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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정념의 불꽃,충동에서 죽음으로-레프 톨스토이<안나 카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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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나비 작성일18-01-02 03:23 조회2,4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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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의 불꽃, 충동에서 죽음으로





김희진(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intro_나의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이 책을 한 번 읽고서 나는 어떤 집념에 사로잡힌 듯하다. 기차역 플랫폼에 서있는 안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정신차려, 안나!’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만일 내 손을 뿌리치고 초점 잃은 눈으로 달려오는 기차에 다가간다면 따귀라도 올려붙여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불과 몇 초 후, 선로에 주저앉은 그녀가 문득 후회하여 빠져나오려고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에게 왠 과도한 간섭질? 여주인공의 비극적 결말이야말로 소설의 클라이막스가 아닌가. 

안나는 죽기 전 제정신이 아니었다. 맛이 좀 갔다고나 할까? 착란증상과 폭발적인 감정의 널뛰기로 보아 히스테리성 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녀의 죽음에서 나는 자꾸 현실의 어떤 장면이 상기되었다. 어느 날, 지인의 집에 놀러갔다가 7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탔다. 그 안에는 예쁘고 세련됐지만 얼굴표정이 전혀 없는 어떤 아기엄마가 100마리는 족히 되는 초파리와 함께 타고 있었다. 그 여자가 가지고 탄 쓰레기 봉투가 뒤쪽에 있었는데 어린 여자아기가 우리한테 낯을 가리느라 엄마 뒤의 쓰레기봉투 쪽으로 숨자 또다시 수 십 마리의 초파리가 더 날아올랐다. 나는 그 끔찍한 봉투에서 아기를 떼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미동도 없는 그 엄마의 표정과 초점 없는 눈동자에 놀랐고 또 두려웠다. 곧 내릴테니 참견 않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뉴스에서 이런 저런 자살 사건을 접하면 왠지 모르게 그 젊은 아기엄마의 마비된 듯한 몸이 두렵게 떠올랐다. 친구들이 우울증을 겪거나 감정적 동요를 보인 후 연락이 안될 때도, 나는 엘레베이터에서 만난 흐린 초점의 눈을 떠올리며 불안해했다. 그리고 드디어 불후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또 다시 그 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톨스토이는 생생한 묘사와 통찰력으로 모든 인물의 심리를 꿰뚫는다. 남자건, 여자건, 심지어 개건(!) 톨스토이의 관찰을 통해 텍스트로 드러난 다양한 속마음들은 우리를 감탄하게도, 뜨악하게도, 무릎을 치며 웃게 하기도 한다. 나의 집념은 옷자락을 끌어당기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전환됐다. 그녀의 내면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미리 살펴서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는가를 찾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올 한 해 나는 안나에 대해 공감과 반감을 오가며 그녀와 함께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안나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죽기로 작정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 날 어딘가로 가려고 내내 헤매이다가 느닷없이 죽었다. 그녀의 생각과 의지는 죽음을 계획하지 않았다. 반면에 꿈은 몇 번이나 죽음을 예고했고, 때때로 죽음충동이 말 그대로 충동적으로 덮쳐온다. 그렇다면 그녀의 느낌과 행동이 중요한 것이다. 생각과는 상관없이 터져나오는 말과 그녀의 발 끝이 향하는 곳을 주목해야 한다. 자, 대체 그녀는 어떤 여자였는지, 그녀를 만나보자. 


1.에로스, 정념으로 타오르다

§수상한 생기
기차역 플랫폼, 안나는 마중나온 오빠를 보자 기품 있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가가 ‘단정하고 조촐한 몸짓으로 왼팔을 오라버니의 목에 두르고 재빨리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세차게 입을 맞췄다.’ 경쾌한 등장이다. 그녀는 외도로 사고를 친 오빠를 이혼 위기에서 구하고자 올케를 설득하러 모스크바에 왔다. 수완 좋은 안나는 이 불행한 가정의 해결사요, 구원병이다. 

