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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카메라를 든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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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7-01-31 02:13 조회5,491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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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든 백수

김재의(감이당 대중지성 토요반)


1. 프롤로그. 흉작과 씨앗
올해 여름은 정말로 뜨거웠다. 날씨가 아니라 5년 동안 써왔던 시나리오의 최종고를 뽑아내느라 그랬다. 정말로 더 이상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9월 초 국내 최대 영화투자사들의 투자심사에 들어갔다. 한 달 후, 수확의 계절 가을에 나는 불합격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어온 농작물은 흉작으로 마무리되었다. 내가 투자자들의 상업적 입맛을 맞추지 못했다거나 그들의 상업적 요구가 나의 창의성을 방해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생각보다 상업영화판엔 틈새가 많다. 나의 실패 원인은 순전히 나의 실력 부족이었다. 미련도 없었고, 마음이 쓰라린 것은 내 몫이니 겪어내야 하는 것뿐이었다.

그 즈음 <청년백수 자립에 관한 한 보고서>를 읽었다. ‘감이당’에서 오며가며 얼굴로만 알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단숨에 책을 다 읽고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설레임을 느꼈다. 더 정확하게는 그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내가 누군가를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것은 에로스의 시작이고, 땅을 박차고 나가는 목기(木氣)의 태동이다. 하지만 이제 나이를 먹었기에 상화(相火)가 뜬 것이 아닌가 며칠을 곰곰이 생각했다. 영화 동료들에게 책을 보내주며 이 청년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물어도 보았다. 반응은 반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큐멘터리(이하 다큐)건 극영화건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들인 ‘백수다’ 팀의 담당 튜터를 찾아갔다. 담당 튜터는 쿨하게 말했다. ‘백수다’ 팀 안에 영상 팀이 있고, 자체 다큐 제작을 한다고. 자체 영상 팀이 있는데 굳이 내가 프로팀을 꾸려서 다큐를 찍을 이유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청년백수들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작년에 중국 태산 여행을 담은 다큐를 보여 달라고 했다. 30분짜리 그 영상을 보며 나는 심각했고 동시에 미소 지었다. 심각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지루해서 끝까지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고, 미소 지은 것은 내가 할 일이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고민은 시작되었다. 어떻게 이들과 만날 것인가? 어떻게 ‘백수다’ 팀 청년 백수들(이하 백수다 청년들)과 중년 백수인 내가 함께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을까?


2. 백수들의 다큐 수업
“카메라를 그냥 손에 들고 다녔네. 찍은 게 아니고.” 나의 코멘트에 백수다 청년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은 우리의 첫 번째 다큐 수업 날이었고 나는 작년 태산 여행 다큐에 대한 코멘트로 수업을 시작했다. ‘백수다’ 팀이 1년 프로그램의 마지막 과정으로 1월에 히말라야 여행을 간다는 것을 알고 나는 다큐 수업을 제안했다. 이 수업은 히말라야 여행 다큐를 찍기 위한 ‘다큐 몸 만들기’ 프로젝트였다. 4회 수업에 다큐의 기본을 가르쳐야 했기에 빠듯했지만 진심으로 기쁘고 신났다. 20세기 사진 역사를 대표하는 사진들과 르포 사진들을 보여주고,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설명하고는 바로 다큐 실습으로 들어갔다. 

사진 1. 백수들의 다큐 수업. 사진 김재의.JPG

백수들의 다큐 수업사진 김재의


다큐는 크게 인물, 공간, 사건으로 나뉜다. 그래서 첫 번째 실습은 인물다큐였다. 한 인물을 정하고 그 사람을 36장 찍은 후, 그 중 7장을 골라서 인화해오는 실습 과제를 냈다. 휴대폰이 있으니 카메라 장비 걱정이 없었고, 감이당엔 널린 게 사람이니 인물 선택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한 사람을 36장 찍는다는 것은 그만큼 관찰과 집중을 해야 하는 것이고, 36장으로 제한하는 것은 생각하고 찍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7장을 고르는 것은 선택하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인데 선택을 하려면 명확한 콘셉트가 있어야 한다. 

1주일 후 청년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과제를 해왔다. 사진들을 보며 토론과 코멘트를 시작했다. 문제는 다양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가 발견한 놀라운 점은 그들의 사진이 그들의 글과 똑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연하다. 같은 사람이 창작한 것이니까. 

