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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도락적인 삶을 산다는 것 - 나쓰메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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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담혜정 작성일18-01-10 13:51 조회2,8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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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락적인 삶을 산다는 것






신혜정 (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일본의 근대를 대표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다보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바로 고등유민이라는 캐릭터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고학력 백수정도로 해석된다. 말 그대로 대학은 나왔지만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취업에 그다지 관심도 없는 부류이다. 소세키의 첫 소설인나는 고양이로소이다안에도 이러한 고등유민들이 등장을 하는데 미학자 메이테이, 이학자 간게쓰, 철학자 도쿠센 등이 바로 그들이다. 처음엔 사실 색안경을 끼고 고등유민을 바라봤다. 모이기만 하면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고, 현실성 없는 연구에 시간을 낭비하면서 빈둥대는 백수건달로만 본 것이다.

그리고 소세키도 당연히 작품을 통해 그들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세키가 살던 때가 어떤 시대인가. 서구의 문물들이 밀려들어와 일본의 근대화가 한창이던 메이지 시대였다. 모두가 서구 열강을 따라 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사회 전체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때문에 모두 열심히 일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당시 일본인들 삶의 모토였다고 할 수 있다. 헌데 이런 시대에 백수건달 고등유민이라니.

하지만 책을 여러 번 읽고, 소세키의 또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차츰 그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세키가 고등유민이라는 존재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소세키는 왜 고등유민을 얘기하는 걸까? 그들을 통해 그가 보여주려고 했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속 내용을 따라가며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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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능동적인 삶의 방식, 자기본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소세키에게 있어서 특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00년도에 국비 장학생으로 영국유학을 떠난 소세키는 2년 반 만에 극심한 신경쇠약과 우울증으로 귀국을 하게 된다. 그가 이렇듯 몸과 마음의 병을 앓았던 이유는 유학 중에 겪었던 경제적인 어려움과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계속되었던 영문학을 연구에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자신이 마치 큰 자루에 갇혀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이 자루는 타인이 아닌 자신만이 뚫어야 하고 그러려면 그것을 뚫을 수 있는 송곳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찾지 못하는 이상 그에게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런 간절함으로 그가 찾아낸 송곳이 바로 자기 본위라는 네 글자였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해 그는 철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책을 탐독하며 사색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렇게 고독 속에서 절차탁마의 시간을 보낸 소세키는 귀국 후 당시 잡지 <호토토기스>를 주재하고 있던 친구 다카하마 교시의 권유로 글을 쓰게 된다. 신경쇠약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주로 영문학자나 교육자로 활동 하던 그가 처음으로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작품이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고양이다이름은 아직 없다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아 무튼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데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쓰메소세키현암사, p.16)


소설의 서술자로 등장하는 라는 고양이는 우여곡절 끝에 구샤미 집에서 살게 되는데 사는 내내 이름을 갖지 않는다. 하다못해 그 흔한 나비야옹이니 하는 이름도 주어지지 않는다. 왜 일까? 그것은 이 고양이가 끝까지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견지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해서 고양이는 타자로서의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여 인간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할 수 있는 것이다. 고양이의 비판의 대상에는 당연히 작가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동시에 고양이의 이런 시선은 작가 소세키의 세상을 향한 시선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서술자인 이름 없는 고양이 는 인간이라는 존재와의 첫 대면을 털로 장식되어 있어야 할 얼굴이 미끌미끌해 흡사 주전자같다고 표현한다. 고양이인 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란 생김새부터 하는 짓까지 정상적인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다. 헌데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기준인 줄 알고 잘난 척을 해대고 근엄한 척까지 하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인간들이나 동물들이나 똑같이 조물주가 빚어 낸 조형물에 불과할 뿐 거기에 우열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의 주장이다. 때문에 인간에게 기죽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는 비록 인간에게 빌붙어 살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양을 피운다든지 절대 굽신 거리지 않는다.

