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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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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7-12-29 05:50 조회2,4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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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몸을 찾아서
 




김지숙(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월든』은 물질문명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숲으로 들어가 삶을 실험했던 소로우의 자전적 에세이다. 그래서였을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에 『월든』 역시 그런 책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작동하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책은 왜 그리도 지루한지, 읽는 내내 시계가 멈춰버린 것 같았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문명의 그림자를 똑소리 나게 꼬집는 소로우의 재기발랄한 입담에 빠져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소로우의 숲 생활이 본격적으로 나오자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는 소로우의 고독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고, 또 누구는 『월든』의 아름다운 문장에 푹 빠졌다고 하는데 왜 나는 『월든』이 지루하고 따분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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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절의 시대, 몸을 잃어버리다

30세의 전도유망한 청년 소로우가 숲으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한다. 학교 선생도 싫다고, 기자도 싫다고 이미 다 때려치운 상태다. 잘만하면 안정가도를 달릴 수 있는데 도대체 왜?


정말로 이제 우리 마을은 
저 날쌘 기차 화살의 표적이 되었네.
평화로운 들판 위를 울리는 정다운 소리는
―콩코드.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강승영 역, 은행나무, 2016, 176쪽)

‘기차’만큼 근대 문명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또 있을까. 소로우가 살았던 그 때가 바로 그랬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70년이 채 안되었지만, 미국은 자본주의의 직격탄을 맞으며 개척과 개발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숲이 베어진 자리에는 공장이 세워졌고 강을 연결한 자리에는 철로가 놓였다. 본격적인 물질문명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로우의 고향 콩코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추었던 일상은 기차의 정확한 기적 소리에 맞춰 이루어졌다. 도시로 갖가지 농산물과 목재들이 올라갔고 식료품과 가구들이 시골로 내려왔다. 집에서 직접 만들었던 쨈과 옷은 가게에서 사야 했고 스스로 짓던 집은 목수한테 맡기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 소몰이꾼들과 목동들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몰이꾼의 개들도 일거리를 잃어 버렸다. 몸을 쓰는 일은 줄어들었고 기계나 전문가들이 그것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보다시피 근대 문명이란 자연과 ‘단절’되면서 ‘몸이 소외되고 결국에는 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문명의 흐름에 몸을 맞추어 버리면서 몸이 개입할 수 있는 확률은 현저히 떨어졌고 그 결과 몸이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다. 몸을 통해 판단하고 결정하며 삶을 영위하던 시대가 사라진 것이다. 몸이 소외되다 보니 자기만의 확신이나 신념을 기대하기가 어렵고 삶에 대한 응용력이나 융통성 또한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유행을 쫓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러이러한 옷을 만들어 달라고 마을의 여자 재봉사에게 주문하면 “그녀는 정색을 하며 “요즘에는 사람들이 그런 옷을 맞추지 않아요.”하고 말한다. (47쪽) 도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에게 식료품을 팔러 왔을 때 “자기 농장에서 자라는 농산물로 자급자족하고 있으므로 “그런 것 필요 없소!”하고 말할 수 있는 농부는 한 사람도 없다.”(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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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이뿐이겠는가. 과학과 지식에 경도되다보니 채식을 하거나 효모 없는 빵을 먹으면 영양실조에 걸려 죽을 것처럼 생각한다. 낚시 미끼로는 꼭 지렁이를 써야만 하니 겨울에는 절대 낚시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소로우는 학교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강의되고 실습되지만 삶의 예술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83쪽) 학교에서 아무리 많이 배워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자기한테 어떤 문제가 생기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것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부딪힌 몸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근대 문명인들은 몸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현재의 생활을 신봉하고 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28쪽) 하며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로우는 달랐다. 정해진 틀에서 움직이는 세상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삐딱선을 탔으니 말이다. 소로우에게는 학생을 체벌하지 않고도 교육을 잘 할 수 있다는 확신, 글이란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써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엄격한 체벌을 통한 교육을 원칙으로 하는 학교, 계몽보다는 사람들에게 흥미와 재미를 주는 기사가 절대적 우선순위인 잡지사와의 간극을 좁힐 수가 없었다. 확신이나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는 양보나 타협이 통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논리가 아니면 그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해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처럼 소로우가 떠날 수밖에 없다. 
 


