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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자신만의 보법(步法)을 찾아서 -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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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단지 작성일17-12-29 16:42 조회3,1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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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보법(步法)을 찾아서





이경숙 (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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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늘 어디론가 바쁘게 다닌다. 학생은 학교에 가고 회사원은 직장에 나가고 누군가는 여행을 다닌다. 각자의 목적에 따라 발걸음이 분주하다. 보행의 자유가 허락되는 한 인간은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사람의 걸음걸이를 따라가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래서 삶을 걸음걸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언제부터 짜여 졌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한 동선에 따라 움직이고 살아간다. 병원에서 태어나고 유치원을 다니고 학교에 가고 직장에 다니고 결혼하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패턴과 사고방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삶에 회의가 올 때가 있다. 이렇게 살아서 될까하고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온다. 다른 방향으로 나가려니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고 그냥 살아가려니 답답한 상황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자신의 스텝이 꼬여서 방황하는 한 남자가 있다.

 


1. 관념적인 책벌레 


1) 인생의 스텝이 꼬일 때


 방황하는 이 남자는 두목(작중화자)으로 30대 중반의 관념적인 책벌레다. 소년 시절부터 공제 조합을 만들어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생각했다. 그에게는 완벽한 이상향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열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확신은 너무 일찍 그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상에 대한 관념이 확고할수록 두목의 삶은 점점 소외되었다. 조르바는 관념에 사로잡혀 삶을 소외시킨 나머지 기본적인 삶조차 제대로 살지 못하는 두목에게 까마귀에게 일어난 일을 들려준다.

 까마귀가 어느 날 비둘기처럼 걷고 싶어서 따라 걸었다. 흉내 내며 걷다 보니 비둘기처럼도 못 걷고 자신의 걸음걸이도 잊어버려 어기적거리며 걷는 모습을 두목에게 비유해서 한 얘기다. 원래 까마귀는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다. 까마귀의 당당한 걸음은 까마귀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이라 하겠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까마귀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함이다. 이렇게 걸을 때만이 까마귀는 자유롭고 당당하게 걷게 된다. 그러나 까마귀는 비둘기의 걸음걸이가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비둘기를 따라 걷다가 스텝이 꼬여 버린 것이다. 까마귀 자신으로부터 기인한 이러한 느낌은 비둘기의 걸음에 대한 표상(表相)을 만들게 되고, 표상에 대해 열망하면서 반드시 비둘기처럼 걷겠다는 집착 곧 관념으로 굳어지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까마귀 본인에서부터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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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겪는 일상과 패턴이 비슷하지 않는가. 국가가 생겨나고 사회가 조직화 되면서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국가, 종교, 돈이라는 시스템에 포획된다. 이러한 것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규범이 필요하고 우리의 전 방위적인 삶을 침범한다. 수많은 매뉴얼들은 형태를 바꾸어가며 꼭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여기에 현혹되면 우리의 마음은 얽매이게 되고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결국 현혹되는 내 마음을 보지 못하고 외부에서 원인을 찾다가 스텝이 꼬여버린다. 두목 역시 국가, 하느님, 종교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스텝이 꼬여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표상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본성에서 나오는 자유로운 삶을 찾아 자신만의 보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스텝이 꼬여버린 두목에게 자신을 바로 보게 되는 기회가 왔다.

 


2) 조르바와의 운명적 만남


 두목에게는 함께 이상을 나누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볼셰비키와 쿠르드에게 모진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 동포를 구하기 위해 카프카스로 떠나게 된다. 평소 남을 구하는 일이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설교를 늘어놓던 사람은 두목이었지만 정작 행동에 나선 것은 친구였다. 함께 가지 않는 두목에게 친구는 책망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작별을 고하면서 하는 결정적 한마디는 안녕, 이 책벌레야!”(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0) 였다. 책벌레라는 말 한마디에 두목은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해졌다.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오르던 그 분노의 순간을 다시 살()수 있다면(같은 책, 14)이라고 할 정도였다. 위험이 닥쳤을 때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살아난다. 이것을 우리는 본성 또는 본능이라 한다. 본성은 어떠한 제약도 가해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이자 내면의 소리다. 두목이 느꼈던 그리고 살고 싶었던 분노의 순간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책 속에만 방치할 수 없다는 몸의 신호였다. 두목은 이제 이상향을 위해 살고 싶은 충동과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다는 현실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찾고자 한다. 이제 문제점을 알게 되었으니 해결할 일만 남게 된 셈이다. 두목은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크레타의 갈탄광 한 자리를 빌려 거기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행동하는 삶으로 삶의 양식을 바꾸고자 결심한다. 그는 책과는 거리가 먼 길을 선택했지만 아직 미완성 원고뭉치와 책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크레타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는 까페에서 60대 헌털뱅이 영감 조르바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두목을 본 조르바는 대뜸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한다. 이에 두목은 왜 그래야 되는지 반문한다. 조르바는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같은 책, 17)라며 거칠게 달려든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 두목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어버린다. 게다가 그는 갈탄을 캐본 경험도 있고, 어떻게 알았는지 두목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스프인데 기막힌 스프까지 끓여준다는 것이다. 두목은 자신의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움직임에 동요되고 있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같은 책, 22쪽)


