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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반시대적 사유와 강한 인간 - 니체 『반시대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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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헌 작성일17-12-30 21:53 조회4,5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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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대적 사유와 강한 인간






안 상 헌(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1. 니체와 ‘반시대적 사유’


『반시대적 고찰』은 니체의 여러 저작들 중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책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책에 주목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니체가 너무 좋아요!’, ‘니체를 읽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내가 니체를 제대로 읽고 있는지, 또 제대로 읽을 수나 있는 것인지, 또 니체를 읽는다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늘 의심스러웠다. 당시 내 눈에는 많은 경우 니체를 공중에 띄워 놓고 공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니체의 무엇을 좋아했는지, 왜 좋아했는지, 좋아 해서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니체를 소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 내게 『반시대적 고찰』은 나의 공부를 오늘 이 시대와 나의 삶으로 당겨와 읽고 사유할 수 있게 해준 책이 되었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을 이렇게 시작한다.


독일의 여론은 전쟁, 특히 승리로 끝난 전쟁의 나쁘고 위험한 결과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의 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승리는 크나큰 위험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패배보다 승리를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니체/이진우 역,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2014:183, 이하 「슈트라우스」)


니체가 살았던 시대는 독일 역사에서 ‘피와 철의 시대’로 명명되는 때이다. 이 시대는 독일 근대를 대표하는 시기이며, 독일의 제왕 비스마르크가 영웅이 된 시대이다. 비스마르크는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피와 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 강자에게 먹히는 것은 약자의 운명이다.”(하겐 슐체/반성완 역, 『새로 쓴 독일역사』, 지와 사랑, 2011:152)라고 웅변하면서 당시 독일 제국 정치와 경제를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당시 독일의 지식인과 대중들은 모두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부추기며 열광하고 있었다. 하지만 니체는 달랐다. 그는 당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와 전쟁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 ‘팽창하는 자본’, ‘근거 없는 문화적 성취감’ 이면에 숨겨진 왜소하고 병든 독일 국민의 모습을 본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위대하게 만들기는 했을 지도 모르지만 니체의 눈에는 위축된 독일인의 모습이 더 중요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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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니체의 ‘반시대적 사유’는 당시 독일 국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 따라서 가장 애써 노력하고 있는 것들의 폐해와 질병을 보면서 시작된다.


이 고찰이 반시대적인 것은, 시대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적 교양을 내가 여기서 시대의 폐해로, 질병과 결함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며, 또 심지어 나는 우리 모두가 소모적인 역사적 열병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적어도 우리가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니체/이진우 역,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2014:288, 이하 「역사」)


그렇다면 오늘 대한민국에서 ‘시대적으로 사유하며 일상을 산다는 것’‘반시대적으로 사유하며 일상을 산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가 시대적으로만 산다면 사유는 필요 없을 지도 모른다. TV, 스마트폰만 보고 있으면 된다. 구글이 주도하는 빅데이터가 나의 마음까지 분석해서 적절한 상품을 늘 제공해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잘 구매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 사유는 오히려 성가신 일이다. 그렇다. 사유란 애초에 반시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중요하다. 니체의 ‘반시대적 사유’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 또 좋은 삶을 위해 애써 노력하는 것(예를 들면 교양, 역사, 교육, 문화)들을 시대의 ‘폐해’로, 또 ‘질병’과 ‘결함’으로 본다. 나아가 니체의 눈에는 당시 독일 국민 모두가 이것 때문에 오히려 ‘고통받고 있음’이 보였다. 시대의 영광이라는 허상에 가려진 왜소하고 병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영광에 취해 어느 누구도 그것이 가진 폐해와 질병을 보지 못했고, 이것이 어떤 고통을 주는 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니체는 우리 모두가 ‘소모적인 역사적 열병’에 고통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활동(당시로서는 전공 분야였던 고전 문헌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를 다시 잡아갔다.


