔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짧은 대화가 오가고, 서로를 챙겨주는 소소한 행동들이 오간다. 굴드는 탁자 자리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우정’과도 같은 훈훈한 느낌을 받았다. 어떤 곳이든 출근 시간은 그곳 시민들의 일상이 그대로 보이는 시간이다. 굴드는 일상의 한 부분인 ‘출근길’이라는 시간에, ‘카운터’라는 단골영역에서 형성된 용도의 진실성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그가 발견한 ‘용도’의 진실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리처드 르원틴이 얘기한 ‘생명체’와 ‘환경’에 대한 관계를 살펴보면서, 용도의 진실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환경이 없으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생명체 없이는 환경도 있을 수 없다. ... 환경이란 주변을 둘러싸거나 에워싸고 있는 무엇이지만, 단순히 둘러싸는 게 아니라, 반드시 중심에 무언가를 놓고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생명체의 환경은 그것과 관련된 외부 조건의 반영이다. 왜냐하면, 외부세계의 상황에 따라 효과적으로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3중 나선」, 리처드 르원틴, p70

리처드 르원틴의 「3중 나선」에서는 ‘생명체’와 ‘환경’은 각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호작용’ 속에서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거나 적응하는 관계를 ‘상호작용’이라고 하지 않는다. ‘상호작용’이란 그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보통 생명체가 일방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환경이 바뀔 때마다 생명체는 바뀐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르원틴은 환경도 생명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아니, 환경은 생명체에 의해 구성될 때만 그 생명체의 ‘환경’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딱따구리라는 생명체가 있다. 딱따구리는 둥지를 짓기 위해 나무에 구멍을 뚫는다. 딱따구리가 뚫은 구멍은 딱따구리에게는 ‘환경’으로 구성되지만, 다른 새들에게는 그저 배경처럼 존재하는 구멍이다. 이렇게 ‘환경’은 각 생명체에 의해 그 생명체에 맞게 ‘구성’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니 같은 장소에 산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생명체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세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각 생명체의 환경은 달라진다. 이 말은, 생명체를 ‘단순히 둘러싸고’만 있는 보편적인 환경이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생명체의 삶의 방식에 따라 그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둘러싼 외부세계의 시공간이 맥락을 함께할 때, 비로소 생명체의 환경이 되는 것이다. 

‘생명체’와 ‘환경’의 이러한 관계를 생각하며 다시 시어스 식당의 카운터를 보자. 굴드가 보기에, 시어스 식당 카운터는 단골과 종업원 그리고 시어스 식당이 ‘상호작용’하는 영역, 즉 서로가 서로에게 ‘환경’이 되어 있는 영역이었다. 굴드는 카운터 자리에 앉았던 그 날 이전에도 시어스 식당에 자주 방문했었다. 하지만 탁자 자리에 앉은 굴드에게 시어스 식당은 잠시 마주쳤다가 스쳐 지나가는 배경일 뿐이었다. ‘환경’이 되진 못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더라도 서로서로 ‘환경’을 구성하고 있지 않으면 ‘용도’의 진실성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니 ‘용도’의 진실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첫째, ‘출근 시간’과 같은 일정 시간을 공유했느냐. 둘째, ‘카운터’ 즉 어떤 장소를 중심으로 모였느냐. 셋째, 생명체(단골)와 환경(종업원, 식당)이 상호 작용했느냐 와 같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만족하여야 한다. 첫째와 둘째 요소는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고 마지막 요소인 서로에게 상호작용하는 환경적 관계가 되어야 비로소 ‘용도가 진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용도의 진실성은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굴드는 ‘이른 아침 케이블카’에서도 용도의 진실성을 느낀다고 했다. 이른 아침이라는 시간에 케이블카라는 공간에 모인 사람들은 ‘등교하는 아시아계 학생들’이나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역들’(p339)이라는 표현과 같이 일상의 한 부분을 케이블카와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월 정기권을 쥐고 올라탄다’(p339)는 표현에서 이들이 케이블카와 지속적인 시간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시아계 학생들이나 회사 중역들에게 케이블카는 등굣길이나 출근할 때의 용도로 케이블카를 사용한다. 굴드는 같은 케이블카더라도 관광객이 일회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에서보다는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일상을 공유하는 지속적 시간에서 용도의 진실성을 발견한 것이다. 케이블카는 학생들의 등굣길과 회사 중역들의 출근길을 사용될 때 그 ‘용도가 진실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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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한 종, 공동체의 탄생

우리는 「여덟 마리 새끼 돼지」전반에서 느껴지는 굴드의 따뜻함이 굴드가 말한 ‘진실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부터 ‘진실성’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진화생물학자’인 굴드에게 ‘진실성’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우리가 보기엔 너무나 평범한 식당의 한 장면이 굴드에겐 어떤 영감을 가져다줬다. 같은 장면이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너무나 다르다. 평범하고도 평범한 카운터, 그리고 거기서 발견한 ‘진실성’, 그것은 ‘진화생물학자’인 굴드에게 어떤 의미일까? 
매일 아침 시어스 식당의 카운터에서는 ‘훈훈한 우정’이 느껴진다. 카운터를 찾은 단골과 식당 종업원 사이의 ‘용도의 진실성을 잃지 않은’ 우정 때문이다. 단골들도 처음부터 단골은 아니었을 것이다. 식당을 처음 방문하고 하루 이틀 오게 되다가 여러 날 반복하여 찾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날들이 지나면서 종업원들과 익숙해지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도 이야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함께했던 공통의 장소와 시간의 농밀함이 ‘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으로 서로’(p341)를 신경 쓰는 관계로 만들었다. 버터가 몸에 좋지 않은 한 단골에게 종업원은 알아서 버터를 빨아내고 가져다주었다. 특별해 보이지 않은 행동이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환경’이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행동이다. 

