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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미혹의인생, 그 출구로써의 『에티카』-스피노자『에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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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짱숙 작성일17-12-29 22:26 조회2,7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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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迷惑)의 인생. 그 출구로써의 『에티카』





장현숙(금성 감이당 대중지성)


인간은 결정된 존재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존재인가? 『에티카』를 읽는 내내, 나는 이 질문에 매달려야했다. 스피노자는 이 질문에 대해 간단하게 대답한다. “우주에서, 인간을 위한 자유는 환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다르지 않으며, 마치 공중에 내던져진 돌멩이와 같다.”(『스피노자』 스티븐 내들러 지음, 텍스트출판사, p606) 인간은 자신의 충동을 의식할 뿐, 그 충동이 결정되는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젖먹이는 자유로이 젖을 원한다고 믿고, 성난 아이는 자유로이 복수를 바란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로이 도망친다고”(『에티카』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p165) 믿을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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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에 의하면 젖먹이, 성난 아이, 겁쟁이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그 누구든 자신의 행동의 결정권은 애초에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아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란 질문조차 무의미해지지 않는가.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데 어떻게 살다니. 내가 ‘어떻게’ 살기로 한다고 해서 ‘어떻게’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결론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1. 인간=자연

『에티카』는 신을 증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스피노자는 신을 “절대적이고 무한한 존재, 즉 제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는 실체”(1부 정의6)라고 한다. 신은 무한하기 때문에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외부의 것은 어떠한 것도 있을 수 없다. 외부의 원인으로 존재가 결정되지 않고 자기가 자신의 원인이 되어 순간순간 변용하며 존재하는 것이 신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을 통해서 파악되는”(1부 정리5) 유한한 양태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외부에 있다는 의미다.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외부 환경에 그 존재 조건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 단지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의식하면서도 자신들을 결정한 원인들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의 표시이다.(『에티카』2부 정리35 주석)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는 신의 연장의 속성이고, 인간의 정신은 신의 사유의 속성이라고 한다. 자연은 무한한 속성을 가진 신이 그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자신을 변용하여 드러낸 것 즉 신의 자기표현이기 때문에, 자연속의 모든 것은 신의 필연성(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될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한 양태, 즉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 법칙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관념들의 질서 및 연결은 사물들의 질서 및 연결과 동일”(2부 정리7)하므로, 우리의 신체뿐만 아니라 사유도 자연 법칙의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지대로 신체를 움직이기도 하고 사유를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렇게 행동하고 사유하게 된 무한한 원인들의 계열을 모르는 우리의 착각이라는 것이다. 공중에 내던져진 돌멩이는 돌멩이와 지구 사이의 인력과 그 돌멩이의 본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도 그런 존재라는 것. 


돌멩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하루에 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일 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인생에도 그런 흐름이 있다는 것은 알고는 있지만, 떨어지는 돌멩이는 좀 그렇지 않은가. 스피노자에 의하면 내가 오늘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에세이를 쓰는 것도, 그리고 에세이 내용조차도 내 자유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원인들이 중중무진으로 중첩되어 결정되어진 대로 행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2. 미혹(迷惑)의 인생

