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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라! - <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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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안 작성일18-01-04 16:41 조회2,8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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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라!





안혜숙(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나와 <법구경>의 만남

나는 이야기책으로 처음 <법구경>을 만났다. <법구경>은 붓다의 시이자 노래인 게송 모음집이다. 그 자체는 아무런 스토리가 없다. 그런데 이야기책이라니? 붓다는 스물아홉살에 출가하여 서른다섯에 깨달았다. 이후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45년간 인도 북부 갠지스강 유역을 떠돌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했다. 주로 출가한 수행승들이 대상이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었다. 왕부터 천민, 계급과 남녀, 이교도들을 가리지 않았다. 법구경의 게송들은 그 만남의 과정에서 나왔다. 그래서 각 게송에 얽힌 배경이야기인 인연담들이 주석으로 달려있다. 이야기들은 붓다가 만난 사람들만큼이나 다채롭다. 아주 짤막한 에피소드들부터, 웃기고 울리는 시트콤같은 이야기들, 한편의 단편소설 같은 애증의 막장드라마, 몇 생에 걸쳐 이어지는 신화같은 전생담과 화려한 신통력까지. 이 인연담들은 2,500년전 당시 인도의 풍속과 살림살이, 사람들의 마음씀씀이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게송의 의미를 더욱 살아나게 한다. 

<법구경>의 게송들은 말 그대로 붓다가 살아있을 때의 육성이다. 붓다는 출가하기 전 사끼야족의 왕자로 크샤트리아 귀족 계급이었다. 그러나 가르침을 전할 땐 귀족의 언어인 베다어나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계층의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중의 언어를 썼다. 그 자신이 주로 마가다국에 머물렀으므로 마가다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마가다어가 빠알리어의 원형이라 하겠다. 빠알리어로 전해지는 붓다의 육성. 나도 낭송을 통해 조금은 그 맛을 느껴보았다. "삐야또 자야띠 소꼬, 삐야또 자야띠 바양, 삐야또 윕빠뭇따싸, 낫티 소꼬 구또 바양/뻬마또 자야띠 소꼬, 뻬마또 자야띠 바양, 뻬마또 윕빠뭇따싸, 낫티 소꼬 구또 바양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난다. 사랑을 여읜 님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두려움이 또한 어찌 있으랴.)"(게송212)) 애착(뻬마또) 때문에, 쾌락(라띠야) 때문에, 욕망(까마또) 때문에... 시리즈로 이어지는 게송들. 운율이 맞아 저절로 리듬을 타 낭송하는 맛이 있다. 이런 연작시도 있지만 대부분 독립적이거나 서로 대구를 이루는 시들이다. 대부분 4행시, 길어야 6행시인 짧은 노래들. 빠알리어로 담마빠다(Dhammapada)인 <법구경>은 ‘가르침의 조각들’, ‘진리의 말씀’, 혹은 ‘진리의 길’로 번역된다. 여기에 실린 총 423편의 노래들을 통해 붓다는 어떤 진리의 말을 전하려 했던 것일까.

붓다는 깨달은 후 고민했다. 도대체 누가 내가 깨달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전혀 사람들이 들어본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붓다의 설법을 들으러 왔다가 집중하지 못하고 딴짓하는 사람들을 보고, 아난다가 붓다에게 참 안타깝다는 말을 하자, 붓다가 묻는다. 너는 알아듣기 쉽냐고. 아난다는 되묻는다. 그럼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붓다가 대답한다. “그렇다. 이 뭇삶(중생)들은 헤아릴 수 없는 수천 겁을 부처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도 내가 설하는 가르침을 듣지 못한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 속에서 이 뭇삶들은 무수한 형태의 모습을 받았었고 여러 축생의 말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마시고 놀고 춤추고 노래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에 취해있을지언정 가르침을 듣는 것은 쉽지 않다.”(『법구경-담마파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역주, 588쪽) 그렇다. 나 역시 그의 언어가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낯선 언어, 낯선 진리. 아니 언어라기보다 붓다의 마음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라는 말이 더 정확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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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진리?   