고전 문헌학이 반시대적으로—다시 말해 시대와 대립해서, 그렇게 함으로써 시대에, 바라건대 앞으로 도래할 시대를 위해—영향을 미치는 것 외에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역사」, 289)


니체는 자신의 활동을 우선 시대와 대립시켰다. 다시 말해 반시대적으로 사유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선 자신의 반시대적 사유가 시대에 영향을 미치길 원했고, 가능하다면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반시대적 고찰』 전체는 당시 종교, 국가, 자본의 가치체계에 속박된 독일 사회를 반시대적으로 사유하면서 자기 삶의 길을 찾아간 니체 자신의 분투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니체의 ‘반시대성’을 단지 오늘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니체가 그러했듯이 오늘 우리들의 공부와 삶의 길을 열어갈 방법론으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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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반시대적 사유’라는 니체의 ‘철학적 방법론’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자. 우리는 많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리고 ‘열심히 많이’ 일하고, ‘열심히 많이’ 논다. 우리만큼 열광적으로 공부하고 일하고 노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각자의 공부가 교양이 되지 않고, 각자의 공부와 일과 놀이가 삶이 되지 않는가. 공부가 더해 갈수록, 일이 더해 갈수록, 놀이가 더해 갈수록 각자는 자기 삶에 대한 힘을 키워가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공부가 교양이 되고 삶이 될 수 있을까? 니체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 삶에서 가장 친숙한 것, 삶을 잘 살기 위해 가장 노력을 많이 기울이는 것, 그래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사유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내 삶의 폐해이자 질병이고 결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니체는 이것들은 통째로 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시대적 사유’란 어떤 것을 취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활동이 오늘과 다가올 미래에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 구체적이고 즐겁고 자유로운 싸움


『반시대적 고찰』은 전적으로 호전적이다. 이것들은 내가 몽상가가 아니라는 점, 내가 검을 빼는 일을 즐거워한다는 점을 입증하며 — 아마도 내 손목이 위험하리만큼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점도 역시 입증하고 있다.(니체/백승영 역,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2013:397)


이 말은 『반시대적 고찰』에 대한 니체 자신의 서평을 시작하는 글이다. 니체는 ‘반시대적 사유’라는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무기이자 기술)으로 시대와의 싸움을 시작한다. 이 싸움은 절대 몽상가의 꿈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과의 싸움이다. 또한 이 싸움은 즐거운 싸움이었으며 (위험하긴 하지만)자유롭고 경쾌한 싸움이었다.


1) 속물 교양과의 싸움


니체는 당시 승리에 취한 독일인들의 모습을 ‘속물 교양인’이라 지칭하고 거울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수탉’에 비유한다.


볼품없는 사람이 거울 앞에 서서 수탉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찬탄의 눈길을 주고받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민망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슈트라우스」, 186)


니체는 당시 속물 교양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매우 민망해 했다. 누군가 자기 사유는 되지 않고, 또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기 몸에 붙어있어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온갖 장식을 치렁치렁 매달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상상만 해도 웃기고 민망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모습을 요리조리 거울에 비춰보면서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런데 혹 오늘 우리들이 이런 모습은 아닐까? 자기 사유는 되지 않고, 또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이 외부에서 얻어진 것으로 덧붙이고, 우쭐대고, 비교하고, 평가하는 우리 삶의 군상들이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내가 가진 것만은 우아하고 아름답고 예의바른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허상이다. 수탉도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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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풀어가야 할 당시 대학의 (철)학자들조차 이러한 교양에 자족하면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의 대학, 나아가 우리의 공부도 이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현대인은 결국 엄청난 양의 지식 돌멩이를 몸에 달고 나니는 데, 이 돌멩이는, 동화에서 말하듯이,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몸 안에서 덜커덩거린다.”(「역사」, 318) 참으로 ‘시끄러운 시대’, ‘자기표현’과 ‘남과의 비교’를 강조하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만이 예외일까, 아니면 우리도 일종의 수탉일까. 우리도 수탉과 같은 존재들이라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글을 쓸 때마다 이렇게 혼날 이유가 없다.

니체는 ‘속물 교양’에 젖은 당시 독일 문화와의 싸움을 이렇게 시작했다. 싸움에는 우선 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적과 싸울 나의 무기와 기술을 분명하게 하고 이를 잘 가다듬는 것이다. 니체가 싸운 적은 ‘속물 교양’으로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적할 우리의 무기와 기술은 무엇인가?


