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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어떻게 나 자신으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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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6-12-27 17:45 조회4,3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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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나 자신으로 살 것인가? 
                                                                   
배현숙(수요대중지성)

누군가의 시시콜콜한 푸념을 듣는 일은 그리 즐겁지도 않고 지루하기까지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념부터 시작하려 한다. 4학기 내내 들뢰즈라는 이름에 눌려 살았다. 정작 들뢰즈는 모든 주체와 표상에서 벗어나라고 하는데, 나는 내가 만들어 낸 들뢰즈라는 표상에 짓눌려 내내 허우적대었다. 『안티 오이디푸스』를 시작할 때의 설렘과 기대는 열등감과 좌절감으로 변질되었다. 푸코가 서문에서 알려준 “자신을 내몰아, 텍스트를 떠나, 문을 탕 닫고 나가라는” 그 숱한 초대들은 전혀 발견하지도 못한 채, 영토에 갇혀 내내 우울했다. 그리고 몇 날 며칠  『안티 오이디푸스』를 이해하기 위해 남들이 친절하게 설명해놓은 이 책, 저 책들에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이며, 애꿎은 수강 노트만 들썩였다. 도대체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의 어떤 욕망이 나를 이렇게 홈 파인 회로로만 가게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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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회로에 갇힌 욕망

정말로 파악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지금 당장 붙들려 있는 지층이다. (삶이 어떤 폐쇄회로에 갇혀 있는가? 인식은 어떤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는가?)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쓰기』, 김해완 지음, 북드라망, p99
 
4학기 내내 한 줄도 편하게 읽지 못한 책을 펼쳐놓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두려워하는지 담판을 지어야 했다. 그나마 푸코의 서문이 없었더라면 어찌했을까! 친절하신 푸코의 서문에 새까맣게 밑줄을 그으며, 내가 이 책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하나씩 하나씩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내게 화가 났다. 들뢰즈가 뭐길래, 도대체 『안티오이디푸스』가 뭐길래! 이 책을 읽지 않고도 들뢰즈를 모르고도 이렇게 오래 잘만 살지 않았는가! 바로 이어 자학이 이어졌다. 나는 애시당초 이 책을 소화할 머리와 능력이 없었던 게야. 욕심만 넘친 거지. 이미 굳어버릴 대로 굳어버리고 늙을 대로 늙어버린 이 머리로 어떻게 저 초인적 에너지를 발휘하며 차원을 가리지 않고 종횡 무진하는 석학의 사유를 따라갈 수 있겠어? 그러다 보니 한없이 딱해 보여 위로를 건넸다. 본격적으로 공부 좀 하겠다고 대든 게 이제 겨우 열 달 째인데, 이렇게 어려운 책을 그렇게 쉽게 읽을 수 있다면 누가 공부를 어렵다고 하겠어? 수십 년 밥 먹고 공부만 한 사람도 어렵다고 말하지 않나? 그런 걸 한 방에 해내려 하다니! 욕심이야, 그래, 욕심이었어! 모르는 게 당연해. 

모든 것은 욕망 기계들 속에서 동시에 기능하지만, 또한 중단들과 단절들, 고장들과 결함들, 단속들과 합선들, 거리들과 분산들 속에서, 결코 그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재통합하지 않는 총합 속에서 기능한다.                     『안티 오이디푸스』,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김재인 옮김, 민음사, p83

내가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곳곳에서 이루어진 절단, 분리, 고장과 결함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산 과정이었을 뿐인데, 나는 그 모든 생산들을 ‘실패’라는 관념적 표상으로 통합하여 회귀함으로써 스스로 영토에 갇히고 있었다. 푸코의 서문을 다시 펼쳤다. “부정의 낡은 범주들(법, 한계, 거세, 결핍, 결함들)로부터 충직함을 철회하라.” ‘부정의 낡은 범주들’이라는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랬다. 나는 읽지 못할 이유를 찾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리 정해놓은 표준에 갇히고, 스스로 규정한 표상을 내면화하며 영토에 갇힌 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 안의 파시즘, 그 미세한 흔적들