그들과 나는 감이당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기에 글쓰기와 동양 명리학이라는 공통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사진 토론은 각자의 사주와 글과 사진을 연결하며 결국 각자의 화두로 돌아가는 경험이었다. 글을 쓸 때 문제제기는 잘 하는데 그것을 펼칠 줄 모르는 친구는 사진에도 콘셉트는 있는데 그것을 담아내질 못했고, 글을 쓸 때 문제제기 자체를 못하는 친구는 콘셉트 없이 사진을 찍어왔다. 참 정직하다. 

자신들이 사는 공간이나 인상적인 공간을 찍어오는 공간 다큐 실습과, 학술제 기간을 맞아 활동과 행사의 현장을 찍어오는 사건 다큐 실습까지 마치자 백수다 청년들의 개성과 문제점들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왜 히말라야 여행 다큐를 찍으려 하냐고 물었다. 청년들은 하나같이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들의 경험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책 한 권은 있어야 한다. 청년백수가 어떻게 자립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그 과정에서 온갖 고난을 겪는 이야기를 담은 책. 백수들로 넘쳐나는 시대에 이런 책 한 권 없다면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한데 놀랍게도(!) 그런 책은 거의 없다. 대신 백수가 정규직이 되는 방법, 재테크로 한몫 잡은 백수이야기, 그게 아니면 백수의 현실을 암울하게 진단하는 책들만 가득하다. 여기에 저항하는 책이 한 권도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불행일 것이다. (<청년 백수 자립에 관한 한 보고서> 류시성, 송혜경 외 13인의 청년백수 지음. 북드라망. 7쪽)


보통 사람들에게 히말라야 ABC(Annapurna Base Camp) 트래킹 코스를 간다는 것은 돈을 모으고 시간을 내고 오랜 시간 준비하고 떠나는 일생의 꿈이자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데 백수다 청년들은 1년 공부의 마지막 과정으로 19박 20일 동안 비행기 값 포함 꼴랑 100만원을 가지고 홀랑 히말라야로 떠난다. 이게 반란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 반란을 카메라에 담아 전파한다면 그들의 실험은 타인들에게 영감을 주지 않겠는가.

사진 2. 히말라야. 사진 이소영.JPG

히말라야사진 이소영


3. 백수의 전복성
흔히 영화는 전문가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금 국민의 대다수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고, 100만원 가까이 되는 이 기계에는 고화질의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다. 어느 정도 고화질이냐 하면 동영상을 찍어서 확대(blow-up)를 하면 극장 스크린에 틀 수 있을 정도다. 2010년, 영화감독 박찬욱이 다른 장비 없이 아이폰 4로 영화를 찍어 극장에서 상영했다. 기술적으로는 바야흐로 모든 국민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현대의 도구에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적인 운영자가 있어야 하고, 그 사람에게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그리고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 기술이 다양해지고 세분화될수록, 사용자가 복잡하게 생각할 일은 줄게 마련이다. 고객 쪽에서 기술자에게 특별한 신임을 줄 필요가 적어지는 것이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느린 걸음. 91)



처음 백수다 청년들이 히말라야 여행 다큐를 찍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나는 우려가 되었다. 그들이 기술적인 문제들을 잘 해결하며 촬영해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다큐 수업을 통해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2030 세대인 백수다 청년들은 일명 영상 세대다. 10대 때부터 휴대폰 카메라, 디카를 통해 마구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컴퓨터를 통해 쉽게 동영상을 접할 수 있었던 세대다. 하지만 영상 세대들이 영상을 잘 찍고 잘 활용한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 있다고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사람과 공간과 사건 현장을 관찰하는 힘,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힘, 그것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힘, 그 힘들은 기술보다는 사유의 영역이다. 그리고 현대의 기술 발전은 인간이 기술에서 더 자유로워지고 더 많이 사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사람들은 과거 똑딱이 필름카메라였을 때나 지금 스마트폰 카메라일 때나 사유 능력이 넓혀진 것 같지 않다.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 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하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현대의 이 새로운 무력함은 너무나도 깊이 경험되는 것이라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느린 걸음. 6)



