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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삶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6-01-01 21:09
조회 : 3,726  

 ‘오늘 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삶


이정수(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자네, 길을 아는가?”


 “자네, 길을 아는가?” 연암 박지원이 연행 길에 압록강을 건너면서 동행하던 이에게 물은 말이다. 감이당 공부 길에 내가 제일 처음 마주친 말이기도 하다. 연암은 뒤이어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낭송 열하일기』 24쪽.)라고 알려준다. 나는 첫 수업 암송문으로 이 문장을 골랐다. 되뇌는 중에 슬그머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길’이라고 옮겼을까? 그냥 ‘도’라고 읽으면 더 이해가 잘 될 것 같은데......’ 이번 학기 『길 위의 인문학』과 『로드클래식』을 읽으면서 그 ‘길’이 이제 ‘도’보다 더 다양한 뉘앙스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시간. “자네, 길을 아는가? 삶의 길 말일세. 자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내 앞에 던져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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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삶의 길 위에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깝든 멀든 어렴풋하나마 자신이 정한 목표를 갖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으며, 그 곳에 도착하면 또 다음 목적지를 정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길 위에 서면 어떻게 될까? 오늘은 이쪽으로, 내일은 저쪽으로, 마음 내키면 떠나고 아니면 머물고 하는 정처 없는 길도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 길은 또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불안하진 않을까? 시간낭비는 아닐까?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도 마음 편히 떠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금 백수다. 그 동안은 오랜 세월 정해진 길을 따라왔다. 속마음까지 편한 길이야 세상 어디 흔하겠냐마는 외형적으론 평탄하고 좋은 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목적지를 떠난 이후 다음 목적지를 고민하던 중에, 이번에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발길 닿는 곳으로 우선 가보기로 했다. ‘공부’라는 길. 그 길에서 마주친 곳이 감이당이다.

지난 달, 이십여 년 목사님 생활을 과감히 접고 강화로 귀촌한 선배를 실로 오랜만에 만났다. “정수야. 넌 요새 뭐하니?” “글쎄, 그냥 공부해요. 요즘은 공부가 직업이예요.” “그래? 와 반갑다. 너도 나처럼 ‘흰 손’이구나? 난 사는게 직업인데.” 오래된 인연들, 서로 다른 길을 갔던 인연들이 중년백수의 길에서 하나 둘 다시 만난다. 길이란 그런 곳이리라. 존재가 백수인 나로서는 백수라는게 목적지를 두지 않고 길을 떠나는데도 요모조모 장점이 많고, 게다가 중년백수에게 ‘공부’는 대외적(?)으로도 나름 괜찮은 명분이라 생각되어, 누군가 죽기 살기로 말리기 전까진 이 길로 주~욱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에 무슨 대단한 뜻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나의 공부를 골프 좋아하는 친구가 필드 나가는 것쯤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 난 골프 못치고 안치니까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는 거다.
 
“백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고 인류의 미래다.”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코뮌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후에는 비평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칼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고미숙, 『길 위의 인문학』, 북드라망, 2014, 277쪽에서 재인용.