교양은 해방이며, 식물의 보드라운 싹을 훼손하려 하는 모든 잡초, 자갈과 해충의 제거이며 빛과 열의 방사이고 사랑스럽게 쏟아지는 밤비다. 교양은, 자연이 어머니처럼 자비로운 마음일 때, 자연의 모방이고 숭배다. 교양이 자연의 잔혹하고 무자비한 공격을 예방하여 선으로 돌린다면, 또 교양이 밖으로 드러나는 자연의 계모 마음과 슬픈 무분별을 베일로 가린다면, 교양은 자연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니체/이진우 역,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2014:396, 이하 「교육자」)


니체는 ‘속물 교양’에 대적할 ‘교양’은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서의 자연’이며, ‘자신을 해방시키는 교육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니체에게 교양이란 계모의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교양이란 ‘해방’이며, ‘어머니 마음’으로 자기 삶을 고귀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니체는 현대적 교육이 아닌 비현대적 교육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간다. 니체는 “비현대적으로 교육받은 수백 명의 사람들, 다시 말해 성숙해지고 영웅적인 것에 익숙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제 이 시대의 시끄러운 사이비 교양은 영원히 잠잠해질 것이다.”(「역사」, 344)라고 말한다. 사이비 교양은 ‘가짜 엄마’가 자식을 키우는 마음이다. 계모의 마음으로 자식에게 주는 먹고, 보고, 듣고, 읽고, 기억하게 하는 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지 못한다. ‘가짜 엄마’의 마음은 나에게 힘찬 흐름을 주지 않는다. 언제나 ‘허상’을 따라가게 해서 우리를 왜소하고 병들게 한다. 이제 우리는 ‘진짜 엄마’의 마음을 찾아야 한다. ‘진짜 엄마’의 마음으로 생명을 키워야 한다. 이것은 곧 니체가 말하는 ‘교육자’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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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명을 낳고 키우는 진짜 엄마의 마음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우리 각자에게 감추어져 있는, 그래서 약간의 수고로 마음만 먹으면 꺼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솔직히 지금 우리의 안목과 경험으로는 아직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너의 진정한 본질은 네 안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너보다 훨씬 높이, 적어도 네가 보통 너의 자아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진정한 교육자와 형성자는 네 본질의 진정한 근본 의미와 근본 소재가 무엇인지, 교육할 수 없고 조형할 수 없는 것, 어쨌든 접근하기도 구속하기도 또 위축시키기도 힘든 것이 무엇인지 네게 말해줄 것이다. 너의 교육자는 너를 해방시키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교육자」, 395)


적어도 니체를 읽고 있다면, 지금 나의 진정한 본질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은 아니라는 정도는 인정한다. 그리고 내가 ‘가짜 엄마’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제 우리가 공부하면서 만나야하는 스승과 친구들은 ‘진짜 엄마’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니체에게는 쇼펜하우어가! 나에게는 니체가! 각자는 이제 지금까지 자신을 억지로 키우고 입히고 먹이고 자라게 한 ‘가짜 엄마’를 버리고 자신의 ‘진짜 엄마’, 즉 ‘자신의 교육자이자 형성자’를 찾고 그와 함께 길을 가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시대 모든 엄마들은 이제 ‘반시대적 인간’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시대적 질병들은 ‘엄마라서!’라는 말을 타고 들어오고 확산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 ‘시대적’이라는 ‘가짜 엄마’를 버리고, ‘반시대적’이라는 ‘진짜 엄마’와 함께 공부하고 살아보자.


2) 과잉된 역사(지식)와의 싸움


니체는 역사의 결핍이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과잉이 우리 삶에 적대적인 것이고 우리 삶을 위험하게 한다고 말한다.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내면과 외면의 대립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인격이 약해진다. 또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시대는 자신이 가장 희귀한 미덕과 정의를 다른 어떤 시대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다.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민족의 본능은 손상되었고, 개인도 전체 못지않게 성숙을 방해받는다. 역사의 과잉은 인류의 연륜에 대한 믿음, 늦둥이이며 아류라는 믿음을 심어준다. 역사의 과잉은 자신에 대한 아이러니라는 위험한 분위기에 빠지고 거기서 더 위험한 견유주의의 분위기에 젖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대는 점점 교활하고 이기적인 실천으로 굳어가고 그로 인해 생명력은 마비된다.”(「역사」, 325) 그래서 니체는 우리에게 묻는다 : 너희에게 활기를 주지 않는 교훈과 그 많은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삶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니체는 우리에게 주문한다 :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들’로부터 도망치지 말라고!


