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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끊임없이 관찰하고 해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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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7-08-04 11:58 조회3,0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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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관찰하고 해부하라!


박정복(화요 감이당 대중지성)

 

소설 아닌 소설

소세끼(1867-1916)는 글쓰기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쓰는 것에 천착했다. 삶이란 의식의 변화의 연속인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쓸 수만 있다면 그 공덕으로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갱부는 있는 그대로 쓰다 보니 소설이 될 수 없다고 이 소설을 쓰고 있는 화자를 빌어 말한다.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소설과 자신이 쓰는 소설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럼 당시에 유행하던 소설은 어떤 소설일까? 그건 서양 근대작가의 사실주의 소설이다. 소세키가 살았던 메이지 시대, 서양의 작가들이 쓴 전지적 시점의 소설이 물밀 듯 들어왔다. 이는 작가가 주인공의 심리를 다 알고 신처럼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사건의 전말에서부터 인물의 심리 일체를 묘사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또한 인물은 하나의 성격으로 일관되게 사건을 전개시키다가 절정에 이른 뒤 파국을 맞이하고 결말을 맺는 구성과 스토리를 갖는다.


이는 소세키가 보기엔 사실이 아니다. 자연이 매순간 변하는 것처럼 인간도 무언가와 만나 관계를 맺으면서 매 순간 변해가는 존재. 그러므로 일관된 성격을 부여할 만한 라는 것이 없다. 목적이나 결말 스토리 또한 없다. 변화는 그 자체가 과정인 동시에 결말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전지적 시점으로 등장인물을 일관된 성격으로 그리게 되면 독자는 인간은 변하지 않는 라는게 있으며 그 나의 의지에 의해 세상을 사는 걸로 인식하게 된다. 소위 자의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고정된 가 있는 이상 나는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며 남과 차별화 시켜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있으면 상대방에게도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고통이 발생한다.


소세키는 갱부에서 자아가 없다는 삶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묘사하기 위해 1인칭 시점을 취한다. 인식은 나의 신체에서 일어나기에 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건이 일어나는 당시의 나가 아닌 시간이 지난 후의 나이다. 인식하는 순간 나도 대상도 변해버리기 때문 당시의 나가 그것을 서술하기는 불가능하다. 시간이 지난 후에 기억에 의해 그것을 회상하며 해부하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 그 당시의 모든 것을 다 서술할 수도 없다. 나의 기억에 남는 것만 선택해서 자신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만 가능하다. 아예 ‘...인 것 같다’, ‘...일 것이다로 추측하는 스타일로 쓰겠다고 소설의 서두에서 화자는 선언한다. 인간은 너무 빨리 변하는 존재라서 자신의 일이라도 단언할 수 없고 남의 일처럼 쓸 수 밖에 없다는 것.


이는 소세키가 자기 본위로 만들어낸 문학관으로서 서양근대문학에 대한 저항이며 자기윤리였다. 소설 군데 군데에서 이렇게 써서는 소설이 될 수 없다며 소설 아닌 소설이라고 종종 밝히고 있는 점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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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멸과 전락

갱부의 주인공 19살 도꾜의 좋은 가문의 부잣집 도련님으로 어젯 밤 가출하여 어느 산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부터 도쿄의 반대방향으로 무작정 걷는 중이다. 자신의 시대(메이지 시대)에 갑자기 불어닥친 자유연애의 풍조에 던져져 좋아하는 여자가 있지만 부모가 정해준 여자에 대한 미안함, 부모와 친척에 대한 반항등으로 도저히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어 자살하기로 하고 가출했다.


그런데 우연히 갱부를 알선하는 야바위꾼 조조를 만나 그가 일하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해놓고 몹시 놀란다. 자살하러 가는 사람이 일을 하겠다니! 이건 모순 아닌가? 마음이 죽음에서 삶으로 그렇게 빨리 변해 버릴 줄은 자신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된 현재의 는 화자로 나서서 그 때는 몰랐던 그 이유를 현재의 입장에서 자신의 지식까지 동원하여 친절하게 해부하고 설명해준다. 변화는 필연적이며 이처럼 급격하게 변하게 되는 메커니즘까지. 현재의 나가 설명할 때는 소설이라기 보다 철학책을 읽는 느낌이 들 정도다.