‘고통’이라는 전제

고, 집, 멸, 도.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의 원인이 있고, 괴로움을 없앨 수 있고, 괴로움을 없애는 길이 있다.’ 붓다가 우리에게 전하는 진리의 메시지다. 여기서 전제는 괴롭다, 고통이 있다!이다. 그는 고통에서 출발한다. 붓다가 느끼는 이 ‘괴로움이 있다’는 전제. 이 전제에 나는 얼마나 공감하는가. 여기에서부터 나는 붓다가 느끼는 ‘고통’이라는 문제의식. 그 절실함에서 거리가 있음을 느꼈다. 괴로움도 있지만 즐거움도 있고, 불만족도 있고 만족도 있고, 불행도 행복도, 희망도 절망도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삶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붓다는 이 모든 것을 고통이라 이름한다. 존재 자체가,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 끝없이 고통의 윤회 속에 있다고. 혹 그는 삶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거 아닌가? 처음에 든 생각이었다. 그러다 알았다. 아~ 그는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에 끄달리는 자체가 고통이라고 하는 거구나. 지금의 즐거움은 곧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지금의 만족이 더 큰 불만족을 낳으니 그러한 분별심에서 자유로워지라는 거구나... 그러면 어떤 상태가 와도 번뇌에 끄달리지 않고,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이로구나.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붓다가 전제한 인간의 고통은 내가 평화롭고 안락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 조차도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붓다가 출발한 문제의식에서부터 붓다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붓다의 말대로 나야말로 과거생 동안 여러 축생의 말들에 너무 익숙해져 마시고 놀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에 너무 빠져있는 것인가? 이 말은 이생의 쾌락과 즐거움에 그만큼 빠져있다는 말인가. 내가 그렇게 사는 걸 즐거워했던가? 쾌락을 즐겼던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래서 나의 <법구경> 읽기는 붓다가 품었던 문제의식인 고통! 뭇삶들이, 내가, ‘고통 속에 있다!’는 그의 깨달음, 그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고 하겠다.
다가가고 싶다...


‘생로병사’라는 고통

붓다가 되기 전, 고따마 싯달타는 왜 출가했을까? 뒤늦게 다시 가지게 된 의문이다. 붓다니까, 붓다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하고 적당히 지나가버렸던 의문. 한 부족의 왕자로 태어나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그. “나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었다오. 하나는 우기(雨期)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겨울 궁전이고, 하나는 여름 궁전이었다오. 그러한 나는 우기의 넉 달 동안을 궁전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여인들과 가무를 즐겼다오.(『맛지마니까야』, 하권, 이중표 역해, 전남대학교출판부, 62쪽) 이렇게 그는 쾌락을 누리는 삶 속에 있었다. 궁핍이나 질병같은 소위 세속적인 고통스런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그는 그러한 쾌락 끝의 공허함을 느꼈던 걸까. 쾌락도 하루 이틀이지. 우리는 쉽게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쾌락은 더 큰 쾌락을 찾는 게 쾌락의 속성이다. 신체가 쾌락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고따마는 이런 쾌락에 길들여지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한 나라의 왕자였고 아내와 자식을 두었던 그는 어느 날,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 


출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고따마가 출가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절에 이런저런 세속적인 소원을 빌러 온 부인들이 있었다. 천상의 복을 받고, 죽어서도 천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다른 여자에게 가지 않게 해달라고, 또 아들을 빨리 얻게 해달라고... 이런 말들 듣고 붓다가 이렇게 말한다. “뭇삶들에게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소치는 사람이 손에 몰이막대를 쥔 것과 같다. 태어남은 늙음으로 내몰고, 늙음은 병듦으로 내몰고, 병듦은 죽음으로 내몬다. 마침내 도끼로 자르듯 목숨을 끝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남에서 벗어남을 구하는 자는 없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모두 다시 태어남이다.(『법구경-담마빠다』, 449쪽) 난 처음엔 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태어났으니 살아야하고 살다가 만나는 저마다의 괴로움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하려 한다. 그런데 그것이 왜 다시 태어나길 원한다는 것일까. ‘천상에 다시 태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비는 사람은 그렇다쳐도, 남편이나 자식일로 소원을 비는 것이 왜 다시 태어난다는 걸까. 난 그때까지만 해도 붓다가 말하는 윤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회의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자. 