안나로 말할 것 같으면 ‘페테르부르크 주요 인사의 아내이고 페테르부르크의 귀부인’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18세기 초 표트르대제가 낙후된 러시아를 유럽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새로 건설한, 완전 유럽풍으로 화려했던 당시의 수도다. 부와 명예, 미모를 다 갖고 있는 그녀는 행복한 가정의 대표주자로 당당히 등장한다. 올케 돌리는 자기 집 안에 들어서서 모자를 벗는 안나를 보자 반가움보다 놀라움을 느낀다. “당신은 행복과 건강으로 빛나는군요!” 마치 수돗가에서 세수하고 나서 젖은 머리카락을 촤~악 흔들어 넘겨 올리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안나에 대한 묘사는 그녀의 차림새나 미모보다는 시종일관 발랄함, 생명력, 생기에 집중된다. 기차역에서 스치듯 만난 청년사관 브론스키에게도 안나의 생기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짧은 시선으로 브론스키는 재빨리 그녀의 얼굴 가운데서 노닐기도 하고 반짝이는 두 눈과 살포시 짓는 미소로 실그러진 붉은 입술 사이를 팔딱팔딱 뛰어 돌아다니기도 하는 짓눌린 생기를 알아챘다. 마치 과잉된 뭔가가 그녀의 몸속에 넘쳐흐르다가 그녀의 의지에 반해서 때론 그 눈의 반짝임 속에, 때론 그 미소 가운데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안나 카레니나』1권, 레프 톨스토이, 문학동네, p.127)

안나가 브론스키와 짧은 대화를 나눌 때, ‘밖으로 나오고 싶어 발버둥을 치고 있던 그 생기는 마침내 미소로’ 나타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브론스키를 홀딱 정신 나가게 한 그녀의 치명적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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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또다른 특징은 아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다. 기차에서는 내내 아들 얘기만 하고, 떨어져 있는 것이 처음이라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안나는 아들의 목과 얼굴, 손에 매일 키스를 퍼부어댄다. 아무리 이 시대 러시아에서 조석으로 가족끼리 하는 인사가 키스라고 해도 이건 좀 과하다. 며칠만에 만난 아들을 껴안았을 때, ‘그의 애무를 몸으로 느끼자 거의 육체적인 환희를 맛보았’다는 걸 봐도 그렇다.(1권,p.215) 과한 생기에 과한 표현, 그리고 과하게 느끼기까지! 신화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 이론에 의하면 에로스는 포용과 모성, 사랑의 무의식적 힘이다. 안나의 생기는 몸에 흘러넘쳐서 어쩔 줄 모르는 에로스적 욕망이다. 그것도 스킨쉽에 집중된. 
   
§안나의 검은 드레스
안나의 말솜씨와 부드러운 공감능력으로 돌리네의 골치 아픈 일은 해결되었다. 돌리는 남편 스테판을 용서했고, 이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 돌리의 동생 키티도 안나의 활달함과 아름다움에 반해서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무도회에 같이 가자고 안나를 조른다. 

무도회는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과 자유주의 혁명으로 귀족의 위상은 이미 허물어진 상태. 귀족들이 왕궁에서 춤이나 추고 놀던 시대는 지나갔다. 시민 계급의 부상은 유럽의 보편적 분위기였다. 그러나 아직도 견고하게 봉건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는 혁명의 바람을 두려워했다. 사교모임조차도 철저히 통제되어 자유롭게 회합할 수 없었던 귀족들은 무도회와 살롱에서 교류를 했고, 거기서 인맥도 넓히고 파벌도 형성하며 자기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무도회는 연인들에게는 특별한 이벤트의 무대이자, 온갖 상열지사의 온상이었다. 

키티는 하루종일 세심한 공을 들여 치장을 하고서 부푼 가슴을 안고 무도회에 참석한다. 브론스키의 청혼이 오늘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밋빛 페티코트와 복잡한 무늬의 망사드레스, 금발의 숱 많은 가발과 꽃장식, 목을 감싼 검은 벨벳끈까지, 오늘의 주인공으로는 완벽하다. 반면 무도회장에 나타난 안나는 별 화려한 치장이 없는 검은 드레스 차림이다. 
검은 의상을 걸친 안나를 보자(...) 이제야 그녀는 전혀 새롭고 예상치 못한 존재로서 안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그녀는 안나가 라일락빛 의상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 그녀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녀가 언제나 치장을 초월한다는 데 있었다는 것, (...) 돋보이는 것은 오직 소박하고 자연스럽고 우아하며 동시에 쾌활하고 생기 넘치는 그녀 자신뿐이었다.(같은 책,p.161)

여간 미모에 자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입기 힘든 검은 드레스. 평범한 사람이 입으면 눈에 더 안 띄게 되지만 뛰어나게 아름다운 사람은 그 검은 옷 때문에 더욱 뚜렷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 아름다움은 어떤 화려한 색깔의 옷들도 제압한다. 가발도 없이 흘러내리는 검은색 곱슬머리, 하얀 어깨와 팔뚝. 그녀가 이 무도회에서 어필하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자기 자신, 육체의 생기인 욕정 그 자체이다. 

