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에세이]사이버 원탁의 선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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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7-10-28 11:19 조회2,805회 댓글0건본문
사이버 원탁의 선물
이문희, 이순이, 안은주, 최선미, 오찬영
(감이당 일요 대중지성)
n분의 1을 넘어선 영상통화 실험의 시작
“제가 매우 훌륭한 식탁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 식탁에서는 1,600명 이상이 동시에 빙 둘러앉을 수 있기 때문에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식탁에는 높은 자리도 낮은 자리도 없습니다.”
-『증여론』, 마르셸 모스, 한길사, 282쪽
증여론의 마르셸 모스는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전설에 나오는 원탁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원탁이란, 증여의 원리로 움직이는 사회는 모두가 수평적인 자리에 앉아 함께 공공의 선(善)을 누릴 수 있는 매개체였다. 문탁 선생님께서는 문탁 네트워크를 처음 시작하셨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증여론을 설명하셨다. 증여적 발상에서 시작된 문탁 네트워크 이야기에 감명 받은 밴드 6조는, 비록 다섯이지만 증여의 원리가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실험을 우리끼리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우리는 과연 서로 무엇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그리고 이에 대한 밴드 글쓰기를 진행하면 또 어떤 결과물을 얻게 될 것인가?
학교에서 팀프로젝트를 하면서 밴드글쓰기 같은 과정은 늘 경험했다. 하지만 그 전제는 n분의 1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공평하게 각자가 기여하는 정도를 측정하여 나눌 수 있을까?’가 주된 관심사였다. n분의 1이란 분량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동시에 활동의 폭도 결정하는 척도다. '넌 이 정도까지 해야 해'라는 상한선을 정해주지만, 동시에 '이 이상으로는 하지 마. 왜냐하면 네가 더 하는 만큼 남은 사람도 더 해야 공평해지거든.' 이라는 하한선을 정해주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운신의 폭과 의견교환의 자유는 상당히 줄어든다. 그렇다면 밴드 내에서 n분의 1을 격파하는 새로운 윤리를 실험해 볼 수 있을까? 그 궁리의 결과가 바로 영상통화였다.
-오찬영 개인 에세이 인용
영상통화, 즉 매일 밤 아홉시에 30분씩 서로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것이 우리의 미션이었다. 어디서나 접속 가능한 디지털 문명의 이기, 노트북과 스마트폰은 우리의 도구가 되었다. 모두가 자신의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영상통화 앱을 설치하는 것으로, ‘밴드 6조 사이버 원탁 기사단’은 갑작스럽게 결성되었다. 문탁 선생님께서 첫 시간 명쾌하게 깨부순 n분의 1의 전제와 모스가 알려준 증여 체제 위에서, 그리고 이거라도 해야 글이 써지지 않을까 하는 암묵적 동의 속에서 영상통화는 56일간의 어색한 항해의 닻을 올렸다. 우리는 n분의 1의 원리를 뒤집고 밴드 내에서 증여의 원리를 실험하고자 했다. 혼밥과 비혼, ‘나 혼자 산다’를 외치며 자신이 가진 n분의 1만 가지고 걸어가는 시대. 그 속에서 함께 나누는 증여의 원리로 글쓰기를 해나간다면 우리는 어떤 결말을 얻게 될까? 계산과 합리성을 넘어선 실험이 시작되었다.
“원래 저녁 시간에 할 일이 다 정해져 있어. 퇴근 후에도 회사 일 때문에 번잡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108배를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거든. 내 나름의 약속이 다 정해져 있고, 그걸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야. 그런데 영상통화는 내가 정해둔 저녁 시간의 규칙을 비집고 들어온 하나의 시도였어. 그래서 내게는 ‘시간의 일탈’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 의미로 다가오더라고.”
