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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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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6-01-02 16:37 조회5,57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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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광기

이 여민 (감이당 대중지성 2학년)

들어가며

조 승우가 나오는 뮤지컬 ‘맨 오브 라 만차’를 2번이나 보면서 ‘이상을 향해 포기하지 않는 돈키호테’에 감격하여 매번 울었다. 나에게 뮤지컬에 나온 돈키호테는 주변에서 이상하게 보아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멋진 사람으로 보였다. 돈키호테의 모습에서 과거의 나를 중첩한 것이다. 불교 공부를 처음 할 때 수행한다는 이유로 속세와 절연했던 내가 떠올랐다. “그래, 수행하면 고립되고 외롭지만 이 길을 가는 것은 역시 대단한 일이야.” 이렇게 뮤지컬이 말해주는 것 같아 감정이입이 되었었다. 그런데 감이당에서 ‘돈키호테’를 공부하면서 곰샘은 돈키호테가 광인 즉 '미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돈키호테는 조선시대사람으로 현대를 사는 상태로 볼 수 있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이상인 ’방랑기사‘의 눈으로 지금을 보고 있으니 그 어긋남이 광기인거지. 어딘 가에 미친다는 열정도 광기와 통하는 것이기도 하고.”이 말씀이 내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어떤 친구가 “너는 그때 미쳤었어.”했던 말이 동시에 생각났다. 39세에 만난 불교에 꽂혀서 이전의 삶을 단절하고 그 프레임으로만 세상을 보았던 내가 주위에서는 미친 것으로 보인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나의 시각은 불교 중 ‘보시’ ‘업장소멸’ 등 특정부분에 편향되어 있었다. 과거의 나를 반추하는 의미에서 돈키호테의 광기에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책을 직접 읽어보니 ‘돈키호테는 방랑기사에 미쳐서 집을 뛰쳐나간다.’고 작가는 처음부터 말하고 있었다. 돈키호테의 광기를 철학적으로 살펴보고 싶지만 지식이 너무 짧다. 수업 시간에 곰샘이 “작품 안에 의학적 단서가 있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이것을 한의학적으로 찾아보려 했다. 그리고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보는 것’이 ‘생각한대로 사물을 보는 것’이라는 정화스님의 유식강의와 연결이 되는 듯했다. 이 지점까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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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에세이에서 돈키호테의 광기를 탐구하고자 한다

심장과 뇌(신장)의 문제로군!

돈키호테에게 신경 써서 잘해주고 심장이나 뇌에 좋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드시게 하라고 권했다. 잘 생각해보면 그의 모든 불행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세르반떼스 기발한 기사  라 만차의 돈키호테2 P35 민용태옮김 창비세계문학4〕

돈키호테가 방랑기사가 되어 집을 뛰쳐나가서 여러 가지 사건을 벌인 뒤 집에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그의 광기를 심장과 뇌의 문제로 보았다. 그래서 심장과 뇌에 좋은 음식을 먹게 하고 방랑기사책을 보지 않게 함으로써 그의 미친 기를 잠재우려고 하였다. 과연 그런 걸까? 돈키호테 1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돈키호테라고 아는 50대 남자의 본명은 시골 귀족 알로소 끼하노이다. 그는 50대에 접어들었지만 골격이 튼튼하고, 군살이 없는데다 얼굴도 홀쭉하고 삐쩍 말랐다. 그는 수입의 4분의 3을 고기를 먹느라고 소비했다. 살코기를 즐겨 먹으면서도 살집이 전혀 없다. 이를 음양오행으로 보면, 모이거나 쌓이는 水나 土기운보다는 밖으로 뻗고 산포하는 火나 木의 기운이 더 강한 것이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서 사냥하는 것이 취미인 원기 왕성한 체질이었다. 그는 오십 중년의 양기가 넘치는 남자였던 것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그는 일상이 너무 한가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는 일이라곤 사냥과 농사일 관리뿐이었다. 그런데 마침 기사소설을 읽고 그 세계가 너무 재미있고 신기해서 빠져들기 시작한다. 기사소설을 열광적으로 좋아한 나머지 그나마 몸을 쓰고 운동하던 사냥을 잊어 버렸다. 좋고 기쁜 것은 화의 속성인데 심장이 주관한다. 먹는 음식도 육식인데 사냥도 하지 않으니 이때부터 피에 콜레스테롤이 넘치게 되지 않았을까?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도 심장에 과부화가 걸리는 조짐이 보인다. 이것도 모자라 그는 돈 관리를 제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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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끼호떼, 심장에 과부하가 걸리다

