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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자기경멸, 새로운 존재로의 변이-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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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석연 작성일17-12-29 20:52 조회2,9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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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경멸, 새로운 존재로의 변이





김석연(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이 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9-1880). 작품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다섯 남자들은 아버지 표도르, 큰아들 드미트리, 둘째 이반, 셋째 알료샤, 사생아 스메르쟈코프이다. 돈과 치정으로 얽힌 채 파국으로 치닫는 형제들은 친부살해라는 희대의 사건에 휘말리고 만다. 

치정, 돈, 살인! 이 삼박자의 코드가 얽혀질 때, 우리는 아주 쉽고 간단하게 ‘막장’이라 부른다. 인생 갈 데까지 간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막장 중의 막장인 카라마조프가의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비정상적이고 부도덕하고 자기 파괴적인 카라마조프가의 삶을 지독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막장의 요소들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질수록 이들의 삶은 더 비루해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집안이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낱낱이 파헤침으로써 막장이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이고 이기적인 인간은 이 막장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맞다. 인간의 삶이 다 그렇지 않은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막장 아닌 인생이 어디 있을까. 인생이란 말이 거창해 보인다면 그래 일상이라고 하자. 막장 아닌 일상이 있을까. 치정, 돈, 살인. 그것은 사랑, 금력, 권력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삶을 구속한다. 그리고 이를 나름 상상이라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단연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너무나 모순적이게도 이 막장의 삶 속에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 막장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가장 인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이 가장 인간답다는 것일까?


1. 악마의 유혹, 사랑

나는 솔직히 탁 까놓고 나 스스로의 파괴를 요구하는 바일세. 하지만, 안 돼, 살아야 돼, 너 없이는 아무것도 없을 테니. 하고 말하더군. 세상에 모든 것이 합리적이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네가 없으면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하지만 사건이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 자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마음을 굳게 먹고 사건이 일어나도록 봉사를 하는 거고, 또 명령에 따라 불합리한 짓을 저지르는 거란 말일세. (3권, p280)

악마의 진술이다. 아니 이것은 분열상태의 이반이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서 솟구쳐 쏟아 낸 그의 진실이다. 스스로의 파괴를 원하지만 끝내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 악마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단다. 인간의 삶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단다. 삶의 무궁무진한 사건을 위해서 말이다. 인간의 삶을 예측불가능의 상황에 빠뜨리는 악마. 이반에게 악마는 타자인가. 자신인가. 이반에게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그는 명백히 부인한다. 인간이란 생각만큼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인간의 이성은 감정에 의해 뒤흔들린다는 것, 인간이란 조화를 추구하지만 완벽한 조화상태를 결코 견딜 수 없다는 것, 인간은 비합리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진실로 이를 부인할 수 있을까?

인간은 수많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다양한 관계는 다양한 감정의 원천이 된다. 인간은 ‘한 순간’ ‘감정’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상황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곤 한다. 감정 때문에 사건을 저지르고, 또 그 상황 때문에 끙끙 앓으며 전전긍긍 하는 게 우리의 실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악마란 감정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감정을 읽는데 있어서 우리의 능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상대가 내뱉는 한마디의 말, 손짓 하나 뿐만 아니라 찰나적 눈빛에서도 우리는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니 말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읽은 순간 우리의 몸은 바로 그에 상응하는 감정을 작동시키고 표현한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장악한 것은 감정이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에 우리는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평온한 소도시에 파란이 인다. 20년 만에 등장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인해. 첫째 아들 드미트리와 그의 배다른 동생들인 이반과 알료샤. 이들은 말이 형제지 남처럼 이십년을 살았다. 자식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덕에 엄마 잃은 아들들은 차례대로 외가 친척들에게 넘겨졌다. 그러니 이들 부자간에 무슨 정이 있겠는가. 그런 형제들이 마을에 나타났고, 지금 사랑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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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두고 연적이 된 아버지 표도르와 큰아들 드미트리. 스물여덟의 드미트리는 장교다. 그리고 스스로를 불한당이라 일컫는 난봉꾼이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 격인 이들 부자는 지금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서로를 향한 각종 험담은 기본이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주먹질도 불사한다. 그리고 이 도시 사람들 중 이들 부자의 첨예한 갈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치정의 중심에 서 있는 그루셴카는 삼소노프 노인의 정부이자 돈놀이가 주업인 여자다. 그리고 드미트리를 쫓아내기 위해 표도르가 손잡은 사업파트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 드미트리는 그만 첫 눈에 그녀에게 매혹 당한다. 그리고 그루셴카와의 새 삶을 위해 어머니가 남긴 자신 몫의 유산을 받아내려고 필사적이다. 그렇다고 그루셴카가 드미트리에게 사랑의 확신을 준 것은 아니다. 