이 장면은 왠지 소세키가 유학 했을 당시 서양인들의 외모나 그들의 발전된 문물을 보며느꼈던 위축감과 자연스럽게 오버랩이 된다. 영국에 도착해서 한동안 소세키는 서양인에 비해 작은 체구와 자신의 노란 피부를 부끄러워하며 스스로를 폄하했다. “영국은 비둘기조차도 일본보다 크다.”라는 말로 상대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했던 것이다. 하지만 후에 그는 그것이 얼마나 수동적인 삶의 태도인지를 알게 된다. 서양인과 자기는 다를 뿐이지 어느 한 쪽이 열등한 것이 아닌데 외부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병들게 했는지도 깨닫게 된다. 해서 소세키는 평생 자신이 살아 갈 삶의 무기로 자기 본위를 발명하게 된다. 소세키가 말하는 자기본위란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살면서 스스로를 배려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를 개성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능동적인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세키는 작품 속에서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2. 시대를 역행하는 자들, 고등유민

 

소설 속에서 고양이인 는 구샤미, 메이테이, 간게쓰를 주로 관찰한다. 그런데 의 눈에는 매일 모여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는 그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우선 가 보기에 매번 독서하는 척 방에 틀어박혀 침까지 흘리며 자는 집주인 구샤미는 돈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는 금력과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 타인의 개성을 침해하는 사업가들을 가장 혐오한다.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사업가라면 아주 질색이었네 그들은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거든. 옛말로 치면 장사치 아닌가.” “어떤 사업가의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돈을 벌려면 삼각법을 써야 한다는 거네. 의리가 없고, 인정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는 것. 이것으로 삼각이 된다는 거지 재미있지 않은가.”(207) 라며 사업가에 대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자신 역시 돈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기도 한다.


고양이는 이런 구샤미를 쇠사슬에 묶여있는 동물원 원숭이에 비유하며 월급에 얽매여 어린 제자의 놀림도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의 비굴함을 비웃는다. 구샤미는 위가 안 좋다고 늘 투덜대면서도 딸기잼을 퍼먹고, 과식을 하는 등 자신의 건강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그래서 얼굴색도 누렇게 떠 있고 늘 피곤에 지쳐 있다. 구샤미의 아내와 메이테이는 그런 그를 도락도 모르는 딱한 사람이라고 혀를 찬다. 그리고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여기저기 사교계를 기웃거리며 사는 메이테이는 대학을 졸업한 재원임에도 취업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거짓말과 허풍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을 즐기는 인물이다. 그가 하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서양의 문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따라하고 보는 가식적이고 천박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한다. 소설 속에서 메이테이의 허풍과 거짓말은 이런 자들이 벌이는 작위적인 행태를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까발리는 역할을 한다. 자신을 허풍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메이테이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 허풍은 그저 단순한 허풍에 불과해요하지만 그 여자의 허풍은 다 무슨 속셈이 있 는까닭 이 있는 거짓말이지요질이 안 좋아요얕은꾀로 짜낸 술수와 타고난 해 학적 취미를 혼동하면코미디의 신도 이 세상에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 있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쓰메 소세키현암사, p.162)


여기서 그 여자란 온갖 술수를 써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업가 가네다의 부인을 말하는 것이다. 가네다의 부인인 하나코는 자기의 딸과 간게쓰를 결혼시키기 위해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구샤미 집을 정탐하게 하고 메이테이가 가짜로 만들어 낸 인물을 잘 아는 것처럼 맞장구를 치는 등 거짓말을 일삼는 인물이다. 고양이 는 하나코를 골탕 먹이고 조롱하는 메이테이의 언행을 통해 당시 돈이면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속물들도 풍자하고 있다. 메이테이는 사업가 가네다를 일개 활동 지폐에 비유를 한다.활동 지폐 화폐에 눈과 코만 붙은 인간이라는 뜻으로 지폐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종이에 불과하지만 가치가 있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이다.


는 그런 화폐를 무조건 신봉하는 인간이 도무지 이해되지가 않는다. 화폐는 집단적 상상의 산물일 뿐이지 그것자체는 어떤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들은 왜 그런 허깨비에 목을 매는지 알 수가 없다. 다음으로 구샤미의 제자 간게쓰는 어떠한가? 그는 대학 연구실에서 목매기의 역학’, ‘도토리의 스태빌리티(stablility)를 논하고 아울러 천체의 운행을 논함등 현실적으로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될 것 같지 않은 것들에 심취해 있는 자이다. 그가 하는 연구는 실용성이라고는 전혀 없다. 돈과도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는 대단한 사업가인 가네다가 박사 학위만 따면 사위로 맞아들이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거기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구샤미나 메이테이가 그 문제를 가지고 설왕설래할 때도 정작 간게쓰 본인은 그 일에 전혀 개의치 않고 무시해 버린다. 남들이 부잣집 사위라는 자리를 두고 뭐라도 떠들어대든 말든 그는 어느 날 고향으로 내려가 시골 색시와 결혼을 해버린다.