여기서 내게 더 다가온 것은 소치는 사람이 채찍으로 몰아대듯 태어남은 늙음으로, 늙음은 병듦으로, 병듦은 죽음으로 내몬다는 말이다. 붓다의 문제의식은 그것에 있었다. 이 예화는 그대로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태어나서 때가 되면 쫓기듯 학교가고 결혼하고 자식낳고, 자식때문에, 남편과 부인 때문에, 누구 때문에, 돈 때문에...뭐 때문에 쫓기듯 애면글면 살다가 나이들고 병들고 그러다 죽음을 맞는다. 말 그대로 내몰린다. 그러다가 도끼로 자르듯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아~ 정말 그렇다! 태어나서 이렇게 내몰리듯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간의 삶. 생각만 해도 허무하다! 그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 왕자였던 고따마도 마찬가지다. 그 허망함, 알지 못하는 죽음 앞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 왜 태어나고, 왜 사는지, 왜 죽는지도 모르고 내몰리듯 살다가 허망하게 맞이하는 죽음. 그 앞에서 고따마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어두운 무명 속에서의 삶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모르는 것만큼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없다.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맞닥뜨리는 일들에 대해 모르는 것. 그 무지가 주는 답답함과 고통! 고따마가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고따마만 느끼는 건 아니다. 그가 다른 점은, 그로인한 고통의 크기가 남달리 컸기 때문이다. 내몰리듯 생로병사를 겪어야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 그 문제의식의 절실함이 목전의 감각적 즐거움과 쾌락을 넘어서게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붓다의 전생담은 설득력을 얻는다. 그는 과거 무수한 세월동안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려는 서원을 세웠다. 애초부터 그의 문제의식은 자신만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던 거다. 사람마다 타고난 근기가 다르듯, 무지로 인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당장의 감각적 만족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나 같은 뭇 중생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괴로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어두운 무명(無明)의 삶은 괴롭다...


고통의 원인, 무지

고따마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이룬 후, 고따마 붓다가 되어 부른 환희의 송가가 있다. 그가 가슴이 벅차 부른 이 노래에는 붓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고통이었네.(게송153)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게송154) 

붓다는 비유를 즐겨 썼다. 이 시에서도 그렇다. 여기서 집은 ‘사대오온(地水火風의 四大와 五蘊)’으로 이루어진 나의 몸을 말한다. 그런 나의 몸이 만드는 욕망과 갈망과 집착, 이게 집을 짓는 자, ‘자아’이다. 이 자아가 서까래라는 번뇌와 망상을 만들어 왔다는 것. 그리고 대들보는 바로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살아왔던 무지다. 내가 이제까지 그런 집을 짓고 살아왔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어리석음. 모르고 있었던 걸 모르는 무지, 무명이다. 그 무지라는 대들보를 부수었고 드디어 나는 알았다!이다. 이게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가슴이 벅차 터져 나온 노래였다. 여기서 포인트는 바로 ‘나는 이제 너를 보았다!’ ‘나는 알았다!’이다. 알았기 때문에 이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이다.

그럼 왜 이런 나, 자아라는 집을 짓는 게 괴로움을 만든다는 걸까? 붓다가 깨달은 세상의 진리, 모든 만물의 법칙인 연기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연기(緣起). ‘연하여 생긴다’는 뜻의 연기의 원리는 모든 존재는 조건에 의해 엮여지고 생겨나는 인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내가 알던 모르던 무수한 인연조건에 의해 서로 의지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붓다의 깨달음이었다. 이 인연조건은 매 찰나찰나 변한다. 그래서 무상하다. 무상하다는 건 허무하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해 항상하지 않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붙들어 고정시키려고 한다. 우리 몸이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불교 오온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뇌에서 무슨일이...?