 두목은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늘 갈증이 있었다. 드디어 갈증을 풀어줄 사람을 직감적으로 찾은 것이다. 조르바의 말은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고 어느 책에서도 읽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인간의 이성이란 그거지 뭐 이성을 마누라 궁둥짝에 비교하는 조르바의 기발하고 엉뚱한 말. 두목과 눈이 마주치자 대뜸 달려드는 그의 야성에 두목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자신의 문제를 조르바를 통해서 풀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그의 차가운 논리를 넘어선 터였다. 이렇게 둘은 크레타로 가서 6개월 남짓한 생활을 함께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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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법을 찾아가는 세 가지 에피소드


1) 먹는 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나 이상향을 꿈꾼다. 누구에게는 돈, 출세, 사랑일 수 있고, 누구에게는 진리, 종교, 이념일 수 있다. 공통점은 현재에 만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많아진다. 두목 역시도 이상향을 설정해 놓고 자신의 삶을 거기에다 맞추어 살고자 했다. 두목에게는 세속의 삶, 즉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따르는 삶에서 오는 즐거움은 쾌락이라 여기고 금욕과 절제의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욕과 절제의 생활로 고귀해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던 터였다. 심지어는 먹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 몰래 먹어치우기까지 한 것이다. 크레타의 생활이 시작되고 끼니때마다 먹는 것에 대해 시원찮은 두목에게 조르바는 말한다. 육체에겐 영혼이란 짐이 있어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영혼을 버리게 될 것이고 결국 육체마저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한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는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디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 가지 부류가 있을 수밖에요. 두목, 나는 최악의 인간도 최선의 인간도 아니오. 중간쯤에 들겠지요. 나는 내가 먹는 걸 일과 좋은 유머에 쓴답니다. 과히 나쁠 것도 없겠지요!”(같은 책, 100쪽)


 사람은 먹어야 산다. 육체에게 먹는 것으로 연료를 채워야 영혼도 무엇을 할까 시동을 건다. 또한 영혼이 시동을 걸어야 육체가 움직일 수 있다. 이처럼 육체와 영혼은 톱니바퀴처럼 하나로 굴러간다. 먹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일상을 거부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조르바가 식충이처럼 먹는 것만 밝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음식은 일과 좋은 유머로 재생산된다. 조르바야 말로 유머의 달인이고 그가 가는 곳은 늘 활기로 넘친다. 두목은 관념에 갇혀 먹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을 하찮게 여겼다. 이것이야말로 음식을 낭비하는 것이고 자신에 대한 죄가 된다. 이런 조르바의 푸짐한 말과 왕성한 식욕은 두목의 식욕을 자극했다. 두목에게 먹는 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정신이 되고 노래가 되고 부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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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국심으로부터 졸업한 사나이


 철탑 기공식 전날 밤. 조르바와 두목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조르바가 자신의 할배(할아버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할배는 성지를 순례하고 하지(순례자)가 되었다. 염소 도둑인 친구가 놀러 와서 성스러운 물건을 하나 달라고 한다.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할배는 낡고 벌레 먹은 문설주를 떼어 친구에게 건넨다. 문설주를 건네받은 친구는 목에 걸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친구는 문설주를 성물(聖物)로 믿고 무작정 독립군에 가입해 총탄이 쏟아지는 터키로 가서 마을을 불태우며 누비고 다닌 것이다. ‘만사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어서 믿음이 있다면 낡은 문설주도 성물이 될 수 있다며 조르바는 킬킬거린다.