-9/14 영상통화 이순이 대화 인용
증여체계의 형성
n분의 1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나니 의견 제안과 활동의 자유로움은 훨씬 더 커졌다. 만약 그 안경을 계속 쓰고 있었더라면 부분 다섯이 꼭 모여야 전체가 되므로, 참여자 수가 적은 것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아예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또 증여의 원리로 함께 글쓰는 과정을 다시 비춰본다면,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은 혼자서만 나대는 것 같고 손해를 보는 것 같은 찜찜함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즉, 더 열심히 해서 손해를 보는 이는 누구인지, 편하게 무임승차하는 이는 누구인지, 이런 식의 대차대조표를 따지는 게 의미가 없었다. 하나든 둘이든 서넛이든 사이버 원탁에 56일 동안 일정한 시간에 앉기만 한다면, 누구든 주고, 받을 수 있는 증여의 원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뭔가 글을 써 볼 수 있을 것이다. 밴드 내에서 증여 체계를 구축하고 모두가 느낀 바를 밴드 글쓰기에 담아내고 싶었다.
증여, 그것은 주어야 하는 의무, 받아야 하는 의무, 답례해야 하는 의무 세 가지가 총체적인 급부체계로 순환되는 사회에서 급부를 움직이는 사회적 약속이 된다. 우리에게 예의의 시작은 ‘저녁 9시, 30분동안’이라는 시간 제안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노트북에 영상통화 앱을 깔게 되자, 접속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의무가 생겨났다. 첫 주에는 아홉 시 만남 자체를 까맣게 잊거나 어색해했다. 매일의 만남을 좀 더 익숙하게 만들기 위해, 제안자는 매일 여덟 시 반쯤에 아홉 시를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고, 토론 후에는 감사의 표시와 함께 저녁 인사를 했다. 그에 반응하여 다른 이들은 함께 이야기하니 새롭고 좋다는 감상을 답장으로 써주거나, 내일은 접속하지 못한다는 식의 스케줄을 미리 알려준다. 거기에는 약간의 미안함과 다음에는 꼭 참석하리라는 자발적 다짐이 수반된다. 이것은 조원들 내부에 '매일 밤 아홉 시'가 밴드의 예의로 자리 잡았음을 뜻했다.
그들이 교환하는 것은 오로지 재화와 부, 동산과 부동산처럼 경제적으로 유용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의, 향연, 의식, 군사적인 봉사, 여자, 어린이, 춤, 축제, 장(場, foire)인데, 이러한 것들의 거래는 훨씬 더 일반적이며 훨씬 더 영속적인 계약의 계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증여론』, 마르셸 모스, 한길사, 53쪽
영상통화가 2주차에 접어들면서, 참여자의 숫자는 적지만, 안정적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책 토론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고, 서로의 신상을 묻거나 어제 소개팅은 어땠느냐는 식의 신변잡기가 오고 갔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30분의 시간을 서로에게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와 감정, 고민과 답까지 활발한 순환의 장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미래를 두고 고민하는 조원에게 다른 조원은 주말에 갑작스럽게 불러내 별자리와 사주를 봐주며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책을 한 권 통독하고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스스로 놀라워한 조원들도 있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질문으로 던져지면 깊이 있는 독해가 부족했음을 깨닫고 다시 책장을 펴서 두 번 세 번 읽은 후 토론에 참여했다.
증여의 큰 특징은 교환 원리와는 다르게 시간차를 두고 답례가 이루어진다. 밴드 6조의 증여 양상도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이루어졌다. 처음 영상통화라는 공을 쏘아 올린 후, 공을 넘겨받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다시 증여함으로써 공을 넘겼다. 서로에 대한 관심, 이야기, 계속적인 맥락 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즉석 만남, 질문과 답이 오고 갔다.
