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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어떻게 나 자신으로 살 것인가- 몽테뉴『수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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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병아 작성일17-12-29 13:44 조회3,1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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떻게 나 자신으로 살 것인가




강미정(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1. 위로
『보봐리 부인』을 쓴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는 실의에 빠진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몽테뉴의 책을 읽게. ...... 그러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이네. ...... 자네도 그를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걸세.” 그리고 슈테판 츠바이크는 『위로하는 정신』이라는 몽테뉴 전기를 썼다. 그는 "특정한 순간에야 비로소 그 완전한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지는 작가"(위로하는 정신슈테판 츠바이크유유안인희 옮김 21쪽)가 몽테뉴라고 했다. 몽테뉴가 원하던 영혼의 자유가 그에게도 절실한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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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 해를 함께 할 책을 정해야 했다. 한 책을 가지고 일 년을 함께하다니. 일 년이란 기간이 엄청 길게 느껴졌다. 이 긴 기간을 함께 해야 한다면 무엇보다도 나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책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나를 답답하게 하는 것이 있다. 내가 자신도 글도 사건도 선명하고 간결하게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올 일 년이 이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해가 되길 바랬다. 그래서 거기에 적합한 책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일단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주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몽테뉴 수상록』이다. 구체적이고 일상적 주제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에 내 생각을 견주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책을 읽고는 ‘아 큰일 났다’ 싶었다. 각 장은 재미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몽테뉴의 사유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가 무엇을 위해 이런 글을 쓴 것인지 잡히지 않았다. 단지 내가 건진 것은 유쾌한 명언들뿐이었다. 

학기가 진행되면서 수상록과 함께 나의 시련도 시작되었다. 전체 맥을 잡지 못하니 쓰는 글이 횡설수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지나온 세월의 햇수만큼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글이면 글 발표면 발표,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다. 어찌해야 하나? 내가 할 것이 아닌 데 오기로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깔끔하게 그만 정리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 자신을 이런 고통 속에 두는 것은 자기 배려가 아니지? 등등. 

이렇게 자신의 무능력과 무기력에 지쳐 있을 때, 몽테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일이다" (위로하는 정신, 슈테판 츠바이크, 유유, 안인희 옮김)라고 했다. 그의 문장은 나를 울컥하게 했다. 이렇게 "비틀거리고 발을 헛디디고 갈팡질팡하면서도 더듬더듬 자기의 길을 걸어"(몽테뉴 수상록육문사민희식 옮김, 207쪽)가는 것이 배움이 아닌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그런 배움의 길이 아니던가. 그 길에 있는 자신을 이해하기는커녕 그런 자신을 왜 그렇게 힘들게 보고 있었을까? 눈앞에 있는 자신을 보지 못했던 것이구나 싶었다. 나는 다른 나를 찾고 있었구나. 그러다 보니 내가 바라는 나와 지금 현재 존재하는 나와의 간격만큼 힘들어했던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지친 나에게 그래도 그렇게 가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해 줬다. 몽테뉴에게는 자신이 저 자신임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 위대한 경험에 동참해보려고 한다.

2. 관찰, 나에 대한 이해의 시작

수상록을 읽고 나서 내가 강력한 힘으로 느꼈던 단어는 관찰과 시험이다. 관찰과 시험은 우리의 앎을 구성하는데 필수적 수단이다. 자연 관찰은 우리에게 자연 현상에 대한 앎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을 무조건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나 앎이 언제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는 않는다. 사회 관찰을 통해 구성된 앎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어떻게 사회를 원활하게 운영할 것인가의 문제는 곧 어떻게 권력을 잘 행사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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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은 그냥 바라보거나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 사물을 ‘자세히 살펴서’ 그것에 가장 적합한 실체를 만들어 내려는 실천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찰은 대부분 외부 물체를 향해 있다. 외부로 향해 있는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면 어떨까? 자신을 관찰하고 시험하면서 자신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은 자기 수양과 단련의 과정이다.  이 과정 또한 자신의 실체를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 내는 실천이다. 몽테뉴의『수상록』은 그런 점에서 자신의 실체를 분명하게 만들어 내는 실천 그 자체였다. 몽테뉴가 관찰과 시험을 통해 자신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 가는 실천 말이다. 그런데 몽테뉴는 왜 이런 과정을 밟으려 한 것일까? 