오온!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라고 푼다. 한자로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이다. 우린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피부)의 오감과 의식(意,정신)을 포함해 여섯 감각기관을 가지고 세상과 만난다. 보고(色) 듣고(聲) 냄새 맡고(香) 맛보고(味) 감촉하고(觸) 생각(法)하면서. 나의 감각기관과 세상의 감각대상,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나의 의식이 만나 세상을 인식한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마다 제각각, 제멋대로다. 가령, 똑같은 사람을 보고도 우리는 다 다르게 기억하고 체험한다. 자기 식대로 상대방과 세상을 구성한다. 심지어는 아예 보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의식(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실상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세상의 실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걸까?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본 것이 실체라고 착각한다. ‘자아’라는 망상의 집을 지으며. 이것이 존재의 집착다발이다. 나의 감각기관은 곧 나의 욕망이다. 감각적 쾌감과 만족을 유지하려는 욕망. 이 욕망이 갈애와 집착을 만들고, 불만족과 괴로움을 만든다. 나, 나의 것, 나의 본질이라는 잘못된 자아, 아상을 만든다. 자아가 견고한 만큼, 단단한 집을 짓는 만큼 괴로움은 커진다. 그래서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오온)은 괴로운 것이고 병든 것이고 종기와 같고 불행한 것이고 허무한 것이고 자기가 아닌 것이다.”(610쪽)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발견한 인간의 타고난 어리석음, 무지의 원인이다. 그러니까 내 몸은 태어날 때부터 무지의 조건을 안고 태어난다. 이런 무지로 인해 내가 만든 마음이 고통스런 윤회를 낳는다고 붓다는 말하고 있다. <법구경>에서 시종일관 붓다가 강조하는 건 내 몸을 구성하는 존재의 다발, 이 오온에 대한 통찰이다. “(존재의 다발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게송113) 나의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인 세상과 의식이 만나 찰나찰나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의 요체다. 있는 그대로 보면 존재의 다발이 만드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알아차림의 수행이 깨달음의 알파요 오메가다. 붓다가 그러했듯이 알아차림으로써 고통의 원인을 모르는 무지를 깨뜨리라는 말이다. 비록 우리 몸이 그러한 번뇌와 망상을 만들어내는 조건, 무지의 조건을 안고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알았을 때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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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망상의 집을 짓고 있는가



윤회의 뿌리, 자아

이제 붓다가 말하는 윤회의 모습을 보자. 출가한 수행승들이 제따 숲의 휴게소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다. 수다의 주제는 이 세상의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거나 왕의 통치와 같은 행복에 비길 것은 없다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행복만한 것은 없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쌀밥과 고기를 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붓다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를 묻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이 이야기하는 행복들은 모두 생사윤회의 고통에 속하는 것이다.”(524쪽) 
  
또 부모와 남편과 자식까지 한꺼번에 잃게 되어 실성하다시피 돌아다니며 방황하고 통곡하는 여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미친년이라며 피했다. 그러다가 붓다에게까지 오게 되었다. 붓다는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기 전에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자식이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423쪽) 또 어떤 장군이 사랑했던 춤추는 무희가 있었다. 그녀는 장군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이레 동안 굶고 장군 앞에서 춤을 추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다. 너무 충격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슬퍼하는 장군에게도 붓다는 이렇게 말을 한다. “이 여인이 이렇게 수없이 죽었을 때마다, 그대는 사대양의 물보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457쪽) 위로라고 하는 말이 이렇게 똑같다. 나는 여기서도 분별심이 올라왔다. 아니 그래도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여인이 훨씬 괴롭지, 다이어트 하다가 제 탓에 죽은 여자 때문에 슬퍼하는 남자에 비할까. 그러나 붓다는 누가 더 슬프고 괴롭냐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누구를 더 위로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붓다는 인간 삶에서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되어 온 윤회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단지 죽음만이 여기에 해당하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겪어야 하는 느닷없고,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 그 앞에서 인간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매 찰나 생성되고 소멸하는 무수한 인연조건들, 그 무상성 앞에서 인간은 수도 없이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려왔다는 걸 말하고 있다.

