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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아줌마, 결핍의 환상을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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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6-12-29 17:10 조회4,5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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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결핍의 환상을 깨다

정기재(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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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하세요?

올해로 직장을 그만둔 지 딱 10년이 됐다. 그동안 아이도 키우고, 공부도 하고, 법당도 다니면서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가끔 누군가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을 때면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곤 했다. “집에서 놀아요.” 내심 전업주부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전업주부가 되기 전, 나는 진학-취업-결혼-출산을 단숨에 주파하면서 맹렬히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러다 사주에 갑자대운이 들어왔고, 나는 뭐에 씌운 것처럼 회사를 때려치우고 전업주부가 됐다. 그런데 적응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왠지 뒤처지는 것 같고, 쓸모없이 남편한테 얹혀사는 것도 같고...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친구를 만나면 어김없이 전업주부 콤플렉스가 발동했다. 그럴 때면 일상은 산만해졌고, 공부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일찍이 이것을 일러 ‘호모 미세라빌리스’라고 했다. ‘미세라블’, 곧 비참하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왜? 성장의 신화 속에서 끊임없이 결핍을 생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리치에 따르면 “발전의 미신”은 “호모 사피엔스의 의식과 감각을,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을 갖지 못한 궁핍한 인간, 곧 호모 미세라빌리스의 의식과 감각으로 탈바꿈 시켰다.”

(「요구:중독된 욕망」,이반 일리치, 재인용- 147p,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야』, 고미숙, 북드라망)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나는 스스로를 궁핍하고 비참한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마땅히 가져야 하는 직업’이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못마땅해한 것이다. 일단 가져야 한다는 욕망이 생기니 결핍감이 나를 장악했다. 그러다 한번은 따져봤다. 정말 취업이 필요한지 아닌지.

사람들이 사회에서 직업을 갖는 이유는 돈, 노동, 자아실현쯤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돈. 일단 우리 부부는 아이가 하나다. 덕분에 남편 월급으로 생활도 하고 저축도 가능하다. 그러니 돈 문제는 일단 통(通). 둘째, 떳떳한 노동.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밥하고, 청소하고, 애 키우는 일이 결코 만만치는 않다. 월급으로 환산되지 않을 뿐 주부도 떳떳한 노동자다. 그러니 노동도 패스. 셋째, 소위 자아실현. 존재의 변화란 측면에서 본다면 감이당에서 벅차게(?) 공부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통. 

결론은 ‘나에게 직업은 필요 없다’였다. 나는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은 떨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조금씩 이유를 바꿔가며 취업의 명분을 대곤 했다. 그렇게 지내온 게 벌써 몇 년째다. 어째서 나는 필요하지도 않은 직업을 욕망하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있지도 않은 결핍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일까? 


소유로서의 욕망, 결핍을 생산하다

들뢰즈·과타리는 이러한 결핍감을 욕망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결핍이란 결국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소유욕망이 낳고 기른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욕망의 논리는 첫걸음부터 그 대상을 놓치고 말았다. 우리에게 생산과 획득 중에서 선택하라는 플라톤의 나눔 말이다. 우리가 욕망을 획득 쪽에 두자마자 욕망에 대해 하나의 관념론적 착상을 갖게 된다. 이 착상은 욕망을 무엇보다 결핍, 대상의 결핍, 현실적 대상의 결핍이라고 규정한다.

(p58,『안티 오이디푸스』)

보통 우리는 결핍이 있고 난 후에 욕망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즉, 뭔가 필요한 게 있어서 그것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과타리는 오히려 거꾸로 라고 말한다. 필요해서 갖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라, 갖고 싶어 해서 필요해진다. 즉,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결핍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을 욕망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돈은 필요 없다. 결핍이 아닌 것이다. 돈이 결핍이 되려면 돈을 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취업을 욕망하지 않는 백수는 아무런 결핍도 없다. 우리 주변의 백수들처럼 말이다. 객관적 결핍? 그런 것은 애초에 없었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p61,『안티 오이디푸스』) 