 조국을 위해 싸우는 일을 낡은 문설주 하나 때문이라는 말이 두목의 마음에 걸렸다. 두목은 내친김에 조국을 위해 싸워본 적이 있느냐고 조르바에게 묻는다. 두목의 질문에 언짢아진 조르바는 등잔을 가져와 자신의 몸을 비추게 했다. 조르바의 몸을 본 두목은 놀랐다. 깡마른 그의 몸은 칼집과 탄흔으로 흉터 투성이었던 것이다. 조르바는 젊은 시절 조국을 위한답시고 전쟁에 가담한 얘기를 해준다. 독립군에 가담해 그리스 비정규 전투 요원이 된 조르바는 불가리아 군인인 신부를 죽인 일이 있었다. 다음 날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장을 보러간 조르바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다섯 아이를 만나게 된다. 알고 보니 그 아이들은 자신이 전날 죽인 신부의 아이들이었다. 그는 충격을 받고 자신이 가진 걸 몽땅 털어 아이들에게 내어 주고는 떠난다.

 자신이 전날 죽인 신부는 그리스인을 무자비하게 죽인 불가리아 군인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신부를 무자비하게 죽였다. 결국 조르바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그리스, 신부가 지키고자 했던 불가리아는 다른 사람의 피를 필요로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죽이고 빼앗고 칼로 도려내며 모은 돈이 무슨 소용인가. 오히려 죽이고 빼앗는 것에 대한 쾌감에 집착하게 된 건 아닌지. 이제 조르바는 결심한다. 정답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내가 경험하고 느낀 사실만 믿자.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조르바는 이제 조르바만의 길로 나선다.

 

“...내 조국으로부터 구제받고, 신부들로부터 구제받고, 돈으로부터 구제받았습니다. 나는 짐을 덜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족족 덜어 버린 겁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짐을 덜었습니다. 자, 이런 걸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해탈의 길을 찾은 겁니다. 나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같은 책, 326쪽)

 

 조르바는 조국, 신부, 돈은 인간이 짊어지는 짐이라고 말한다. 무거운 짐 덩어리를 덜어내야 가볍게 나갈 수 있다. 그는 자신을 구제하는 길은 짐을 덜어내는 일이고 이것을 해탈의 길이라 여겼다. 조르바의 말이 두목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든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라며 머리로 이해했던 것들이 조르바의 이야기에 무너져 내린다. 두목은 책 속에서 세상을 배웠고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가 옳다고 믿는 판단의 근거에는 자신이 겪어내고 결론 내린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관념에 갇혀 조국 운운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온 몸으로 겪어낸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 조르바의 용기가 한없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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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체의 즐거움은 곧 정신의 기쁨


 크레타마을에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과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기르던 암양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암양을 찾으러 빗속을 뛰어다니는 그녀를 본 순간 두목은 격렬히 빠져든다. 두목은 그녀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욕정을 품는 것이 큰 죄인 듯 그녀를 떨쳐버리기 위해 불경을 베껴 쓰며 그는 자신과의 엄청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과부 때문에 괴로워하는 두목에게 조르바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하느님은 대단한 임금이라 인간의 모든 죄를 스펀지로 쓱싹쓱싹 문질러 지워준다. 그러나 여자가 원하는 대도 자주지 않는 죄만큼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과부댁으로 갈 것을 설득한다. 두목의 마음은 욕정으로 불이 났지만 태연한척 애를 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조르바와의 생활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여자, , 그리고 힘든 노동! 일과 술과 사랑에 자신을 던져 놓고, 하느님과 악마를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것이 젊음이란 것이다!”(같은 책, 340) 이런 조르바의 말을 되뇌이며 마음의 명령에 따라 마을로 걸어갔다. 두목의 발길이 머문 곳은 과부의 뜰 앞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집으로 들어갔고 과부와 동침하게 된다.