오래 전 헤어진 친구를 만나듯 이 글을 다시 만났다. 반가웠다. 청년시절엔 이 글의 앞부분, ‘코뮌주의 사회’에 꽂혔다. 뒷부분의 삶을 기대하며 앞부분에 몰두했던 이념의 시절, 사회제도를 만들기만 하면 자유로운 삶은 저절로 따라오리라 믿던 시절. 이젠 빛바랜 구호, 찢어진 깃발, 조르바의 “녹슨 고물총”이 되어버린 그 이념과 이상이 아직까지 몸 어느 구석엔가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있음을 느낀다. 되돌아보면 가까운 곳을 멀리 우회하다가 길을 잃어버린 모양이랄까. 이제 세월이 흘러 중년백수가 되고 보니 스스로 뒷부분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무용지용, 쓸모없음의 쓸모’란 이런 것일까? 그저 가다보니 ‘어! 여기 예전에 가려던 데 아냐?’하고 다시 한 번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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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언제까지 공부할 거냐?” ‘도시농업’ 활동을 하는 친구가 묻는다. “글쎄, 이삼년 더 해보고......” “저 놈 저거, 아주 원풀이를 하는구나 원풀이를 해. 야! 공부 적당히 하고 같이 일 좀 해보자.” 이따금 지인들로부터 협동조합이나 그와 비슷한 류의 일에 대한 권유를 받곤 한다. 머리 아픈 일에 다시 매이고 싶지 않아서인지, 홀로 공부하는게 더 좋아서인지 흔쾌한 답을 주지 못한다. 당연히 ‘삶 따로 공부 따로’가 되어서야 안되겠지만 ‘공부가 거의 삶’이 되다시피 한 이 현실은 또한 바람직한 것인지 아리송하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게 바로 삶이오!”라는 조르바의 말과 “글이 안 써지는 이유는 삶속에서 아무것도 시도하고 있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는 채운샘의 얘기가 무겁게 다가온다.

 
이 와중에 만난 “백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고 인류의 미래다”라는 고미숙샘의 글은 심히 위로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인류의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사명감(?)에 어깨도 뻐근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뒤이어 “백수는 사회를 위해, 인류를 위해 특별히 더 좋은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을 배려하는 기술을 갈고 닦으면 된다. 이름하여 자기배려의 윤리 혹은 양생술이 그것이다.”(고미숙, 같은 책, 55쪽.)라는 글에 이르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오호라! 그래, 나 한 몸이나 제대로 챙기라 이 얘기지?’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사회와 인류를 위해 더 좋은 일’로부터 속 시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배려’와 ‘사회와 인류를 위해 더 좋은 일’ 사이에는 무엇이 가로놓여 있을까? ‘자기배려’를 제대로 하면 후자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일까? 둘이 양자택일이거나 이율배반적인 것은 아닐진대 아직은 둘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 내가 풀어야 할 과제!

 
고미숙샘의 ‘백수를 위한 비전’은 단순명쾌하다. “노동에서 활동으로! 화폐에서 자유로! 쾌락에서 충전으로!” 그리고 “소유에서 순환으로!” 그러니 백수로서 위의 테제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외에 어떻게 살지에 대한 무슨 뾰족한 방법이 더 있을까? 필요한 건 약간의 용기와 뚝심일 뿐. 누가 뭐래도, 배가 좀 고파도, 뚜벅뚜벅 백수의 길을 가보는 것. 목적지와 성과에 연연해하지 말고 하루하루 충만한 삶을 보내는 과정에 착목하는 것. 목적지가 없어도, 예비양식이 없어도 그게 ‘엄청난 여행길’이라면 기꺼이 떠나는 「돌연한 출발」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는가. ‘여기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나의 목적지일세.” “나리께서는 어떤 예비 양식도 갖고 있지 않으신데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따위 것은 필요없다네.” 내가 말했다. “여행이 워낙 긴 터라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한다면, 나는 필경 굶어 죽고 말 것이네. 예비 양식도 날 구할 수는 없을 걸세. 실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여행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여행이라는 걸세.”

-프란츠 카프카, 「돌연한 출발」, 『변신』, 이주동 옮김, 솔, 2007, 6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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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좋은 날?!”