2. 숲 속에서의 생활, 몸의 감각을 일깨우다

그런데 솔직히 의문이다. 숲으로 들어가겠다는 소로우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숲으로 들어가야만 하는지 말이다. 다른 이유는 정말 없는 것일까. 
 
나는 우리 마을의 길들여지지 않은 가축들을 돌보았는데, 이 녀석들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가 충실한 목동들의 애를 여간 먹이는 게 아니었다. 또한 나는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농장의 이곳저곳을 살펴주기도 했다.(‧‧‧)나는 빨간 허클베리, 모래벚나무, 팽나무, 폰데로사소나무, 검정물푸레나무, 희포도나무와 노랑오랑캐꽃에도 물을 주었다.(‧‧‧)자랑삼아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이처럼 나는 내 직무를 오랫동안 충실히 해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나를 공직자의 대열에 끼워주거나 약간의 보수가 있는 한직閑職 하나 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점점 명백해졌다.(‧‧‧) 그리하여 나 스스로 앞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안 나는 더욱더 숲으로 얼굴을 돌리게 되었다.(38쪽)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하고서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에게 먹고 살만한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고 숲으로 얼굴을 돌리게 되었다는 소로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로우의 논리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소로우는 길들여지지 않은 가축을 돌보는 것,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농장을 살피는 것, 길가의 나무들과 꽃이 말라 죽지 않도록 물을 주는 것이 직무, 즉 책임지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불편하면 상대도 불편할 것이고 내가 목마르면 상대도 목마를 것이니 이것을 해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자랑스럽고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공직자의 대열에 끼워주거나 보수를 지불하기는커녕 관심조차 없으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한 것일까.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다. 자본주의와 긴밀히 결탁되어 있는 그들에게는 이윤을 추구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증표일 뿐만 아니라 성공한 삶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돈이 되지 않는 저런 일들이 중요했겠는가. 그런데다 그 대상이 인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까지 포함하고 있다니!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그나마 고려해보겠지만 나무나 꽃까지 돌봐야 하는 것은 그들로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소로우와 사람들이 갈리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소로우는 저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소로우처럼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자연’이라는 세계관을 가진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즉, 자연과 교감하는 신체에서 나올 수 있는 얘기라는 뜻이다. 사실 소로우는 자연과 교감하는 인디언들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이쯤 되면 소로우는 사람들과는 감각자체가 다르게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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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절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였던 에머슨이 소로우에게 끌렸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에머슨의 관점에 따르면 천재는 자연 속에 감춰진 메시지를 찾아내고 그것을 의식에서 끄집어내어 최상의 표현으로 바꿀 수 있는 자이다.”(하몬 스미스,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서보영 옮김, 이레, 2005, 25쪽) 한마디로 천재란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에머슨은 현관에서 인사를 건네는 이 하버드 대학 학생이 예사로운 젊은이가 아님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위의 책, 21쪽) 소로우에게 자연과 교감하는 천재성이 있음을 에머슨은 직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 단절된 사회에서 소로우가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통이나 관습, 주류적 가치에 맞춰 살 것을 요구하는 사회가 갑갑하게 느껴지는 건 물론이고 까닥하다가 그것들에 삶을 내주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잠재된 천재성을 하루라도 빨리 실현시키려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았을까. 결국 “소로우는 자신의 초절주의 철학을 실험대에 올려놓았고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헨리 솔트, 『헨리 데이빗 소로우』, 윤규상 옮김, 양문, 2001, 양문, 103쪽) 과연 숲으로 얼굴을 돌린 소로우가 찾아낸 자연의 감춰진 메시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 공생만이 살 길이다
  
숲에서 소로우가 유일하게 한 생산 활동은 콩밭을 일구는 것이었다. 농사를 짓다보면 의도치 않게 모든 것을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게 되는데 소로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슬과 비, 그리고 땅의 지력은 콩밭을 가꾸는 아군들이며, 적군들은 벌레들과 서늘한 날씨, 그리고 잡초와 우드척이었다. 특히, 비료도 쓰지 않고 소나 말, 기계도 없이 맨 손으로 짓는 농사는 그야말로 잡초와의 치열한 전투였다. 오죽하면 해도 해도 끝날 것 같지 않는 트로이 전쟁처럼 느껴진다고 했을까.  

