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롄수의 비겁하지 않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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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10-08 17:28 조회5,719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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롄수의 비겁하지 않은 삶
- 「고독자」를 읽고

이소영(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죽은 이를 보내는 순간은 어떤 이유에서든 마음 한편이 멍멍하다. 사랑하는 사람이든 미워하는 사람이든 말이다. 심지어 “현세에서 살아 봤자 별수 없는 자가 죽는다는 것은 보기 싫던 자가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남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모두 좋은 일(루쉰, 「축복」,『방황』,18쪽, 그린비)”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죽음 앞에서는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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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건강히 살다 편안히 잠자며 죽음을 맞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과 달리 우리는 죽음 앞에서 초연해질 수 없다. 삶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로, 때로는 고통으로 죽음은 내가 원했던 모습을 일그러뜨린다. 진실은 이런 것이라는 듯 그 안에는 가족 간의 다툼과 오해, 병자의 고통을 맞닥트려야 한다. 이렇게 낭만적 죽음을 벗어내고 당면한 죽음을 보고나면 차라리 고독하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 「고독자」에서 렌수는 “사람이 죽은 뒤에 한 사람도 그를 위해 울어 주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145쪽)”이 아니라고 말한다. 마치 그는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고 자신의 죽음에 울어주지 않기를 바라는 듯하다. 롄수는 자신을 도와주려 애써준 선페이에게 “제발 나를 잊어 주기 바라오. 당신이 일전에 나의 생계를 걱정해 준 것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소. 그러나 이제 나의 일은 잊어 주시오. 나는 지금 이미 ‘좋아졌으니’ 말이오(150쪽)”라며 유언 같은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롄수는 결국 홀로 죽음을 맞는다. 울어주는 이도 문상객도 없는 장례식은 쓸쓸하기만 하다. 그가 입고 있던 구겨지고 피 묻은 셔츠는 그의 죽음이 편안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죽은 롄수의 표정은 “편안히 입을 다물고 눈을 감은 모습은 마치 잠들어 있는 듯했다. 하마터면 코끝에 손을 대어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155쪽)”였다. 피 묻은 셔츠와 편안히 잠든 듯한 죽음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롄수의 낯선 말과 행동으로 그의 쓸쓸한 죽음이 예견되기도 하지만 편안한 죽음 앞에선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도대체 롄수는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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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선택한 사람들

“마치 상처 입은 이리가 깊은 밤 광야에서 울부짖는 것 같았고, 그 슬픔 속에는 분노와 비애가 뒤섞여 있는 듯(131쪽)”이 롄수는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할머니의 시신이 입관 될 동안 곡도 하지 않고 울지도 않던 그가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렸다. 친척들과 이웃들은 그의 통곡이 당혹스러웠다. 반시간을 울던 그는 갑자기 울음을 툭 그치고 할머니의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의 눈물은 돌아가신 할머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고독을 만들어서 그것을 씹어 삼켜 온 사람의 일생(144쪽)”을 애도하는 눈물이었다. 자신이 할머니와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는 할머니와 같이 고독한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할머니처럼 스스로 고독 속에 머물려는 사람이 있고, 그런 이들을 위해 그는 울었던 것이다. 선페이는 그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롄수의 고독을 비난했다. “당신은 스스로 누에집을 만들어 자신을 그 속에 가두어 놓고 있소. 세상을 좀 밝게 볼 필요가 있어요.(142쪽)” 스스로 고독을 자처하고 있으니 차가운 표정을 거두고 세상으로 나오라는 충고였다. 그러나 롄수는 “그 누에집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142쪽)”라고 되물었다. 

할머니를 멸시했던 사람들도 장례식에서는 표정만이라도 울며 슬픈 모습을 보였다. 살아있을 때는 멸시하고 죽으니 울어주는 사람들의 가식을 롄수는 차갑게 비웃는다. 그의 표정은 천성이 쌀쌀해 보일 정도로 차갑다. 그는 가식과 위선으로 살기보다 이렇게 차가운 표정 뒤에서 세상을 응시할 것을 선택한다. 그렇기에 결혼을 생각할 수도 없다. 롄수는 가식보다 고독을 선택한다. 그것은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자의식의 외로움이 아니다. 그는 위선에 동참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고독한 누에집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가 운다. 이런 적막과 같은 고독을 씹어 삼치는 사람들을 위해 그는 짐승과 같은 소리로 울며 애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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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찰나간에, 모든 것이 합쳐졌다. 그리움과 결별, 애무와 복수, 양육과 멸절, 축복과 저주. ……이에 그녀는 하늘 향해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입술 사이로, 사람과 짐승의, 인간 세상에 없는, 그래서 낱말이 없는 언어를 흘렸다. 