그런데 아이러니 하다. 『에티카』는 윤리학이라는 뜻이다. 윤리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 질문의 끝에는 ‘자유’와 ‘행복’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살 것인가 라니. 스스로 원인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결정된’ 인간에게 너무한 질문이지 않은가. 인간을 ‘떨어지는 돌멩이’로 만들어놓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것은 도대체 어떤 짓궂음인가. 사실 ‘떨어지는 돌멩이’는 외부 환경을 무시하고 살 수 없는, 아니 외부 환경에 구속되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 상태를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하필 ‘떨어지는 돌멩이’인가. 그러니 이즈음에서 스피노자가 인간을 떨어지는 돌멩이로 표현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는 왜 인간을 이런 존재로 표현했나? 그 이유를 『지성교정론』에서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이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다음의 세 가지로 환원될 수 있다: 부, 명예 그리고 감각적 쾌락. 정신은 이 세 가지에 단단히 사로잡혀 다른 어떤 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할 수가 없다. (...) 그러나 향락이 끝난 다음에는 극심한 슬픔이 뒤따른다.”(『지성교정론』 p11)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늘 외부의 어떤 대상과 만날 수밖에 없다. 보이든 보이지 않던 우리 신체는 늘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우리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며,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3부 정의3)을 일으키는데, 우리는 이를 감정으로 인식한다. 외부의 대상을 원인으로 한 우리의 감정을 스피노자는 ‘수동적 감정’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양태이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변화만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4부 정리4)하므로 인간은 언제나 외부의 대상을 원인으로 한 수동적 감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부와 명예, 감각적 쾌락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들이다. ‘부’ 자체는 없다. 우리가 ‘부’라고 할 때는 항상 비교대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명예도 마찬가지이다. 쾌락은 “한 인간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많이 자극받아 변화되는”(3부 정리11 주석) 신체 변용의 표현이다. 그러니 쾌락도 반드시 비교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자연에는 보다 더 강하고 더욱 힘센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어떠한 개물도 없다. 어떤 것이 주어져 있더라도, 주어진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보다 더 강력한 다른 것이 존재”(4부 공리)가 있기 때문에, 부는 더 큰 부에 의해 부가 아닐 수 있게 되고, 명예는 더 큰 명예에 의해 명예가 아닐 수 있게 되며, 쾌락은 더 큰 쾌락에 의해 쾌락이 아닐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부와 명예, 그리고 감각적 쾌락에 매달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념은 더 강력한 관념에 의해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다. ‘부유함’이라는 관념은 ‘더 큰 부유함’이라는 관념에 의해 언제든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부유함’이 주는 기쁨이 ‘더 큰 부유함’에 의해 사라지는 공포에 사로잡히면서도 끊임없이 이 변덕스러운 기쁨을 쫓는다. 

이 대목에서 스피노자가 왜 인간을 떨어지는 돌멩이로 표현했는지 알 수 있다. 공중에 내던져진 돌멩이는 지구인력의 영향으로 떨어지는 것 말고 달리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도 수많은 외부대상에 미혹되어 예속되는 것 말고 달리 ‘자신’이라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에, 명예에 그리고 감각적 쾌락에 미혹되어 예속된 인간. 그럴 때 인간은 떨어지는 돌멩이와 다르지 않다. 미혹된 인간, 미혹의 인생. 
 
3. 출구를 찾아서

그런데 스피노자에 의하면, ‘부유함’에 미혹되는 것은, 외부 환경에 의해 존재 조건이 결정되는 나약한 인간이, 자신은 알 수 없는 무수한 원인들의 계열에 의해 발생하는 충동의 결과일 뿐, 그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극단적인 예로, 누군가를 찔러 죽인 사람의 경우도, ‘그’가 찔러 죽인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무수한 원인들의 계열에 의해 ‘형성된 조건’이 찔러 죽인 것이고, 죽임을 당한 이 조차 ‘형성된 조건’에 의해 죽은 것이지 않은가. 성난 아이는 자유로이 복수를 바란다고 생각하지만, 그 바람은 그 아이의 바람이 아니라 그도 모르는 수많은 원인들에 의해 생긴 충동일 뿐이라 했듯이... 그렇다면 죄는 어찌되는가? 벌은?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죄도 벌도, 용서도 가책도 없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마침내 그의 충동을 조절할 수 없고 법에 대한 공포로 그것을 억제하는 사람은, 그가 그의 연약함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평안함과 신에 대한 인식과 사랑을 즐길 수 없습니다.(『스피노자』 p615)

