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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아줌마 길 위에 서다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5-12-25 21:28
조회 : 4,295  

시골 아줌마 길 위에 서다

장현숙(감이당 수요 대중지성)

시골 아줌마 길을 나서다

“당장 공부해. 근데 1,2년 만에 그만둘 생각은 하지 말고, 최소한 5년은 할 생각으로 시작해야해” “예? 5년요?” 

재작년 이맘때 장유 어느 점집에서 오갔던 말이다. 감이당을 알게 되고 공부를 시작하고 싶은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편과의 상의도 상의지만 먼저 나 자신이 나를 설득하지 못하며 망설이고 있는데, 평소 친구처럼 지내는 아는 동생이 ‘용한데’ 라면서 점집을 소개시켜줬다. 점집이라곤 평생 한 번도 간적이 없었으니 그 생소함이야. 굿을 하라느니 살이 꼈다느니 하는 말이라도 나오면 당장 튀어나올 기세로 들어갔는데 최소한 5년은 공부하라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아니, 1년도 다닐까 말깐데 5년이라니, 저 무당아줌마 처음 왔다고 그냥 막지르는 거 아냐?’ 
  
그렇게 투덜거리던 내가, 사계절이 두 번 변하는 동안 여전히 감이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이 상태로 라면 사계절이 세 번 더 변하는 동안에도 계속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당아줌마의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용쓰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하긴 인생에서 뚜렷이 이유를 댈 수 있는 일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굳이 탓으로 돌리자면, 1학기 에세이에서 쓴 것처럼, 어쩌다 읽은 책 한권 때문이었다. 평소에 책이라곤 읽지 않는 사람이 한권의 책에 자극받았다. 이래서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있나보다. 많이 읽고 많이 공부한 사람은 소위 '나와바리'를 구축하며 평화롭게 잘만 살아가던데 평소에 아무것도 안하던 사람은 꼭 이렇게 사고를 치며 자극받은 티를 낸다. 아이 잘 키우고, 살림 잘하고, 남편 일 잘하고. 딱히 길을 나서서 생고생 할 이유가 전혀 없었건만, 내 몸은 작년 봄부터 매주 수요일 새벽 5시 56분 KTX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 그야말로 시골 아줌마가 서울로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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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있지만 ‘정주’하는 것 

어쩌면 재작년 이즈음 또다시 역마살이 발동했을지도 모른다. 병 신(丙申) 일주인 나는 역마를 일지에 깔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항상 길 위에 있었던 것 같다. 결혼하고서도 서울과 창원을 오가며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다. 컴퓨터로 처리하는 업무가 많았던 관계로, 대부분의 일은 창원 집에서 하고 2주에 한 번씩 서울에 와서 나머지 일을 처리했다. 그렇게 창원과 서울을 오가며 3년여를 근무하다가, “내 영혼이 더 이상 이 일 하는 것을 싫어해”하는 요상한 핑계를 대며 일을 그만뒀다. 남편 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놓아버리고 자발적으로 백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난 또다시 서울과 창원을 오가고 있다. 

천지만물이 생성소멸을 멈추지 않는 한, 사계절이 끊임없이 돌아오는 한, 인간은 늘 길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이미 정해진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열어 갈 것인가. 다시 말해, 길 위에서 ‘정주’할 것인가 아니면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고미숙, 북드라망, 27쪽)

‘인간은 늘 길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처럼, 먼 거리든 짧은 거리든 우리는 매일 길을 나선다. 그 길의 모습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하다. 같은 길인 것 같지만, 사람과 길과 그 시간의 풍경이 만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탄생한다. 매일 같은 것 같지만 매일 달라지는 이야기들. 창원에서 서울. 분명 같은 길이지만 그 속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달라진 시간만큼이나 그 이야기도 다르다. 

