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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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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6-12-31 21:36 조회3,8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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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송형진 (감이당 일요대중지성)


들어가며


대중지성 1년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는 시점이다. 프로그램 오티때 곰샘께서 ‘사계절을 겪으면서 한번 공부해보라’는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어느 덧 마무리를 할 때가 되었다. 책을 읽기 위해서 시간을 쪼개고, 시간이 부족하면 사무실에서 일하는 시간을 훔쳐서라도 책을 읽으려고 했다. 늘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한 그 주의 읽어야할 분량을 다읽어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리고 좋은 문장은 필사를 하고, 그 종이 쪽지를 가지고 출근시간에 지하철역까지 40여분을 걸어가면서 읽고 외웠던 시간은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였다. 또 우리 조원들을 비롯해서, 같이 공부하는 분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고 산책했던 일들이 피와 살이 되는 것 같은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이런 시공간을 지내면서 새삼스러울 수 있지만 공부는 머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는 것이고, 혼자하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더 재밌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러한 1년 공부를 통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 지를 물어본다면, 글쎄 ‘딱히’ 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생활의 어떤 큰 패턴의 변화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계속한다면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다만, 내 생각의 변화 조짐들은 있는 것 같다.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이번 에세이의 주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사는가’라는 물음과 맥이 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가기 위해서 1년 공부를 포함해서 내 생각의 바탕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동안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지만 ‘시공간’, ‘운명애’, ‘가족관계’, ‘대중지성’이라는 4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얘기를 풀어보겠다.



이제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고, 시간은 직선적인 움직임을 가진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았다. 삶이라는 것이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니 말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로 합법칙성을 가지면서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진보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살고 있는 시대가 가장 문명화되고 진보화된 시대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방향성’을 가지고 시대는 ‘발전’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서양의 근대적 사유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은 구부러지고 접혀졌다. 그리고 이때 시간은 공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시간은 공간의 펼침이고, 공간은 시간의 주름이다. 시공간 = 우주(宇宙).                                                             - 바보야, 42쪽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유는 알 듯 모를 듯 했지만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시간은 직선적이지 않으며, “시간은 구부러지고 접혀졌다”하는 것이고, “이 때의 시간은 공간의 다른 이름”이며, 우주도 하나의 시공간이라는 사유는 내 생각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함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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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에 대한 사고는 “직선적 시간관”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20대에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역사적 합법칙성을 믿으며, 혁명을 꿈꾸었다. 그리고 동구권의 몰락을 목격하고, 좌절과 방황하는 시절을 보내지 않았던가. 지금 느끼고 있었던 것을 그때 느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지금의 나의 생각을 변화시켜 가려고 한다.


여전히 세상이 좋아지기를 희망하기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를 꿈꾸지는 않는다. 지금은 “일치일란(一治一亂)이 변주되고, 생과 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넘나들며 상생과 상극이 교차하는” 동양적 우주론과 음양오행론의 세계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인류가 남은 혁명은 모두가 구도자가 되는 코스뿐일지도 모른다”라는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활동과 관계의 네트워크를, 새로운 혁명을 꿈꾸며 살아가려고 한다.


아울러 1학기 에세이에서 썼던 ‘욕망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찾기 위해서 감이당에 와서 공부하고자 한다’고 했던 나의 문제의식을 바꾸려고 한다. 욕망의 출구를 찾으려고 했던 자체가 어떤 유토피아를 여전히 염두에 둔 생각이 아니었을까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의 욕망을 바로 들여다보고 ‘욕망을 재배치’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의 생각을 수정해가려 한다.



운명을 사랑하고자 한다


감이당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 2014년에 ‘중남미 프로그램’을 등록하게 되었다. 아마 절반도 출석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일 저녁시간이어서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빠진 것도 있지만,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같이 공부하던 분들의 사주풀이 얘기가 귀에 많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공부하러 와서 왜 사주를 얘기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사주명리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잘몰랐던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운명이라는 것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것에 매여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굳건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우연한 계기로 ‘내 몸에 대한 앎의 욕구 때문에 동의보감과 사주명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곰샘의 인터넷 강의를 듣게 되면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으며, 사주명리학의 기초강의도 듣고 책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일간이 ‘임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주명리에 대한 편견이 어느 정도 사라지면서 그 때 그 순간에 미워했던 ‘중남미 프로그램’을 같이 들었던 그 분들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사주명리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면서, 운명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거나 운명이라는 것은 극복되어질 수 있다는 등의 생각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운명애”로 바뀌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건 없다. 환난을 당했을 때 거문고를 켤 수 있는 공자, 그리고 그것을 담담하게 전하는 장자를 보라! 우리가 부러워하고 도달해야 할 경지는 바로 저기다. 왜 우리는 운명애를 누릴 수 없는가?”

                             - 바보야, 7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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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발버둥을 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삶을 온전히 그대로 살면서 그 삶에서 ‘거문고 같은’ 공부 등을 통해서 충만함을 느낀다면 그냥 족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오늘’을 열심히 살고, 물흐르는 듯 흘러가면서 새로운 스텝을 밟아가며, 나에게 주어진 나의 운명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자 한다.