심장은 우리 몸의 군주지관에 해당하는 장부이다. 한 나라를 군주가 다스리듯이 심장은 오장육부에 피를 보내며 우리 몸을 통솔한다. 이때 냉정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군주의 임무이다. 심장에 문제가 생기자 왕이 장희빈의 치마폭에 쌓여 나랏일을 내버려 두듯이 돈키호테도 일상을 내팽개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드넓은 논밭을 팔아서 집안 곳곳에 기사소설을 채워 놓는다. 마치 피에 콜레스테롤이 쌓여 혈전이 되듯이 담음을 만들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우리시대로 말하자면 ‘오타쿠’이다. 그런데 이 양반 기운이 좋다. 그 책을 밤낮 잠을 안자고 읽고 외워둔다. 뇌는 물을 다루는 장부인 신장에 배속된 장기이다. 이렇게 뇌를 과하게 쓰니 물이 부족하게 되어 ‘뇌가 푸석푸석 말라버린’ 상태가 된다. 기사소설을 만나기 전에도 양기가 강한 사람이었다. 하물며 책을 읽고 외워두느라 뇌수를 심하게 쓰니 물인 음기는 부족한 상태가 된다. 물이 부족하니 불을 꺼 줄 수 없게 되고 양의 기운은 더 세 진다. 신장의 기운은 허하고(腎虛) 심장의 화기는 치솟게 된 것이다. 동의보감 내경편에 보면 전광(癲狂)이란 말이 있다. 우리 시대로 말하면 광인을 말한다. 이 전광의 시작은 양(陽)에서 생긴다고 한다. 음이 허하고 양이 실하면 광병이 된다. 아! 물 부족, 불 왕성한 상태가 된 돈키호테이다. 

그러다 보니 돈키호테는 마침내 정신이 이상해지고 만다. 머릿속에는 기사소설에서 읽은 갖가지 환상으로 가득 찼고 상상을 초월한 엉터리 이야기들이 그의 생각 속에 실재로 자리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읽은 유명한 기사소설 속의 꿈같은 희한한 이야기들이 모두 현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이 세상에 기사소설 속 이야기보다 더 명확한 현실은 없다고 생각했다.
〔세르반떼스 기발한 기사 라 만차의 돈키호테1 P47 민용태옮김 창비세계문학4〕

그래서 이 불쌍한 영감은 7월의 가장 더운 날 방랑기사 임무를 수행하려고 몰래 집을 떠난다. 길을 나선 것이다. 맞네! 그의 광기는 심장의 화기가 왕성해지고 물 부족으로 뇌수가 말라버려 시작된 것이었다. 심장과 뇌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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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에 빠진 그대, 돈키호테

과거의 나로 돌아가 보자. 당시 38세였던 나는 스위트홈을 9년째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생활이 매일 똑 같아 보였다. 심심했다, 돈키호테처럼. 그러던 차에 어머니가 인생의 지혜를 배우라고 불교 공부그룹을 짜 주셨다. 이때 만난 선생님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전생, 윤회, 업, 성불, 깨달음등등. 갑자기 사는 게 재미있어졌다. 돈키호테가 방랑기사소설에 푹 빠지듯이 나도 이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도 부처처럼 수행해서 ‘왕자가 담을 넘어 수행하고 생사로부터 벗어난 경지’를 공부해 보고 싶어졌다. 

처음에는 건강하고 맑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갑자기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주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생사해탈은커녕 눈앞에 일어난 어떤 사건도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때 나를 끌어당긴 것이 금강경 한 구절이었다. ‘딱히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주위가 나를 모두 욕하면 그것은 전생의 업장이다.’ 이것만 믿고 새벽에 일어나 수행하고 365일 환자보고 일상생활에서 생긴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느라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래서 엄청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낮에 그 일들을 다 해결하느라고 심신이 지쳐서인지 밤에 잠은 잘 잤다. 그러다보니  몸무게가 100kg에 육박했었다. 돈키호테가 음 부족, 양 과잉인 ‘음허화동(陰虛火動)’이었다면, 나는 어려운 일이 닥치고 몸이 변하자 담음이 쌓여 맑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꽉 막힌 몸이 되었다. 이렇게 기운이 한 쪽으로 치우치면 몸에 문제가 생겨 제정신으로 살기 어렵다는 것을 돈키호테와 과거의 내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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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몰두하면서 엄청 먹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대로 보다