스마트폰 카메라라는 풍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기계를 가지고 일상과 여행, 맛집 음식 사진과 셀카 찍는 용도로 밖에는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웨딩 사진도, 자기 아이의 백일 사진도, 영정 사진도 모두 전문가에게 맡긴다. 비싼 돈을 주고, 인공적인 스튜디오에서 어색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 신랑, 신부는 마치 결혼 당일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하고픈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고 쳐도 백일 된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 그 이상한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는 고생을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특별한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인데 그냥 친구가 찍는 웨딩 포토, 엄마 아빠가 찍는 백일 사진이면 안 될까? 회사 홍보 영상도 촬영 전문팀이 들어가 몇 천만 원을 받고 만든다. 자기 회사 홍보 영상이라면 전문팀보다 회사 사람들이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회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사 사람이나 촬영 전문팀이나 똑같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돈까지 주면서 전문가에게 넘겨준 것은 주체성과 창조성 그리고 자유와 능력 그 모두일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삶의 특별한 순간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순간 현재와 일상은 초라해진다. 뭔가 결핍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 3. 동생의 웨딩. 사진 김재의.jpg

동생의 웨딩사진 김재의


백수다 청년들의 히말라야 다큐 찍기는 주체적이고 창조적이어서 좋다. 여행 사진을 남기는 것은 평범한 일이지만 그걸 다큐로 찍어 편집해서 타인과 공유하려는 시도는 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다큐를 어떻게 찍는지도 잘 모르고, 편집하는 기술은 뭔가 전문가가 하는 것 같고, 따라서 그것을 배우고 시간을 쓰는 게 왠지 의미 없고 고생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정규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다큐를 만들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백수니까 발상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백수는 자기 시간을 알아서 조정할 수 있기에 원하는 것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실험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새로운 실험을 위해 공부할 수 있는 자유, 공부를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자유, 여기에 백수의 전복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굳이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냥 조금의 공부면 충분할 정도로 현대의 영상기계와 기술은 쉬워졌다. 그리고 ‘유투브’라는 만인의 극장이 있다. 거기엔 새롭고 다양한 것을 기다리는 관객들이 잔뜩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들의 창조성을 마음껏 펼치는 것이다. 창조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백수다 청년들과 다큐 수업을 하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그들의 사진 안에 들어있는 개성들이었다. 색깔 감각이 좋거나, 어둠을 보는 특별한 시선, 수줍게 드러낸 두려움 등등. 하지만 생각보다 그들은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잘 모르고 있었다. 

사진 4. 밤의 풍경. 사진 김단아.jpg

밤의 풍경사진 김단아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 즉 누구나 개성을 가지고 있다. 개성은 디테일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디테일은 한 인간이 드러내는 예민함과 연결된다. 사진엔 무의식중에 그것이 담기곤 한다. 현대 사회에서 예민함은 권위의 폭력에 의해 쉽게 억압될 수 있고, 학습된 안정의 유혹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며 제거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예민함 속에 창조성의 씨앗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백수가 상대적으로 더 그 예민함을 유지하고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전복적이라고 생각한다. 

백수는 기존의 안정적인 틀 밖에 있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꾸려야 하기에, 생존을 위해서는 훨씬 창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자기 안에 내재된 야생성을 끌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거기서 창조성이 나온다. 그리고 살아내는 그 적나라한 경험 속에서 스스로의 힘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주체성과 능동성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백수는 생리적, 심리적 질병에 훨씬 더 쉽게 노출될 것이다. 그렇다면 실험성, 자유, 창조성, 주체성 같은 백수의 전복성은 혼자서 가능한 것일까? 