표도르는 평생을 돈과 여자만 밝힌 늙은이다. 이런 표도르가 처음부터 그루셴카에게 빠졌던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 아들 드미트리가 그루셴카에게 매달릴수록 절대 그녀를 아들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그의 욕망이 커져갔다. 그 또한 지금 그루셴카를 얻기 위해 필사적이다. 자기에게 오기만 하면 3,000루블이라는 거금을 주겠다며 그루셴카에게 약을 치고 있다.

그루셴카에게 빠져 있는 드미트리에게는 뜻밖에도 약혼녀가 있다. 인물 좋고, 집안 좋고, 대학교육까지 받고, 거기에 많은 유산까지 물려받은 약혼녀 카체리나. 무엇하나 빠지지 않은 카체리나가 방탕아 드미트리의 약혼녀인 것도 의문이지만 이들의 약혼이 카체리나의 요구에 의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더 의아해한다. 완벽한 카체리나가 이런 허랑방탕한 인간한테 전적으로 마음을 주고, 더욱이 지금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 드미트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싸움에 한 남자가 전격 합류한다. 드미트리의 배다른 동생인 이반, 그는 대학생일 때 ‘목격자’라는 필명으로 이미 사회의 문제점을 쟁점화 시킨 냉철한 지식인이자 철저한 합리주의자이며 무신론자이다. 이반은 인간의 이성만이 사회를 진보시킨다는 확신에 찬 인물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그가 활기차고 저돌적인 카체리나를 보고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다. 

사랑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사랑은 전혀 예상치 않은 순간 이렇게 몰아친다. 흡사 인간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사건이란 것을 만들기 위해 안달 난 악마의 못된 장난마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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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의 진실, 경멸
  
전 세상을 통틀어 사람에게 자기와 비슷한 자들을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것은 단연코 아무것도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했습니다. 사람에게 인류를 사랑하도록 하는 자연의 법칙 같은 것 – 그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지상에 사랑이 존재하고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자연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이 자신의 불멸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거죠. (1권. p144)

인간이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반은 이것을 ‘발작적인 기만’이라고 말한다. 이반의 논리대로라면 인간에겐 타인을 사랑하는 본능이란 것이 애초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이기적인 인간은 오로지 자신을 위할 뿐이다. 존재의 흩어짐을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은 스스로에게 영원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불멸의 필수조건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이라는 이타행위를 상상해낸다. 타자에 대한 사랑, 이것은 인간의 상상물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이 개별적인 사람 즉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인간은 몽상 속에서는 인류애를 열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 행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도 곧잘 한다. 하지만 인간은 “고작 이틀도 누구와 한 방에서 지낼 수가 없”으며 “꼬박 이십사 시간 동안이면 심지어 가장 훌륭한 사람도 증오하게 될 수 있다.” “누구는 너무 오랫동안 식사를 하니까, 다른 누구는 콧물감기에 걸려 끊임없이 코를 푸니까” 이것이 적대감과 증오의 이유이다. 인간은 이렇게 누군가 “자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곧 그들의 적이 된”(1권, p120)다. 아주 구차하고 사소한 이유로 말이다. 

그렇다면 앞서 우리가 확인한 카라마조프가에 불어 닥친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 드미트리와 카체리나의 사랑. 이제 이 사랑의 껍질을 벗겨보자. 카체리나는 어떤 이유에서건 4,500루블에 몸을 팔러 왔던 자신을 드미트리가 경멸한다고 마음속 깊이 확신한다. 그녀의 자존심은 상처 입었다. 고통 받은 자존심은 보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드미트리를 그럴싸하게 숭고한 사람으로 포장했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숭고한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녀는 먼저 약혼을 요구한다. 이것만이 상처 입은 그녀의 자존심을 다독일 수 있었다. 드미트리는 어떤가.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돈이 필요한 카체리나의 약점을 백분 이용해 탐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을 카체리나가 당연히 경멸한다고 확신한다. 