현재의 나의 설명에 의하면 그 때의 나는 자살은 겁이 나서 못하고 부득이한 차선책으로 자멸하고 싶은 마음에 갱부를 승낙했다.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기 때문에 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갱부가 되면 부잣집 도련님으로서의 자신을 버리는 일이므로 이 고통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지 않으면서도 자살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


그러나 의식의 이런 메커니즘을 모르는 과거의 나는 급격한 마음의 변화들을 모순으로 받아들이며 조조를 따라 광산으로 가는 여정에 오른다. 그는 원했던 대로 도련님으로서의 자신이 깨지는 자멸을 많이 겪는다. 평소 같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파리가 득시글거리는 아게 만주를 맛나게 먹고 조조의 흉측한 외모에 금방 훈훈함을 느끼고 도저히 사람이 잘 수 없을 것 같은 집에서 자기도 한다. 조조는 붉은 담요와 꼬맹이도 꼬셔서 동행하게 되는데 예전이라면 곁에 있기조차 부끄러울 천한 사람들이지만 함께 이틀을 같이 걸으며 푸근한 애정을 느끼기도 한다. 산을 오를때면 묵묵히 걸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괴로움도 겪는다. 아게 만주로 배가 좀 채워지자 기차에서 눈이 짓무른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조조에게 정나미가 떨어진다. 조조가 그 비천한 붉은 담요와 꼬맹이를 만났을 때 자신에게 할 때와 똑같은 말로 갱부를 알선하자 모욕감을 느낀다. 붉은 담요와 꼬맹이가 자신과 함께 불행해질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면 유쾌해지기도 한다. 그는 여전히 부잣집 도련님으로서의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데 그에겐 갱부가 소, 말 다음이라는 그 시대의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여정을 전락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자의식이 불쑥불쑥 솟아난다. 자멸과 전락이 왔다갔다하는 의식의 흐름.


산속에 산이 있고 그 산속에 또 산이 있는, 구름속의 산, 산 속의 구름을 걸으며 남의 눈에 안 띄고 산 채 묻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하니 역설적으로 얼마나 자의식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다. ‘자아를 잊은 갱부행, 즉 자멸의 첫 무대로서의 전락과 체념과 을 겪으며 조조 일행은 광산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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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전락

도련님은 정해진 구도로 가도록 되어 있는 존재이다. 근대문명이 기획하는 존재. 근대문명은 남보다 공부 잘하고 대학졸업 후 돈 많이 벌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의지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부추기면서 소외된 존재들을 생산해내며 이 사회가 견고하게 돌아가도록 살기를 강요한다. 인간의 자의식을 근간으로 하는 문명이다. 인간은 변하는 존재, 나라고 할만한 나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한 문명이다.


자멸을 원했지만 광산에서 나는 더 자의식이 작동한다. 갱부들의 한결같이 험악한 얼굴과 열악한 시설, 들끓는 빈대, 벽토와 같은 안남미, 환자에 대한 잔인함. 매춘부를 통해 삶을 확인하는 역겨움. 더구나 자신을 놀려대는 그들의 야유와 경멸, 욕지거리를 들을 때 나는 어쩌다 이렇게 전락했는가 한탄한다. 그들은 야만의 극치였다. 그들은 자신들과 동일하게 살지 못할거면 떠나라고 요구한다. 인간이 아닌 짐승같은 놈들이다. 도쿄도 나를 배척했고 광산도 나를 배척한다. 도쿄가 나를 문명에 위배된다고 내쳤음에도 나 역시 문명에 위배된다고 갱부들을 내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갱부가 천직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모순.


이러한 자의식이 절정에 이를 때는 뭐니 뭐니해도 땅속의 험한 절벽, 천길 낭떠러지- 촉의 잔도와 같은 헐렁거리는 사다리를 오를 때였다. 너무 힘들어서 정말로 나는 자살하려 한다.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진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빠른 속도로 이렇게 개죽음은 할 수 없다는 자의식이 솟아오른다. 기왕이면 폼나게 죽어야지. 개곤폭포 같은데로 가서. 남들이 알아주는 죽음을 죽고 싶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디서 힘이 생겼는지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다는 것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죽어서 내 의식이 없어진 마당에 누가 알아주든 말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도 마음은 그처럼 자의식 덩어리이니. 하지만 그 자의식, 허영심 덕분에 그 때 자살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지 않느냐고 현재의 나는 말한다.


