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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고독한 사람들과 함께 읽는 『에티카』-스피노자 『에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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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담 작성일17-12-29 15:28 조회2,8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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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사람들과 함께 읽는 『에티카』

                                                                      




이한주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1.스피노자의 고독

1)신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들 


유대공동체 파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스피노자가 신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들에게 파문당했다. 그가! 왜?

21살의 스피노자, 아버지 미카엘 스피노자가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스피노자는 직계존속 모두를 잃었다. 그는 남은 두 동생과 함께 유대 공동체 안에서 살아야 했다. 스피노자는 스승인 랍비들에게 명석하고 신뢰가 가는 제자였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확실성이 오히려 오류로 보였다. 물론 스피노자의 이러한 의혹은 복합적인 관계망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문의 형성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파문과 철회를 반복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친구 위릴 다 코스타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위릴 다 코스타는 스피노자의 아버지 미카엘과 함께 네덜란드 유대공동체의 연합체 ‘탈무드 토라’ 교육 위원회에서 일했다. 교육 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담하게 영혼불멸사상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유대경전과 율법책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이를 안 유대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파문당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파문을 결정한 사람들은 랍비들이 아니었다.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공동체 내부의 평신도 7명으로 구성된 마아마드. 공동체의 가장 중심에 있는 권력자들이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구조 안에서 언론의 자유나, 사유의 자유, 철학의 자유는 없었다. 신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들의 주장, 미신만 있을 뿐!

 

위릴 다 코스타는 경제적 궁핍을 견디지 못하고 공동체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파문당했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8살이 되던 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이야기는 공동체 안에서 오랫동안 유령처럼 떠돌며 사람들의 생각 속으로 파고들었다. 위릴 다 코스타의 이야기는 돌고 돌다가 소년 스피노자의 의문 속에 들어와 한참을 머물렀다. 하지만 스승인 랍비들에게 묻지 않았다. 스승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랍비들은 허구의 신에 매달려 있었고 공동체의 권력은 평신도 중 지적 중산층 계급에 있었다. 스피노자에게는 유대 공동체의 구조가 사방으로 어긋난 무지의 집으로 보였다.


율법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다고 인간처럼 분노하는 신이라니?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제 1부 정리 15 주석)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스피노자는 이 불합리함에 대하여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삶을 욕망했다. 그의 이러한 욕망은 파문이라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는 생계의 터전인 공동체의 누구와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삶의 터닝 포인트는 백척간두에 섰을 때 주어지는 것인가? 스피노자는 아버지의 친구, 위릴 다 코스타의 전철을 따르지 않았다. 고립의 삶으로 남거나 자살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떠도는 이야기로는 더욱더 남고 싶지 않았다. 스피노자에게 파문은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공동체와의 단절은 고립이 아니라 고독으로 들어가는 입구였기 때문이었다. 그 길은 자신이 홀로 만들어 가야할 길이었다. 그것이 이 상황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 길이었기에 그는 기쁘게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2) 고독이라는 심연

스피노자는 1656년, 23살에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당했지만 바로 암스테르담을 떠나지 않았다. 5년 동안 암스테르담에 남아 있었다. 물론 그에게는 은밀한 우정을 나누었던 공동체 외부의 친구들이 있었다. 스피노자는 파문 후 곧바로 그 친구들과 만나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스피노자의 암흑기’라고 말하는 5년의 시간 동안 그는 침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그의 반전의 삶이 펼쳐졌다. 1661년, 렌즈의 장인인 동시에 철학자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친구들과 독서토론장의 리더가 되고, 활발한 저작활동도 시작한다. 암흑기의 터널을 통과하여 유대 공동체가 고립시키고자 했던 삶을, 철학을 생성하는 삶으로 역전시켰던 것이다. 그 터널의 이름은 ‘고독 속의 정신의 격동