검은 드레스에 깜짝 놀란 키티는 이번엔 브론스키와 안나가 함께 춤추는 모습을 보고서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안나는 불타오르는 광채를 내뿜으며 환락에 도취되어 있었다. 반면 브론스키는 ‘오직 공손과 경의의 표정’이다. 
그녀는 그들이 이렇게 사람들로 가득 찬 홀에 있으면서도 자기들밖에 없는 것같이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토록 의연하고 듬직하던 브론스키의 얼굴에 아까 그녀를 자극했던, 영리한 개가 나쁜 짓을 저질렀을 때 짓는 것과 같은 당황과 순종의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같은 책, p.168)

키티는 이제 안나의 해사한 얼굴에서 ‘뭔가 무섭고 잔인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기괴하고 악마적인 힘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을 느끼며 완패를 절감한다. 대체 키티가 발견한 이 기괴하고 악마적인 것은 느닷없이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아니, 느닷없을 리가 있나. 안나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생기가 바로 이 힘의 원천이지 않겠는가?

안나에게 감출 수 없었던 생기는 브론스키에 의해 정념으로 타올랐다. 사로잡힌 브론스키가 개처럼 순종하는 태도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안나는 상대방의 숭배와 복종에 도취된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완벽한 지배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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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념의 질주

§줌 인 브론스키 
속도, 전율, 몰입... 정사장면이 아니다. 이것은 경 마의 순간이다. 프랑스 철학자 투르니에는 말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 섹시한 엉덩이 때문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이 경 마장 장면은 우리에게 격렬함과 에로틱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안나와 브론스키의 정열적 사랑과 그 파멸의 끝을 암시하고 있다. 안대를 하고서 질주하는 말. 기수로 나선 브론스키에게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숨소리와 추격해오는 말의 발굽소리다. 

안나는 브론스키에게 쌍안경을 고정하고, 긴장으로 부채를 꽉 쥐고 있다. 옆에 앉은 남편의 시선따윈 아랑곳 없다. 브론스키와의 염문을 극구 부인하면서도 오로지 쌍안경으로 브론스키만을 쳐다보고 있는 안나. 그런 안나에게 남편은 아웃 오브 안중이다. 쌍안경으로 보는 세상엔 브론스키 한사람 뿐이다. 숱한 기수들이 말과 함께 나뒹굴고 관중들이 안타까움과 놀라움의 탄식을 자아낼 때도 안나는 알지 못했다. 

어떤 평론가는 이 소설이 위대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했다. 지금도 이 작품은 유명 여배우들이 앞다퉈 안나 연기를 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비극적 사랑의 전형이다. 그렇게 끔찍하게 죽었는데도! 아마 사랑만 이렇게 미친듯이 하고, 죽진 않을 거라는 착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비극은 죽음에 있지 않다. 안나는 벌써 모든 것들과 단절되어 가고 있다. 자신의 욕구에만 갇힌 불통의 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안나는 오직 브론스키만을 보고 있는 듯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욕망의 충족뿐이다. 그녀는 우승을 코앞에 두고 말에서 떨어져 뒹구는 브론스키를 보고 미친듯이 울부짖었으면서도 기수는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에 ‘그럼 오늘 밤 그이는 오겠지’라며 안도한다. 소식을 전한 쪽지 말미에 그가 절망하고 있다는 언급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저 ‘지난번 그와 만났을 때에 대한 세세한 회상이 그녀의 피를 끓어오르게’ 했을 따름이다.(1권,p.417) 안나는 쌍안경 밖 세상을 못 보고, 관심도 없다. 아니, 쌍안경 속의 브론스키의 욕망과 의중에도 관심이 없다. 오히려 브론스키가 딴 데서 무언가를 하기만 하면 극도의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안나는 이제 생각대로 말하지 않으며 말한대로 행동하지도 않는다. 이토록 단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데 모든 것이 분열되다니. 그녀의 몸은 이제 그때 그때의 기분과 충동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안나의 궁전
안나가 집을 나가서 브론스키의 영지에서 지내고 있을 때, 돌리가 방문을 한다. 그녀는 마차에서 상념에 잠긴다. 

