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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죽음의 고통을 돌파해 삶을 완성하다!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5-10-12 18:54
조회 : 5,664  


이반 일리치, 죽음의 고통을 돌파해 삶을 완성하다!

김희진(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고통 없는 삶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우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끝에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삶, 그 안에는 다양한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 고통 중에서 존재로서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은 삶과 죽음의 교차점에 다다랐을 때에 느껴지는 고통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매 순간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는 이 고통의 자리가 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삶과 맞닿아 있는 죽음, 그것은 존재 가능성의 상상만으로도 두려움과 공포를 야기한다. 여기 온 몸이 찢겨지는 고통에 찬 육신을 끌고 삶의 끝에 죽음과 마주한 한 남자가 있다. 


삶은 즐겁고, 명랑하고, 품위 있게 
  
능력 있고, 밝고 선량하며 사교적이면서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해내는 그런 성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은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나 커서나 아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날벌레처럼 어려서부터 사교계의 최고위층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려 그들의 습관이며 세상을 보는 시각을 그대로 따라 배우며 그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갔다. (똘스또이.『이반 일리치의 죽음』, p25) 


이반 일리치는 법조인으로 19세기 러시아의 시류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다. 그의 삶에서 굳이 독특함을 찾자면 매사에 운이 따라 순조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1882년 45세의 이반 일리치는 항소법원판사이자 두 아이를 둔 집안의 가장이다. 그는 상류층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집안, 학벌, 직업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더불어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은 이반 일리치의 삶은 상류층이 제시하는 삶의 기준과 목표에 딱 부합하는 형태였다. 이반 일리치는 삶이란 즐겁고, 명랑하고, 품위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게 ‘고통’이란 삶에 존재해서는 안 될 그런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모토인 품위 있는 삶에 적당하다고 여겨졌던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와 20년차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아이가 생기면서 그러니까 17년 전 즈음 사사건건 대립하는 문제를 겪었다. 어느 집이나 부부문제는 있기 마련이건만 결혼생활에서 품위 없이 다툼이 일어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반 일리치는 당황하며 이전의 품위를 되찾기 위해 고심한다. 그 해결책은 어찌 보면 아주 간단했으며 실용적인 것이기도 했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을 것’ 즉, 관계가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정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대신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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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의 ‘거리두기’와 일에의 ‘몰입’은 이반 일리치에게 훌륭한 도피처가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부부문제는 더 이상 어떠한 해결점도 찾지 못한 채 외면과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수면 밑으로 가라 앉아 버리고 만다. 결론적으로 이반 일리치는 아내로부터 얻을 수 있는 따뜻한 식사와 집안 관리, 잠자리라는 세 가지에 만족하며 겉으로는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가정과 부부관계를 유지한다.

가정에서 멀어진 이반 일리치에게 직장은 가정보다 더 소중한 곳이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보장해 주는 직장에서 특히 서류작성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런 능력은 직무에 관한한 가장 효율적인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했고, 사회적으로 명성과 신뢰의 기반이 되었다. 직무에 있어서 이반 일리치의 독특함은 관계 맺기에 있다. 직무상 만나는 사람들을 사건의 당사자로만 관계한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즉, 이반 일리치에게 그들은 서류의 빈칸에 채워 넣을 서류상의 인물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는 이들을 대할 때 항상 품위를 갖추어, 예의 바르게, 그리고 아주 신사적으로 처신한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철저하게 공적인 선을 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일에 최선을 다했던 이반 일리치에게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승진에서의 탈락! 이반 일리치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조직에 분노와 적개심을 느낀다. 이런 분노의 원인에는 상류층에 버금가는 생활패턴으로 빚이 점차 늘어가는 상황이라는 것도 한 몫 한다. 늘어나는 채무와 승진에서의 탈락은 그에게 더 이상 품위 있는 생활이 유지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런 위기도 잠깐, 운 좋은 남자 이반 일리치의 새로운 인생 목표인 5,000루블의 연봉은 인맥을 통해 손쉽게 이뤄진다. 새로운 직장은 그가 원했던 연봉과 품위에 어울리는 고풍스런 집을 선사한다. 이반 일리치는 언제나처럼 즐겁고, 명랑하고, 품위 있는 상류층의 삶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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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가정과 직장에서의 위기가 쉽고 간단하게 봉합되어 버린 상황에서 이반 일리치에게 삶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들어갈 틈은 없었다.  