그는 파문 전에 겪었던 신에 대한 ‘정신의 격동, 또는 감정(제 5부 정리2)을 끊어내고 미신의 지배적 구조에 기대지 않는 철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에게 있어 파문 후 5년의 고독은 파문 전과는 또 다른 정신의 격동기였으며, 모순의 세계에서 철학의 세계로 들어가는 도제 기간이었다. 스피노자는 철학적 도제 기간에 고독이라는 심연으로 자신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굳이 나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 하나하나 질문하며 나아갔다. 그의 질문들은 하나의 등불이 되어 자신의 눈을 밝혀 주었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근원적 고통의 심연을 헤치고 올라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신을 허구의 존재로 만든 사람들, 신과 인간을 이간질 하는 사람들 저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과 그들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정서는 무엇인가? 진정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무엇이란 말인가?  


질문들 속에서 스피노자의 사유는 점점 명료해져 갔다. 새로운 사유의 길에 들어선 그의 모습은 신을 증명하기 위해 길을 떠난 순례자의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마치 구도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모습이 왜 그렇게 보였던 것일까? 해답은 그의 저서 『에티카』에 있다. 『에티카』는 스피노자 생애 그 자체로 보인다. 『에티카』는 그가 지나온 암흑기의 터널이 참된 고독으로 그의 내면에 녹아들어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태어났음을 말해준다. 


이후, 스피노자는 우정과 고독의 소중한 시간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자유롭게 살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고독의 시간을 지나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부터 『에티카』 속으로 들어가 보자. 



2. 당신은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1) 신의 길에 대한 오해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1부에서 신에 대한 모든 오해의 시작은 무지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무지 속에 발을 푹 담그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마음의 동요’ 속에 있었다. ‘마음의 동요’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두 가지의 반대되는 감정으로부터 생기는 정신 상태”(제 3부 정리16 주석)이다. 지금까지 굳건하게 믿었던 대상에 대하여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작용할 때 이 의혹이 일어난다. 


그는 신을 사랑했지만, 그가 사랑한 신은 인간의 감정을 부여한 허구의 신이 아니었다. 신은 무한하고 완전하다. 신은 “자신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동하도록 결정”(1부 정의 7)된다. 신은 자유로운 실체이다. 그 자신이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는 실체, 이 실체가 만물을 산출한다. 그렇다. 스피노자는 신을 자연으로 보았다. 인간은 이 자연의 법칙 속에서 생겨났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이 변용된 양태인 동시에 자연의 속성을 지닌 존재물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물들과 공존하며 그 사물들에게 필연적으로 작용을 받고 있는 수동적 존재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완전함과 무한함을 내재성으로 가지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외부의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 유한한 존재라는 말이다. 모순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순된 인간이 완전한 신에 대해 논한다고?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용케도 지배자들은 자연력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순만을 이용했다. 그들은 신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약한 존재이다. 당신들의 삶은 문제투성이다. 그런데 나약한 당신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신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나의 말을 믿어라. 나의 말을 믿으면 당신들은 영원한 삶을 구원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삶에 결함이 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은 마치 신성함이 깃든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무지했으므로 자신의 삶이 신에 대한 오해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이 말은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는 자연의 완전성을 외면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빠져있는 무지와 모순의 세계부터 세밀하게 분석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신을 인간의 외부에 놓고 논할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흐르는 자연성에 집중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에게는 인간이 자신의 자연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먼저 발견되었다. 



2) 인식의 결핍은 길을 잃게 만든다


정리 13.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일정한 연장의 형태이다. 그리고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2부 정리 13)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의 대상은 신체이다. 인간은 신의 속성 중 연장속성으로서 신체를, 사유속성으로서 정신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속성을 지닌 우리 신체는 본질적으로 다른 물체와 상호 작용을 할 때에만 감각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인식할 수 있다. 이 때 일어나는 인식 작용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관념들이다. 즉 신체의 변용이 관념이다.