‘나는 마치 감옥에서 나온 사람처럼, 여러 가지 걱정으로 나를 죽여버릴 것 같은 세계에서 도망쳐 나와서 지금 겨우 잠깐 동안 정신을 차렸을 뿐이다. 모두들 살아있다. 방금 그 아낙네들도 동생 나탈리도 바레니카도 지금 찾아가는 안나도. 그저 나만이 그렇지 않다. (...) 안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상대방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 나처럼 굴복당하고 있지 않고, 틀림없이 여느 때처럼 싱싱하고 영리하며 무엇에나 마음을 터놓고 있을 것이다’(『안나카레니나』3권,p.119)

이토록 지쳐있는 돌리에게 안나는 탈주의 아이콘이다. 그녀가 영지에 거의 다 도착한 길목에서 만난 안나는 또다시 돌리를 놀래킨다. 이번에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우아한 이륜마차와, 훌륭한 말과, 우아하고 눈부신 사람들’때문이었다. 그리고 승마복을 입은 안나의 얼굴에서 발견한 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만 나타나는 일시적인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주부의 눈’으로 관찰해본 안나의 집과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어색하다. 벽지와 커튼에서부터 가구, 장식품들은 모두 프랑스와 영국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안나는 돌리와 함께 있는 하루동안 옷을 몇 번을 갈아입었는지 모른다. 승마복, 평상복, 만찬복, 테니스복, 잠옷. 

안나가 어린 딸 ‘아니’를 보여주러 들어간 방에도 돌리가 여섯아이를 키우면서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아이 물건들이 꽉 차있다. 모두 유럽에서 공수해온 것이다. 그러나 안나는 아이의 장난감이 어디에 있는지 젖니가 몇 개 났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다. 

만찬 때에는 집안 사람들과 손님들이 응접실에 모여있다가 하인이 와서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하면 남자가 여자를 에스코트하여 짝을 맞춰 식당으로 들어간다. 영지의 주인인 브론스키가 안나의 소중한 손님 돌리를 에스코트 한다. 우리가 만화나 영화에서 보는 이 화려한 장면은 같은 귀족신분인 돌리의 눈에도 어색한 장면이다. 당황해하는 돌리에게 안나는 겸연쩍었던지 자기네는 영국식 격식을 굉장히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고 한다. 
  안나는 사교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에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없다. 그래서 아무나 와주면 고맙다. 시답지 않게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농이나 건네는 청년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청년과 에로틱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즐기는데, 돌리가 그걸 탐탁치 않게 바라보자 대답하기를, 별 것 아니라고, 그저 브론스키를 간질이기 위한 거라고 한다. 이런 표현.. 안나가 참 낯설어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딴 사내와 농을 하는 것도 브론스키로 하여금 계속 그녀를 원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남자분들에게는 심심파적이라는 것이 필요해요. 그래서 알렉세이(브론스키)에게도 온갖 사람들이 필요하죠. 때문에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모두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말하자면 나는 집 안을 언제나 활기 있고 유쾌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돼요. 알렉세이가 뭔가 새로운 것을 바라거나 하지 않게끔 말예요.(...여기는) 하나의 조그마한 궁전이라고 할까요.”(3권,p.142)

만찬에서 안나는 거기에 앉아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제를 바꿔가면서 얘기를 건넨다. 안나는 브론스키가 집을 비울때면 자기도 할 일을 만들기 위해 책을 박스로 주문해놓고 읽어대는데, 건축, 교육, 위생 등의 유럽의 동향을 파악한 것이 이렇게 빛을 발한다. 아주 내성적이고 숫기 없는 남자라도 거기에 앉으면 잠시 동안은 안나의 공감과 호기심을 누리며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건, 정말... 살롱(술집) 마담(여주인)이지 않은가! 돌리는 점점 좌불안석이 되어간다. 집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것은 브론스키다. 장식품이나 만찬 따위의 사소한 것들까지도 브론스키에 의해 준비되고 있었다. 돌리는 ‘아이들의 아침 죽마저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세심한 주의를 누가 기울이고 있는지를 간파했다. “안나는 그저 이야기를 잘 이끌고 간다는 점에서만 안주인이었다.”(3권,p.160) 이것이 안나가 자신의 궁전에서 하고 있는 유일한 역할이다. 