“우리에게는 많은 공동체가 있고, 그들은 서로 중첩되며 그 힘도 다양하다. 나는 내가 개중 한 집단에 속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이것은 흡사 지역 색이 완연한 공통의 장소를 통해서 하나의 단일한 종이 탄생하는 것과 같다.”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스티븐 제이 굴드, p347 

단골과 시어스 식당, 종업원이 진실성을 잃지 않으며 서로의 ‘환경’이 되어 존재하는 모습은 카운터라는 작은 장소를 중심으로 흡사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 모습과 같다. ‘지역 색이 완연한 공통의 장소’와 그 장소를 기반으로 생명체와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집단적 모습은 공동체의 다름 아닌 모습이다. 우리는 흔히, 공동체는 어떤 이념이나 목표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주변의 많은 공동체들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굴드가 본 공동체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도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적도 따로 없이, 그저 일상의 시공간을 함께하며 서로에게 환경이 되어 존재하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다. 그러니 굴드가 시어스 식당 카운터에서 공동체의 모습을 봤다 할지라도, 정작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단골들과 종업원들은 본인들이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굴드는 단골들과 식당, 종업원들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작고 독특한 공동체의 탄생은, 흡사 지역 색이 완연한 공통의 장소에서 하나의 ‘단일한 종’이 탄생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단일한 종’의 탄생. 진화생물학자인 굴드에게 ‘용도’의 진실성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체, ‘단일한 종’의 탄생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생존을 위한 분투(struggle for existence)’의 방식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투라 하면 보통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투쟁을 떠올린다. 투쟁에서 살아남은 종은 진화하고 살아남지 못한 종은 도태되는 약육강식의 세계.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헤카툼’(p208), 즉 소 100마리가 한꺼번에 도살되듯 ‘대규모로 제거’되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운 좋은 극소수’ 개체만이 ‘단일한 종’을 형성한다. 생물은 이렇게 끊임없이 경쟁하는(적자들만이 생존하고 경쟁에서 진 개체들은 가차 없이 제거되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하지만, 굴드가 본 진화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굴드는 시어스 식당에서 작고 독특한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는 ‘용도의 진실성을 잃지 않은 훈훈한 우정’과 ‘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으로 서로 신경써주는 사람들’(p341)이 있었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종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꿋꿋이 공동체를 이루어 ‘단일한 종’의 형태로 살아내고 있었다. 시어스 식당 카운터의 단골들은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는다. ‘운 좋은 소수’만이 살아남고 실패한 자들이 제거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일상의 한 부분을 공유하면서, 서로에게 ‘환경’으로 존재하고 모두가 함께 살아갈 뿐이었다. 굴드는 그 아침, 시어스 식당에서 ‘생존을 위한 분투(struggle for existence)’의 다른 양상을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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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풍성하게 가지 친 관목(灌木)

이제 거의 다 왔다. 우리는 굴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막연하게 보였던 카운터와 케이블카의 ‘진실성’을 넘어 굴드의 ‘진화’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화는 풍성하게 가지를 친 관목과 같다”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스티븐 제이 굴드, p405

굴드는 진화를 나무에 비유한다. 진화는 풍성하게 가지를 친 관목과 같다고 말한다. 관목(灌木)은 교목과 달리 키가 작은 나무이다. 밑동부터 줄기가 갈라져 나오고 주된 줄기가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수북한 가지를 친다. 각 줄기의 수명은 비교적 짧지만, 고사한 줄기 근처에서는 항상 새로운 줄기가 교대로 자라나 나무 자체의 수명은 길다. 키 작고 동글동글 풍성하게 가지 친 나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풍성하게 가지를 친 관목을 진화에 비유한 굴드의 말에서 우리는 굴드가 진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관목은 각각 줄기의 수명은 짧지만, 전체 나무의 수명은 길다. 하나의 줄기가 고사하면 그 근처에서 항상 새로운 줄기가 교대로 자라난다. 나무의 줄기는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겨남을 반복하지만, 전체 나무는 오래도록 살아남는 것. 굴드는 관목의 이러한 살아냄 자체를 진화에 비유했다. 나무는 성장을 목표하지 않는다. 다른 나무보다 더 커야겠다고 의지를 다지지도 않는다. 오래도록 살아남겠다고 계획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나의 줄기가 사라지면 새로운 줄기가 생겨나는 무수한 과정에서 나무는 오래도록 살게 된다. 관목의 무심한 가지 침이 관목의 수명을 오래도록 하고, 굴드는 관목의 이러한 모습이 진화와 닮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관목과 진화를 비교하다 보니, 관목에 가지를 친 하나의 가지는 인간이라는 종의 나무에 가지를 친 하나의 공동체와 비교된다. 인간을 관목에 비유했을 때, 각 공동체는 이 관목을 구성하는 무수한 가지이다. 굴드가 진화를 다루는 에세이에 ‘진실성’이란 제목으로 그의 단상들을 적어놓은 이유를 알겠다. 굴드는 진화의 힘을 관목의 ‘가지 침’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가지 침. 이것은 공동체의 생겨남이다. 새롭고 독특한 가지의 탄생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공동체들이 생겨난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나무가 살아남아 진화하는 가장 큰 힘이다. 