내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꼭 읽고 싶었던 이유는 그것이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는 텍스트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욕망이라는 낯선 단어가 그동안 해결할 수 없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들뢰즈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환상도 한 몫 했으리라. 이 책에는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욕망이라는 말도 낯설건만 자본주의에 분열증이라니! 그러니까 이 책은 그냥 욕망에 대한 사용설명서가 아니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어떻게 인간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 했는가를 인정하면서도, 그런 정신분석이 어떻게 인간을 더 억압적인 방식으로 영토화하려 했는가를 비판하는 책이다. 들뢰즈 가타리가 자본주의를 분열증과 연결시킨 것은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었다. 즉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방식이 분열증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 책을 쓰던 1960년대는 정신분석의 영향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던 때였고, 들뢰즈 가타리는 자본주의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확장시켜왔던 ‘무의식’에 관심을 가졌다.(『들뢰즈, 유동의 철학』, 우노 구니이치, 이정우, 김동선 옮김, 그린비, 150) 내가 이 책을 두려워한 이유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이런 스펙트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나는 왜 이 말이 그토록 생경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왼통 자본주의 세상임에 틀림없고, 그것으로부터 어느 하나 자유롭지 않은 게 분명한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딴 세상에 살다 온 사람처럼 현실감이 없다. 무지해서일 것이다. 그것에 대해 깊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것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등 돌리고 뛴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그럴 깜냥도 못되니 미리 겁먹고 도망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등 돌리고 뛰었어도 그 자본주의가 내게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배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주의는 아주 교묘하고도 섬세하게, 내 안에 결핍과 좌절을 깊이 내면화하도록 배후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비하와 열등감은 그것들이 남긴 잉여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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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학생운동부터 시작하여 남편과 함께 학교에서 내몰린 80년대를 거리에서 떠도는 동안에는, 자아와 정체성과 삶의 의미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도 탐구도 필요 없었다. 누군가 “차라리 이데올로기가 삶의 목표였던 그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라고 말한 것처럼, 정말 그랬다. 국가와 민주, 자유, 정의, 평등 같은 추상적 초월적 기표가 삶의 전부였던 그 시절을 지나, 햇수로 십여 년 만에 통장에 찍힌 숫자를 확인하면서,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 생각하기 시작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었다. 한 번도 내 욕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우리’의 욕망이라면 모를까. 

나는 그 시절, 내 안에서 어떤 본원적 억압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욕망 기계들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했다. 보일러를 틀지 못한 방에서도 춥지 않았던 때를 지나와보니, 세상은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따라 잡을 생각도 없었지만 따라갈 수조차 없는 세상을 뒤에 두고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고개를 돌리는 일이었다. 남편은 학교로 돌아갔지만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다 스스로 변방으로 비껴 섰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그렇게 멀찌감치 서서 영토에 갇혔다. 무기력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거리로 몰려 나왔던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억눌린 욕망과 자신들의 해방에 대해 외쳤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병든 사람들처럼 은신처로 숨어들었던 것일까?” 들뢰즈 가타리가 이 책을 쓸 당시 가졌던 이 질문은 바로 내가 나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었다. 

경제 성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 어디서든 직장에 다니지 않거나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 우리는 자기 안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고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환경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겼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했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느린 걸음, 9쪽

세상은 어느새 분주해져 있었고,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만만세!’를 외치던 광장은 시장이 되어 있었다. 함께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던 동지들은 모두 ‘교사’라는 직함을 되찾고 ‘선생님’이 되어 그들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지만, 나는 시장이 되어버린 광장의 한 귀퉁이에서 나를 불러 줄 ‘이름’을 빼앗긴 채 망연자실했다.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부랴부랴 ‘직(職)’과 ‘업(業)’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기르고, 살림하며, 지역신문, 학원, 논술, 사서보조, 기간제 교사, 배운 도둑질을 써먹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끌어안고 ‘일타 삼피’의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이름’들을 바꿔 달았다. 그런데 그 숱한 이름을 가슴에 달고도 나는 왜 여전히 ‘결핍’과 ‘좌절’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그 허망함을 메우기 위해 무엇이라도 찾아야 했다. 국선도, 단학, 마음공부. 그 시절 나는 본질주의자였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답도 없는 질문을 반복하며 ‘진정한’, ‘의미 있는’, ‘참다운’ 것들을 찾아다녔다. 그런 것들은 나를 비우라고 말했지만 나는, 무거웠다. 누구도 나를 가로 막아서지 않았지만, 나는 ‘나’를 곁에 두고 찾지 못했다.

그 시절, 먼지 낀 사진첩 속 가족사진에 박혀있는 내 표정은 전혀 나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굳어있어 볼 때마다 민망하다. 십여 년 동안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던 학교에서 나올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그 홈 파인 회로를 벗어나지 못했다. 끊임없이 비정규 자의식이라는 표상화된 영토에서 도주선을 마련하지 못한 채 휘청거렸다. 나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바로 그것까지도 욕망했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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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와 코드로부터 달아나기

현실계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욕망의 종합들의 결과물이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다. 또는 고정된 주체를 결핍하고 있는 것이 욕망이다. 탄압을 통해서만 고정된 주체가 생기는 법이니 말이다.
『안티 오이디푸스』, p61

지금의 이 찌질한 나는 내 욕망의 결과물이다. 나보다 먼저 욕망이 있었다. ‘탄압을 통해 고정된 주체’로 있기를 욕망한 결과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주체 이전에 욕망과 배치가 있다’고 말한다. 배치를 떠난 의지는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인연조건의 산물이며 모든 욕망은 내가 살고 있는 시대적 조건과 연관이 되고, 그 모든 일들은 지금 나 이전에 존재하는 조건의 배치 속에서만 설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랬다. 나는 그런 인연 조건 속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닌, 배치의 산물이었다. 이 사회체에는 끝없이 욕망들이 흘러 다니고 그 욕망들은 코드를 만들며, 그 코드를 가진 욕망들은 주체를 형성하면서 집단을 형성하고 커다란 배치물을 형성한다. 그런데 자연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은 욕망하는 생산이 일차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배치물을 끝없이 형성하며 영토가 되더라도 늘 그것으로부터 흘러넘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즉 영토로부터 늘 무언가가 빠져나가게 된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규정적이지 않다. 들뢰즈는 이 빠져나가는 힘을 ‘탈영토성’이라고 말한다. 