몽테뉴가 살았던 16세기 프랑스는 36년을 종교전쟁 속에서 보낸다. 신교인 프로테스탄트와 구교인 가톨릭의 갈등이 전쟁으로 표면화되었다. 내 편이거나 네 편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려운 시대였다. 나란 존재는 시대에 묻혀 있었고 어느 쪽이든 선택이 필요했다. 몽테뉴는 가톨릭을 믿고 있었지만, 전쟁에 동조하지 않았다.

종교는 믿음이 바탕이다. 내 종교를 옹호하고 지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래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몽테뉴의 태도는 특이했다. 몽테뉴는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 종교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현재 프랑스를 내란의 행위로 몰아넣는 저 종교적 논쟁에 있어서 가장 훌륭하고 건전한 당파는 의심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고래의 종교와 정부를 지지하는 당파" (위의 책470쪽)라는 것이 몽테뉴의 입장이었다. 그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서로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잔혹하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몽테뉴는 "모든 악덕 중에서 잔인함을 - 천성에 의해서나 판단에 의해서나 - 가장 큰 악덕으로 여기며, 따라서 그것을 지독히 싫어한다."고 했다. 또한 "거짓말하는 것과 그보다는 덜하지만, 싹이 터서 자라지 않도록 끊임없이 싸워야 할 옹고집만이 악이라고" (위의 책 63쪽)  했다. 전쟁은 자신의 믿음 외에 무엇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완고함이며 살상과 잔혹을 특성으로 하는 것이다. 몽테뉴는 그런 독선과 잔혹의 상황에 자신을 두고 싶지 않았고, 믿음에 대한 소명감에 자신을 맡기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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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몽테뉴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13년간 다니던 보르도 고등법원을 퇴직하고 자신의 집 몽테뉴 성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나머지 시간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며 자신의 집에 은거하기로 했다. 몽테뉴는 앞으로의 삶은 "생각과 계획을 자신과 자신의 행복 쪽으로 되돌려야" 하며, "자신을 사회로부터 해방 시"키고, 외부로 향해 있던 힘을 거두어 자신에게 집중시켜 "이성과 양심을 존중하고 경외하며 자신을 다스리도록" (위의 책 327쪽)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에 자신을 펼칠 수 없을 때, 동양에서도 선비들은 은거를 택했다. 은거 시간은 학습과 수양으로 자신을 단련시켜 세상에 나갈 때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몽테뉴의 은거는 다르다. 생의 가장 활동적인 시기를 충분히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으므로 나머지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지금 감각으로 이해하기에는 터무니없는 나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 평균 수명은 33세 정도였다. 몽테뉴는 38세 정도면 살만큼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에도 얽매임 없이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야" (위의 책 327쪽) 하는 나이 말이다. 

자신의 집인 몽테뉴 성으로 돌아온 몽테뉴는 "정신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여 스스로 교류하게 하거나 자신 속에 평온하게 안주" 하게 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의 정신이 무게를 더하고 더욱 성숙해"지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몽테뉴의 바람과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정신은 순서도 목적도 없이 잇달아 수많은 괴이한 망상과 환상적인 괴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면 보통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잡생각을 없앨 방법을 찾는다. 취미 활동을 하거나, 뭔가 새로운 일을 찾아 밖으로 나가거나 한다. 그러나 몽테뉴는 무척 다른 결정을 한다. "그 망상들의 괴이함과 터무니없음을 관찰하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는 나의 정신이 그것들을 보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되기를 바라며 그것들을 기록해 두기"로 한다.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여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 글이 바로 에세라 불리는 수상록이다. (위의 책,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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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시험, 나의 확장