붓다 당시 인도인들은 죽으면 반드시 몸이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좀 더 좋은 곳에 태어나기 위해 공덕을 쌓고 여러 천신에게 제사지내고 의존하는 건 당연했다. 죽으면 반드시 어디에 태어났냐고 묻는 건 관례고, 죽은 사람의 해골과 뼈를 가지고 어디에 태어났는지 알아맞히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지금 이생에서의 자기 삶의 모습은 전생의 업의 결과라 생각했다. 이런 윤회의 세계관은 카스트제도라는 철저한 계급사회를 유지시키는 억압의 기제이자 동시에 구원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윤회하지 말라, 다시 태어나지 말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파격이자 받아들이기 힘든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윤회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티벳불화-12윤회도>


당연히 <법구경>에는 많은 전생담, 윤회의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윤회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보자. 다섯 재가신자가 붓다의 설법을 들으러 왔는데, 와서는 한 사람만 열심히 듣고 다른 사람들은 집중하지 않고 딴짓을 하는 거였다. 한사람은 잠자고 또 한사람은 땅을 긁고, 다른 사람은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잡거나 흔들고, 다른 또 한사람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난다가 그걸 유심히 보다가 붓다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붓다가 그들이 그런 것은 과거의 훈습(경향성:평소에 익힌 여러 가지 행위의 습관. Vasana)때문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오백생동안 또아리 틀고 잠을 자던 뱀이었고, 땅 파던 사람은 지렁이였고, 나뭇가지를 흔들던 사람은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던 원숭이였고, 하늘을 쳐다보던 사람은 별보고 점치던 점성가였고, 열심히 듣던 사람은 인도 경전인 베다를 읽고 독송하던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붓다가 훈습이라고 표현했듯이 그만큼 반복되는 행위의 힘이 얼마나 큰지,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오래된 건지를 말해준다. 지금 나의 반복되는 사고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팁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꼭 전생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매일 이렇게 윤회를 반복한다.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감정, 똑같은 말, 똑같은 글쓰기도 다 윤회다. 그럼 좋은 윤회도 있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남을 돕고 공덕을 쌓는 선한 행위들은 좋지 않냐고. 물론 악한 업을 쌓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러나 붓다가 요구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붓다는 “공덕과 악행, 양자를 뛰어넘어 세상의 집착에서 벗어나”(게송412)라고 한다. 공덕조차도 세상에 대한 ‘집착이고 슬픔이고 티끌’이라고. "거룩한 님에게는 공덕이 없다"(772쪽)는 붓다의 말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아무런 결과도 남기지 않는 행위를 요구한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에 의하면 공덕 역시 무지가 만들어내는 자아라는 집, 그 자아의식이 만들어내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선이든 악이든 윤회의 뿌리를 남기는 거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죽을 때까지도 남아있는 욕망과 애착과 집착이다. 이루지 못한 욕망이든 원한이든 미련이 남아있는 것.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신도 그런 존재 아닌가. 

붓다는 말한다. 부귀든 권력이든 쾌락이든 자기 욕망을 쫓아 사는 것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무상함 앞에서 겪는 괴로움도, 끊임없이 반복하는 습성도 모두 윤회의 고통 속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그것은 나의 감각기관이 만들어내는 탐진치, 욕망과 집착의 집을 짓는 몸을 가진 인간이 갖는 숙명적 조건이다. 붓다도 그러한 조건 속에 있었다. 그러하기에 동시에, 붓다는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 또한 인간이 가야할 길임을 알려주었다.  