그러나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 물레나물과 그 밖의 풀들을 쫓아내며 그들이 예부터 이룩해놓은 잡초의 정원을 망가뜨린단 말인가? 이제 남은 콩들은 곧 우드척을 당해낼 만큼 커질 것이며 또 다른 새로운 적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235쪽)

콩을 먹어치우는 우드척도 나중에는 콩한테 제압당하고 우드척이 사라지면 또 다른 적들이 나타난다. 콩밭, 여기에는 우주의 보이지 않는 손인 상생과 상극이 작동하고 있다. 콩을 생(生)하는 아군들과 콩을 극(克)하는 적군들이 콩의 생산량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콩을 살리는 아군들만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숲 전체가 콩밭으로 도배 될 테니 그처럼 끔찍한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많은 콩을 수확하려고 적군들을 다 없애면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다른 것들이 죽게 되고, 마침내 콩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파멸에 이르는 참담한 상황에 이르고 만다. 그래서 ‘자연은 독점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잡초가 자라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실은 새들이 잡초를 계속 먹어 치우고 있으며 동시에 콩들을 살리고 있다. 따라서 새들의 주식인 잡초를 쫓아낼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결국 소로우는 ‘공생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농사를 지으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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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내던 어느 날, 소로우는 ‘공생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는 사건과 마주친다. 소로우의 오두막 주변에서 자라던 수십 그루의 리기다소나무가 그것도 생쥐 한 마리에 의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생쥐가 리기다소나무를 위아래로 갉아먹지 않고 고리 모양으로 빙 둘러 갉아먹은 것이 사단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강한 번식력을 가진 리기다소나무들을 제어하기 위한 자연의 필연성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리기다소나무들이 온 숲을 점령할 것이고, 종국에는 생태계 전체가 파괴 될 테니 자연이 미리 손을 쓴 것이다. 독점하는 순간 그것을 아예 없애버리는 냉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세계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미국의 서부 개척은 상극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브레이크 없는 질주’였다. 사실 미국은 공화파-남부 노예주와 연방파-북부 자유주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정치가 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경을 넓히는 것에는 어떤 이견도 없었다. “신이 자신들에게 야만인을 몰아내고 이 대륙에 발을 넓히라는 ‘명백한 운명’을 내려 주었다고 주장하며, 신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했다.”(전국역사교사모임, 『처음 읽는 미국사』, 휴머니스트, 2016, 165쪽) 노예주였던 텍사스를 합병하기 위해 북부 자유주가 내세운 꼼수 역시 ‘명백한 운명’이었다. 멕시코 전쟁을 감행하며 서부로의 진격을 멈추지 않았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짓는데 일조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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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 영토 확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모르지만 자국민들의 희생도 만만치 않았다. 원주민들이 ‘눈물의 길’을 걷고 목숨을 잃을 때 백인들 역시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공생’이 뭔지 모르니 자연의 경고를 눈치 채지 못한 결과다. 소로우는 이런 정부에 항의하며 인두세를 납부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투옥된다. 이 일을 계기로 집필하게 된 책이 바로 『시민의 불복종』이다. 


홀로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
  
소로우가 숲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했다. “그곳에선 무척 외롭겠군요. 특히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밤 같은 때는 이웃이 그립지 않습니까?”(201쪽)라고.

다른 새들이 조용해지면 부엉이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죽음을 곡하는 여인들처럼 부엉부엉 하고 그들의 태곳적 울음을 시작한다.(‧‧‧)교활한 한밤중의 마녀들 같으니! 그들의 노래는 시인들의 정직하면서도 투박한 노래가 아니라 실로 엄숙하기 짝이 없는 무덤의 노래이며, 동반 자살한 두 연인이 지옥의 숲에서 지난날 이승에서의 강렬했던 사랑의 고통과 기쁨을 돌이켜보면서 서로를 위안하는 노래인 것이다.(‧‧‧)“아, 차라리 태어나지 말 것을!”하고 호수 이쪽에서 부엉이 한 마리가 한숨을 쉬고는 절망에서 우러난 불안한 심경으로 날아올라 한 바퀴를 돌더니 회색 떡갈나무들 속에 새로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러자 “‧‧‧태어나지 말 것을!”하면서 호수 건너편에 있는 다른 부엉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응답한다. 그러자 또 “‧‧‧말 것을!”하고 멀리 링컨 숲에서 응답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190쪽)
  