에세는 보통 시도, 시험, 실험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수상록은 몽테뉴의 시도이며 시험이라 할 수 있다. 몽테뉴에 따르면 수상록은 그의 정신에 떠오르는 온갖 환상과 터무니없는 망상에 대한 관찰이며, 자신의"‘판단력을 시험하기 위해 (수상록에) 온갖 종류의 경우를 이용" (위의 책, 368쪽)한 것이다. 몽테뉴가 말하는 터무니없는 망상과 이용했던 온갖 종류의 것은 ‘냄새에 대하여’, ‘술주정에 대하여’, ‘거짓말쟁이들에 대하여’, ‘엄지손가락에 대하여’, ‘병자를 흉내 내지 말 것에 대하여’처럼 일상적인 소소한 것에서부터 죽음과 삶, 정신, 영혼, 등과 같은 철학적 주제에까지 다양하다. 어떤 것들은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고민해봤거나 생각해본 것들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무심하게 지나쳐버린 것들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러한 주제에 대해 그의 판단력을 시험한 것이 수상록이다.
 
몽테뉴가 자신의 판단력을 시험할 때 사용하는 방법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생각과 견주어 보는 방식이다. 그는 그리스로마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이 읽었던 그리스로마 사상가들의 이야기나 사상을 자신의 생각과 함께 나열하면서 견주어 본다. 자신의 생각이 미흡하면 미흡한 대로, 그들과 같은 생각이라면 그것을 기쁘게 생각하기도 하고, 독특한 자신의 생각을 뽐내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몽테뉴가 판단력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판단력은 모든 문제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이며, 무슨 일에든 관여"하기 때문이다. 몽테뉴에 의하면 그 판단력은 "사물에 따라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따라서" 다루어진다. (위의 책, 368쪽) 즉 "모든 사물은 각기 나름의 무게와 크기와 성질을 지니고" 있지만, (위의 책, 369쪽) 사물들이 우리 내부로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그 사물을 자기가 이해하는 바에 따라 마름질하게 되는데 그것이 나의 판단력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행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판단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누구도 자신의 판단력을 옳음으로 간주하여 고집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옮음이 모두의 옮음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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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시험은 언제나 열려있다. 어떤 문제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 그는 처음 제공되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죽음에 대한 문제를 만나게 되면 자신에게 떠오른 생각을 힘이 닿는 대로 깊게 보려고 한다. "때로는 그 겉만을 핥기도 하고 때로는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때로는 뼈까지 씹어 보기도" (위의 책, 369쪽) 하면서 정리된 판단을 일단 받아들인다.

