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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으로 만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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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8-07 11:26 조회7,24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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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으로 만나는 세상

감이당 수요대중지성 밴드 5조 (김희진·채영님·이소영·정기재)
 
 
1. 굴드가 바라본 우연
 
이번 학기 8주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온전히 과학과 함께 하는 낯선 경험을 했다. 에른스트 마이어의 ‘진화란 무엇인가’부터 이 낯설음은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지난 학기 스피노자와 니체를 통해 근대적 개념에 얽혀있는 우리를 파헤쳐 보기도 힘들었는데 이제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생명 전체의 역사란다. 지구의 역사인 45억년이라는 숫자에 0이 몇 개인지도 짐작할 수 없는데, 생명의 역사인 진화가 우리와 접점이 있기는 한 건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굴드의 「여덟 마리 새끼 돼지」를 글쓰기 책으로 정한 우리는 이후로 ‘다섯 마리 새끼 돼지’ 중 울며 집에 간 새끼돼지마냥 눈물어린 불평을 하였고, 책은 언제나 가방 속에 한 자리를 두툼히 차지했다. 그리고 반복되는 읽기와 에세이 주제 잡기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안에 진화의 이야기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연, 적응, 중복성, 무작위성, 쐐기, 진보 등등. 이 중에서 우리가 가장 흥미롭다고 느낀 부분은 ‘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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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는 '우연'을 통해 진화의 역사가 쓰여진다고 말한다

진화 과정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런 적응을 위해서는 최적의 적합함과 필연적인 목적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굴드는 진화의 과정이 완전성과 목적을 향해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고 말한다. 분투하는 생명 존재들이 만드는 ‘우연’을 통해 진화의 길이 이어진다고 말이다.

우리에게 우연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다가온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에서 우연은 계획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것을 의미하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굴드는 이런 ‘우연’이라는 단어가 진화라는 과학의 영역에서 여러 현상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굴드는 <04 여덟 마리 새끼 돼지>에서 익티오스테가의 일곱 발가락과 아칸토스테가의 여덟 발가락을 통해 사지동물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종 내에서 다섯으로 귀결한 것은 다섯이 더 안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우연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지동물이 갖고 있는 이 다섯 개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으며 표준도 아니고 필연도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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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여덟 개나 되었던 아칸토스테가

그렇다고 굴드가 말하는 ‘우연’이 막 생기는, 막 생길 수 있는, 의미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굴드는 “우연은 풍요롭고 환상적이다. 역사를 빚어내려는 인간 세력과 자연법칙이 부과한 명확한 한계 사이의 정묘한 긴장을 체현한 것이 바로 우연이다.(04 여덟 마리 새끼 돼지, p108)”라고 말한다. 즉 우연이란 어떤 힘과 한계 사이의 긴장을 통해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바다로 간 파충류가 자신이 가진 척추 뼈와 등 근육을 활용해 익티오사우루스로 재탄생하고, 포유류의 턱뼈가 귀뼈로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굴드가 말하는 ‘우연’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우연과 명확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힘과 한계 사이에서 정묘히 체현된다는 ‘우연’은 어떤 순간을 말하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굴드가 말하는 힘과 한계가 만드는 제3의 길, ‘우연’이 어떻게 작동하며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자연선택, 적응을 요구하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각자에게 부여된 일정한 조건이나 환경에 알맞은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적응을 제대로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삶을 성공적으로 살았는지의 여부를 판가름 당하기도 한다. 그만큼 ‘적응’이란 삶을 지속하고 발전시키는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생명체는 적응을 통해 지구라는 환경에서 각기 나름의 공간을 차지하고, 또는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살아간다. 환경에 적합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말이다.
 