결국 이 둘의 사랑은 자신이 받았다고 여기는 ‘경멸’에 대한 복수였을 뿐이다. 이들은 사랑의 이름아래 경멸, 분노, 질투, 증오, 치욕 등의 감정을 교묘히 숨긴 채 타자를 파괴하거나 상대에게 군림하기 위해 자신마저 기만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 둘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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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이걸 싸움이라 하기도 뭣한 것이, 낡은 군복을 입은 중년의 퇴역군인이 젊은 장교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때문이다. 주먹질을 끝낸 젊은 장교는 퇴역군인의 수염을 움켜쥐고 술집 밖으로 개처럼 질질 끌고 나온다. 그런데 가혹하게도 그의 어린 아들이 이 장면을 보게 된다. 어린 아들은 젊은 장교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제발 아버지를 놓아달라고 울며 애원한다. 
  
일방적으로 구타당한 남자는 퇴역한 2등 대위 니콜라이다. 이 퇴역군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다. 그에게는 치매에 걸린 아내, 소아마비에 걸린 둘째 딸, 폐병을 앓고 있는 어린 외아들이 있다. 현재 큰 딸이 대학에 복학하기 위해 애써 모은 학비마저 생활비로 다 써버린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니콜라이는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표도르의 정보원이 되어 드미트리의 뒤를 캐고 다녔다. 그러다 드미트리에게 걸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먹질을 당하고 어린 아들에게 수치스런 모습까지 보이게 된 것이다. 

이 가족의 궁핍과 드미트리의 드잡이를 알게 된 카체리나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카체리나는 알료샤편에 200루블의 큰돈을 보낸다. 지속적인 도움을 약속하면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큰돈을 받게 된 퇴역군인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는 돈을 받자마자 알료샤를 보며 미친 듯이 기뻐한다. 그는 외친다. “이 돈이면 아픈 아내와 딸과 아들을 치료해 줄 수 있고, 큰 딸의 등록금도 낼 수 있고, 아들의 희망처럼 치욕 당한 이 도시를 떠나서 새 삶을 살 수도 있다”고. 환호하며 진심으로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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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는 이 기쁨에 찬 환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알료샤를 지그시 응시한다. 그리고 보란 듯이 200루블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린다. 극심한 분노감에 사로잡힌 그는 미친놈처럼 돈을 짓밟아버린다. 이때 알료샤가 본 것은 그의 붉게 충혈 된 광기 어린 눈빛이었다.

그는 왜 분노한 것일까? 이유는 ‘진심으로 너무 기뻐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보여줬다는 것! 그 때문에 부끄러워졌고 분노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때 알료샤는 그를 향해 어떠한 경멸도, 우월감도 갖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누군가의 호의에 너무나 환호하고 있는 자신을 알료샤가 경멸한다고 확신한다. 이 때문에 순간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있지도 않은 경멸에 분노하는 존재, 이것이 인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경멸만은 참아낼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3. 자기경멸, 자신을 파괴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난무한다. 물론 사랑의 가면을 쓴 기만적 상태로 말이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사랑만이 지옥 같은 인간의 현실을 구제한다고 말한다. 단, 이 사랑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신비, 기적, 권위에 기대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사랑”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 가당키나 할까. 둘째 아들 이반의 말처럼 이기적인 인간에게 이런 사랑은 절대 불가능하다. 신이라면 모를까. 

도대체 어떻게 이 거짓투성이인 우리의 사랑이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일까? 기껏 우리가 하는 사랑의 진실은 경멸, 분노, 질투, 증오, 치욕, 오만, 군림, 파괴, 그리고 헛된 이상일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진실이 드러날수록 우리는 참담한 지경에 빠질 뿐이고, 이렇게 사랑을 파고 들면 들수록 우리의 가장 비열한 지점만 명확해질 뿐인데. 

그렇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테마는 결국 우리가 교묘히 숨기고 있는 우리의 비열하고 오만에 찬 진실과 대면시키기 위한 장치였던 것은 아닐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인간에게 이 진실과의 대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앞서 보았듯이 인간은 누군가가 ‘자신을 경멸하는 것’을 결코 참아낼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경멸’당한 인간은 당연히 어떻게든 ‘복수’를 하려 든다. 자기 존재를 위태롭게 그냥 두는 인간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제 드미트리와 이반의 ‘경멸’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드미트리에게 삶이란 진창에 빠져 벌건 대낮에 등불을 켜고 고귀함을 찾는 것과 같았고, 인간이란 “혼돈과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곧바로 길을 잃고 헤매는 존재이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던 드미트리. 드미트리는 그루셴카를 찾으러 몰래 집에 숨어들었을 때 그루셴카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본다. 지금껏 그렇게 혐오했던 아버지를. 