하지만 몽테뉴는 그것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는 관점은 사물의 일면만을 본 것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자기 판단만을 고집하거나 상대의 판단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우리에게 너무 일상적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임을 안다면 "언제라도 의혹과 불확실성에 굴복할 수 있으며, 내 본디 특성인 무지에 굴복할 수 있다."(위의 책, 369쪽)고 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로 확장된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유럽은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된다. 1562년 몽테뉴가 보르도 고등법원에 근무할 당시 그는 샤를 9세를 따라 루앙에 가게 된다. 루앙은 무역중심지라 동양과 신대륙의 소식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통역을 통해 브라질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다양한 풍속을 흥미로워했다. 에세에는 당시 들었던 이야기가 꼼꼼하게 적혀 있다. 아버지가 죽으면 자신의 몸속보다 더 좋은 묘는 없다는 생각에 그 살을 함께 나눠 먹는다거나, 시신을 토막 내어 새나 짐승들에게 나눠주는 장례풍습, 그 외 결혼 풍습, 인사법, 신체를 대하는 다양한 태도 등. 당시 유럽 사람들은 이런 풍습을 야만적이라 비난하며, 시신을 먹지 말고 화장시키라고 제의했지만, 오히려 제의를 받은 사람들이 더 기겁했다고 한다. 상대방의 풍습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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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몽테뉴는 이런 일이 관습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에서도 일어난다고 말한다. 사실,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공통관념들은 그 사회에만 통할 수 있다. 그런데도 각 사회는 자신의 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려 하고 평정하려 한다. 하지만 나라마다 인종마다 다른 관습과 관념이 아무리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이성적이더라도"이성이 그 근거와 기반을 찾아낼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것" 없으며, "습관을 이루려 하지 않거나 이루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위의 책, 168쪽) 는 것이 몽테뉴의 생각이었다. 습관은 개인이 단지 어떤 상황에서 반복된 행위로 생긴 익숙함이다. 그 익숙함이 사회적으로 고착되면서 관습이 되고 그 사회에서 인정받는 이성적 행위가 된다. 관습은 자신과 다른 것을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을 ‘잠들게’ 하기도 한다. .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젖과 함께 관습을 마시기 때문에, 그리하여 세계의 모습은 관습이라는 형태로 우리 눈에 맨 처음 나타나기 때문에 마치 그런 관습의 길을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우리들 주위에서 신뢰받는 공통된 관념, 조상들에 의해 영혼 속에 주입된 관념들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고 자연스러운 관념들인 것처럼 보인다. (몽테뉴 수상록, 육문사, 민희식 옮김, 177쪽)


그래서 한 사회의 관념은 다른 사회의 관념과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자기 사회의 관념이나 관습을 세계의 중심으로 고정하기 때문에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관념이나 관습에 배타적 태도를 보인다. 우리는 자주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된다. 그 힘이 너무 강하므로 우리는 "그 손아귀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으로 돌아가 이성적으로 습관의 명령을 고찰해 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위의 책, 175쪽) 하게 된다. 특히 종교적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관념은 그 힘이 더욱 강하다. 프랑스의 종교 전쟁뿐 아니라 얼마 전에 접했던 미얀마 로횡야족 학살사건은 인간의 관념이 "판단력의 눈을 잠들게"한 대표적인 사례다.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불교도들은 이슬람교도인 로힝야족의 마을을 불태우고 학살했다. 

몽테뉴는 자신의 견해에 고정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외부에 묶여 있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유로운 자신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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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된 고독, 자신에게 머무르기
   
짐을 꾸리자. 어서 친구들과 작별하자. 우리를 다른 곳에 속박시키고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억센 마수로부터 도망치자. 우리를 묶고 있는 매우 강한 이 끈들을 풀어야 한다. 이제부터 이것저것 사랑해도 좋지만 우리들 자신 이외의 어떤 것과도 결합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다른 것들을 소유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떨어질 때 피부와 살의 일부까지 떼어 갈 정도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신에게 머무를 줄 아는 일이다. (몽테뉴 수상록, 육문사, 민희식 옮김, 327쪽)


몽테뉴의 자유는 자신에게 돌아와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라고 말할 때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언뜻 머무름과 벗어남이 정반대인 듯해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테뉴의 머무름은 벗어남을 전제로 하는 머무름이다. 몽테뉴의 벗어남은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에서부터다. 우리의 영혼을 속박하는 것은 나를 나일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 떠나고자 할 때 떠날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 벗어날 때 나의 피부와 살을 떼어내야 할 정도로 집착하는 것들이다. 명예, 재산, 가족, ‘오만과 탐욕, 사치, 나태, 분노’와 같은 것들이다. 이미 이런 것들은 나와 한 몸이다. 어떻게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가? 

몽테뉴는 그 힘이 외부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것들에서 벗어나 "자신에게로 되돌릴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위의 책, 325쪽) 고 말이다. 영혼의 힘으로 자신에게 돌아와 머무르는 상태가 참된 고독이다. 우리가 말하는 고독은 단절과 고립이다. 사회로부터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단절과 고립 말이다. 그런데 몽테뉴의 의미는 좀 다르다. 몽테뉴의 고독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짐을 내려놓고 자신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혼의 힘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는가?