돌리가 이 어색한 집에 대해 느낀 점은 한마디로 연극이다. “그날 온종일 그녀는 자기보다 능숙한 배우들과 연극을 하고 있는 듯한, 그리고 자기의 서투른 연기가 무대 전체를 망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3권,p.147)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안나는 싱싱하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 돌리의 환상은 이렇게 깨졌다. 안나는 자기의 궁전에 틀어박혀 극도의 긴장 속에서 매끈한 연극을 하고 있다. 무얼 위해서 이토록 사력을 다하고 있는건가? 브론스키가 딴 데 관심갖지 않게 하기 위해, 변치않고 자기를 욕망하게 하기 위해! 그리하여 자신의 몸에 그 쾌락의 순간을 끊임없이 재현하기 위해!  반복, 반복, 반복... 차이를 생성하지 못하는 반복은 반생명적이다.


3. 질주의 종착역_죽음

안나는 두통과 신경증에 시달린다. 이 두통과 신경증은 안나가 브론스키와 단 둘이 살게 되면서 오히려 더 심해졌다. 안나는 브론스키가 집을 비울 때면 모르핀을 복용해야 잠을 잘 수 있다. 군복을 벗고 백수가 된 브론스키가 경 마나 귀족선거 등으로 출타할 일이 있게 되면, 러시아의 땅덩이가 워낙 넓어 그런지 며칠씩 걸릴 때가 많다. 안나는 브론스키의 부재를 한 순간도 견딜 수가 없다. 

브론스키에게 한 친척 아주머니가 안나가 모르핀을 너무 많이 복용한다고 걱정하자 안나는 "당신만 집에 있으면 괜찮아요. 그럼 난 모르핀을 하지 않아요"라고 한다. 이것은 협박이다. 이런 말을 듣고도 네가 나간다면 해보자는 의미이지 않은가. 브론스키도 물론 이 의미를 알아듣고, 자기를 잡아 가두려는 안나에게 질려간다. 

그렇다면 그녀의 넘쳐 흐르던 생기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를 빛나게 해주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뭇 사람의 시선을 강탈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매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허공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다.

 안나는 브론스키의 수심에 찬, 지극히 의아해하는 표정을 모른 체하며 유쾌한 어조로 그날 아침의 장보기에 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 번뜩 그의 얼굴에 멎은 그녀의 반짝이는 눈에는 잔뜩 긴장된 기색이 있었으며 그녀의 언행에는 신경질적인 재빠름과 우아함이 느껴졌다. 이것들은 그들이 가까워졌던 초기에는 굉장히 그를 매혹한 것이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놀라게 했다. (『안나 카레니나』 2권, p.591)

이것은 재현된 생기다. 그러니 매력이 있을리가 있나. 곧 끊어질 듯 당겨진 현과 같은 긴장상태에서 벌이는 연극일 뿐이다. 하악, 하악, 이 숨막히는 불안... 안나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울 능력이 전혀 없다.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라서 브론스키가 정식 남편이 아니기 때문일까? 이런 안나에게 연민을 느끼는 브론스키와 오빠가 나서서 이혼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해도 정작 안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다른 사람의 골칫거리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던 그녀는 자기 문제는 단 하나도 직시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는게 좋겠냐고 물으면 때론 신경질적으로, 때론 바보처럼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대답하기 일쑤다. 그녀는 단 한가지, 무엇이 자신을 충족시키는지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사랑만 있으면 된다. 당신이 내 것이기만 하다면!’(2권,p.159)  안나야, 이건 너무 끔찍해! 