그동안 필요 때문에 돈을 벌고 직업을 원했다는 믿음은 완벽한 착상, 즉 오해였다. ‘자립이 필요해서, 노후가 불안해서, 직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나는 그저 직업이라는 대상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야 설명이 된다. 아무리 객관적 상황을 들이밀어도 취업을 되풀이해 갈망했던 이유를 말이다. 나의 전업주부 콤플렉스는 돈과 직업에 대한 욕심이 원인이었다. 폼 나는 직업을 갖고 싶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획득하고 싶다.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결핍감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감정이다. 누군가는 넉넉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미래를 운운한다. 또 누군가는 여기저기 맛집을 순례하면서도 먹고 살기 힘들다 아우성이다. 마치 ‘결핍’은 인간이 타고 태어난 숙명인 것처럼 현대인들은 모두 부족하다, 모자라다 외친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상에 대한 욕망, 즉 탐욕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하지만 들뢰즈·과타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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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하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결핍으로서의 욕망이 ‘선택’의 결과라고 한 점이다. 인류가 욕망의 의미를 ‘생산’과 ‘획득’ 중에서 ‘획득’ 쪽에 두자마자 결핍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즉, 인류가 욕망을 ‘대상에 대한 소유욕’이라고 믿어온 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결과일 뿐, 욕망의 본질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욕망의 의미를 굳이 ‘획득’ 쪽에 묶어둘 필요가 없다. 사실 따져보면 ‘획득’으로 규정된 욕망은 역사의 방향을 사적 소유와 축적으로 틀어버렸다. 최근에는 자본과 결합하면서 무한증식과 무한소비라는 광란의 질주도 시작했다. ‘획득’, 즉 ‘소유’로서의 욕망이 이런저런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으니, 이제는 욕망의 의미를 ‘생산’ 쪽으로 돌려 재구성할 때다. 


생산하는 욕망, 지금-여기를 복원하다

요컨대 모든 기계는 자신이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자신에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 자체 또는 흐름의 생산이다. 이런 것이 생산의 생산의 법칙이다. 도처에 욕망이 샘솟는 흐름-절단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바로 욕망의 생산성이요, 생산물에 생산하기를 접붙이는 일을 한다.

(p75,『안티 오이디푸스』)

들뢰즈·과타리는 ‘욕망’을 ‘획득’ 대신 ‘생산’과 접속시켰다. 욕망은 생산을 일으키는 근원적 힘, 즉 에너지란 설명이다. 여기서 생산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어떤 유형의 물질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다. 우주만물이 만들어내는 모든 변화와 흐름이 생산이다. 커서의 깜박임, 바위의 마모, 우주의 수축과 팽창... 인간으로 치자면 몸과 마음, 결단과 행동이 모두 생산이다. 그리고 이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욕망’이다. 욕망이 곧 생산이고, 생산이 곧 욕망인 셈이다. 

이 말을 고스란히 나에게 포개보았다. 가끔 샘들이 ‘네가 하고 있는 것이 너의 욕망이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욕망이 ‘생산’이라면 나의 욕망은 내가 현재 접속하고 생산하는 변화와 흐름이 된다. 내가 움직이고 변화하는 바로 그 지점에 욕망이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나의 욕망은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지금-여기에 있다. 밥하고, 잔소리하고, 공부하는 현장에 내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나는 취업을 욕망하지 않았다. 변화와 흐름을 촉발하지 않은 어떤 것도 욕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산적 욕망은 지금-여기를 내 욕망의 현장이라 말한다.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우리의 삶은 한결 경쾌해진다. 어떤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나, 마땅히 가져야 할 어떤 것을 결여했다는 불안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욕망이 삶의 현장에 있으니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사라진다. 간극이 사라지면 그것을 메워야 한다는 강박이나 초조함도 함께 사라진다. 이제 남은 문제는 지금 내가 있는 이 지점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문제가 지금-여기에 있다면 문제의 해결책도 지금-여기에 있다. 지금-여기를 복원해 바로 이곳에서 변화를 이루는 것, 그것이 생산하는 욕망이 가진 혁명성 아닐까? “투사가 되기 위해서는 슬퍼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혁명적 힘을 지니고 있는 건 욕망과 현실의 연결이다.” (푸코의 서문-p9,『안티 오이디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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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사회적이다

그런데 실제 사람들의 욕망은 ‘생산하는 욕망’과 많이 달라 보인다. 모두들 더 높이, 더 많이 갖지 못해 안달들이다. 나만 해도 살림도 하고, 일도 하고, 공부도 하겠다며 한껏 욕심을 부리고 있다. 그 때문에 불안에 빠지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만일 들뢰즈·과타리의 말처럼 생산하는 욕망이 본질이라면 우리 사회는 어째서 이토록 결핍감에 시달리는 것일까?

진실로, 사회적 생산은 특정 조건들에서 단지 욕망적 생산 자체이다. 우리는 말한다. 사회장(社會場)은 즉각 욕망에 의해 주파되고 있다고... 욕망과 사회가 있을 뿐, 그 밖엔 아무것도 없다.