표면적으로 가장 달라진 것은 돈을 버느냐 또는 쓰느냐의 모습이다. 15년 전에는 돈을 벌었다. 서울을 두 번 오가면 통장에 월급이라는 이름으로 돈이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돈을 쓴다. 한 달을 서울을 오가면 아이들 학원 두 곳을 보낼 만큼의 돈이 나간다. 그 다음, 그때는 일을 했다. 그래서 서울을 오가는 모습 그 자체로 주변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집에서 근무하며 애까지 돌보는 능력 있는 커리우먼이 나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배운다. 그 모습에 주변에선 다들 의아해한다. 제일 먼저 듣는 소리가 ‘뭘 하려고?’이다. 그러곤 ‘그저 배우고 싶어서’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세상물정도 모르는 철없는 아줌마의 표상으로 전락한다. 똑같은 길인데 그 길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이렇게나 다르다. 창원에서 서울 그리고 서울에서 창원. 분명 같은 길인데 나는 왜 이렇게 다르게 가고 있는 걸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가끔은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음에도. 하지만 나는 지금의 이 길이 15년 전의 그 길 보다 더 좋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명 그렇다. 왜 그럴까?  
  
이미 정해진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열어 갈 것인가’, '길 위에서 ‘정주’할 것인가 아니면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같은 길이지만 어떻게 가고 있는 가의 차이 인 것 같다. 겉으론 돈 잘 벌고 살림 잘사는 커리우먼이었지만 서울을 오가면서 늘 답답해했던 것 같다.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에서 비롯되는 답답함이 아니라, 굳이 표현하자면 영혼이 정지하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었다. 그러니 ‘내 영혼이 더 이상 이 일을 하는 것을 싫어해’라는 요상한 말도 이해가 된다. 이미 정해진 길을 마음 없이 오갈 때 인간은 그리 답답한가 보다. 길을 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멈추어 있는 것, 길 위에 있다지만 사실은 골방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 이를 길 위에 있지만 ‘정주定住’하고 있는 것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느낀 답답함은 그런 것이었다. 


‘정주’에서 ‘유목’으로
 
정주에서 유목으로! 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정주민에겐 모든 것이 고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소유와 증식, 서열 및 위계가 공고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길 위에선 반대다. 모든 것이 유동한다.  ... 가치의 고정성은 물론 척도의 절대성도 사라진다. 상이한 방향의 힘들이 각축하고 서로 다른 윤리들이 좌충우돌하는 것, 무엇이든 실험할 수 있고 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유목이다.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고미숙, 북드라망, 24쪽)

‘정주’냐 ‘유목’이냐는 단순히 집에 머물러 있느냐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있느냐와 같은 외부적 모습만으로는 말할 수 없다. 집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정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유목’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어떻게 머무는지, 어떻게 길을 가고 있는지, 그것이 ‘정주’와 ‘유목’의 차이를 결정하는 것 같다. 

15년 전에도 나는 서울과 창원을 오가는 길 위에 있었고, 지금도 나는 서울과 창원을 오가는 길 위에 있지만, 두 길은 처음부터 너무나 달랐다.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경력을 쌓아가지만 매일이 그 다음날과 다름없었던 날들. 매일을 정신없이 겪어내지만, 그 전날과 똑같은 모습의 자신을 그 다음날 발견하는 일이 반복될 때, 인간은 왠지 모를 허무를 느낀다. 벗어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면서 매일을 습관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길 위에서도 ‘정주’한다는 것은, 일상에 침몰하여 이미 정해져있는 욕망의 회로대로 그리고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인정되는 인생의 설계대로 살아가는 것, ‘소유와 증식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같은책,  99쪽) 것이다. 매일 길을 나서지만 ‘내가’ 주체적으로 길을 열어가며 사는 것이 아니고 나의 욕망과 사회의 욕망이 하나의 회로를 형성하여 그 회로대로 살아내는 것. 15년 전 서울과 창원을 오가는 길은 이런 길이었다. 그래서 그리도 답답했는가 보다. 정주민에겐 모든 것이 고정되어 버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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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어떻게 길 위에 서라는 것인가? 유목하는 삶이라니. 어찌 살라는 말인가. 오늘 하루 여기서 지내고 다음 날 저기서 지내면 유목하는 삶인가?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삶이란 말인가? 돈키호테도 길을 나섰지만 그 길은 그의 광기에 갇힌 길이었다.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를 지우고 책의 세상을 그대로 현실로 만들기 위해 나선  길. 돈키호테가 길을 나선 모습은 어쩌면 15년 전 내 모습과 닮아있다. 똑같은 욕망의 회로를 무한 반복하는 나의 모습이나 책 세상대로 살려는 돈키호테의 모습은, 자신이 만든 서사 없이 타인이 만든 이야기대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점에서 묘하게 닮아 있다. 그러니 둘 모두 길을 나서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나는 욕망이 똑같이 반복되는 ‘정주의 회로’에, 돈키호테는 ‘책 속의 세상’에. 그러니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것인가? 어떻게 벗어나서 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유목의 삶을 살 수 있는가?