아버지의 목살, 아버지의 코, 아버지의 눈, 아버지의 파렴치한 냉소가 미워 죽겠어. 인간적으로 딱 혐오스러워. 바로 이게 무서운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지 못하고…….” (2권, p257) 


이 혐오스러움 때문에 죽일지도 모르겠다던 아버지. 그러나 드미트리는 마지막 순간 자신이 아버지보다 결코 나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저지르지 않은 친부살인죄를 받아들인다. 도대체 드미트리는 왜 짓지도 않은 죄를 받아들인 것일까?

드미트리는 지금까지의 방탕함을 깨끗이 청산하고, 사랑하는 그루셴카와 새로운 곳에 가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고결하게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이때 모든 상황 파악을 끝낸 약혼녀 카체리나가 3,000루블이라는 거금을 드미트리 앞에 내놓는다. ‘네가 이 돈을 가지고 그 여자와 떠난다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저의를 깔고. 드미트리는 약혼녀의 이런 의도를 알면서도 돈을 죄 써버린다

드미트리는 3,000루블을 반으로 나눈다. 1,500루블을 그루셴카와의 3일간의 향락에 쏟아 붓는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향락의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3,000루블 정도 탕진한 것으로 여기게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남은 돈 1,500루블을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옷깃 속에 숨긴다. 아버지한테 돈을 받지 못할 때를 대비한 차선책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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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드미트리는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아버지가 살해되기까지 약 한 달 간, 매일 매 순간 셀 수 없이 갈등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아무도 모르게 돈을 숨긴 자신의 행동을 두고 ‘자기 생애에 가장 비열한 이해타산’을 했다면서 말이다. 앞서 퇴역군인을 때리고 수치감을 안긴 것도 자기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린 것도 이런 자신 때문이었다고 울부짖는다. 

돈의 출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약혼녀의 돈을 훔쳐서 다 쓴 것처럼 한 뒤 음밀하게 숨긴 자신의 행위를 잊지 못한다. 고결한 삶을 계획하며 아버지를 죽이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자신, 도둑질한 약혼녀의 돈으로 새 삶을 살겠다는 자신. 이처럼 드미트리의 고결함은 비열함과 방탕함에 기초되었다. 따라서 이 고결함은 결코 고결할 수 없었다. 그에게 고결함이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이제 후안무치한 자신을 드미트리는 경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드미트리는 경멸당했다. 당연히 복수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할까. 자신을 경멸한 것은 자신인데. 결국 그는 스스로에게 복수해야만 한다. 인식이 여기에 이르자 드미트리는 공포감에 휩싸인다. 이 공포로 인해 미친놈처럼 주먹질을 하고 다닌다. 

경멸이 자신을 향하자 드미트리는 돈과 여자만 밝힌 혐오스런 아버지와 자신이 똑 닮았다는 것, 즉 자신이 아버지보다 결코 나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반은 어떤가. 이반은 아버지가 살해되기 전날 집을 떠난다. 그의 떠남에는 카체리나에게 거절당한 사랑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이반은 이보다 앞서 동생 알료샤에게 약속했었다. 막무가내로 날뛰는 형 드미트리가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무슨 일을 저지르려 한다면 자신이 막겠다고. 그런데 떠나버린 것이다. 물론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이반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죽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반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극심한 고통 속에서 급기야 정신분열 상태에 이른다. 이반의 정신을 뒤흔든 것은 무엇일까? 아무도 모르는 이반의 문제.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을 기대했고, 아버지가 죽을 걸 알면서도 떠났다는 사실. 여기서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음을 방조했다는 인식은 이반을 끝 간 데 없이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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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은 아버지가 살해되기 전날 늦은 밤, 2층 자기 방에서 소리 없이 나온다. 그리고 계단 위에서 숨죽인 채 아래층에 귀를 기울인다. 이반이 온 몸의 신경을 세워 포착하려고 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그날 밤, 그 순간,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이반은 잘 알고 있다. 드미트리처럼 드러내놓고 아버지를 경멸하지는 않았지만 이반은 아버지란 존재 자체를 혐오했다.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다. 이런 자신을 떨쳐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스메르쟈코프가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떠났다. 그래서 살인범 스메르쟈코프가 이반이 왜 살인의 주범이고 자신은 공범에 불과한지 조목조목 알려주는 말에 결코 반대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정신은 분열 상태에 이르고 만다. 