(p64,『안티 오이디푸스』)

들뢰즈·과타리는 그 이유를 ‘사회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회체는 욕망이 펼쳐지는 베이스, 즉 기본 장(場)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사회장을 흘러다니며 접속하고 생산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사회의 욕망은 고스란히 개인에게 투여된다. 사회적 욕망이 개인의 욕망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때 현대사회에서 개인에게 투여되는 욕망은 ‘획득’과 ‘소유’다. 그리고 소유로서의 욕망은 ‘결핍’이라는 환상을 퍼트린다. 자본주의는 결핍에 따른 두려움과 공포에 의지해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다. 그러니 더 많이 가져 불안을 해소하라.’ 자본은 이렇게 부추기며 이윤을 창출한다. 들뢰즈·과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외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이에게 엄마, 아빠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근원적 결핍감을 심어준다. 우리가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서 탈주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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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여성에 대한  주부들의 욕망도 맥락이 비슷하다. 보통 가사노동은 자본으로 환산되지 않는 ‘그림자’ 노동으로 분류된다. 때문에 주부들은 상대적 결핍감에 시달리고, 자본은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부추긴다. ‘너는 지성과 독립된 인격을 결핍했다. 그러니 욕망하라, 전문직 여성을.’ 최근 전문직 여성에게 ‘섹시’, ‘당당’이란 이미지가 덧붙는 것은 이런 이유다. 주부들에게 갖지 못한 무엇을 욕망하게 유혹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부들이 밖으로 나오면 사회에는 새로운 시장이 창출된다. 각종 취업 강좌, 창업 정보, 전문직 패션, 화장법 등등. 결국 취업 욕망 역시 사회적 욕망이 나에게 재생산된 결과였던 것이다. 


욕망의 흐름에서 길을 찾다

사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자본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담준론을 주고받다가도 눈앞의 작은 이익에 맥없이 무너지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때문에 많은 선각자들은 사회 시스템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리라 기대했다. 사회가 바뀌면 우리의 욕망도 바뀌리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자본이 오직 ‘무한증식’에 매달린 것처럼, 혁명 또한 단숨에 자본의 숨통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자본이 위대하고 거창해서가 아니다. 자본의 거처가 다름 아닌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기 때문이다.

(p254,『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야』)

이유는 자본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이미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한번 내면화된 욕망은 사회를 바꾼다고 단숨에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시스템 속에 자신의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실현한다. 사회주의 혁명도 그랬다. 공산국가는 사회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뒤집어엎었지만, ‘부의 분배’라는 사회적 욕망은 그대로 방치했다. 그 결과 체제는 스스로 붕괴의 길을 걸었다. 하부구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은 자본의 거처인 ‘욕망’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들뢰즈·과타리의 말대로 결핍의 환상에서 깨어나 생산하는 욕망을 복원해야 한다.  

하지만 욕망은 뒤죽박죽이다. 욕망기계가 있을 수 있게 되면 사회의 모든 부분은 온통 요동친다. 몇몇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p.208, 『안티 오이디푸스』)

생산하는 욕망은 본질적으로 ‘흐름’을 전제로 한다. 생산은 기계의 흐름들이 타자와 접속해 발생하는 변화와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즉, 생산하는 욕망은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짝짓’는 대상에 따라 매번 다르게 규정된다. 들뢰즈·과타리의 설명에 의지하면 ‘입’은 한 가지 기능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접속하는 대상에 따라 어떤 때는 ‘먹는 기계’, 어떤 때는 ‘말하는 기계’, 어떤 때는 ‘호흡 기계’로 매번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 입의 욕망이 매번 뒤죽박죽 요동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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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질서를 뒤죽박죽 섞는 것, 논리를 반복하지 않고 매번 뜻밖의 생산을 해내는 것. 이것은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는 측면에서 그 자체로 혁명이다. 생산하는 욕망에는 고정된 규정성을 해체하는 혁명적 힘이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가 매번 결핍감을 느끼는 것은 감이당에서도, 집에서도, 친구를 만날 때도 일정한 모습으로 규정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이당에서는 배움-기계, 집에서는 보살핌-기계, 친구들과는 수다-기계로 존재한다면 나는 시공간에 따라 늘 다른 질서를 창조하는 셈이된다. 매 순간이 혁명이다. 그 과정에서 고정된 실체는 해체되고, 결핍은 끼어들 틈이 없다. 결국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화폐, 취업, 명예, 폼 등에 쫄지 말 것, 현재 내 욕망의 실체를 직시할 것, 그리고 지금 내 욕망이 작동하는 그 시공간의 생산에 충실할 것. 결국, 결핍과 반복으로부터의 도주선은 지금-여기-욕망의 흐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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