뇌 과학에 따르면, 뇌는 외부와 직접적으로 소통을 하지 않는다. 캄캄한 방에서 이미지를 만든다. 그 ‘만들어진 개념’을 실제로 착각한다. 이 개념을 고수하게 되면 그게 바로 집착이요. 망상이다. 여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외부와 접속해야 한다.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고미숙, 북드라망, 160쪽)

‘정주’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겠는가. 자신을 바꾸기 위해 길을 떠난다고 해도 습관의 힘은 무섭다. 몸은 무대포로 다시 길 위에 섰지만 머리는 여전히 익숙한 욕망의 회로에 꺼둘리는 것. 그래서 그런지 같은 길을 15년 전과는 다르게 가고 있다고 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뭘 하려고?’라는 질문을 받는 순간 내 머리는 순식간에 15년 전의 회로를 회복한다. 한마디로 ‘뭐 하려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이럴 때는 내가 주체적으로 ‘생각 한다’라기보다 태생적으로 몸에 새겨진 반사 신경처럼 거의 본능에 가깝게 생각이 올라온다. 뇌는 캄캄한 방에서 이미지를 만들고 그 만들어진 개념을 실제로 착각한다더니. 한번 만들어진 개념의 힘은 이리도 강하다. ‘그걸 배워서 뭘 하려는가?’ 라는 질문 하나에 머리는 순식간에 다시 ‘정주의 회로’에 갇힌다. 그렇게 머리가 생각에 갇히면 새벽에 일어나 창원을 나서는 그 모든 시간들은 순식간에 빛을 잃는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몸에선 힘이 빠지고, 배속 저 밑에서부턴 회의감과 초조함이 올라오며 마음이 괴로워진다. 익숙한 감정의 회로이다. 그러니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벗어날 방법이 있기는 하겠는가? ‘뭘 하려고?’라는 가벼운 질문하나에 이렇게 무너져버리는데. ‘정주’의 습관은 이렇게나 강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질문에 대해 내 몸이 반응하는 시간과 반응의 정도가 작년 봄 보다는 작년 가을에 접어들 무렵 훨씬 무뎌지고, 작년 가을보다는 올봄에 더 무뎌지고, 올봄보다는 지금 더 무뎌져있다. 질문에 익숙해져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들의 질문에 반응하는 내 속의 ‘정주의 회로’가 희미해져서 그럴 수도 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매번 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처럼 굳건히 나를 흔들어댔는데. 

사실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흔들려도 길을 나서는 것 그리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것. 매번 다시 길을 나서고 매번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새 정신이 든다. ‘정주의 회로’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써가며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고질병처럼 취급했는데, 그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의 수다라니.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단순한 수다가 어떤 애씀도 없이 스스로 자신을 돌려놓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외부와 접속해야 한다고 하는가보다. 기존에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머리를 가볍게 돌려놓기 위해선 그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정주’에서 ‘유목’은, 집을 중심으로 고정되었던 것들이 흔들리고 흔들려 더 이상 고정되지 않고 흐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정된 가치’는 물론 ‘척도의 절대성’도 사라질 시간이. 그렇게 모든 것이 흔들리면서 유동하다보면, 언젠가는 상이한 방향의 힘들을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윤리들이 좌충우돌하면서, 무엇이든 실험할 수 있고 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존재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삼장법사와 손오공 무리가 81난을 겪으며 서천에 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길을 나서고, 계속 가면서, 매일을 겪는 것. 하나의 난을 겪을 때 마다 기존의 고정된 가치는 조금씩 흔들리고 그 다음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가 모이다보면 어느덧 서천에 도달하는 것. ‘정주’에서 ‘유목’의 길.