다윈에게 진화적 변화를 일으키는 지배적인 힘은 자연선택이라는 결정론적 힘이었다. 선택은 인과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개체를 주변 환경에 맞게 변화, 적응시킨다. (28 우연에 걸기 그리고 엿보기 없기, p565)
 
다윈은 진화의 힘은 ‘자연선택’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자연선택이란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개체는 제거하고, 주변 환경에 알맞게 적응한 개체만이 생존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다윈이 자연선택을 진화의 결정론적 힘으로 본 점이다. 즉, 다윈은 자연선택으로 인해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하고, 이런 변화 자체가 진화라는 것이다. 따라서 다윈은 진화를 이끄는 강력한 힘인 자연선택만이 생명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외부의 힘으로 존재하며 진화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다윈은 ‘자연선택은 오직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지역적 적응(21 운명의 바퀴와 진보의 쐐기, p429)’일 뿐이며, 생물학적 진화는 내적 경향성이 없다고 말한다. 그저 진화는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변덕을 아주 천천히 부릴 뿐(14 구두장이와 샛별, p307)’이라고 말이다. 다윈의 말처럼 생명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생명의 적응이 얼마나 기발한지 물고기로 둔갑한 해양파충류 익티오사우루스와 뭍에서 턱뼈를 이용해 청각이라는 감각기관을 만든 포유류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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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돌아 간 육상 파충류인 익티오사우루스(어룡)는 뭍이 아닌 물속이라는 환경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외형상의 주요 측면들에서 어류와 아주 흡사한 형태를 띠며 수렴진화 하였다. 적응의 상태를 보면, 익티오사우루스는 육상 선조들의 앞뒤 다리를 물 젓기에 알맞도록 물갈퀴로 변형시켰고, 등가죽과 척추 뼈를 변형시켜 등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를 만들어서 어류의 유사 구조들과 아주 흡사해졌다.

또 다른 환경 적응의 예로 청각기능을 하는 포유류의 턱뼈를 들 수 있다. 익티오사우루스와는 반대로 물에서 뭍으로 올라 온 육상동물들은 파동을 더 이상 옆줄로 느낄 수 없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충류, 조류, 포유류는 ‘고막’이라는 새로운 구조를 발달시켰고 그중 포유류는 턱뼈로 사용되던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를 이용해 중이를 만들고 귓바퀴를 형성해 감각기관을 바꾸어 환경에 적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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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턱뼈가 청각 기관이 되었다

이처럼 적응적 측면만 보자면 외부적 힘 앞에 익티오사우루스는 새로운 구조들을 무에서 진화시켜 외형의 변화를 만들어야 했고, 포유류는 원래 진화의 이유와는 무관하게 새로운 기관을 탄생시켜내야 했다. 그만큼 강력한 변화의 요구를 외부로부터 받았다고 보여 진다. 이처럼 자연 선택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게 작용하기에 생명은 살아남기 위해서 그저 충실히 따라야만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과연 진화는 생명이 살아남기 위해 자연선택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굴드는 자연선택의 추진력이 주어져야 생명의 변화라는 움직임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 변화가 일어나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생명이 갖고 있는 내적인 한계와 그 한계로 인한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즉, 진화란 환경의 일방적 작용이 아니라 환경과 생명이 갖고 있는 내적인 한계가 마주쳤을 때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굴드를 따라가며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생명의 내적 한계란 과연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3. 내적한계, 생명체의 구조적 한계
 
익티오사우루스의 굽은 꼬리에 대한 첫 논문은 1838년 <런던지질학회보>에 발표된 리처드 오언의 글이었다. 오언은 자연선택 이론이 ‘외부 환경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내적 구조의 법칙은 너무 적게 고려(05 구부러진 꼬리뼈, p113)’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익티오사우루스의 탈구된 굽은 척추에서 꼬리지느러미를 상상한다. 그 후 화석의 발견과 많은 연구 결과 익티오사우루스는 ‘바다의 그물에 걸린 파충류’로 불리게 된다.
  