혼자 읽고 글을 쓰면서 이렇게 몇 년 하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읽는 습관이나 쓰는 습관은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이렇게 답답하던 차에 밴드로 함께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매일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결 이해하는 수준이 달라지고, 내용을 잘 정리해서 이야기하는 힘도 생겼다. 우응순 선생님께서 ‘화려할수록 허술하다, 공부는 허술해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고 하신 말씀처럼 훨씬 단단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문희 개인 에세이 인용
교환과 증여의 목적은 재생산이다. 관계를 맺든, 호감을 사든, 다시 다른 재화를 만들어내든 뭔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밴드에서는 책 읽기와 글쓰기, 친밀한 관계가 다시 재생산되었다. 도서관에서 꼭 책을 다 읽고 와서 토론에 참여하겠다는 굳은 다짐을 단체 채팅방에 올리기도 했고, 매일의 토론내용을 쓴 56개의 후기가 56장의 캡쳐와 함께 남겨졌으며, 이해하지 못한 강의녹음본이 공유되고 녹음파일을 쉽게 이해하라고 배려한 누군가의 요약본이 그 뒤를 이었다. 여기서 증여 원리에 왜 모스가 '시간 차'를 이야기했는지 알 수 있었다. 주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공은 언젠가 더 커진 답례로 내게 돌아온다. 그러면 이미 줬다는 사실을 잊은 채 계속 스스로를 수증자라고 느끼고 감사함을 표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특정한 물품(타옹가)를 갖고 있어 그것을 나에게 준다고 가정합시다. 또 당신이 그것을 일정한 대가도 받지 않고 나에게 준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것을 매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 물품을 제3자에게 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 그는 나에게 ‘대가’(utu)로서 무엇인가를 주려고 마음먹고, 나에게 무엇인가(타옹가)를 선물합니다. -『증여론』, 67쪽
우리는 화폐가 아닌 것들을 증여의 방식으로 주고받았고, 의무와 자발을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고착화되어 자연스럽게 운영되고 있었다. 회사에서 주는 인센티브라는 게 없이도, 승진이라는 지위 상승 없이도 사람이란 자율적으로 시스템을 돌릴 수 있는 존재로구나. 명령이나 지시는 없었지만 모두 책을 읽고 토론에 참여했으며, 매일의 토론을 모으고 후기를 쓰다 보면 밴드글쓰기라는 어려운 과제도 수월하게 풀릴 것만 같았다.
막상 실천을 해보니,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시각에 규칙적으로 출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장은 매번 어김없이 “은주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평일에는 독서를 게을리 하고, 주말에 몰아서 읽는 습관이 있는 내가 제대로 얘기를 할 리가 없었다. 내가 독서를 하지 않으면 이 공생체에 내 배설물을 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들의 배설물만 계속 주워 먹는 것은 내 “썩은 얼굴”을 영상통화 화면에 들이미는 것이었다.
콰키우틀족과 하이다족의 귀족은 중국의 문인이나 관리와 완전히 똑같은 ‘체면’(face) 관념을 지니고 있다. 포틀래치를 주지 않은 신화상의 대(大)추장 가운데 한 사람에 대해서는 ‘썩은 얼굴’을 가졌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중국에서보다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북서부 아메리카에서 위세를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증여론』, 152쪽)
어서 책을 읽고 공생체에 내 배설물도 내놓아야 내가 떳떳한 자유인의 신분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밴드의 일원으로 제대로 참여하기 위해 퇴근 후 동네 도서관에 가서 그 주에 읽어야 할 책을 읽었다. 주말로 미뤄두던 독서 습관에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안은주 개인 에세이 인용
이때까지 우리의 목표는 ‘한 몸처럼 글쓰기’였다. 문탁 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신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와 <옥자>를 함께 보고 증여론과 대칭성 인류학에 대입하여 감상평을 나누거나, 글쓰기 책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를 뽑아 돌아가면서 조원들에게 설명해주는 시간을 마련했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핵심 부분들을 뽑아 영상통화방에서 읽어주고, 긴 문단들은 함께 낭송하며 읽었다. 이 모든 시도들은 서로 일치된 시선으로 글을 써내기 위한 우리 나름의 방편이었다. 밴드 6조가 사이버 원탁을 들고 탄 배는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뒷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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