어찌 보면 이들 세 사람은 근대 일본의 속도와는 맞지 않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메이테이나 간게쓰는 그 당시 모두가 사력을 다해 달려가는 방향과는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그들의 이웃인 사업가 가네다나 그의 아내 하나코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돈으로 움직인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구샤미와 그의 친구들은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모르는 답답한 인간들인 것이다. 물론 그들이 돈과 명예, 권력에 아주 초연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 역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수세미외처럼 때때로 그 앞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며 한없이 작아지기도 한다. 그래서 고양이인 의 눈에 구샤미와 메이테이, 간게쓰는 자신들이 자처하는 천연거사속인들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지금 주인이 밟고 있는 곳은 문지방이다.”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교언영색원전활탈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다.”(358)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돈이나 권력 때문에 인정을 져버린다든지 허둥지둥 그 길만을 좇지 않는다. 구샤미는 그렇게 살다가 세상의 낙오자로 살게 될 거라는 지인의 말에 자네는 자꾸 시대에 뒤처지는 걸 걱정하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시대에 뒤처지는 편이 낫다네...아무리 가봐야 끝이 있는 게 아니네. 도저히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거지.”(450) 이 말은 소세키가 이 작품을 통해 그 당시 서구화라는 불빛을 쫓아 몰려드는 불나방 같은 인간 군상에게 허울뿐인 발전과 흉내 내기 식의 서구화는 자기 본위의 삶이 아닌 타인 본위, 즉 세상이 만들어놓은 속도와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타고난 개성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짓밟아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삶은 불안하고 불행해질 수밖에는 없다. 그런데 세상은 다수의 방식이나 당시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들을 비웃고 소외시킨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세키가 왜 자신이 앓고 있는 신경증이 개인적인 병이 아니라 20세기 근대인의 병이라고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다소 이치를 알고 분별이 있는 놈은 오히려 방해가 되니 정신병원을 만들어 거기에 가 둬둔 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그렇다면 정신 병원에 갇혀 있는 자는 보통 사람이고병원 밖에서 날뛰고 있는 자가 오히려 미치광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쓰메 소세키현암사, p.465 )


고양이 는 인간들 모두가 개인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똑같이 속된 욕망에 사로잡혀 경쟁하고 서로를 공격하고 있으니 문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사는 인간들의 세상을 초열지옥바로 미치광이들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런 세상일수록 그 안으로 휩쓸려 들어가지 말고 자신만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개성의 동물이다. 개성을 없애면 인간을 없애는 것과 같은 결과에 빠진다. 인간의 의의를 완전하게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 개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발전시켜야 한다.”(598)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소설 속에서 소세키가 그리고 있는 고등유민들은 그 시대에 자신의 개성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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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등유민이 살아가는 방식, 도락

 

소세키는 자신의 강연 <도락과 직업>에서 도락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도락이란 자기본위로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한마디로 도락이란 자기 본성에 맞는 일을 하며 자기를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면 자연히 활력이 소모가 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돈벌이와도 연결된다고 주장을 했다. 그리고 소세키는 도락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예로 예술가들 즉 과학자, 작가, 미학자, 철학자 등을 얘기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예술가는 대중의 인기나 명예, 부에 편승하는 사람들이 아닌 오롯이 자기만의 스타일, 자기 언어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세키는 자기 본위의 시각을 가지지 않고서는 절대 제대로 된 예술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반드시 직업적인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스스로의 삶을 소신을 있게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자기 인생에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세키는 이런 도락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고등유민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 소설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구샤미, 메이테이와 간게쓰의 일상을 통해 그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 살펴보도록 하자.


메이테이와 간게쓰는 거의 매일 중학교 교사인 구샤미 집에 모여서 각자 관심거리에 대한 토론과 잡담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들 중 유일하게 정규직을 가진 사람이 구샤미인데 이들은 구샤미 집을 마치 자기 집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들락거리며 밥도 얻어먹고 간식도 얻어먹는다. 그런데 거기에는 어떤 자의식도 없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거기에 어떤 감정의 잉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돈이 없고 직업이 없다고 절대 기도 죽지 않고 오히려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하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모임을 만들어서 연극도 하고 바이올린 연주회도 열어서 즐기기도 한다. , 이들은 어느 한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토론도 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공부에 대해 조언을 하고 지지를 보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통섭과 횡단하는 지성의 현장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들은 이런 활동을 바탕으로 여기저기 강의도 하면서 생계를 해결한다.