그 후 루이 돌로는 익티오사우루스의 꼬리가 된 굽은 척추를 설명하기 위해 물려받은 설계로 인한 제약을 ‘비가역’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물에서 올라온 파충류는 다시 바다로 돌아가야 하는 변화를 겪는다. 이때 익티오사우루스는 과거 선조의 모습 그대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익티오사우루스의 피부 한 꺼풀 아래에는 파충류의 역사가 담겨 있고, 파충류의 몸을 물려받았다는 점은 여러 바람직한 가능성을 제외한 상태에서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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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에서 살기 위해 수렴 진화한 익티오사우르스

익티오사우루스는 파충류의 부속을 가지고 물고기처럼 물갈퀴와 등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러나 익티오사우루스에게는 물고기와 같은 등지느러미를 만들 부속이 없었기에 등주름을 이용해 뼈대 없는 등지느러미를 진화시켰다. 물갈퀴를 만들기 위해서는 손가락뼈의 개수를 늘려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있는 빗살처럼 일렬로 늘려 세운다. 마지막으로 꼬리지느러미를 만드는 과정은 독특했다. 어류의 척추는 꼬리 시작점에서 끝나거나 꼬리지느러미 위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파충류인 익티오사우루스는 척추를 아래쪽으로 굽혀 꼬리 굴곡을 만드는 방법을 선택한다. 유일하게 척추를 아래로 향하게 한 익티오사우루스는 위치나 형태에서 더없이 효율적인 꼬리지느러미를 탄생시킨다.
  
굴드는 올바른 진화적 시각은 계통학적 시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박쥐가 기능적으로는 새와 비슷할지 몰라도 유래상 포유류이며, 익티오사우루스가 물고기처럼 보이고 물고기처럼 행동한다 해도 유래상 파충류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생명이 아무리 진화한다 해도 타고난 구조를 통한 계통진화만이 가능하지 그 계통을 넘어서는 진화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익티오사우루스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역사는 돌이킬 수 없다. 동물이 파충류의 기본 체제를 채택하는 순간 다른 많은 선택지가 영원히 차단될 테고, 동물은 물려받은 설계의 한계 내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펼쳐나갈 수밖에 없다. 물론 적응은 인상적일 만큼 넓은 범위에서 작동하며 자연선택은(비유적으로 말해서) 독창성 빼면 시체라 해도 좋다. (05 구부러진 꼬리뼈, p130)
 
앞에서 언급했던 최초 육상동물의 ‘귀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되짚어보자. 이미 알고 있듯 최초의 육상동물들은 희박한 공기로 인해 청각기능을 확보해야 한다는 외부적 힘 앞에 놓여졌다. 이들은 턱뼈의 일부였던 ‘등자뼈’를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이미 한 번 어류의 아가미뼈에서 파충류의 턱뼈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던 등자뼈는 우연히도 소리전달에 알맞은 구조를 갖고 있었다. 때마침 육상 척추동물의 머리뼈도 굳게 봉합되는 바람에 등자뼈는 딱히 할 일을 잃어버리게 되고 자연스럽게 부업이었던 청각기능을 주요 기능으로 전환한다. 자신이 가진 재료를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해서 내적설계를 변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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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돌이킬 수 없다. 내적 한계 속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야 하는 동물들

이와 같이 생명의 힘은 내적한계를 갖지만 또한 놀라우리만치 독창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진화의 역사 속에 살아남으라는 미션을 이행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뼈를 깎는 고통’이란 속담이 이런 진화의 진실을 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익티오사우루스는 뼈를 구부리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멸종의 거대한 ‘체’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포유류의 귀도 소리의 증폭은 키우지만 완벽한 구조는 아니다. 이처럼 생명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신체구조의 한계를 비틀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지만 그 상태는 여전히 불완전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환경에 적응했다고 영원히 생존을 보장받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 환경과 내부 사이의 힘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좀 더 살펴보자.
 
 
4. 외부와 내부의 정묘한 긴장
 
다면체 돌멩이도 자연선택이 세게 밀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면체가 선택에 보이는 반응은 다면체의 내부 구조에 의해 제약된다. 다면체는 제한된 위치와 한정된 가짓수로만 움직일 수 있다. 골턴의 다면체 비유를 따라 결론을 내려 보면 진화적 변화의 실제 방향은 외부의 추진력과 내부의 제약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한 기록인 셈이다. (27 골턴의 다면체를 통해서 본 개의 삶, p547)
 