그녀가 낱말 없는 언어를 말할 때에, 그녀의, 위대하기가 석상과 같은, 그러나 이미 황폐해진, 무너지는 몸 전체가 떨리었다. 그 떨림은 비늘처럼 점점이 이어졌고, 비늘 하나하나가, 들끊는 물처럼 출렁였다. 허공도 즉각 함께 떨었다. 폭풍우 속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 루쉰, 「무너지는 선의 떨림」 『들풀』, 69쪽, 그린비

허식도 부정하고 누구의 시선도 상관하지 않는 울음 안에는 수많은 언어가 담겨져 있다. 언어화 되지 못한 다양한 감정을 하나의 소리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롄수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동물의 울음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허식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그 사회에서 외부자가 된다. 롄수는 외부자의 위치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외부자는 자신의 고독을 짊어져야 한다. 그는 세상에 있을 자신과 같은 외부자들을 위해 그렇게 목 놓아 울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외부자의 강렬한 호소는 사회 안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는 없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의문과 동요는 일으킬 수 있다. 

위선을 거부하는 고독자

“진짜로 출세한 뒤에는 보통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우리는 늘 말했지요.(156쪽)” 우리가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출세를 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를 다시 기억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모습은 출세하기 위한 밑거름과 발판이 된다. 롄수는 사람들에게 차가운 편이었지만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친절했고, 밉살스런 주인집 아이들에게도 천진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거실은 드나드는 사람과 아이들로 번잡하곤 했다. 그러나 롄수가 실직 후 곤궁해지자 그를 찾아오던 청년들도 오지 않고 거실 테이블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아이들도 그를 피해 달아났고 주인집 다량의 할머니도 롄수를 찾아온 선페이를 싸늘하게 대했다.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구걸을 할 정도로 곤궁해 예전의 침착함까지도 잃어갈 쯤 롄수는 군부대의 고문으로 자리를 얻었다. 별 볼일 없던 사람이 출세하자 사람들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이제 거실에는 “새로운 손님, 새로운 선물, 새로운 찬사, 새로운 아부, 새로운 절과 인사, 새로운 마작과 면회(150쪽)”가 넘쳐났다. 그리고 그를 괄시하던 다량의 할머니도 그의 결혼을 걱정해주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아이들도 그를 찾아와 떠들고 놀았다. 이제 롄수는 그들의 달라진 태도를 비웃어준다. 그는 선물로 들어온 약초는 마당에 던지고 아이들이 선물을 원하면 그만큼의 복종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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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기 향락은 쉽게 영합하고 개처럼 벌렁 누워 버리는 비천한 자들을 더욱 업신여긴다. 세상에는 실로 개처럼 비천하고, 충실하고, 쉽게 영합하는 지혜도 있는 것이다. 

자기 향락은 저항하지 않는 자, 독 있는 침과 악의에 찬 시선을 꿀꺽 삼켜 버리는 자, 모든 것을 참을 만큼 지나치게 인내심이 강한 자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또한 어떤 것에든 만족하는 자들을 몹시 증오하고 그들에게서 심한 구역질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노예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신들과 신들의 발 앞에 굴종하든, 인간과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에 굴종하든, 모든 노예의 본질에 대해 저 지복한 아욕은 침을 뱉는다. 

 - F.W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39쪽, 홍신문화사

롄수는 변절자다. 그를 믿어주던 마지막 한 사람이 살해되자 그는 자신이 믿었던 모든 가치를 버리고 증오해왔던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자들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사람들 위에서 명령할 수 있는 사단장의 고문이 되어 사람들이 가진 위선과 복종하는 노예 속성을 그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는 선페이에게 “나는 이제 완전히 실패했소. ― 하지만 난 승리한 것이오.(149쪽)”라고 고백한다. 전에 믿었던 가치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실패했지만, 더 이상 고독 속에서 위선을 응시하지 않고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그는 승리한 것이다.  

롄수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의 간극에 구역질을 느꼈다. 그는 새롭게 찾아온 사람들의 노예적 행동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도 침을 뱉었다. 새로운 손님과 선물로 북적이던 마작과 연회가 끝난 밤이면 그는 혼자서 각혈을 토하고 경멸과 혐오로 잠 못 들었다. 그의 구역질은 타인을 향한 동시에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그는 몰락을 선택했고 그곳에서 그는 더욱 고독했다. 굴종하는 사람들과 자신에게 모두 칼날을 겨누는 그는 망설임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변절자라 쉽게 욕할 수 없고 오히려 그의 하강에 마음이 아파온다. 
 
자신을 위해 흘린 눈물

“덥수룩한 머리와 짙은 눈썹과 검은 수염이 길쭉한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었고, 두 눈만이 검은 얼굴에서 빛을 발하고(130쪽)”있던 롄수의 모습을 선페이는 또렷이 기억했다. 선페이에게 롄수의 눈은 강렬했다. 어린 시절 만들었던 눈사람을 추억할 때 눈사람의 검정 숯은 일순 빛을 발하며 롄수의 눈으로 변할 만큼 그의 눈은 확고했다. 그런 그의 눈도 죽음 앞에선 빛을 잃었다. 고문관이 되어 사흘마다 이어지던 연회 후에 혼자 각혈을 하던 그는 죽기 사흘 전에는 목이 막히어 말도 못하며 죽음을 맞았다. 마지막 유언조차 남길 수 없는 절대 고독 안에서 그는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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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먼 길을 가오. 그대가 없음은 물론 다른 그림자도 암흑 속에는 없을 것이오. 내가 암흑 속에 가라앉을 때에, 세계가 온전히 나 자신에 속할 것이오. 