안나에게 사랑은 완벽한 소유다. 이런 비현실적이고 폭력적인 요구가 실현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안나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으려 해도 불안한 감정은 번번이 그녀를 무너뜨렸다. “벌써 몇 차례나 되짚었던 생각의 굴레를 또다시 돌고 나서도 자기가 이전의 조바심으로 다시 되돌아온 것을 깨닫고 그녀는 전율했다. ‘정말 안 되는 것일까? 나는 정말 자기를 이겨낼 수가 없는 것일까?’”(3권,p.374)

이제 그녀는 어디로 가게 될까? 그와 싸움이 있던 어느 날도 그녀는 문득 혼자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두려워졌다. 아기방에 들어가 전남편에게 두고 온 아들 세료쥐아를 찾는다... 거울 속의 자기를 보고서는 ‘어머, 누구지?’ 못알아본다... 브론스키의 키스가 그리워 자기 손에 자기 입술로 키스를 한다... 그렇게 얼이 빠졌던 그날, 그녀는 브론스키를 찾아 집을 나섰다. 아침에 어머니집에 다녀온다며 나간 브론스키에게 무섭다고 당장 돌아와달라고 전보를 치고 하인 편에 편지를 보내는 둥 난리를 치다가 직접 찾아나선 것이다. 그러다 기차역에서 열기를 뿜으며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쇳덩이를 보더니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이 모든 고통을 끝장내줄 구세주. 여태껏 어떤 결단이 필요할 때마다 그렇게 주저해오며 방치했던 모든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 할 방법을 찾았다. ‘저기로, 저 한가운데로. 그리고 나는 그이를 벌하고 모든 사람들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자.’(3권, p.427)

안나의 생기와 불꽃은 그렇게 꺼졌다. 허망하고 끔찍하게, 그리고 어이없고 느닷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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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충동, 죽음의 전주곡

생명은 무엇과도 접속할 수 없는 불통의 긴장상태를 중단시키려 한다. 안나에게 덮쳐오는 자살의 충동은 그녀의 몸이 더이상 반생명적인 상태를 견딜 수 없음을 알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난 것일까?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정념을 분노와 복수로 채웠다. 절망과 미움은 이제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갖고 있는 사랑스러운 생기가 왜 이토록 끔찍한 회로로 빠져들었는지가 안타까웠고, 두려웠다. 나의 두려움은 소설 속에 있지 않다. 내가 엘레베이터에서 만난 아기엄마처럼 도처에서 반생명적인 신체들을 만난다. 일상에서, 생활에서, 삶에서 소외된 마비된 신체는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안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다 무의식에서 이루어졌다. 아니, 몸이라고 해야 맞겠다. 넘쳐나는 생기와, 욕구, 충동, 그리고 중독과 마비까지. 그녀는 자기의 생각과 감정에 충실히 따라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 거라고 여길 수 있지만, 안나는 한 번도 자기 몸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따라온 안나의 스토리는 그녀가 내내 수동적으로 휘둘리기만 한 것을 보여준다. 

정념(파토스pathos)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내적 충동이다. 본질적으로 수동이다. 에로스는 파토스로 인해 정열이 되고 격정이 된다. 그 충동은 한 때의 격정으로 내 몸을 충족시키고 지나가게 되어 있다. 그것을 지속시키고 싶어한다면 소유와 지배에 대한 집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안나에게는 ‘사랑’과 ‘내 것’이 동의어였고 삶은 ‘내 것’에 올인한다.

모든 것들과 단절되고 삶이 그 욕망만을 위해 존재할 때, 죽음은 이미 시작된다. 안나가 자기만의 궁전에서 끊임없이 재현하려는 육체적 쾌락,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은 꺼지지 않는 정념의 불꽃이다. 자신을 다 태워버리고서야 소멸할 죽음의 불꽃이다. 

안나는 죽기 전 헤매이면서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저 그이의 애무만을 열망하는 연인 이외의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면 좋을지 모르지만, 나는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없고 또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3권,p.417) 결국 안나는 죽음으로도 다른 무언가가 되지는 못했다. 평안을 얻지도, 욕망으로부터 해방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념의 불꽃은 그렇게 그녀를 삼켰다. 
 
톨스토이는 50세에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단행본 출판을 마치고서 마치 쫓기듯 부랴부랴 옵티마 수도원을 방문하고, 『참회록』을 쓰고, 철저한 금욕주의자가 된다. 이 두려운 죽음의 불꽃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는 탈주를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채식주의자도 되고, 무정부주의자도 되고,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위대한 휴머니스트가 되었다. 

우리도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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