인간은 생로병사를 겪으며 평생 변용을 거듭할 것이고 관념의 관념도 계속 만들어진다. 이 관념들은 포개지고 포개지는 양상으로 우리의 내면에 남는다. 더구나 우리 신체는 수많은 세포들로 구성된 복합개체이기 때문에 관념들은 일종의 무의식 같은 형태로 다층적으로 내면화된다. 그러는 중에도 우리 신체의 세포들은 다른 세포들에게 정지당할 때까지 빠르게, 또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세포들의 빠르고 느린 운동과 정지의 움직임은 외부의 다른 물체들과도 연결되어 있다. 빠르고 느린 운동과 정지의 움직임이 안 밖으로 개체와 개체들 사이에서 작용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끊임없는 생명활동 속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활동에서 신체적 감각으로 느끼는 경험의 인식을 스피노자는 허위의 인식이라고 말한다. 만약에 우리의 신체가 변용하는 시점에 “여러 사물들을 동시에 고려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치점, 차이점, 반대점”(2부 정리 29 주석)을 모두 동시에 인식할 수만 있다면 이런 오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정신이 내부로부터 이런 저런 방식으로 결정될 때에, 정신은 사물들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고찰하기 때문이다.”(2부 정리 29 주석)  스피노자는 이 고찰 방법으로 인간은 신의 필연성을 타당하고 적합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공통개념’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우리의 신체는 이렇게 전능하지 못하다. 몸 속 세포들 하나하나의 경험까지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우리는 신체가 수많은 세포들로 이루어진 복합개체임을 늘 잊어버리기까지 한다. 설상가상 우리의 신체는 감각적 경험을 닥치는 대로 인식하는 시스템이다. 이 와중에도 신체는 계속 변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각을 통하여 단편적이며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어떠한 지성적 질서도 없이”(제2부 정리 40 주석2) 인식한다. 여기에서 인식의 결핍이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은 허위의 인식인 것이다. 


물론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식의 결핍을 인간 신체와 정신의 오류라고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연적 법칙에 의해서 생겨난 인간을 오류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인식의 결핍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은 ‘공통개념’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가 자극받은 공통성만을 묶은 ‘일반적 개념’을 도출해 놓고 그것을 따르는 오류를 범한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을 올바르게 표현하지 않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정신을 잘못 해석”(제2부 정리 47 주석)함으로써 ‘일반적 개념’의 오류에 빠진다.


그런데 우리가 도출한 일반적 개념이 다층적, 다면적으로 포개지고 포개져 집단 무의식으로, 또는 집단의 도덕으로 내면화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인식 능력은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유대 공동체 사람들이 신에 대한 무지의 사랑에 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무지가 허위의 인식에서 오는 것이라면 지적 인식, 참된 인식으로 나아가는 길도 있지 않을까? 이 답을 찾아가는 길은 인간의 필연적 조건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마음의 동요’를 겪었던 스피노자는 이 답을 찾아나가기로 했다. 



3) 좋은 것을 알면서도 나쁜 쪽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

사람들이 무지하다고, 허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그들에게 연민, 아니면 비난의 감정으로 다가선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그들에게 결함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고 그들을 무능력한 존재로 더 몰아붙이는 꼴이 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다르게 접근한다. 그는 “인간의 무능력과 약점의 원인은 공통적인 자연력”(제 3부 서문)에 있다고 말한다. 무지가 결코 인간 본성의 결함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자연 안에서는 자연의 결함 탓으로 여길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은 항상 한결 같으며 자연의 힘과 활동 능력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제3부 서문) 그래서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가진 허위의 인식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작용하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 이해해보자고 한다. 그리고 자신을 ‘저주하고 조소’한 사람들의 감정과 행위를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증명하고자 한다. 즉 그들과 그들, 그들과 자신 사이에 작용하고 작용 받는 감정을 자연의 법칙에 의해 분석하고자 한 것이다. 