“자연의 다양성은 여러 차원으로 존재한다. 복제 집단이 아닌 이상, 모든 개체군의 내부에 다양성이 스며 있다. ... 지역적 다양성의 가장 큰 부분을 낳는 것은 사실 지리적 분포다. 우리가 각양각색의 환경에 적응하고 타 지역들과는 제한적으로 접촉하면서 독특함을 누적한 탓에 장소마다 다른 차이가 생겼다.”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스티븐 제이 굴드, p343

시어스 식당의 카운터와 같은 ‘공동체’는 다른 지역에도 무수히 존재한다. 그 공동체들은, 공동체가 속해있는 지역의 특색과 그곳에서 일상의 맥락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므로, 시어스 식당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마치 하나의 관목이지만 줄기마다 다른 가지를 치고, 그 가지마다 모양이 다른 것처럼. 공동체들의 특징은 ‘지방 사투리나 지역의 인사법’, ‘식사 습관’으로 드러난다. 미국 전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다이너 식당의 경우, 식당 주인들이 규격화된 지급품을 받은 후 거기에 지역적 개성을 가미하여 독특하고 새로운 메뉴를 개발한다. 이것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와 주인의 독특한 솜씨, 그리고 지역 손님의 특색에 맞춰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덕분에 같은 이름의 식당이지만 지역마다 다른 다양한 메뉴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런 작은 공동체들이 획일성의 틈바구니에서 계속 형성되는 한, 나는 다양성의 힘을 낙천적으로 믿겠다.”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스티븐 제이 굴드, p347

‘자연의 다양성은 여러 차원으로 존재한다.’(p343) 지역마다 기후가 다르고 그에 따라 자연적 조건도 다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도 다르다. 그러므로 자연의 다양성은 그러한 기후마다, 자연적 조건마다, 사람들의 성격마다 여러 차원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차원만큼이나 다양한 공동체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관목을 구성하는 가지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의 나무를 오래도록 살아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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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우리 밴드는 굴드의 따뜻함이 ‘진실성’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란 막연한 질문을 시작으로 굴드의 진실성, ‘용도’의 진실성에서 탄생하는 공동체, 단일한 종, 인간이라는 종을 이루는 관목까지 살펴보았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굴드의 따뜻함은 굴드라는 사람 자체에서라기 보다 굴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었다. 그는 잊힌 과학자, 생물 등등을 ‘용도’의 진실성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대, 그 지역, 또 그들이 그 당시에 맺은 관계를 최대한 고려하여 이해하려 했다. ‘진실성은 인간의 영혼에 호소한다’(p346)는 굴드의 말처럼, 굴드의 진실한 시선은 우리에게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앞서 보았듯이, 작고 독특한 지역에서 탄생하는 공동체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은 인간이라는 종을 더욱 오래 살게 한다. 무수한 가지가 있듯이 각기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만의 힘이 있다는 것. 굴드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 그 힘을 보았다. 대지진 후 ‘평소 좁은 지역공동체에서만 유통되던 상호 보살핌’(p348)이 샌프란시스코 전체로 확장되었다. 작고 좁은 지역에서 일상을 공유하면서 형성된 진실성이 대지진을 계기로 샌프란시스코 전체로 확장된 것이다. 이 모습은 마치 가느다랗고 허약하게 싹을 틔우던 여러 가지 들이 생각지도 않은 폭우를 맞아내고 훌쩍 자라나 당당히 그 모습을 갖추는 모습과도 같다. 이는 풍성하게 가지 친 관목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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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수많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고 있다. 그러한 공동체들은 우리의 삶과 우리 주변의 환경이 관계 맺은 진실성에 의해 탄생한다. 다양한 삶의 방식만큼이나 헤아릴 수없이 많은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나의 삶과 잠시 관계를 맺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때론 영원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기도 한다. 나와 다른 존재와 만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내 삶의 맥락에 이전과는 다른 삶의 맥락을 추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삶’이라는 관목에 새로운 가지를 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나의 삶’이라는 관목을 풍성하게 만들어 진화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일상의 시공간에서 탄생하는 공동체가 나와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매 순간 살펴보아야 한다. 시어스 식당의 탁자자리와 카운터. 그 사소한 차이에서 진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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