‘작심삼월’이 될 지도 모를 일 한 가지.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오늘 좋은 날?’하고 가볍게 묻고는, 느낌에 따라 ‘오늘? 좋은 날! 내일도 좋은 날!’하든가 아니면 ‘오늘은 70점정도? 내일은 좋은 날!’한다.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날마다 좋은 날! 오늘도 좋은 날!’하고 다짐한다. 한 친구에게 “내, 요새 이런 짓을 하노라” 했더니 “아니, 그런 초딩 같은 짓을 아직도?”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술자리가 심심찮게 잦은 편인데, 내일걱정 없는 자유인이 되다보니 편안한 이들끼린 술자리가 마냥 길어지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백수들이야 늦잠이라도 푹 자면 그만이지만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이들은 몸고생,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 민폐가 될 일이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떠오른 것이 운문화상의 화두 “날마다 좋은 날”이다. 그 즈음 『낭송 선어록』을 읽고 있었던 탓. 화두의 생활화라고나 할까. 눈뜰 때부터 눈감을 때까지 하루를 오롯이 잘 살아보자는 취지에서다. 삼 개월 가까이 해보니 술 덜 마시고 돈 덜 쓰고, 책 읽고 산에 가고, 오랜 친구 선후배를 만난 날들은 주저없이 “오늘 좋은 날!”이라고 답하게 된다. 그런 날은 아주 기분좋게 잠이 든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불필요한 일들을 줄일 뿐만 아니라 매사에 다소 신중해짐을 느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작심삼월로 흐르던 “오늘 좋은 날”을 계속 살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는 잘 때와 일어날 때의 다분히 감각적인 자문자답이었지만, 앞으로는 내용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보려고 한다. ‘오늘’ 또는 ‘지금, 여기’를 충만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결과나 목적보다 과정으로서의 삶 자체를 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하지만 목적을 두지 않는 삶, 결과나 성과를 목표로 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닐 터.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 주변에서 그 일의 목표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고, 스스로도 어떤 성과가 있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목적 없는 삶은 괜스레 무익한 것으로 간주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도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어쩌면 목적이란 것을 의도적으로 밀어내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집착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생전에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경지에 단 한 번만이라도 가볼 수 있을까?

 
이 즈음에서 공부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낀다. 책을 읽고 글을 써본다는 것은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기존의 척도, 목표나 성과로 되돌아가려는 자신에게 문제를 던지며 경쟁적 자본주의 사회의 중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끌어올리려는 노력과 연습 없이는 ‘과정으로서의 삶’이 소중하게 이어질 리 없다. 올 한해 감이당 공부를 통해 다르게 생각하는 힘, 스스로를 돌아보는 힘에 대해 조금은 익힌 듯하다. 읽기만큼 잘 되지 않는 쓰기가 여전히 고민거리이긴 하지만 되던 안 되던 계속 도전해보는 재미도 있다. 게다가 에세이를 쓰는 과정에서 체험하고 발견하게 되는 한두 가지의 시행착오는 공부를 해나가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듯하다. 이번 에세이를 맞아서는 카프카의 『변신』과 장시간 씨름해보았으나 뒷심부족으로 역시 ‘공부’만 하고 말았다. 다음에 카프카를 또 만난다면 훨씬 반가우리라는 기대로 위안을 삼을 작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보상이 필요없다. 사랑하는 순간 이미 천국을 경험하게 되니까. 그렇다면 공부에도 목적이나 이유, 대가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 공부하는 순간 삶은 이미 축제가 되니까. 그리고 그 축제의 절정이 곧 평상심이다. 일상이 공부요 곧 도가 될 때, 생사의 문턱 역시 가뿐히 넘나들 수 있다.

-고미숙, 같은 책,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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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애독자   2016-01-11 16:43:58
 
“‘자기배려’와 ‘사회와 인류를 위해 더 좋은 일’ 사이에는 무엇이 가로놓여 있을까? ‘자기배려’를 제대로 하면 후자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일까?”

절박한 내면적 요구가 있어 선택한 자신의 실존적 상황을 남의 일 얘기하듯 하시네요. 자신의 절박한 내면의 소리를 못 듣는 것. 자기를 망각하고 끊임없이 사태의 주변을 맴도는 것. 이게 지금 문제잖아요. 자기 문제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대의명분으로 치장하려는 안이한 태도로는 자기배려도 인류 구원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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