스피노자는 그들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죄를 짓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 물론 이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그 용서가 아니다. ‘그러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인식. 즉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는 차원에서의 용서이다. 그러나 사람을 찔러 죽인 마당에 정신의 평안함이라니. 행위는 어쩔 수 없지만 정신의 평안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 ‘행복’일까. 그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해답일까. 그 해답에 동의되느냐를 떠나서 도대체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런데 정신의 평안함은 고사하고 스피노자가 말하는 ‘결정된’ 인간은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결정론이 맞는지 자유론이 맞는지는 사실 알 수 없다. 기하학적 증명방식으로 인간의 행위 및 사유는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지만, 사실 그 과정은 세상을 해석하는 스피노자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니 스피노자의 증명이 다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은 결정되어 있을 수도 있고, 자유로울 수도, 아니면 반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왜 결정론에 불편해하는가이다. 사람을 찌르고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황당한 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상하다. 매일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수많은 사건, 사고에 너무나 잘 무덤덤하면서 왜 이제 서야 피해자에게 과도하게 감정이입까지 하면서 반발하는가.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과는 다를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빛에 반응하는 아메바와 다르지 않음을 알아서? 그러니 그 다르지 않음이 왜 불편하냐는 말이다. 

“희망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변덕스러운 기쁨이다.” (『에티카』3부, 감정의 정의) 
 
『에티카』는 기하학적 증명방식으로 신, 자연, 인간정신을 증명한다. 그 증명의 치밀함을 따라 가노라면 우리는 우리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결정된 방식으로 행동하고 사유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결정된’ 인간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태양은 태양의 방식으로 살고 있고, 들꽃은 들꽃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지 않은가. 그처럼 우리도 “신의 본질을 일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2부 정의1)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태양이나 들꽃과 다르다. 태양은 들꽃을 욕망하지 않고, 들꽃은 태양을 욕망하지 않지만(정말일까?), 우리는 늘 다른 무엇이 되기를 욕망한다. 지금 내가 아닌 다른 무엇! 더 큰 부를 가진 나, 더 큰 명예를 가진 나, 더 많은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나. 

인간이 자유롭다는 환상은 대개 이 욕망을 더 부추긴다. 자유롭다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런데 결정론은 이 모든 가능성을 부정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미래의 희망이란 희망은 모조리 부정해버린다. 지금 아닌 어느 시간, 여기 아닌 어딘가, 나 아닌 누군가로 향한 시선을 모조리 거두고, 지금, 여기 그리고 이 모습의 나 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결정론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결정론 자체의 맞고 틀림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순간, 지금 이 모습의 나 밖에 없음, 다른 나 없음을 받아들여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니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나? 아니다. 그러니 ‘형성된 조건에 의한 충동’이라는 우리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보편적 이유 아닌 다른 이유를 찾고 싶은 것이다. 칼로 찌른 것은 그 개인의 문제일 뿐. 즉 그 개인의 자유의지로 돌리고 싶은 것이다. 내가 결정론을 불편해하는 이유, 그것은 여기 이 모습의 나, 이것밖에 없음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우리가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결정된’ 인간에서 본 것이 아닐까. 결정된 인간은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다. 아니 희망하지 않는다. 희망은 가능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인데, 결정론은 희망 자체를 부정한다. 희망은 지금, 여기 아닌 것에 대한 갈망인데, 결정론은 지금, 여기밖에 없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희망 못함. 희망할 필요 없음. 희망하지 않음. 이것이 미혹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니. 어떻게?




4. 이성, 필연을 인식하는 것 

우리가 자유로운 것으로 표상하는 사물에 대한 사랑 및 증오는, 다른 사정이 똑같다면, 필연적인 사물에 대한 사랑 및 증오보다 더 크지 않으면 안 된다.(『에티카』 3부 정리49)
   
우리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 잘 안될 때 더 분노할까? 아니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이 잘 안 될 때 더 분노할까? 사람들에게 자신이 마음에 드는 미술품을 직접 고르도록 했을 때와 임의로 미술품을 정해줬을 때, 어느 때 만족도가 더 클까? 후자의 만족도가 더 컸다는 실험이 있다. 자신이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는 미련이 선택의 만족도를 떨어뜨린 것이다. 선택하지 않은 다른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느라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의 사랑과 증오의 감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정이 똑같다면, 필연적이라고 생각할 때의 감정 보다 더 크다.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는 미련이 감정을 더 증폭시키는 것이다. “감정을 제어하고 억제함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4부 서론)이 예속이다. 왜 무능력해지는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음’을 희망하고,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음’에 좌절한다.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희망은 더 희망적이고, 절망은 더 절망적이다. 그러니 자유는 예속이고, 필연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이다. 