자주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른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지 못했다면, 그들은 인간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행한다고 주저 없이 믿었을 것이다. (3부 정리 2 증명)


우리는 종종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선택이 자유로운 결정이라고 오해하고는 한다. 인간이 이런 존재라면 어떠한 감정에 빠져 있든지 외부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감정은 정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체의 능력과 동일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제3부 정의 3)이 감정인 것이다. 화가 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신체적 감각에 왜곡이 일어나 사건을 명확하게 보지 못한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활동 능력은 떨어진다. 그러다가 외부 상황이 개선되어 기분이 좋아지면 세상천지 자신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감정에 빠진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기감정에 푹 빠진 사람들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르고는 한다.

 

감정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신체가 자연의 힘에 의해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과 똑같은 양상으로 감정은 외부 원인의 영향을 받고 우리의 삶도 뒤흔들린다. 감정은 자연적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감정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하는 노력’(코나투스)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하여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 감정이 자신의 삶에 부적합한 원인이 되고 있다면 그는 수동적 감정의 상태다. 운동과 정지의 비율에 의해 힘의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감정은 늘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의 자연성이다. 하지만 수동적 감정 때문에 무력해지지 않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들여다보는 방법이다. 스피노자는 고독 속에서 동요하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추방한 결정권자들의 도덕이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그 답을 찾아내었다.



각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더 좋은 것이고 무엇이 더 나쁜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고 무엇이 가장 나쁜 것인지를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판단하거나 평가한다.(제 3부 정리 39 주석)



그랬다. 인간 도덕의 판단 기준은 감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악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단지 자신의 실존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 그것에 대한 기준이 있을 뿐. 유대 공동체의 권력자들도 신앙에 대한 선악의 판단 근거를 그들 자신의 감정에 두었던 것이다. 공동체의 결집과 자신의 명예욕, 권력욕과 결합된 수동적 감정에 근거하여 도덕의 기준을 삼는 사람들, 그들에 의한 추방은 스피노자에게 오히려 내재적 능동의 힘으로 윤리를 찾아갈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3. 고독한 사람들의 윤리

1) 이성의 발견

우리가 자신의 수동적 감정을 인식하고, 자신의 코나투스와 만나 새로운 인식으로 가는 과정은 얼마나 중요한가. 스피노자를 추방한 사람들의 목적은 그가 고립 속에서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자신들의 미신에 매달려 복종하며 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유대 공동체의 학습된 사유에서 벗어나 새로운 철학의 삶을 개척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가 고독의 시간에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감정이 수동에서 능동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인간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수동성이 자연적 힘이라면 자연 법칙에는 다른 한편의 능동성을 발현하게 하는 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이성, 또는 지성의 힘이었다.





그가 말하는 이성의 힘이란 감정의 흐름, 즉 우리 삶을 보는 정신의 인식능력이다. 강력한 감정의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들어가 태풍의 눈이 되어 그 흐름을 투시하는 힘, 그것이 이성이다. 스피노자는 공동체 외부의 친구들과의 철학적 만남에 조급증을 내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의 만남 전에 먼저 자신에게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파악했다. 자신의 삶 안에서, 자신의 깊은 곳, 그 심연에서 일어난 ‘마음의 동요’를 이성의 눈으로 투시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의 이성의 눈은 개인의 삶에서 외부의 세계로 확장되었고 철학적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이성은 본성에 반대되는 것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이성은 각자가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진실로 인간을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을 욕구할 것을, 그리고 절대적으로, 각자가 가능한 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제4부 정리 18)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성은 우리의 정신 능력으로서 인간 본성과 일치하는 것만 요구한다. 따라서 이성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코나투스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연의 흐름과 가장 잘 합일될 수 있도록 인도한다. 따라서 이성은 현재의 삶과 관련이 있으며 생성의 힘을 쓰게 한다. 쉽게 말해서 이성은 수동적 감정에 의해 아수라장이 된 현재의 삶에 능동성을 부여하는 정신의 참된 인식능력이다. 따라서 인식의 결핍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문제투성이로 규정했던 사람들이 철학으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힘의 발현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성의 발견 이후 유대공동체의 권력자들이 강요한 고립감이라는 감정에 다른 변종의 수동적 감정이 달라붙어 자신이 무력해질 틈을 주지 않았다. 고립감은 관계에 집착하여 소외당했다고 느끼는 수동적 감정이다. 그는 더 이상 유대 공동체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사상으로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욕망은 새로운 철학과 결합했고 그것은 지성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그 누구로부터도 강요받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내재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드디어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서로에게 유익하며 가장 친밀한 우정의 인연으로 서로 결합하고 똑같은 사랑의 열의로서 서로를 이롭게 하려고 노력한다.”(제 4부 정리71 증명)고. 그의 증명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의 고독은 고립이 아니라 우정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이었음을. 또한 그의 고독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연구하는 철학의 시간이었음을. 