고통과의 직면 그리고 거짓들   
  
이반 일리치가 알고 싶은 것은 딱 하나, 상태가 심각한지 아닌지 여부였다. 그러나 의사는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 무시해버렸다.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질문은 한가하고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 의사는 이반 일리치의 생명에 대한 질문은 안중에 두지 않고 오직 신하수증인지 맹장염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 이런 모든 것들은 이반 일리치가 피고인들을 대하면서 멋지게 수천 번도 더 써먹었던 그런 방법이었다. 의사 역시 안경 너머로 자신의 피고를 바라보며 얼핏 명랑하게도 보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멋지게 자신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똘스또이.『이반 일리치의 죽음』, p53)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반 일리치의 일상은 외면적으로 평온하게 흘러갔다. 이반 일리치가 자신의 이상에 맞는 고상한 품격을 갖춘 집을 꾸미려다 사다리에서 미끄러지며 창틀 모서리에 왼쪽 옆구리를 다치는 아주 사소한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 사고는 불쾌한 통증을 낳는다. 그리고 기분 나쁜 묵직한 통증은 처음에는 아주 미미한 변화로 인해 차도가 있는지 없는지도 분간이 안 되었고, 하다못해 병명도 불분명한 채 지속된다. 

두 달이 지나며 이반 일리치는 고통이 점점 심해지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절망감에 빠진다. 그리고 문득 죽음의 공포까지 느끼게 된 이반 일리치에게 이 고통은 절대적으로 해결해야만할 난제가 된다. 자신의 몸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더불어 자신과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관찰이 시작된다. 이 관찰을 통해 이반 일리치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타자들을 통해 대면하게 된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자신을 대하는 의사들로부터 곧 법정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사건의 대상으로만 존재했고, 공적인 업무의 관계자로만 존재했던 서류상의 사람들처럼 이제는 이반 일리치 자신이 의료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의사들의 상투적이고 의례적이며 형식적인 말과 행동에서 기만과 거짓들을 보게 된다. 즉,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기준에 의해 행해왔던 모든 말과 행동들이 사실은 상대의 입장에서 진실로 알고 싶어 했고 의문시 했던 근본 물음에 대한 아무런 답이 되지 않았었고, 이들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그저 표피적인 관계로 일관해 왔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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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점점 극심해 지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이반 일리치에게 병의 책임을 물으며 오히려 아픈 남편 때문에 자신이 더 힘들고 괴롭다는 아내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 이반 일리치는 아내가 하는 형식적인 말과 태도에서 아픈 남편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위로해주는 한 톨의 진실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관심과 회피로 일관한 위선적인 관계, 이것이 이들 부부가 20년을 함께 살며 서로에게 할애 한 몫이었다는 것을 이반 일리치는 자각하게 된다. 20년 동안 이들 부부는 품위 있는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적당한 상대자로만 존재했었기에 이반 일리치가 아내에게 기댈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아내의 위선과 거짓이 느껴질 때마다 증오할 뿐이었다. 

생사를 오가는 고통의 한 가운데서 이반 일리치는 기만적으로 자신을 대하는 타자들을 보며 이들을 증오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그 자신 또한 그저 병이 빨리 나아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기만을 그래서 그것이 거짓이고 기만이라 하더라도 즐겁고, 명랑하고, 품위 있는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처럼 이반 일리치는 사회가 제시한 삶의 기준에 맞춰진 타율적인 존재인체로 거짓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고통, 삶과 죽음의 공존 그리고 진실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었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아. 어쩌면 아직, 아직 ‘그걸’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 이렇게 자문하고 갑자기 침묵했다. (...)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 떨어졌고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삶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걸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그게’ 뭐지?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 “데리고 나가.... 불쌍해, 당신도....” 그는 ‘쁘로스찌’(용서해줘)라고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쁘로뿌스찌’(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을 바꿀 힘도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었다. (똘스또이.『이반 일리치의 죽음』, p116-119)