진화의 낙천적 시각에서 보면 생명체는 매끄러운 탁자 위에 놓인 당구공과 같다. 따라서 환경적 압력으로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큐대는 공을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밀어낼 수 있다. 이때 진화적 변화의 속도와 방향은 외부에서 가해진 자연선택의 힘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당구공과 같은 생명체는 자신의 힘으로 큐대라는 환경적 압력을 되밀어내지 못하고 주어진 힘에 의해 이리저리 굴러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자연선택의 힘이란 절대적이기에 생명체는 그에 최적화할 때에만 비로소 생존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생존에 성공한 생명체는 가장 완벽한 구조를 가진 최적화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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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를 자연선택에 의한 변화로만 보았을 때, 생존에 성공한 생명체는 완벽한 존재다

그러나 굴드는 프랜시스 골턴의 ‘다면체’ 비유를 통해 생명체는 이처럼 수동적인 구가 아니라 한 면을 안정되게 바닥에 대고 있는 다면체라고 말한다. 다면체 돌멩이인 생명체는 자연선택이 세게 밀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 자연선택이라는 큐대의 힘이 강력하게 가해지면 다면체도 한 면을 바닥에 댄 체 팽팽한 마찰력으로 압력을 견뎌내려 한다. 그러나 결국 다면체를 밀어내려는 외부의 힘과 이를 버텨내려는 내적 한계라는 두 힘의 부딪힘은 다면체를 어느 한쪽 방향으로 튕겨 나가서 다른 면을 바닥에 대고 멈춰 서게 한다. 이때 다면체가 멈춰 서 있는 방향과 바닥에 댄 면은 외부적 힘과 내적 한계 사이의 긴장에서 우연히 결정되고, 생명체는 기존과는 다른 자신의 면을 바닥에 댄 체 일정기간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두 힘의 긴장 상태에서 다면체가 자연선택에 보이는 반응은 다면체의 구조에 의해 제약된다. 왜냐하면 다면체는 제한된 위치와 한정된 가짓수로만 움직일 수 있는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즉, 강력한 자연선택에서 진화의 기회를 찾은 개체들도 자신의 내적 설계를 넘어선 ‘적응’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생명체의 내적 한계는 자연선택에 대한 최적 적응을 방해하므로 생존에 성공한 생명체라도 어딘가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익티오사우루스가 어떻게 물속에서 그토록 독특한 구조를 발달시켰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골격이 겪었던 적응적 변형은 파충류라는 계통적 형태 위에 가해졌다. 또한 포유류의 관절뼈가 아래턱뼈로서 완벽히 기능했다면 포유류의 청각기관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는 생명체 구조의 변화에 있어서 차출의 지점에 기능의 ‘불완전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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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한계로 인한 진화에 의해 생존한 생명체들도 어딘가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생명체는 외부의 압력과 맞닥뜨리자 자기 내부의 불완전한 구조들을 끌어 모아 자신을 변화시킨다. 불완전함이란 완벽하고 효율적인 것이 아니기에 생명체 내에서 변화를 유도해 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이처럼 진화는 어딘가 부적합하고 불완전한 즉, 선택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요소들로부터 시작된다. 만약 개체의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해서 잠시라도 일을 멈출 수 없는 필수 기관이거나, 한 가지 기능에 완벽한 요소들은 변화의 실험에 도전할 이유도 그리고 여유도 없다. 그러나 보조적이고 불완전한 내적 요소들은 뜻하지 않은 자연선택의 압력이 가해졌을 때 진화라는 ‘우연’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으로 작동한다.
  
이때 ‘진화적 변화의 실제’는 최적화된 모습도 진보된 모습도 아니다. 진화의 결과인 생명체는 우연을 체현한 불완전한 신체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외부의 힘이 강하게 가해질 때 다면체는 가장 평평하고 안정적인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면체는 우연히 더 좁고 울퉁불퉁한 면으로 멈춰서 전보다 더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상태로 버티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진화의 역사에 남을 수 있는 행운은 ‘최적화’된 생명이 아니라 내부구조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이라는 한계에서 열리고 체현된다.
 