대체로 사람들이 모든 고독과 모든 현실적 여가가 그들에게 끈질기게 강요하는 가장 중요한 물음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하여 그토록 열심히 업무와 학문에 종사한다고 생각한다.(「슈트라우스」, 237)

우리 모두는 ‘바쁜 스케줄’이라는 시대적 질병을 앓고 있다. 우리는 참 바쁘게 살아간다. 바빠야 존재감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 심지어 백수도 바빠서 몸살이 난다는 말까지 있다. 그런데 이들이 정말 바쁘기나 한 것일까. 우리 시대에 바쁘다는 말은 대부분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당장 눈앞에서 해야 할 일, 혹은 삶의 근본적인 질문을 피하기 위한 마음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치고 뭘 하나 제대로 하는 경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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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니체는 특히 그랬다. 그는 맑고 청명하고 따뜻한 공기를 찾아다니면서, 몇 권의 철학책을 읽고 깊은 사유를 하면서 친구들과 보냈다. 그 결과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니체가 되었다. 우리도 니체에게서 이것을 배워보자. 니체는 우리에게 말한다. “왜 이 고향 땅에, 이 생업에 매달리는가, 왜 이웃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가? 몇 백 마일만 가면 구속력을 잃어버리고 마는 견해에 얽매인다는 것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가?(「교육자」, 394) 니체처럼 살아보자. 나를 위해 고향을 떠나보고, 생업에 매달리지 말고 정말 생업에 필요한 경제활동만을 해보자. 이것만으로 이웃이라는 무서운 시선들, 우리를 구속하는 많은 이념적 가치들은 쉽게 지워질 것이다.

대신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과잉된 역사, 과잉이 문제인 지식, 타자의 해석에 힘들어하는 우리가 이에 대적해 싸울 우리의 무기와 기술은 무엇이며, 이것은 어떻게 단련될 수 있는가? 우리는 남들로부터 너무 좋은 해석을 기대하며, 온갖 고생과 치장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니체는 먼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 너희는 과연 무엇을, 혹은 누군가를 해석할 수 있는 존재인가?


현재가 가진 최고의 힘으로부터 너희는 과거를 해석할 수 있다. 너희의 가장 고귀한 특성을 가지고 전력을 다해야만 너희는 지나간 것 속에서 알 만하고 보존할 만하고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것은 같은 것을 통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는 과거를 너희에게 끌어내리는 셈이 된다.(「역사」, 342)

우리는 나에 대한 해석 때문에 걱정을 하거나, 무언가를 해석할 경우에도 언제나 말석의 관점과 시야를 가지고 해석한다. 그러니 해석하기도 전에 걱정이 앞선다. 해석은 많은 힘(혹은 최고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은 해석은 과거와 타인을 나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으로 작동한다. 같은 것은 같은 것을 통해! 내가 가진 현재의 힘만큼 나는 과거와 타인을 해석할 수 있다. 내가 고귀한 특성(천재 혹은 군자)을 가지고 있으면 그 만큼 지나난 것들, 혹은 현재의 많은 일들 속에서 그 만큼의 고귀함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고, 내가 왜소한 사유에 갇혀 있으면 모든 과거와 현재는 부정, 아니면 염세 혹은 질투로 해석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오로지 그들 자신의 청춘만이 할 수 있다. 이 청춘의 사슬을 풀어주어라. 그러면 너희는 청춘과 함께 삶도 해방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감옥 속에 감추어져 있을 뿐, 아직 시들어 죽은 것은 아니다.(「역사」, 383)

자신의 ‘청춘’만이 이러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청춘의 힘’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감옥 속에 감추고 있을 뿐인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스스로 감추고 있는 것을 풀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조차 내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니체가 쇼펜하우어라는 반시대적 철학자를 자신의 교육자로 받아들이고 해석했듯이 우리는 누군가를 자신의 교육자로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과잉된 역사의 끝물 혹은 아류가 아니라, 역사의 장자 혹은 조형력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 니체가 말하는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역사」, 293) 니체는 우리에게 ‘역사의 끝자락에서 나에게 활기를 주지 않고, 나의 활동을 잠재우면서, 가르치려고만 드는 지식’은 싫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이런 지식을 배우려 애쓰지 않겠다고 말한다. ‘절대적 진리’ 같은 것은 없다. 지식과 앎은 우리에게 ‘성장’과 ‘변형력’을 줄 때 의미와 가치가 있다. 지식과 앎은 우리에게 ‘치유력’과 ‘대체력’, 혹은 ‘복제력’을 키우는 힘으로 작용할 때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역사, 지식, 혹은 앎’은 역사의 끝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실험해보려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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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한 사유, 강한 인간의 탄생