 

“흡사 오래 고민하던 복잡한 문제의 해답을 의외로 간단하게 발견해 버린 그런 기분이었다....(중략)...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소 과장되어 있고 긴 여행으로 지치고 물려받은 짐에 짓눌려 있기는 하나 육체 또한 영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같은 책, 343쪽)


 과부와 동침하고 난 두목은 감각으로 느껴지는 육체의 즐거움이 엄청난 정신적 기쁨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두목은 과부를 멀리해야 된다는 관념의 해제로 육체적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육체와 영혼은 따로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종속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금욕과 절제는 몸과 마음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무작정적인 금욕으로는 절대 육체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금욕으로 육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었다. 삐뚤어진 세속의 욕망만 키울 뿐이다. 욕망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우선 자신의 감각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간의 감각은 살아있는 생명이 느끼는 자연스러움이다. 몸의 자연스러운 감각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육체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겠는가.


 위 세 가지 에피소드에서 봤듯이 두목은 자신의 기본적인 삶조차 관념화시키며 살고 있었다. 기본적인 삶이라 하지만 결국 우리가 사는 전부가 여기에 포함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삶 자체를 관념화 시켰을 때 수동적으로 살 수 밖에 없고 몸과 마음이 경직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껏 먹고 사랑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하며 살면 되는 것인가. 지금 우리는 이러한 것들의 과잉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상을 위해 금욕과 절제의 생활에 집착하다 보면 일상이 잠식당한다. 반대로 현실에 집착하다보면 과잉으로 치닫기 일쑤다.

 조르바는 나는 최악의 인간도 최선의 인간도 아니오. 중간쯤에 들겠지요.”(같은 책, 100)라고 한다. 조르바는 양극단의 선택지가 아닌 그 사이의 길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위 에피소드에서 조르바가 두목에게 한 말들은 자신이 욕망한 것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실체에 대해 정확하게 보라는 것이 아닐까. 나타나는 현상에 치우지지 않고 현상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본질을 똑바로 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많은 성인들이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았던가. 습관대로 가던 길을 멈추고 용기 있게 발걸음을 돌려서 가다보면 그 언저리에 있는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두목은 조르바와의 생활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관념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꼬였던 스텝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3. 산투르, 삶의 기술이 되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은가. 관념적인 책벌레였던 두목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조르바는 어떻게 자신만의 삶의 철학을 갖게 되었는지. 잠시 조르바를 살펴보자. 두목이 조르바를 처음 만났을 때 조르바의 겨드랑이에는 보따리가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산투르라는 악기였다. 산투르를 켜기 위해 정성스럽게 보따리를 푸는 조르바의 모습은 흡사 의식을 치르는 제사장 같았다. 조르바가 스물 살 때의 일이다. 산투르 소리에 혼이 빠진 조르바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하려고 모아둔 돈을 몽땅 털어 산투르를 하나 샀다. 그는 터키에 가면 아무에게나 산투르를 가르쳐 주는 선생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산투르 하나 들고 터키로 튄 것이다. 당시 그리스는 터키와 죽네 사네하며 원수지간인 나라였지만 조르바의 배우겠다는 열정 앞에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일푼인 조르바는 선생을 보자마자 발밑에 넙죽 엎드리고는 가르쳐 달라고 사정한다. 산투르를 배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선생에게 전해진 것일까. 선생은 이교도 젊은 청년인 조르바에게 돈 한 푼 받지 않고 그를 제자로 받아 준다. (선생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1년 동안 선생 밑에서 조르바는 산투르를 배웠다.

 악기를 다루거나 기술을 하나 익혀 본 사람은 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생소하고 재미가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운다. 그렇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배우는 사람에게 정체기가 온다. 사람에 따라서는 정체기를 벗어나는 데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실력이 늘지도 않고 오히려 퇴보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며 배우는 사람의 마음은 술렁거린다. 시작할 때는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수 십 가지 이유가 이제는 반드시 그만둬야 하는 수 십 가지 이유로 바뀌는 것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걸 억지로 하고 있는 것 같고 선생의 자질을 의심해 본다. 동료에게 흠집을 내서 기술이 늘지 않는 것을 동료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이렇게 남 탓 하며 그만두게 되면 어딜 가나 똑같은 패턴으로 살게 된다. 무언가를 하나 마스터한다는 것은 기술뿐만 아니라 과정에서 오는 마음의 부침(浮沈)을 견뎌내는 것이다. 이때 배우는 사람은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오직 배우겠다는 일념하나로 버텨야한다. 배우는 과정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하다.