길 위에 선다는 것

하지만 거꾸로 물어보자. 요괴들이 없었다면 과연 이 길을 갈 수 있었을까? 만약 가는 길마다 태평하고 도처에서 환대를 받았다면? 단언컨대, 길을 갈 수 없었으리라. ... 길이란 장애와 번뇌를 마주하는 것이고 그로부터 힘을 길어 올려 다시 한걸음을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구법과 고난, 서천과 요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고미숙, 북드라망, 116쪽)

‘서유기’에서 삼장법사와 손오공 무리는 서천에 불경을 얻으러 간다. 그런데 그 가는 길의 모습이 ‘정주’에서 ‘유목’으로의 길과 많이 닮았다. 길을 나서고 걷는다. 그리고 또 길을 나서고 걷는다. 삼장법사 무리가 서천으로 향할 때 요괴들이 없었다면 과연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을까? 요괴들 없이 도처에서 환대받았다면? 아마도 끝까지 길을 갈 수 없었으리라. 어느 곳엔가 멈춰서 그 환대에 취해 정착하며 살지 않았을까. 요괴들을 한번 만날 때 마다 삼장법사와 손오공 무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욕망 회로는 흔들린다. 요괴가 흔들어서가 아니라 요괴와의 접속 자체가 그것을 흔들어댄다. 길 위에 서야지만 대면할 수 있는 자신의 욕망들. 정주해 있을 때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미세한 욕망들. 길 위에 선다는 것은 그러한 욕망들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이고, 그로부터 힘을 길어 올려 다시 한걸음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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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무당아줌마(^^;)가 왜 5년이란 시간을 얘기했는지 알 것 같다. 그 분이야 뭘 보고 5년이란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정주’에서 ‘유목’으로 내 욕망의 회로를 변이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손오공 무리처럼 81난을 겪으며 나 자신을 변이시키는 시간. 매번 자신과 대면하면서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시간. 그러면서도 다시 굳건히 길 위에 서는 시간. 그 정도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길을 가야만 바뀔 수 있는 내 속의 질긴 욕망의 회로들을 본다. 그러니 나는 또 길 위에 설 수밖에. 


마치며

올가을 열 서넛의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3시간씩 5회. 나로썬 빡센 경험이었다. 서울을 오가며 뭔가를 배우는 내 모습을 보던 친구가 도대체 뭘 배우는지 사람들 앞에서 ‘썰’을 풀어보라고 마련한 시간이었다. 그 친구의 개인 사정 때문에 갑자기 땜빵형식으로 진행한 강의였지만, 2년여의 배움의 시간이 없었으면 차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경험이었다. 첫 시간의 떨림과 마지막 시간의 뿌듯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재작년 처음 이 길을 나설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길이다. 그래서 다들 일단 나서보라고 하나보다. 나서기 전에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은 모두 망상이다. 길은 나서기 전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 어떻게 걸어갈지, 어떻게 펼쳐질지, 어떻게 이어질지. 하나의 길은 다른 길을 부른다지만 그 모습이 어떤 형태일지도 그 시간이 닥치기 전까지는 모른다. 길은 그렇게 계속 변화한다. 

로드클래식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길이다. 길은 변화무쌍할뿐더러 끊임없이 유동한다. 수많은 인연이 오고 또 간다. 그 유동성이 길을 계속 변화시킨다.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고미숙, 북드라망, 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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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이소룡   2016-03-16 08:25:55
 
입춘도 지나 볕도 좋은데 우울하던 차에 다시 읽은 길 위의 공부가 참 조타- 지금은 작년보다 가벼워진 맘으로 공부 중인거죠.?
애독자   2016-01-10 17:12:23
 
“내 영혼이 더 이상 이 일을 하는 것을 싫어해” 내 아내가 만약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고 이런 말을 하면서 공부하겠다고 매주 창원에서 서울까지 새벽기차 타고 돈 버는 게 아니라 돈 쓰고 다닌다면? 참 이해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우선 살아야 하니까 말리지는 못할 것 같아요. 무상한 자연의 흐름 속에서 나만 머물러 변하지 않는 것은 생명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니까요. “흔들려도 길을 나서는 것 그리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것” 그것 말고는 우울증과 자살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 같아요. 아줌마의 수다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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