인간이 스스로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답답해만 하는 존재가 아닐까? 그러다 죽을 지경이 되면 한번 씩 머리를 쳐드는 정도. 하지만 니체는 이것을 대단한 것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런 일조차 우리 힘만으로는 할 수 없으며,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바로 기쁨의 도약을 위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머리를 조금 쳐들고 얼마나 깊은 강물 속에 빠져 있는지를 아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조차, 한순간 물 위로 떠올라 깨어나는 일조차 우리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누군가 우리를 들어 올려야 한다. 우리를 들어 올리는 자는 누구인가? 그들이 저 진실한 인간들, 더 이상 동물이 아닌 사람들, 철학자들, 예술가들과 성직자들이다. 그들이 나타나면, 또 그들이 나타남으로써, 결코 도약하지 않는 자연이 단 한 번 도약한다. 그것도 기쁨의 도약을.(「교육자」, 441)


나를 포함에 우리 모두는 예전에도 공부를 했었고 지금도 공부란 걸 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의 공부와 최근의 공부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전의 공부가 나에게 답답함을 견디는 대신 약간의 보상을 주었다면, 최근의 공부는 나의 머리를 쳐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이제 공부하는 사람들 속에서 진실한 인간들, 더 이상 동물이 아닌 사람들, 삶과 세상에 대한 철학과 예술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기쁨의 도약인지 아닌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만약 이것이 기쁨의 도약이라면, 분명한 것은 그것이 순전히 나의 노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존재의 도약을 위해서는 규칙적인 자기 활동이 필요한데, 이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니체도 공동체의 중요성을 말한다. “규칙적인 자기 활동을 위해서는 강력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들은 근본 사상을 공유한다. 즉, 우리의 안과 바깥에서 철학자, 예술가와 성자의 탄생을 장려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의 완성을 도모하는 것이다.”(「교육자」,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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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도약을 위해서는 우리 삶을 방해하는 것들과 지치지 않고 싸울 힘이 필요하다. 이를 내 혼자 힘으로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먼저 위대한 스승을 만나야 하고, 이 ‘스승의 공동체’에서 함께 공부하고 살아갈 친구들로 이루어진 강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 공동체와 함께 “개인과 그 비참한 한계, 그의 변화와 불안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좀 더 일반적인 것을 미워하는 법을 함께 배워갈 것이다. 즉, 우리가 지금 사랑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될 저 고양된 상태에서 그렇게 할 것이다.”(「교육자」, 444-445) 공동체는 우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다. 이렇듯 니체와 함께 공부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과는 다른 것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낙관할 수만은 없다. 여전히 세상은 니체를 공부하면서 ‘반시대적 사유’를 말하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그럴수록 우리가 철학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의 진정한 친구들은 이 혼동에 반대 증언을 하고 적어도 철학의 저 거짓 하인과 위엄을 깍는 사람들만이 우스꽝스럽거나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자주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 자신이 행동을 통해 진리에의 사랑은 두려운 것이고 대단한 것임을 증명하면 더 좋을 것이다.(「교육자」, 494) 

이제 우리는 역전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당장 나의 존재를 바꿀 수 있느냐고 또 걱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걱정에 앞서 먼저해야할 것이 분명해 졌다. 다행이 우리는 이제 니체와 함께 한다면 적어도 지금 당장 사유의 역전은 가능하다. 그 결과 우리는 강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강함을 뽐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왜소하고 병든 것인지를 니체처럼 우리도 드러내야 한다. 참고로 니체는 대학 안에서 안주한 칸트를 ‘번데기’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들과 다르게 살아가려는 삶이 얼마나 강하고 건강한 삶인지를 행동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래도 또 누군가는 그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물을 것이다. 또 이렇게 공부할 때는 뭔가 된 것 같은 데 돌아서면 예전으로 돌아가는 데 과연 존재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를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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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리에게 니체는 ‘반시대적’ 이라는 ‘강한 사유’를 주문했다. 니체는 우리에게 ‘강한 사유’는 ‘강한 욕구’를 끌어 올리고, 나아가 ‘강한 행동’으로 이어진다고 가르친다. 반시대적 사유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고, 나아가 우리의 존재를 바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제 그동안 현대인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이제 쳐다보고 싶은 마음조차 잃어버린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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