실상 우리도 이러지 않을까? 이처럼 절박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의식에 의한 욕심으로 일상을 사는건 아닐까? 남에게 싫은 말 듣고 싶지 않고 칭찬 받으면 좋고 그러기 위해 책임도 다하고 약속도 지키면서. 이게 우리를 살리는 동력으로 작용하는건 분명하지만 대신 그에 따른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늘 남에게로만 향해야 하는 고통. 자신에 대한 허전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 우리는 이 자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소설에서는 내가 이 허영심으로 살아나긴 했지만 다시 한 번 위기에 처한다. 구리 광맥들이 실핏줄처럼 얽혀진 미로에서 길을 잃는다. 이 때 우연히 만난 갱부 한 사람. 야쓰씨. 그는 정을 쪼며 열심히 광석을 캐고 있는 갱부임에 틀림없었지만 다른 갱부들과 확연히 달랐다. 말도 행동도 외모도. 전혀 짐승이 아니었다.


야쓰씨는 문명사회의 실상을 관찰하고 날카롭게 해부한다. 내부의 죄는 용서하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것만 단죄한다고. 이에 따라 자신의 윤리를 세운다. 여자문제로 죄를 지은 그는 도쿄의 법에서는 죄인이다. 그러나 법에 대해서는 떳떳하므로 처벌을 거부하고 도망해서 갱부로 살고 있다. 내년엔 시효가 만료되어 돌아가도 되지만 마음의 내부의 죄는 있다. 그러므로 돌아가지 않고 갱부의 삶을 살겠다는 것. 사회가 어떠하든 법이 어떠하든 법과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그에 따라 자신이 할 바를 세운다. 이는 수많은 갱 바닥을 전전하며 광석은 파지만 갱부 방식의 전락한 삶은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가 아직도 한자를 버리지 않았고 말씨를 잃지 않았으며 외모에서도 그게 풍겼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갱부로 살면서 갱부로 살지 않기. 그는 미로에서 외길로 나를 데려다 준다.


나는 야쓰씨의 말을 들으며 감동한다. 아 제도가 아무리 동일성을 요구해도 다르게 살 수 있구나! 야쓰씨는 자신의 윤리로 사회 혹은 제도, 문명에 저항하고 있었다. 예전과는 다른 전락이다. 그러기 위해서 길 위의 그 수많은 전락이 필요했던 것일까? 길 위에서 돈이 한 푼도 없었고 온통 자의식 덩어리로 그 자의식의 극한까지, 문명의 대척점 광산까지 전락해온 자만이 할 수 있는 전락!


그러나 전락은 끝이 없다. 그는 폐염의 전조인 기관지염을 진단받아 갱부로마저도 전락하지 못하는 전락을 한다. 소설은 도쿄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 후에도 전락은 계속 될 것이다. 매번 다른 전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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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 삶의 여건을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없다. 내가 조조를 우연히 만나 갱부가 되려 했듯이. 자의식이 떠오르는 것도 막을 수는 없다. 워낙 강렬한 심리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리고 관찰하고 해부할 수는 있다. 야쓰씨는 그렇게 했다. 그럼으로써 자의식 없이 제도 속에서 남과 살면서도 남의 눈치, 제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소세키가 갱부에서 화자를 현재의 나로 했던 이유이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서구 근대문명이 거세게 들어오던 메이지 유신의 시대에 던져지듯 태어나 서구의 문명대로도 살 수 없고 과거의 전통대로도 살 수 없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며 근대문명과 자신을 관찰하고 해부하면서 소세키가 찾아낸 새로운 길. 그것은 서구소설도 아니고 일본의 전통적 소설도 아닌, 갱부처럼 있는 그대로의 소설을 창작하는 것이었다. 창조가 이런 윤리의 열정에서 나왔다는 게 놀랍다. 또한 그 사이 소세키가 얼마나 많은 전락을 반복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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