- 루쉰, 「그림자의 고별」 『들풀』, 18쪽, 그린비

누구나 죽음 앞에서 홀로 먼 길을 가야한다. 타인의 위선을 미워하고 스스로의 위선을 용서하지 않았던 그는 홀로 죽음을 맞았다. 친척 세 명의 의례적인 곡소리만이 그의 시신과 함께 했다. 선페이가 롄수의 장례식을 다 못보고 나올 때 그의 귓속에서는 무언가 발버둥 치며 나오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롄수가 울었던 상처 입은 이리의 울부짖음이었다. 고독을 씹어 삼키는 사람들을 위해 롄수가 울었던 그 울음이 다시 선페이의 귓가에 들려왔다. 오래전부터 롄수는 자신을 위해 미리 울어둔 것이었다.

자신의 바람대로 롄수는 아무도 울어주는 이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누구도 진심으로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았다. 센페이도 그를 위해 울지 않았다. 하지만 발버둥 치던 귓가의 소리를 뱉어낸 선페이는 이제는 그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왜 고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기에 선페이는 가볍게 그의 장례식을 떠날 수 있었다. 롄수는 선페이의 가슴에 오래토록 남을 것이다. 

롄수의 인생을 두고 변절자로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어설프게 타협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적당히 타협하지도 않았고, 다른 변명으로 위선과 타협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고독을 선택했고 그 끝에 완전한 고독, 죽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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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기 중에 나는 비겁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하고 혼자 있으면 그 상황이 마음속에서는 불편해졌고, 솔직하게 표현한다고 말하고는 다른 사람의 반응은 내 안에서 소화시키지 못했다. 이런 내 모습을 인정하지 않을 때 도반은 나에게 비겁하다고 말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당혹스러웠다. 드라마의 명대사 같은 이 비겁함의 선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내 안에서 점차 부정과 분노로 변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자신에게 비겁함을 적당히 설득했고, 의견의 다양성으로 이해하자며 분노를 사그라트렸다. 내 안에서 적당히 괜찮은 선을 만들고 그 말을 마무리하려했다.  이 때 나는 치열하게 생각하지 않고 도망친 것이다. 나는 비겁함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불편하다고 회피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위선이 무엇인지 바라보기를 회피하고 적당한 곳에 안주하려 했다. 

롄수는 변절자였지만 비겁자는 아니었다. 그는 적당히 안주하지 않았고 고독의 깊이만큼 치열했다. 그의 위선에 대한 거부의 끝에는 완전한 고독, 죽음이 있었다. 롄수에게 삶과 죽음은 다른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은 것과 최대한 가까운 상태로 살아가는 것(플라톤, 「파이돈」, 『플라톤의 네 대화편』, 301쪽)’이다. 마치 지금이 생의 마지막 날인 듯이 사는 것이다. 이 수련을 통해 죽음을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사건으로 만들어 낸다.(강민혁, 『자기배려의 인문학』, 24쪽, 북드라망)” 그에게 죽음은 삶의 다른 상태일 뿐 특별한 무엇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롄수는 고통 속에서도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적당히 회피하고 안주하려다 내일이 생의 마지막 날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미련과 후회로 몸부림치며 죽음을 맞이할까! 불쾌감이나 두려움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회피한다면, 회피는 망설임으로 돌아온다. 망설임은 다른 불안을 만들고, 불안은 또 다른 회피를 만든다. 이런 순환이 비겁한 삶인 것이다. 비겁해서는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내가 서 있는 곳, 내가 잡고 있는 욕망을 바라보려는 치열함이 지금 내가 서야할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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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혜진님의 댓글

혜진 작성일

소영샘의 질문과 답이 느껴지는 힘있는 글이네요. 이렇게 자기 질문으로 글을 풀어낼 수 있는 힘이 멋져요. 한문턱을 넘으신 것 축하드려요.

마녀님의 댓글

마녀 작성일

드뎌 , 해 냈어요. 첫번째 뚫었으니 이젠 수많은 변주가 가능하겠죠
기대됩니다. 참 성실한 소영씨 애 많이 썼어요

파랑소님의 댓글

파랑소 작성일

드디어! 글이 올라왔네요ㅎㅎㅎ

에세이 장에서는 은근한 긴장감으로 집중해서 읽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또 다르게 읽혀요~
끝까지 비겁하지 않으려 고독하게 살아간 롄수, 그리고 죽음 또한 고독의 하나일 뿐이었다는!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