사물을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고찰하는 것이 이성의 본성에 속한다. 사물을 정확히 지각하는 것, 즉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것이 이성의 본성에 속한다. (...) 우리가 사물을, 과거 및 미래에 관해서, 우연으로 고찰하는 것은 오로지 표상력에만 의존한다.(『에티카』 2부 정리44) 

 ‘필연’이 무엇일까? 우리는 ‘필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운명’이라는 말과 함께 소설과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두 주인공의 파격적인 행동에 ‘뭐 저래’라고 욕하다가도 ‘필연적’이라는 말에 그냥 모두 이해해버린다. ‘아, 어찌할 수 없구나.’ 이럴 때 필연은 비이성적으로 들린다. 논리적으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을 단박에 설명해주는 마법의 단어. 그런데 스피노자는 사물을 필연으로 고찰하는 것이 이성의 본성이라고 한다. 필연과 이성이라니. 마치 미신과 과학처럼 기이한 조합이다.

필연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연부터 이해해야한다. 우리는 ‘우연히’라는 말로 우연을 만난다. 예상치 못함의 표현. 그래서 우연에는 뜬금없음의 의미가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맥락 없이 툭 끼어듬. 우연은 주로 표상에서 생긴다. 표상은 내 신체의 상태와 내 기억의 회로, 내가 사회적, 환경적으로 영향 받은 것에 따라 어떤 것을 인식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러니 표상은, 굳이 표현하자면, 과거나 미래의 인식이다. 내 기억, 내가 받은 교육, 환경적 영향은 모두 과거에 형성되어 미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나 미래는 현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표상은 태생적으로 현재의 시, 공간과는 분리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리는 표상을 언제나 인과적인 면에서 우연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렇다면 필연은 어떤가. 필연은 사물을 자연에 내재한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다. 법칙은 모든 것에 공통으로 작용한다. 누구에게나, 무엇에나 인(因)이 있으면 과(果)가 생기듯이, 인연(因緣)으로 모든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공중에 내던져진 돌멩이는 땅에 떨어진다. 이는 돌멩이의 자유, 불가해한 우연 때문이 아니다. 인력이라는 자연법칙과 돌멩이의 본성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우리는 전지(全知)한 신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물(또는 관념)이 존재하게 된 수많은 원인들, 수많은 법칙들을 일일이 다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필연을 알 수 없는 것일까? 

사물을 필연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관계된 중중무진한 원인들을 일일이 다 알아낸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필연을 고찰한다는 의미라면 우리는 죽을 때 까지 필연을 모를 수밖에 없다. 필연은 연결의 인식이다. 나무는 햇빛과 바람과 땅과 물과 연결되어 있듯이, 나란 인간도 다른 수많은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모든 사물이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결과가 되어 있다는 인식. 보이든 또는 보이지 않던 우리는 다른 수많은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인식 말이다. 그러한 인식은 여기 아닌 다른 곳, 지금 아닌 다른 시간, 이 모습의 나 아닌 다른 나를 생각하지 않게 한다. 다른 곳, 다른 시간, 다른 나는 표상으로, 우연으로, 자유롭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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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기 원인’으로 내재하는 신=인간

자기원인, 그 기쁨      
인간은 결정된 존재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존재인가? 나는 아직도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 행위에 대한 결정권이 오로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이든 원하면 가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고, 무엇이든 꿈꾸면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인간은 필연의 존재이다. 내가 어찌 생각하고 싶든, 인간은 다른 많은 사물과 연결되어 있고, 공통의 자연 법칙을 따르는 필연의 존재이다. 그 필연에 의해 지금이 ‘결정된’ 존재이다.
 