2)고독과 우정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관념으로 시작해 인간의 지복으로 『에티카』를 끝맺고 있다. 이제 우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윤리가 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에티카』는 결국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어떤 윤리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스피노자처럼 고독의 시간을 가져야만 철학이 생성되느냐는 물음이다. 답은······그렇다! 고독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 원초적으로 주어진 시간이다. 인간에게는 연합된 힘이 훨씬 유용하다는 것과 함께 이 사실은 인간 본성 안에 있다. 중요한 것은 고독이라는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핵심은 그 시간에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이성이 완전한 인식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올바른 생활 규칙이나 일정한 생활지침을 구상하고 이것을 기억에 남겨 인생에서 흔히 마주치는 개개의 경우에 끊임없이 그것을 적용”(제 5부 장리 10 주석)하라고 한다. 이 말은 자연이 부여한 생사의 필연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수동적 감정에서 필연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으로 확장 해석 된다. 그리고 능동성을 발휘하는 데 있어 이성의 발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또한 이성적 사유만으로는 철학적 삶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 스피노자는 한 스텝 더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 다음 스텝은 세계에 대한 통찰의 인식능력이면서 스피노자 철학의 최종심급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것은 우리의 지성 또는 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하는 것이며, 오로지 이것에만 인간의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이 있다. 왜냐하면 지복은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서 생기는 정신의 만족이기 때문이다.(제 4부 부록)


이 말이 무슨 뜻일까? 스피노자는 인간의 행복은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서 생기는 정신의 만족’이라고 한다. 그는 ‘지성 또는 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하는 것’‘인간의 행복 또는 지복’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 이성 또는 지성이 가능한 ‘완전’해진다는 것! 스피노자의 개념으로 파악해본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이 최대한 자연적 흐름과 합일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스피노자는 실재성과 완전성을 동일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란 자연과 합일하는 통찰의 인식능력을 말한다. 그 때 인간은 지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지복감은 당연히 능동적 기쁨이다.


스피노자는 고독이라는 도야 과정을 통해 이것까지 발견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필연적 조건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사유를 『에티카』를 통해 증명했다. 그리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가 자신의 생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인식의 대전환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에티카』가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올 수 있을 것인가? 참다운 인식을 경험한 새로운 신체감각과 인식능력, 그리고 지복감, 이 철학의 힘은 바로 그의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의 능력에서 왔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정신의 본질은 인식에만 있고, 신은 이 인식의 시초”(제5부 정리 36 주석)라고 한다. 인식의 시초인 신을 사랑하는 마음, 스피노자는 이것을 자연의 법칙 속에 있는 자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정한 자기 구원이며, 행복이며, 삶의 윤리라고 한다. 이것이 그의 고독의 시간이 우리에게 선사한 철학이다. 그의 선물이 삶으로 들어와 녹아든 그 순간, 우리는 자신도, 친구도, 지적 사랑으로 충만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우정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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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길에는 신의 선물처럼 길섶 곳곳에 우정이 숨겨져 있다. 스피노자는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철학이 삶으로 들어와 자신의 감정이 투명해지는 어느 순간, 당신은 이미 구도의 길 위에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구도의 길 위에서 고독을 관통하고, 자신의 삶을 관통하여, 자신 안에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인식한 사람이라면 길섶에 숨겨진 우정을 발견하지 못할 리 없다고. 자신의 삶으로, 『에티카』로, 그는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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