 그렇게 배우다 보면 어느 날 선물처럼 기적의 순간이 온다. 기술을 완벽히 익혀 자유자재로 만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변주가 가능해진다. 여기서부터 자신만의 스타일이 나온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스타일대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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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바는 산투르를 일 년 만에 마스터한다. 고될 때 돈벌이가 될 정도의 실력이니 그의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인고의 시간을 오직 배우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텨냈다. 그래서 그는 전문 산투르쟁이의 길로 들어섰냐 하면 천만의 말씀! 조르바는 산투르를 치고부터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이런 사연을 듣고 두목은 묻는다.


「근심 걱정을 잊으려고 산투르를 치셨던 게로군요?」 「이것 보쇼. 보아하니 당신은 악기 하나 못 만지는 모양인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집구석에 들어가면, 있는 건 근심걱정뿐...마누라가 그렇고, 새끼들이 그렇잖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장차 이러다 무엇이 될까? 이런 젠장. 이래선 안 돼요. 산투르를 치려면 환경이 좋아야 해요.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거예요...(중략)...산투르를 치려면 온갖 정성을 산투르에만 쏟아야 해요. 알아듣겠어요?」  (같은 책, 22쪽)

 

 조르바에게 산투르는 돈벌이 수단도 감정을 풀어내는 수단도 아니다. 목적을 두는 배움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를 중시하게 된다. 조르바가 돈을 벌겠다는 목적을 두고 산투르를 배웠다면 생계와 연결되면서 안정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르바의 배움은 오로지 배우겠다는 그 마음 하나였다. 목적 없는 배움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 조르바는 배우는 과정에 집중하면서 그 과정에서 오는 기쁨을 배웠다. 그가 보따리를 풀 때 예사롭지 않더니 그에게 산투르는 그런 존재였다.

 조르바는 두목과 크레타로 가기로 결정한 후 조건이 하나 있었다. 아무 때나 산투르를 켜지 않겠다는 것이다. 산투르의 마음이 내켜야 킬 수 있다고 말이다. 조르바는 산투르를 치려면 좋은 환경과 깨끗한 마음에서 온갖 정성을 쏟아야만 켤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산투르를 대하는 방법을 삶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그에게 닥친 사건을 두고 마음이 가라앉아 맑아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사건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재해석한다. 조르바만의 삶의 기술이고 조르바만의 보법이다.



 

4. 자신만의 글쓰기


 두목과 조르바의 6개월간의 크레타 생활이 끝나고 그들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돌아왔다. 계획했던 갈탄 사업은 폭삭 망했다. 하나도 남은 게 없었다. 두목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관념에 균열이 생기는 경험과 갈탄사업의 참패로 물질적인 폭망의 순간도 맛보았다. 내외적으로 완벽한 참패의 순간을 맛본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두목은 복잡한 미로 속을 빠져나와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끝까지 가봐야 끝이 어떤지 실체를 볼 수 있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은 각자의 길로 떠나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두목의 꿈속에서 조르바가 나왔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조르바의 꿈을 꾼 이후 두목은 조르바에 대해 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이 충동이 조르바의 죽음을 예견하는 것 같아 두려워서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더 이상 마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두목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르바가 뿌렸던 말, 절규, 몸짓, 춤을 모아 몇 주일 만에 원고를 완성하게 된다.

 행동하는 삶으로 삶의 양식을 바꾸려고 했던 두목은 여전히 펜을 잡고 있다. 그러나 예전에 펜을 잡던 그가 아니었다. 관념에 사로잡혀 책을 읽고 글을 쓰던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두목은 조르바를 만나는 순간부터 과부의 집을 찾아가는 것까지 차가운 논리가 아니라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제는 조르바의 죽음을 예견할 정도로 그의 신체는 변한 것이다. 신체가 변했기에 삶도 새롭게 구성된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무미건조한 글이 아니라 자신만의 살아있는 글을 쓰게 되었다. 삶의 양식은 똑같지만 두목은 거기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해 낸다. 자신만의 보법을 찾아낸 것이다. 두목은 조르바와의 생활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관념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사실 두목이 열망했던 이상은 실체가 없는 환상이다. 다만 믿는 사람의 믿음에 의해 구체화된 관념으로 굳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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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의 작가 카잔차키스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다. 글쓰기는 그에게 수련의 과정이었고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글쓰기를 통해 노력하고, 추구하고, 시험하고, 실험하면서 세상을 보았노라고 카잔차키스는 고백한다. 자신의 삶에 질문이 생기고 자신만의 보법이 궁금하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는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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