월든 숲에서 소로우가 들은 부엉이의 소리다. 사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로우의 문장력이 뛰어나고 의인화하는 능력이 탁월해서 이처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스승은 그게 아니라고, '교감하지 않고서는 저런 묘사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다시 읽어보니 정말 그랬다. 소로우는 단순히 부엉이의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연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절망과 비탄에 잠긴 부엉이와 교감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올빼미의 우울한 세레나데에 소로우는 신음했고 술에 취한 황소개구리의 멋들어진 노랫가락에 덩달아 신이 나기도 했다. 염소의 구슬픈 하소연을 듣다 잠 못 이루기도 했다. 낮이라고 달랐을까. “황색의 흙이 자신의 여름 생각을 쑥이나 개밀이나 피 같은 잡초가 아니라 콩잎으로 나타내도록 설득”(237쪽)하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어떤 날은 “사격!, 제발 사격!”(345쪽)을 외치며 검은 개미에게 격렬히 저항하는 붉은 개미의 살기어린 눈에 몸서리치다 “그날 내내 흥분과 더불어 처절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347쪽) 되강오리와의 멋진 한판승부를 기대하며 뒤쫓아 보지만 그것의 교활함을 당할 수 없어 씩씩거리다 끝나기 일쑤였다. 숲에서 이렇게 지내고 있는 소로우에게 외롭다는 말이 통할 수 있을까. 그럼, 어떻게 소로우는 자연과 교감할 수 있었을까. 
  
자연에는 ‘마땅히 그래야한다’는 당위나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규정된 것이 없다. 즉, 자연에는 표상이 없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내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숲에서 살고 있는 소로우의 몸은 마을에서 살 때의 그 몸이 아니었다. 소로우의 몸은 표상이 없는 자연의 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몸의 감각이 깨어났던 것이다!’ 소로우가 낚시를 하다가 “자연과 다시 연결되는 기이한 체험”(264쪽 재인용)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우정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 있었던 것도 몸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조용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자연 속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속에, 또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속에 진실로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공기 그 자체처럼 무한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우호의 감정이었다.(‧‧‧)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 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황량하다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200쪽)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소로우는 대자연 속에, 빗속에,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속에 우정이 존재함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몸의 아주 미세하고도 단순한 감각이 깨어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저렇게 말할 수가 없다. 즉 몸의 감각이 깨어나면서 ‘만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그 결과 ‘어떤 것과도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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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는 말한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개인도 적당한 크기의 넓고 자연스러운 경계선은 물론 상당한 크기의 중립지대마저 가져야 할 것”(213쪽)이라고. 중립지대란 나와 다른 생각들이 혼재 해 있는 곳으로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는 곳이기에 표상이 사라질 때만이 중립 지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홀로 있을 때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면 자기의 생각을 놓치게 되고 통념에 휩쓸리기가 쉽지만 홀로 있을 때는 자기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좀 더 투명하게 바라보면서 정리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고독의 시간은 표상에 찌들어 있던 몸이 정화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독의 시간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깨어나면서 새로운 생각의 길이 열리는 변화와 생성의 시간이자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자기가 되는 시간이다. 소로우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 심신에 좋다고 생각한”(205쪽) 것도, 평생 동안 산책을 즐긴 것도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소로우는 고독 속에서 표상으로 얼룩진 몸을 닦아내고 있었다. 
  

정언명령으로서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
  
그렇다면 소로우가 왜 그렇게 ‘간소하고 간소하게 살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몸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요 회복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나이 또래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최근 몇 년 동안 육류 및 차와 커피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것들이 건강에 무슨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을 알아내서가 아니라 어쩐지 마음에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육식에 대한 거부감은 경험의 결과가 아니고 일종의 본능인 것이다. 검소한 생활을 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점에서 더 아름답게 생각되었다. 완벽하게 해낸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나의 상상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나름대로 할 만큼은 했다. 자기의 고매한 능력, 시적인 능력을 진정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은 육식을 특히 삼가고 어떤 음식이든 많이 먹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음은 나는 알고 있다.(322쪽)
  
소로우의 말에 따르면, 검소한 생활과 검소한 식사를 하는 것은 고매하고 시적인 능력을 최고 상태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도대체 그런 상태란 어떤 것일까. 
  