돈키호테는 광인이 되어 길 위로 뛰쳐나간다. 돈키호테가 믿는 대로 세상의 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풍차가 악독한 죄의 씨앗인 거인으로 보이고, 이발사의 세수 대야가 황금투구로 보인다. ‘돈키호테는 눈에 보이는 것마다 소설에 자주 나오는 엉뚱한 기사 행각이나 황당한 생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세르반떼스 기발한 기사 라 만차의 돈키호테1 P281 민용태옮김 창비세계문학4〕한 술 더 떠서 양떼구름을 적인 기사의 무리로 본다. 소설책 세 페이지에 해당하는 대사로 모든 기사의 이름을 열거하고 갑옷 색깔과 무늬, 좌우명까지 자세히 덧붙여 쉬지 않고 말한다. 자신이 믿는 바를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듣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한다. 
 
유식을 배울 때 정화스님께서는 뇌는 정보의 창고이고 정보자체가 종자가 된다고 하셨다. 종자가 생명의 정보들을 가지고 기억의 내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사는데 필요하면 정보의 스위치를 켜고, 필요 없으면 정보의 스위치를 끄거나 무효화시켜 자신이 사는 시대에 맞게 대충 살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돈키호테도 뇌 안의 기억창고에 기사 소설을 차곡차곡 쌓아서 그 기사소설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끔 스위치가 켜진 것이다. 이 세상을 보게 해 준 새로운 눈이 ‘방랑기사소설’이였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분별하도록 되어 있는 일상의 틀을 깨 버린다. 돈키호테는 밥 먹던 목동들 앞에서 조리 있게 방랑기사의 위대함을 말한다. 논리적인 이야기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와 청중 앞에서 이야기한다. 삶의 맥락이 끊어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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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는 풍차에 달려들어 온 몸이 부서지고 아파도 방랑기사의 길을 그만 두지 않는다. ‘아프면 삶이 바뀐다.’ 이게 아니라 돈키호테는 이런 고난을 방랑기사의 명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육체의 상처를 엉터리 ‘치료묘약’을 만들어 스스로 치료한다. 이 환상을 실제라고 본 것이다. 마음과 몸이 따로 있지 않다. 지극히 믿으면 그 자체가 힘을 발휘한다.

이런 돈키호테도 기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둘시네아가 마법에 풀려나 해방되기를 바라는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아픔이 그를 우울증에 빠지게 한다. 이상을 향해 질주하며 기운은 다 썼는데 결과가 없는 것이다. 환상으로 시작한 일이니 눈에 보이는 성과도 있을 리 없지만 말이다. 이제 정기를 다 소모한 그는 신열이 오르고 열병이 들어 엿새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사는 돈키호테가 슬픔에 빠져 불쾌감, 권태, 우울로 목숨이 위태롭다고 말한다. 돈키호테는 좀 자고 싶으니 자기를 혼자 있게 해 달라고 청했고, 그는 주위 사람들이 죽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한 번도 깨지 않고 여섯 시간을 쭉 잔다. 잠에서 깨어난 돈키호테가 말한다.  

"나는 이제 정신이 제대로 밝아졌고 자유롭단다. 머릿속에 자욱하던 안개 낀 무지의 그림자 하나 없이 말이다. 그 역겨운 기사도에 관한 책들을 끊임없이 죽도록 읽어대다가 정신에 안개가 끼었던 거지. 이젠 그것들이 다 엉터리였고 사기였음을 알았단다....이 순간 나는 내 일생이 미친 사람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죽을 만큼 나쁜 것이 아니었음을 알리고 가고 싶구나.”
〔세르반떼스 기발한 기사 라 만차의 돈키호테2 P850 민용태옮김 창비세계문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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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임종 장면

잠은 음기로 물의 기운을 채워주는 행위이다. 말라버린 뇌수에 물이 공급되고 죽음이 눈앞에 오자 돈키호테는 자신이 환상에 빠졌던 것을 알아차린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유식(唯識)에서 말하는 일체 이미지를 마음에서 일어난 환상으로 아는 것이다. 물론 기사소설에 미쳤던 부분에 대해서만 허상임을 알아차린다. 

나는 미치광이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 정신입니다. 나는 라 만차의 돈키호테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말했듯이 착한 양반 알론소 끼하노올시다.
〔세르반떼스 기발한 기사 라 만차의 돈키호테2   P854 민용태옮김 창비세계문학4〕

이렇게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서 죽었다.