근대적 프레임으로 이들을 보면 사실 한심한 사람들로 해석될 수도 있다. 교양이나 예의는 찾아볼 수도 없고 모두들 열심히 일하며 사는 시대에 대학을 나온 소위 고급 인력들이 쓸 데 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며 사니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예의나 겉치레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고 엘리트들의 정해진 코스를 가지 않는다. 모두가 연연해 하는 직업이나 돈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들은 이렇게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적 통념을 깨는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세키가 고등유민을 통해 의도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소세키가 살던 시대는 근대화가 한창이었던 메이지 시대였고 그 당시는 서구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열심히 일해서 자본을 축척하고 명예를 얻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나 즐거움이 물질적 요인의 산물이라고 믿고 돈이 많으면 당연히 그런 것들도 보장될 거라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일에 매진하던 때였다. 하지만 소세키가 보기에 그건 절대 자신을 배려하거나 돌보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자기의 본성대로 사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근대인들은 행복해지기는커녕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다고 본 것이다.


사실 사회적으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를 두기 시작한 것은 모두 근대 이 후의 사고방식이다. 그 이 전의 사회에서 노동은 오히려 비천한 자들인 노예의 몫이었고 고귀한 자들인 귀족은 자신을 위해 여가를 즐기며 창의적인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자들이었다. 인류학적으로 봤을 때도 인간이 일에만 매진하면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많다고 이야기한다.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라는 단어는 인간의 본질을 노동이 아니라 유희라는 점에서 파악하는 인간관이기도 하다. 소세키는 이렇게 고등유민과 도락을 통해 자본주의와 서구 근대라는 시대가 정해놓은 길이 아닌 다르게 살 수 있는 삶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헌데 어떤 사람들은 소세키의 고등유민을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니트 족이나 은둔 형 외톨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엄연히 다르다. 소위 니트 족이나 히키코모리라고 불리는 은둔형 외톨이처럼 모든 개인의 문제를 사회 탓으로 돌리고 타인을 원망하면서 스스로를 소외시키거나 그야말로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부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등장하는 고등유민들은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즐기는 자들이다. 소세키는 고양이 의 시선 속에 비춰진 이들을 통해 자신의 본성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을 구원하고 바로 그런 삶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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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금 우리에게 도락적인 삶이란

 

20세기의 일본 사회에서는 소세키가 말하는 도락적인 삶이 큰 질문거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들은 그 당시 모두가 당연히 믿고 있던 것들에 균열을 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에게도 소세키의 도락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지금은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지 않았나? 예전처럼 미래를 위해 무조건 참고 열심히 일만 하는 삶을 더 이상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욜로(YOLO)라는 말도 현재를 즐기며 사는 태도를 일컫는 신조어이다. 한 번뿐인 인생 즐기며 살자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세키가 말하는 도락적인 삶을 이미 살고 있는 것일까? 현대인들이 말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 곧 자기를 배려하는 도락적인 삶과 일맥상통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욜로 라이프를 외치는 많은 이들은 그런 삶을 실천하기 위해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고 여가를 이용해 여러 가지 취미 생활을 즐기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이미 상품화되어 자본을 통해서 구입해야 되는 실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누리기 위해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건 소세키가 말하는 자기를 배려하는 삶과는 더욱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락적인 삶을 위해 지금 하고 있는 직업을 버리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야 하나. 아니면 직업을 버리고 백수로 살아야 하나. 소세키는 자신의 글에서 아사히신문사의 주필로 일하면서 스스로 도락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평생을 돈벌이로 글을 썼던 소세키가 도락적인 삶을 살았다니.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직업을 가지느냐 아니냐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직업으로 시작했던 일도 도락이 될 수 있고, 도락으로 시작했던 것도 어느 순간 자기 본위가 아닌 타인 본위의 돈벌이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세키가 말하는 도락적인 삶을 실천한다는 것은 일상을 떠나 뭔가 새로운 것을 구성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지금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삶 속에서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스스로에게 더욱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눈앞의 현상 세계에 속박되어 물거품 같은 몽환을 영원한 사실로 인정하”(같은 책, 590)고 그것에 꺼둘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에게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이라는 건 아주 중요한 말”(585) 이라고도 언급한다.


이는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로 외부의 어떤 현상이나 작용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소세키는 그런 지경에 이르지 않으면 결국 인간은 괴로워서 못 견디(585)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죽는 것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하면 더 괴롭고.. 죽는 게 싫어서 걱정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죽는 게 좋을지 걱정하는지경이 된다는 것이다.그래서 향후 세계의 추세는 자살자가 증가하고 그 자살자가 모두 독창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을 하직할 게 분명하다.”(588)는 예견도 한다. 그렇다면 결국 소세키가 말하는 도락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세상이 만들어 놓은 욕망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고 머무는 바가 없이 계속 나아가는 삶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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