 
5. 새롭게 만나는 ‘우연’
 
우리는 환경의 영향과 생명의 내적 한계가 치열하게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우연’의 예를 익티오사우루스와 포유류 턱뼈의 진화과정을 통해 알아보았다. 이들을 통해 생명체는 어떤 환경에서든 필요한 부분을 땜질해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부의 영향이라는 환경이 아무리 계획하고 의도하고 강력하다 하더라도 생명이라는 다면체는 환경에 완벽하게 적합한 결과물이 아닌 의외의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말이다. 생명은 자신이 가진 특성 그대로를 통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로 등장한다. 이처럼 우연은 자연을 완벽함으로 만들어 가는 것도 생명을 최적의 적응상태로 이끄는 것도 아니었다. 생명은 자신만의 한계를 통해 외부 영향에 저항하고 불완전하게 적응하며 자신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우연은 ‘최적적응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며 ‘불완전한 신체’로 드러난다. 이처럼 생명의 진화는 불완전성에서 불완전성으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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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로서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불완전한 신체를 통해 체현되는 ‘우연’, 즉 외부의 영향과 내적한계의 정묘한 긴장이란 진화의 두 축 각각이 자신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실현하려고 맞부딪힌 지점에서 탄생한다. 이는 어느 한쪽의 영향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다. 다면체를 밀어내려는 큐대의 힘과 안정된 바닥을 유지하려는 다면체의 저항처럼 그 두 힘은 서로를 향해 팽팽히 맞서고 있기에 긴장을 발생시킨다. 팽팽히 맞서며 자신을 실현하려는 양자의 힘은 결국 ‘방향틀기’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상대방의 방식을 따를 수도 없기 때문에 양자는 힘을 마주한 체 함께 새롭게 방향을 틀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들로부터 나온 힘이지만 자신을 떠나야만 실현되는 제3의 길, ‘우연’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연은 필연이며, 필연은 곧 우연이다. 따라서 굴드가 말하는 우연은 우리가 생각하듯 필연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우연이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굴드의 ‘우연’을 통해 우리의 ‘불완전함’이라는 내적 한계를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외부의 힘에 상응하는 자신만의 힘을 작동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 이는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한계가 곧 삶에 있어서 분투의 지점임을 말해 준다. 생명은 분투함에서 존재함이 있으며, 분투가 멈추는 상태는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명은 스스로의 존재함을 위해서 끊임없이 분투해야만 하며, 이 지점이 자유로 나아가는 출발선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불완전함이라는 내적한계에서 일어나는 분투를 통해 ‘자유’로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우연은 우리에게 ‘불완전함’이 곧 자유의 지점이 된다는 ‘새로운 자유의 상’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자유는 항상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삶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막다른 골목이라 느껴질 때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다고 절망했다. 이처럼 우리는 자유를 외부에 존재하며, 환경에 의해 좌우되고, 쟁취해야 할 대상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굴드가 말하는 ‘우연’을 통한 ‘자유’란 기존의 상식으로 말해지고 있는 자유가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자유’란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닌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이며, 기존 삶의 질서를 고수하는 것이 아닌 기존 삶의 법칙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유’는 자신이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한 얽매임을 끊어버리고, 숙명에 불복하는 행위에서 나온다. 이처럼 자유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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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연은 자유란 나와 또 ‘다른 힘’의 부딪힘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나를 극하고 제어하려는 것을 통해서만이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부와의 마주침이 없다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할 수 없고 한계를 통해 새롭게 변화할 기회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타자’와의 마주침만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며 스스로 생성하는 자유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이제 내적한계가 갖는 불완전함이라는 것에서 더 이상 고통이나 절망을 절망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완전함’ 그것에서 절망적인 것을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변화시키는 자유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연은 생명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이 주는 자유를 통해 다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연은 복잡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희망에 고분고분 순응하지 않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으리만치 더욱 흥미로운 것 아닌가? (22 타이어에서 샌들로, p460)"
 

댓글목록

쫑은님의 댓글

쫑은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굴드의 "여덟마리 세끼돼지" 을 강력하게 읽고 싶게 만드는 글. "불완전함" 이 진화의 초록빛 새싹같다는 빛같은 글입니다

한량님의 댓글

한량 작성일

불완전함에서 불완전함으로 진화해 가는 과정... 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