나로 다시 돌아가 보면 당시 7년 동안 세상을 보는 눈은 ‘보시’‘전생 업장소멸’ 이었다. 인생의 지혜로 공부한 불교를 내 상황을 빨리 해결하는 도구로 쓰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살다보면 누구나 위기를 겪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지 못했었다. 전생업장으로 일어난 특별한 어려움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공부하는 스님에게 보시하는 것’이 제일 빠른 방법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공부하는 스님들께 보시하라고 주신 돈이 사적으로 쓰이고 있다.” 는 말을 들었다. 돈키호테가 잠을 푹 잔 뒤 정신이 들었듯이 나는 믿음이 깨어지자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업장소멸’과 ‘보시’에 광적으로 몰두하던 수행을 그만두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돈키호테를 읽기 전까진 지난 7년을 나는 ‘용광로에 달구어지는 수행의 기간’으로 여겼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를 지낸 딸들은 보는 관점이 달랐다. “그때 엄마는 좀 이상했어.” 나는 최근까지도 이를 쉽사리 인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찬찬히 돈키호테를 읽어 보니 ‘아! ‘닫힌 눈’으로만 세상을 보았던 나는 그때 미쳤었구나.’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나가며

물과 불의 조화, 평형 상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기쁨이 넘치거나 주체하지 못하는 열정은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심심하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찾아 나서게 된다. 마치 돈키호테처럼. 이런 경우는 길을 나서도 외부를 만나지 못한다. 이미 방랑기사의 틀로 세팅된 눈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닫힌 경우는 길로 나서본들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를 재현하는데 몰두하게 된다. 여행을 떠나도 쇼핑만 하는 것처럼. 그러면 길에서도 외부와 소통되지 않으니까 길을 떠난다고 새로운 삶이 구성되지 않는다. 소통할 수 있는 몸이 되어야 길을 떠나도 지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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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보니 돈키호테와 나의 미침은 닮은 부분이 많았다. 돈키호테는 스스로 방랑기사 소설을 통째로 외워 그대로 세상을 보았다. 그래서 나타난 실제 사건으로 자신의 육체가 아프거나 다치는 것은 ‘고난’과 ‘수행’의 결과로 보고 명예스럽게 여겼다. 나는 불교를 빙자한 선생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 난 불행을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 업장을 소멸하려면 내가 번 돈을 모두 주는 ‘보시’를 당연하게 여겼었다. 한의학과 유식(唯識)으로 돈키호테의 광기를 찬찬히 다시 보니 과거의 내 모습이 많이 보인다. 돈키호테를 만나 낱낱이 살펴보기 어려웠던 나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돈키호테를 만나지 못했다면 과거의 나를 ‘미쳤었다.’ 이렇게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면서 제 정신으로 잘 살려고 한다. 죽을 때 깨달은 돈키호테와는 달리 나는 살아서 정신을 차리고 싶다. 그런데 사실 미친 순간에는 이것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계속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 기쁨이나 슬픔이 와도 ‘계절이 변하듯 지나가는 사건’임을 알고, ‘나를 구할 수 있는 자는 나’뿐이라는 말처럼 나를 끊임없이 살피면서 말이다. 



댓글목록

애독자님의 댓글

애독자 작성일

돈키호테의 정체성을 이렇게 명쾌하게, 간단명료하게 정의해 주시다니... 미치인...놈!
미친 이유는?
사지 멀쩡한 놈이 일 안 하고 놀고먹어서!

몸 안에 쌓인 쓸데없는 힘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군요. 몸은 안 쓰고 맨날 소설 나부랭이만 읽어대니. 심장의 화기가 치솟고, 뇌가 푸석푸석 말라버려서. 현실과 환상 분간을 못 하고. 거인들아 댐벼라! 부러진 창을 휘두르며 풍차를 향해 돌진하게 되는 것이로군요.

이런 돈키호테에게서 언젠가 불교에 푸욱 빠져 현실을 잊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셨군요. 뮤지컬 <맨 오브 라 만차> 두 번 보면서 매번 우셨다니. 괜히 저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게 고전의 힘인가봐요. 이 미치인 놈 하면서 거기서 절절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근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완전히 미칠 수 있는 힘, 그것이 광기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완전히 앓아버림으로써 치유가 되는 병 같은 거요. 도(道)는 열린 길로 나서는 것이지만 그 길에서 때로 수렁을 만나기도 하지요. 피해도 번번히 되돌아오는 업장 같은 것.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심연의 밑바닥에 한 번 깊이 가라앉아 보는 것도 길을 열어가는 한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 안의 돈키호테를, 나의 방황과 번뇌와 실패를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