가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1년의 프로그램 과정에서 망치로 맞은 것 같은 말 중의 하나는 ‘스위트홈이 망상’이라는 것이다. 결혼해서 딸,아들을 낳고, 22년째 가정을 꾸미고 특별한 문제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입장에서 좀 어처구니 없게도 느껴졌다. 꼰대같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나름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아이들도 별문제 없이 잘크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을 뿐인 것이지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사회적인 관습과 관행으로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랑에는 우정이라는 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좋은 부부란 ‘친구 같은’ 부부이지 ‘연인 같은’ 부부가 아니다. 후자의 관계는 반드시 구속으로 이어질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노후대책과 가족정책은 언제나 ‘건강과 경제력’, ‘맹목적 사랑’만 강조할 뿐 관계의 중요성을 방치하고 있다.”                 - 바보야,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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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를 고민하면서 건강과 돈에 대한 얘기를 해보았지만, 부부지간의 열정에 대한 생로병사에 대해서는 얘기해보지 못한 것 같다. “부부지간의 열정에 가을이 있고 겨울을 향해가는 것이 생리적 속성”이라는 얘기를 언젠가 자연스럽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좋은 친구같은 부부로 우정이라는 윤리를 부부관계에 접목시켜서 인연을 풀어가봐야 겠다.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최대한 그들의 인생에 많이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관계의 윤리를 맺어가는 것을 생각해본다. 이제 곧 성인될 아이들에게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자립하는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해보려 한다. 부모와 자식도 우정의 관계로 거듭”날 수 있게 말이다.



함께 하는 공부가 즐겁다


감이당에서 낯선 단어 중에 하나가 ‘대중지성’이었다. 모여서 공부한다는 얘기를 참 낯설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대중지성’이라는 단어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근대적 계몽이성에 대해서, 그리고 앎과 배움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앎에 대한 욕망, 앎을 통해 몸의 흐름을 바꾸고, 나아가 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이 욕망이 살아 움직일 때 그것이 곧 대중지성이다.”

                - 바보야, 135-136쪽


대중지성 일요반을 비롯해서 감이당에서 와서 공부를 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앎과 배움에 대한 욕망과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넘쳐난다는 것이었다. 이런 욕망들이 모여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은 단순하게 모여서 공부하는 그 이상의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중지성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죽어가는 뱀장어들이 때마침 나타난 미꾸라지의 생기있는 기운을 받아서 살아나는 것처럼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자극을 주며 삶에 활력을 주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함께 공부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의 원천은 이런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대중지성 프로그램에서의 공부를 통해서 내가 아직도 계몽적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대중지성이라는 말을 낯설게 느꼈던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더 많은 지식을 얻으려는 관점에서 책을 보고 있다는 생각,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 뛰어난 지도자가 다수의 대중을 이끌어가는 것이 어느 정도 당연하다는 생각, 강자가 약자를 구하고 약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당연하다는 생각, 조금 뭔가를 알게 된 것을 가지고 아는 척을 하려고 하는 것 등의 생각에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중지성’이라는 의미에서 내가 가졌던 계몽적 프레임을 깨야 한다는 자각과 깰 수 있는 엄청난 망치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배움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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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핵심은 ‘자기 안에 도’를 갖추는 것이다. ‘자기 안에 도를 갖춘 다음에야 다른 사람도 갖추게’ 할 수 있다. 그것은 계몽과 설득이 아니라 촉발과 감응이다”

                - 바보야, 133쪽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내 생각의 바탕이 수정되고 변경되어 가더라도 당장은 여전히 나는 ‘어떻게 살겠다’라고 굳은 결심을 가지고 자신있게 무엇인가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딱히’ 없는 것 같다. 굳이 앞으로 내 삶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면 “장자-되기, 조르바-되기의 프로세스”가 되지 않을까라는 희망사항 정도는 얘기할 수 있겠다. “대자연은 내게 몸을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고,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곧 나의 죽음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라는 마음과 자연, 죽음에 대한 장자의 말을 즐거운 마음으로 나는 만날 것이다. 또한 “조국이나 신, 이념 등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는” 조르바를 만나면, 나는 삶의 충만함을 느끼는 신체가 되어볼 것이다.


그렇게 별일 없어 보이는 것처럼 살면서, 지금처럼 읽고 싶은 책을 보고, 그것을 가지고 글을 쓸 수 있다면 족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을 위해서 감이당과 같이 “국가, 이윤, 제도에 포획되지 않는 자유의 새로운 시공간”에서 앎과 배움을 얻고 나누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책읽고 글쓰는 신체, 그리고 공동체적 신체가 되어가지 않겠는가. 이것은 그동안 나의 에세이 화두 중의 하나였던 ‘자유로운 개인과 조화로운 공동체’를 풀어가는 과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신체로 인생의 중장년을 보낼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별일없이 살아가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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