고백하건대, 나는 시를 잘 읽지 않는다. 아니, 읽지를 못한다. 난해해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쓴 것 같은 말들의 향연과 파격적인 형식에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웬만하면 시 읽기를 피한다. 물론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해맑은 시도 있다. 그렇다. 시란 이런 것이다. 말하자면 표상에 얽매여있지 않을 때라야 시를 쓸 수 있다. 그래서 고매한 능력과 시적인 능력이 최고라는 것은 표상에서 자유로운 상태, 천지만물과 교감할 수 있도록 감각이 완전히 깨어있는 신체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신체 상태와 검소한 생활, 검소한 식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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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해보면 알겠지만, 차나 커피는 사람을 흥분시킨다. 달고 맛있는 음식은 계속해서 원하게 만들고 나중에는 감각을 마비시켜 중독 상태로 몰아간다. 중세 신학자 후고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부른 배에서는 섬세한 감각이 나올 수 없다. 결국 소박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자연에 가까운 음식을 먹는 것이자 내 몸의 감각을 살리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소로우는 효모없는 빵과 물, 산딸기 등 자연 그대로의 소박한 음식을 즐겨 먹었다.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 것을 자각했기에 본능적으로 육식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랬더니 몸도 가벼워지고 살아가는 데 돈이 얼마 들지 않았다. 한마디로 중노동과 대식할 필요가 없어졌다. 돈을 벌지 않고 육체적 노동만으로 생계를 꾸려가니 생활자체가 굉장히 심플해지고 감각이 오롯이 깨어있을 수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소로우. 돈을 번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거기에 맞춰야 하겠기에 아무래도 표상에 물들기가 쉽다. 소로우가 소박한 음식과 단순한 생활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 몸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확장시키기 위해선 몸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럴 때 자기의 삶을 어떤 것에도 내어 주지 않을 수 있고 자기가 확신하는 삶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박하고 단순한 삶은 정언명령이다.’ 



3. 당신은 왜 거기에 있는가
   
『월든』의 하위 텍스트로 『시민의 불복종』을 읽었다. 『월든』의 부드럽고 수사적 문체와는 너무나 달라서 깜짝 놀랐다.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이면서도 거침없이 내뱉는 소로우의 말들은  마치 유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명확하고도 단호한 소로우의 면면을 놓친 줄 알고 여기에 초점을 맞춰 『월든』을 읽다 오독하기도 했다. 어찌하여 두 책의 문체는 이렇게도 다른 것일까. 
  
언급했듯이 숲에서 살 때 소로우는 멕시코 전쟁과 노예제도를 반대하며 인두세를 납부하지 않아 투옥되었다. 세금을 내지 않은 건 ‘공생’의 개념이 전혀 없는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숲에서 나온 후, 자신의 투옥사건에 대해 강연을 하며 불합리한 정부를 고발하고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소로우는 단 한 명의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그것이 정부의 독단과 질주를 막을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공생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농사를 통해 몸으로 체득하고,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숲에서의 생활은 몸의 감각을 일깨웠기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어설픈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홀로 감옥에 들어가고 강연을 하는 등의 근본적인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직설적이면서 아주 투명하게 말이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감옥에 찾아온 에머슨이 ‘당신은 왜 거기에 있는가’라고 묻자 소로우 역시 ‘당신은 왜 거기에 있는가’라고 응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솔직히 난 이 대목에서 전율했다. 이 한마디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것이 과연 에머슨에게만, 그 시대에만 할 수 있는 얘기일까. 인디언과 흑인을 탄압하던 백인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은 물론이다. 
  
그렇다. 몸의 소외를 극복할 때만이 자연의 몸으로 살아가는 인디언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누구와도 어떤 것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소로우. 국가, 민족, 종교, 이념 등의 문제로 분쟁과 살육이 끝나지 않는 오늘, 『월든』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남고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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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을 읽는 내내 소로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답답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나는 ‘몸을 잃어버린 전형적인 근대 문명인’이었다. 몸의 감각이 죽어 있으니 자연과 교감하며 쓴 글을 지루하다고 치부하는 결례를 범하고 말았다. 간식을 소박하게 먹으라는 스승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밀가루가 들어있나 없나’만 따지는 무지한 제자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늘 고민이었는데 소로우가 명쾌하게 정리해주었다. 잃어버린 몸을 찾을 때 자기가 확신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내 삶의 모토도 정해졌다. ‘소박하고 단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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