4. 자기 도덕의 생성, 변이  
  
이반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은 말한다. 양심의 자유란 인간에게 가장 매혹적이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인간은 고대의 율법 대신, 사랑만을 길잡이로 삼은 채 스스로 선악을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이 본성만으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없다. 즉, 본성 자체가 존재를 변화시키는 절대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본성과 맞물려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의 방향타이다. 그리고 이 삶의 방향타는 “거대한 운명으로부터 한 방 크게 맞아야”만 작동 가능해진다.

살인범으로 체포 된 드미트리는 재판과정에서 1,500루블이 수중에 있었고 그래서 3,000루블 때문에 아버지를 죽일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검사는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 1,500루블이라는 거금이 있는데 어떻게 한 달 간이나 그렇게 궁핍한 생활을 하고, 단돈 10루블을 빌리러 다닐 수 있냐고.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1,500루블 중에서 100루블씩 꺼내 쓴다 한들 누가 알겠느냐고. 검사의 말처럼 그게 무슨 큰 문제겠는가. 남겨진 돈이 1,500루블이든 다 쓰고 100루블이 남았든 무슨 차이가 있느냔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드미트리에게는 다르게 작용하고 있었다. 법리적 판단이 아닌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이 행동의 판단 근거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이반의 경우는 어떤가? 이반은 무신론자이다. 이반은 신도 불멸도 믿지 않는다. 그는 “이 세계는 무엇이든 허용된다.”라는 신념을 굳게 갖춘 인물이다. 그의 신념에 따른다면 이반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 “식인도 허용된다는 판에 죽음을 기대한 것”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더욱이 죽음을 기대한 것은 행위가 아니다. 일상의 법리적 기준에 따른다 해도 생각이 죄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반에게 찾아 온 강력한 죄의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선악의 판단’ 그것도 ‘인간 스스로에 의한 판단’이라는 측면이 수면위로 떠오른다. 즉 무엇을 선으로 보는가에 따라 악이 결정되고, 악을 저지르는 것은 곧 죄가 됨이 분명해지니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선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노동하는 것과 같고, 학문하는 것과 같고, 인내하는 것과 같은 사랑”(1권, p123)을 의미한다. 이 사랑의 실천성 안에는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인 내면의 인식까지도 포함된다. 따라서 악이란 내면에서부터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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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앞서 사랑으로 까발려진 인간의 비루함을 보았다. 비루함뿐인 사랑!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이 지점, 이렇게 사랑으로 인해 비루함을 인식하는 순간에 주목한다. 자신의 비열함을 인식하는 순간 스스로를 경멸할 수 있을 때!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 처벌할 수 있을 때! 이때야말로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변이되며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이라고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기경멸은 자기합리화나 허무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합리화와 허무주의는 존재 변이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다. 

“솔의 그림자로 마차의 그림자를 닦고 있는 마부의 그림자”(1권, p54)

55세의 표도르. 앞으로 20년을 지금처럼 돈과 여자를 쫓으며 살겠다던 그는 자신의 사생아인 스메르쟈코프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돈이 문제였다. 그루센카를 유혹하기 위해 표도르가 준비한 3,000루블, 이 돈은 표도르에게도 스메르쟈코프에게도 장밋빛 환상일 뿐이었다. 살해와 자살로 삶을 끝낸 이 둘에게는 타인을 향한 경멸어린 시선만이 존재했다. 이 둘은 어떤 상황에서도 경멸의 칼날을 자신에게 겨누지 않는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경멸한다. 이런 삶은 본질이 아니다. 그저 자기합리화에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끝난 실체 없는 삶일 뿐이다.

알료샤의 스승인 조시마장로는 죽음 직전 사람들에게 당부한다. 타인에게 “오만하지 말 것”을. 오만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의미한다. 경멸은 자신을 향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회의를 할 수 없다는 것이고, 회의가 없다면 극복 또한 있을 수 없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자신만의 도덕이 생성될 수 있고, 이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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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와 이반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자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자기경멸은 치열한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자기파괴, 그것이 바로 이들이 스스로에게 내린 처벌이다. 이 처벌은 이들의 일상과 존재의 존립 여부마저 위협한다. 그래서 자기 도덕의 생성 과정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용기가 필요하다. 자기파괴에 이를 용기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삶을 사랑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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