이성에서 생긴 감정은 필연적으로 사물들의 공통된 특성들에 관계되며, 이 공통된 특성들을 우리는 항상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 이성에서 생기는 감정이 보다 강력하다.(『에티카』 5부 정리7)

모든 인식에는 감정이 함께한다.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2부 정의13)이고, 우리는 신체의 변용을 감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감정을 가진다는 말과 같다. “정신은 자기 자신 및 자신의 활동능력을 고찰할 때 기쁨”(3부 정리53)을 느끼는데, 스피노자는 이 기쁨을 능동의 기쁨이라고 했다. 능동은 우리 자신이 어떠한 변용의 타당한 원인이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3부 정의3)이다. 그러니 능동의 기쁨은 자기 자신이 타당한 원인이 되었을 때 자신이 느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기가 자기 기쁨의 원인이 되는 기쁨이다. 우리는 우연에 의해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우연은 외부에서 주어진 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외부를 원인으로 하는 기쁨이다. 그러니 이 기쁨은 외부 상황이 바뀜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필연의 인식은 외부대상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사물을 분석하고 그 공통된 특성을 추론할 때 생기는 인식이므로 자기가 자신의 타당한 원인이 되는 인식이다. 그러니 이 인식에는 능동의 기쁨이 따른다. 자기를 원인으로 하는 기쁨. 

스피노자는 이러한 기쁨을 정신의 평안함이라 한 것이 아닐까. 자기가 자신의 타당한 원인이 될 때 느끼는 기쁨의 상태. 이는 외부상황이 바뀐다고 따라서 바뀌는 감정이 아니다. 평온한 상황에서는 기쁨을 느끼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선 못 느끼는 그런 우연적 기쁨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부상황이 어떠하든 자기가 자신의 타당한 원인으로 있느냐, 즉 어떤 상황에서든 필연을 인식할 수 있느냐에 따라 생기는 기쁨인 것이다.     

자기원인으로 내재하는 신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감정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기쁨을 느끼며, 이 기쁨은 신의 관념을 수반한다.(『에티카』 5부 정리15 증명)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할 수도 없”(1부 정리15)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인식하든 그것의 원인으로서의 신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을 생각한다는 것만으론 우리가 진짜 신을 인식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모든 인식에는 반드시 신체적 변용의 관념을 동반하기 때문에 신체적 변용이 동반되지 않은 단순한 생각은 인식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관념에도 반드시 기쁨이라는 신체적 변용이 수반된다고 한다. 이 기쁨은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의 신을 인식하는데서오는 기쁨, 즉 신에 대한 지적 사랑(5부 정리32 참조)에서 생기는 기쁨이다. 이런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이성, 즉 필연을 인식하는 것이 깊어짐에 따라 직관적으로 생긴다. 이성으로 지성이 발달하고, 지성이 깊어져서 영성이 되는 지점.


영성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필연의 인식에 신의 관념이 수반하게 되는 것은 ‘자기원인’ 때문이다. ‘자기원인’은 그 자체가 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외부의 원인이 아닌 자기원인, 즉 그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변용을 거듭하는 존재이다. “자기원인이란, 그것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1부 정의1)이고, 스피노자는 신만이 ‘존재(실존)’를 가진다고 한다. 자기가 자신의 원인이 되어 어떤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자기원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실존을 느낄 수 있다. 현존함을 느낀다. 이 실존감은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이 최대한으로 확장된 상태, 즉 자신의 존재감이 가장 확장된 상태이다. 이는 우리 자신 속에 내재한 신이 ‘자기원인’이란 이름으로 발현된 상태이기도 하다. 

결국, 스피노자는 ‘자기원인’을 인식하게하기 위해 필연을 얘기한 것이 아닐까? 자기 속에 내재한 신, ‘자기원인’이라는 신 말이다. 그 신을 인식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 자유는 상황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필연의 통찰로 내 감정을 예속시키지 않을 수 있는 힘. 이때 인간은 결코 무능력하지 않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따르라고 한다. 어느 때는 부를, 어느 때는 명예를, 어느 때는 감각적 쾌락을. 우리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감정적 예속을 겪는다. 그럴 때 우리는 자유로운가? 스피노자는 필연적으로 결정된 똑같은 상황에서도, 무엇인가에 감정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상태로 존재하느냐, 신의 지적 사랑인 기쁨의 상태로 존재하느냐, 즉 내 존재의 상태를 수동으로 두느냐 자기원인인 능동으로 두느냐는 지금 이 자리에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자신의 존재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를 ‘드물고도 귀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분명 그 길은 있다고 했다. 『에티카』는 기하학적 증명방식으로 느리고도 정교하게 그 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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