윤회의 멈춤, ‘불방일(不放逸)’로부터

붓다의 메시지는 확실하다. 죽되 다시 태어나지 말라! 완전히 죽으라!이다. 이 말은 곧 어떤 미련도 욕망도 애착도 남기지 말고 살아라!이다. 완전히 죽으려면 완전히 살아야 한다. 어떤 여한도 남기지 않고 사는 것. 생과 사가 여일하게 사는 것. 그런데, 이건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인가. 아무런 욕망과 애착의 찌꺼기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 어떤 고통이 와도 흔들림 없는 건 어떤 경지인가. 오래되고 오래되어 세포에 각인된 습을 어떻게 뿌리뽑을 수 있는가. 이건 붓다의 경지,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붓다는 우리에게 붓다가 되기를 요구한다. 그는 그 길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가 이룬 경지가 아직 실감이 나진 않지만, 분명한 건 붓다는 어두운 ‘무명’과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한 어떤 삶도, 어떤 죽음도 괴롭고 허망하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혜가 없이 백년을 사는 것보다,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지혜를 갖추고,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게송111,114) 이 말이 주는 자유가 조금은 다가오는 것 같다. 붓다는 이렇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스스로 깨우친 지혜와 진리를 길을 따라 살다 갔다.

붓다의 마지막 유훈은, "모든 것은 변하니 결코 방일하지 말고 깨달음을 이루라"(『디가니까야2권』, 대반열반경, 288쪽)였다. 방일하지 않음, 불방일(不放逸, appamado)은 뜻으로는 ‘지혜를 수반한 마음챙김'이다. 붓다는 <법구경>에서 방일하지 않음이 생사에 구애받지 않고, 생과 사를 초월해 사는 길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게송21) 여기서 죽지 않는다는 건 영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탐진치의 소멸인 깨달음(열반)을 이뤄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죽음도 없다는 의미이다.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소리다. 반면, “방일하게 지내는 사람에게 갈애는 말루바 덩굴처럼 자란다. 숲속 원숭이가 열매 찾아 옮겨 다니듯. 그는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떠다닌다.”(게송334)고 했다.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소리다.

붓다는 고도의 마음챙김인 명상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 방법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 멈춤(止)과 통찰(觀)의 위빠사나 수행이 그것이다. 제자들은 그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못하기도 했다. <법구경>에는 명상주제를 받아 홀로 좌선에 들어 수행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니 불방일에는 이런 수행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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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방일이 어떻게 윤회를 멈추는 길이 되는가. 불방일은 한 순간도 마음챙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알아차리는 것인가. 나의 감각기관이 세상과 만나 어떻게 자아의 집을 짓고, 어떻게 집착을 만드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것은 매 순간 내 몸의 집착다발이 만들어내는 망상과 애착과 탐욕을 부수는 일이자, ‘나’라는 집짓기를 부수는 일이다. 태생이 그러하니 잠시도 마음챙김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 불방일의 초점이다. 이는 곧 존재하는 것의 무상성을, 그 무상과 무아의 진리 안에 ‘나’라는 것도 ‘나의 것’이라는 것도 없음을 통찰하는 과정이자, 지금여기의 내가 수많은 인연조건의 산물임을 깨닫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지혜를 수반한 마음챙김’인 불방일이다. “항상 깨어 있으면서 밤낮으로 배움을 익히고 열반을 지향하는 님들에게는 번뇌가 사라져버린다”(게송226) 결국 불방일은 이러한 하루하루를 사는 일이다. 이것이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온전히 살고 온전히 죽는 길이자, 윤회의 고통을 멈추는 길이라고 붓다는 말하고 있다.
                
붓다는 깨달음으로 ‘자아’의 집을 부순 후, 다시는 집을 짓지 않았다. 자신의 ‘앎의 그물’에  엮이는 인연들을 찾아 평생을 ‘집 없이’ 길 위에서 살다갔다. 2,500년전의 그가 무수한 인연조건에 의해 ‘지금여기’의 내게로 왔다. 나 역시 그의 ‘앎의 그물’에 들어가 내가 어떤 ‘자아’의 집을 짓고 있는지를 보게 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마음만으로도 조금은 집착과 번뇌의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고통이 있다!’는 붓다의 문제의식의 절실함, 그 무량함의 덕이다. 나는 이제야 아주 조금 그의 마음에 다가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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