삶 그리고 죽음! 산다는 것 그것은 곧 죽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삶의 다른 모습인 죽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만큼은 영원히 지속될 듯이 말이다. 이반 일리치에게도 죽음은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어떤 치료도 통하지 않는 육체의 병은 이반 일리치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한다. 그리고 온갖 약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고통을 겪으며 이반 일리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지금껏 그저 이론상의 개념에 불과하며 추상적인 것으로만 존재했던 그리고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이라 믿었던 공포의 대상 ‘죽음’. 그러나 이제 자신이 죽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이반 일리치에게 삶은 더욱 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육체에 가해지는 극한의 고통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삶에 자리 잡고 있는 기만과 거짓을 직시하게 한다. 이 같은 기만과 거짓에 대한 통찰은 자신에게 그렇다면 거짓과 기만이 아닌 ‘진실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기존의 이반 일리치에게 삶이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회와 상류층이 제시하는 기준만이 모두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삶의 척도였기에, 그저 이 기준이 요구하는 삶을 추구하고 모방이라도 해서 따라가는 것만이 최선의 삶으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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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이반 일리치에게 죽음의 고통이 커질수록 삶에 대한 의문들 또한 커져만 간다. 이반 일리치는 ‘삶의 진실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물론 이반 일리치의 이런 필사적인 매달림은 자신의 삶이 그  해답이라는 답변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자신의 삶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이반 일리치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삶의 한쪽만을 부여잡고 달려 왔으며, 나머지 한쪽인 고통을 삶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긍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고통을 통해 거짓과 기만을 분별함으로써 비로소 ‘진실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하인 게라심이 보여주는 거짓 없는 말과 행동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는 이반 일리치. 이제 이반 일리치는 인간은 태어났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며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거짓된 희망으로 삶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자신의 절망감을 위로해 주고 함께 해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진심을 다하는 관계, 이것이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었고 유일하게 게라심에게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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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에게 육체적 고통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과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고통의 무게만큼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깊이 느끼는 이반 일리치. 이제 그는 자신이 처한 이 고통을 온전히 홀로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이 해내야 할 삶의 마지막 과정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삶에 의문을 갖고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반추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과 죽음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삶의 성찰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깊은 고뇌의 끝에서 인정할 수 없는 진실과 마주한다. 이미 오래전 삶의 방향이 틀어져버렸다는 진실과의 대면! 이러한 진실은 그가 살아 온 삶이 무의미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반 일리치가 이 진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는 이미 스스로 던진 질문에 의해 삶의 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더 늦기 전에 틀어져버린 삶을 제자리에 돌려놓고자 하는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딛고 있었던 지반의 타당성, 자기 삶의 정당성에 대한 거듭 거듭 되풀이 되는 의심과 질문을 지속한다! 그리고 죽기 세 시간 전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살아 온 삶의 전제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며 스스로 획득한 새로운 전제로 자신의 생을 채운다. 

‘사랑’, ‘진심을 다하는 타자와의 관계’! 죽어가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울고 있는 아들.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어둠의 공포를 넘어서며 빛을 보게 된다. 이반 일리치가 삶의 고통도 죽음의 고통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순간 죽음은 사라져버린다. 두 시간 뒤 이반 일리치는 아주 편안하게 할 일을 다 했다는 모습으로 죽음을 통해 삶을 완성한다.


삶, 전제를 바꾸어 가는 과정
 
자신과 자신의 삶을 직시한다는 것! 그것은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과의 마주침은 말만큼 쉽게 이루어지지도 항상 달가운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 진실은 삶 자체를 무의로 돌려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반 일리치의 삶처럼 말이다. 모든 것이 허망한 허상이라는 진실, 자신의 삶이 타인의 삶을 모방한 모조품이라는 진실, 그래서 자신의 삶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진실. 이렇듯 ‘진실’과의 대면은 불편하고 불쾌하며 아주 고통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 고통과 대면하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전환 죽음! 삶의 진실을 찾고자 한 이반 일리치의 용기는 끝없이 가해지는 죽음의 고통을 삶의 안내자로 변용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반 일리치는 타자적 삶이 아닌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기회를 스스로 획득한다. 죽음의 순간, 비로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스스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고 이를 구성하기 위해 한 발을 내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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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우리에게 이 한 발의 내딛음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거짓과 기만과 위선. 이것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자신의 삶과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구성해 가며 살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써 말이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토대와 전제를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자신의 전제를 바꾼다는 것은 기존의 나를 버릴 때, 기존의 나를 무의화 시킬 때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변화는 자기 자신만이 이끌어 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삶의 진실을 찾으라고 그리고 지금 늦지 않았다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삶 속에서 질문을 도출하고 자신의 답을 의심하며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 끝없이 거듭되는 삶에 대한 의문과 되물음!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딛고 있는 지반이 과연 정당하고 타당하고 진실한지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전제를 바꿀 수 있으며 새로운 존재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만이! 진실한 삶이고 삶의 매 순간을 완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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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혜진   2015-10-15 20:11:24
 
나를 정당화하려는데서 벗어나 질문자체를 쫓는 힘은 죽음과 마주서는 용기와도 같은건가요?
치밀하게 몰아가는 글의 구조와 제목이 자꾸 읽게하는 힘이 있어요. 정말 멋지고 부러워요, 언니...
key1254   2015-10-15 17:11:19
 
샘의 눈으로 다시 읽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잘 읽었습니다.
마녀   2015-10-13 08:17:48
 
두둥!!  반장님  이렇케 보니 더 잘 읽히네요. 날카로운 질문과 매의 눈을 가진 통찰력  ...
늘 자극받고 배우고 있지요.  글을 끌고 가는 치열함까지 ,
기존의 나를 무의화 시킬 때까지 죽 가 보는것 ....  오직 이것뿐 .
이 에세이가 말하는 함성을 내가 잘 알아 실천하는것. 남경 여행뒤에 빠르게 일상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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