4. 백수와 공동체 

나는 받기만 하는 존재,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립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혼자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도움을 뿌리치고 혼자 해내는 것만이 자립인 것일까? 내 주변에 있는 것들로부터 떠나야만 자립할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니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는 없었다. (<청년 백수 자립에 관한 한 보고서> 류시성, 송혜경 외 13인의 청년백수 지음. 북드라망. 159)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이었다. 해직 언론인들이 만든 ‘뉴스타파’라는 제작사가 제작했고, MBC ‘PD 수첩’ PD이었다가 해임된 최승호 PD가 감독한 간첩조작 사건에 관한 작품이었다. 뉴스타파는 중년 언론 백수들이 팀을 짜고, 거기에 4만 5천명의 정기 후원자들이 후원금을 내면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었고, <자백>과 같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나는 영화 엔드 크레디트에 끝없이 올라가는 수많은 후원자들의 이름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저 많은 후원자들이 카메라를 들어 우리 사회에 관한 다큐를 만든다면 그게 혁명이 아닐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공동체는 가능하게 한다. 백수다 청년들도 그랬고, 뉴스타파 중년 백수들도 그랬다. ‘감이당’이라는 공동체가 물질과 지성의 지원을 했고, 그 속에서 백수다 청년들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공동체는 백수들에게 실험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백수다 청년들은 처음에는 맨몸으로 공동체 공간들을 청소했고, 그 다음엔 잡지를 만들고, 고질라 같은 자신들만의 프로그램을 만들며 다른 청년들에게 지성과 실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자신들의 경험을 책으로 출판했고, 이제 다큐로도 만들어 공유한다. 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백수다 청년들과의 다큐 수업이 그토록 즐거웠던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순환의 흐름에 올라탔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20년 동안 배우고 경험한 영화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는 기쁨, 그들의 책을 읽으며 내가 영감을 받고 새로운 영화를 기획할 수 있었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 역시 공동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공동체가 백수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지도 않고, 하나의 공동체가 늘 영원한 것은 아니다. 모든 자연의 이치가 그렇듯 공동체도 생멸변화를 한다. 그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들고 나고 만나고 헤어진다. 기회 역시 때론 약이 되고 때론 독이 된다. 따라서 백수의 운명이란 때론 또 혼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수의 전복성은 공동체의 토양 위에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강의를 하러 다닐 때도 이 마을 저 마을 작은 공동체들이 있어 중년 백수인 나는 순환의 흐름을 타게 되고 실험과 창조를 계속 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백수는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주체적인 태도로 공동체와 관계 맺는 것이 중요하다. 창의력도 생산력도 순환의 흐름도 모두 그 주체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백수와 공동체는 그렇게 서로를 살린다.


5. 에필로그 : 시네마 천국
어렸을 때, 40대 중반이 되면 내가 만든 영화 작품들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내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길 꿈꿨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시나리오는 번번이 영화화되지 못하고 컴퓨터 안에 쌓여갔다. 그 막힘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과 자괴감은 자신감과 창조성을 점점 앗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감이당’이라는 공동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많은 시작이 그렇듯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내가 중년 백수라는 것을 인지했고, 영화인이여서가 아니라 백수라서 창의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백수의 실험성과 창조성은 공동체를 만났을 때 시너지가 나고 순환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 백수다 청년들과의 다큐 수업은 끝났고 히말라야 다큐 기획 회의만 남았다. 다큐는 세 번 시나리오를 쓴다. 현장 가기 전, 현장, 그리고 편집할 때. 나는 그들과 첫 번째, 세 번째 시나리오를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나를 설레게 한다. 우리는 더 자유롭고 더 제멋대로 발상하고 진지하게 사유할 것이다. 

이번 백수다 청년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전문가가 아닌 모든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마을의 작은 공터에 스크린 하나 세우고 동네 백수들이 만든 영화들을 보면서 동네 사람들과 손님들 함께 모여 저녁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허황되고 재미없는 드라마나 영화보다는 동네 사람들의 생생하고 실험적인 영화들을 보는 게 더 재밌지 않을까? 고발 다큐도 재밌을 거 같다. 집에서 자기 가족하고만 보거나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같이 보면 더 재밌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시네마 천국’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사진 5. 시네마 천국. 그림 박희진.jpg

시네마 천국그림 박희진



댓글목록

전화노인님의 댓글

전화노인 작성일

저도 언젠가
마을의 작은 공터에 스크린 하나 세우고 동네 백수들이 만든 영화들을 보면서
동네 사람들과 손님들 함께 모여 저녁을 보낼 수 있을까요?
아! 그러면 참 재미지겄네요.
재의샘 글, 재밌고, 우리 안의 실험성과 창조성이 불뚝 솟아오르게 하네요.

박꽃님의 댓글

박꽃 작성일

개성은 디테일에서 드러나고 디테일은 예민함과 연결된다.^^
다큐수업이 제 안의 예민함에 더 귀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던 좋은 시간이었어요 쌤~

음 남산골 영화제가 열린다면 저는..
요거트(티지스쿨에서 파는)를 먹는 여러가지 레시피를 담은 다큐를 찍고 싶네요.ㅎㅎ
히말라야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ㅎㅎ
역시 몸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뼈저린 깨달음을... 곧 만나요 쌤!

최원미님의 댓글

최원미 작성일

이 글을 읽고 나니 더 뜨겁게 "백수"이고 싶어요. 이렇게 멋진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었군요!!!!! 와우! 다큐 기대하고 기다리겠슴다+_+

기랑님의 댓글

기랑 작성일

쌤 정말 짱이에요. 좋은 수업 감사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