주체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존재는 규정적이지 않은 그것들 때문에 규정적인 그것으로부터 늘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어떤 순간도 동일한 나일 수 없는 이유다. 고정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모든 존재는 내가 아님으로써만이 ‘나’일 수 있고, 나로부터 빠져나가는 지속의 힘으로써만 나일 수 있다. 나라는 존재는 끝없이 영토에 갇히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에세이를 쓰면서 ‘먼 기억’이라는 이름의 망상으로 또 다시 규정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규정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또 다른 힘도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글쓰기란 그러한 과정인 것이다. 이 달아나는 힘들이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평형 상태가 될 때를 죽음이라고 한다. 존재가 위험에 빠지는 순간은 바로 그런 순간이다.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영토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바로 그때! ‘나’를 ‘고정된 실체’로 규정하는 바로 그 순간! 지구가 기울어 진 채 돌고 있고 별들도 기울어진 채 돌기 때문에 매번 오는 봄이 다른 봄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매번 차이의 반복으로써만이 존재가 될 수 있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존재, 도주선을 만들어 끊임없이 비평형상태를 만드는 것, 이것이 존재의 본질이다. 고정된 실체, 영토로부터 달아나기!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작용하는 이 모든 중력- 사회적 가치, 고정된 신념체계들로부터 달아나기! 그 반복되는 과정만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영토와 코드로부터 벗어나 다른 선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다른 접속이 가능해질 수 있다. 내 영토 안에 다른 코드와 영토성이 들어와야 비로소 탈주선이 마련된다. 문제는 접속이다! 접속의 계기는 자기 영토를 절대화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공부란 그런 계기를 잡을 수 있는 감성, 신체를 만드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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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
 
살아오면서 던졌던 어떤 본질주의적 질문도 나라는 존재와 내 삶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찌 인생에 답이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없음에도 나는 그것을 기어코 찾으려 했고, 삶의 목표 따위가 따로 있을 리 없는데, 끈질기게 그걸 찾아 헤매는 망상의 시간들을 보냈다. 답이 없는 질문들과 씨름하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내 ‘팔자’를 들여다보는 공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가 대운이 바뀌던 쉰다섯이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마치 온 우주가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는데, ‘나’가 거기에 있었다. ‘과정’일 뿐인 존재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낸 우주의 기운들은 시절 인연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기운들과 만나 연결되고 접속하며 생성하고, 영토화하고 또 탈주하면서 한 순간도 쉼 없이 ‘작동’하는 생성의 과정을 살고 있었다. 

몸을 본다는 것은 몸이라는 존재(Being)가 아닌 생성(Becoming)을 본다는 것이다. 즉 절대불변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작업이 아니라 기의 흐름이, 기의 모임과 흩어짐이 어떻게 세계를 만들어내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명랑인생 건강교본』, 김태진 지음, 북드라망, p266
  
내 몸, 내 팔자를 본다는 것은 ‘기의 모임과 흩어짐이 어떻게 세계를 만들어 내는 지 살피는 일’이다. 이 시공간의 배치 속에서 매번 다르게 운용되는 내 팔자가, 어떻게 다른 기운들과 만나 다른 방식으로 운용되고 드러나는 지 본다는 뜻이다. 내 팔자의 기운이, 내가 가진 코드들이 변환되어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기의 흐름, 즉 기관 없는 신체의 흐름 자체를 매번 동일한 방식으로 가져온다면 팔자는 굳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 내 여덟 글자의 코드를 공동체적 삶 속에 열어놓음으로써, 시공간의 배치 속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기관 없는 신체와 접속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야말로 ‘운명의 능동적 배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될 것이다. 

운명의 능동적 배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사유의 적극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기존의 통념과 표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전제를 바꾸는 데서부터 공부는 시작된다.” (정화스님)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 p31

니체는 모든 생명에너지의 본질을 ‘능동성’이라고 했다. ‘능동성’이란 “다른 것에 복종하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자기화하는 걸 원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완벽한 나를 만들고 그것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떠나고 다시 만나는 과정 속에서 나‘들’을 만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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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그토록 열망했던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나를 가두고 있는 모든 표상과 코드로부터 벗어나 충만하고 능동적인 욕망의 흐름을 내 삶에, 행동에 적용하고, 다양체로서, 내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과 거침없는 연결접속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으로 살기를 강렬하게 원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리좀적 존재로 매 순간 ‘중간’을 살 것인가? 어떻게 어떤 사건 앞에서 매번 새롭게 나의 다양한 욕망들을 있는 그대로 발휘하는 ‘강렬함’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뿌리를 내린 그 영토들로부터 ‘신중하게’ 도주선을 마련할 것인가? 오직, 쉼 없는 공부만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안티 오이디푸스』,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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