몽테뉴는 영혼을 자신에게 되돌리려면 단련이 필요하다고 봤다. 몽테뉴는 정신에 많은 것을 주입하는 것보다 단련시키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그것을 위해 가장 강력하고 충실한 방법이 명상이다. 명상은 "자신의 사상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준 특권이라고 했다. 자신의 사상과 대화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지속적 관찰과 시험이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매여 있는 온갖 외부의 욕망을 드러낸 자신과 마주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장 위대한 영혼은 명상을 업으로 삼는다." "명상보다 더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명상보다 더 자주 쉽게 몰두할 수 있는 것도 없다."(위의 책, 5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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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명상과 더불어 영혼의 단련에 대화를 통한 교제를 말했다. 몽테뉴는 "교제의 목적은 친분과 우의와 대화"이며 교제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소득은 영혼의 단련이라고 말한다. 좀 특이하다. 영혼의 단련에 교제라니. 특히 대화를 통한 교제는 "정신을 훈련시키는데 자연스러운 방법이며 인생의 어떤 행위보다도 즐거운 것"(위의 책, 576쪽) 이라 한다.

대화가 정신을 훈련시킨다는 말은 인간의 다양성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생각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몽테뉴 사유의 출발이다. 대화는 각자 다른 생각을 나누는 과정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상대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에게 자신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대화의 시작이다. 

모든 이야기가 대화는 아니다. 대화는 ‘서로’ 주고받음이 있다. 그곳에서는 내가 가진 지위나 명성이나 부가 아닌 내 생각과 상대의 생각이 만나는 현장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올바른 질서가 있어야 한다. 권위나 지위라는 힘을 사용하는 대화는 올바른 질서라 할 수 없다. 상대의 생각이 무엇인지 그 논지를 잘 이해하고 현학적이지 않은 쉬운 말로 솔직하고 논리적인 대화를 진행하는 것이 올바른 질서다. 이런 과정은 참 어렵다. 어렵다는 것만으로도 단련의 시작이다. 거기다 솔직한 대화는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를 비난하고 나를 돋보이고자 하는 솔직함이 아니기 위해서는 늘 자신을 관찰하고 시험할 힘이 있어야 한다. 대화는 그렇게 힘을 기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감이당에서 공부를 하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알게 되고 조금이라도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스승의 지적과 도반들과의 대화를 통한 지적이었다. 그런데 정말 아팠던 것은 도반들의 지적이었다. 나는 나를 잘 보지 못하지만, 상대는 나를 훨씬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지적을 받게 되면 내 문제가 선명해진다. 그러면 출구를 찾기 위한 고민을 하게 된다. 솔직하고 과감한 지적이 아니라면 이 과정이 치열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아픈 지적에는 온몸이 반응한다. 몸 전체가 아프면 아픔을 덜기 위해 변하려고 애쓴다. 그런 과정이 수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몽테뉴의 생각, 대화가 수련이라는 것,이 얼마나 탁월한 생각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몽테뉴는 자신이 원하는 고독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내가 사랑하고 주장하는 고독이란 주로 감정과 생각을 나 자신에게로 돌리며, 발걸음이 아니라 욕망과 근심을 억제하고, 외부 사물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마치 죽음을 피하듯이 예속과 속박을 피하고, 많은 사람이 아니라 많은 일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 육문사, 민희식 옮김, 562쪽) 


그렇다. 고독은 밖으로 발산하는 에너지가 아니다. 그것은 안으로 침잠하는 에너지다. 외부로 향해 있던 나의 시선을 내부로 돌리는 행위다. 외부 탓으로 환경 탓으로 누구 탓으로 돌렸던 이유를 나에게 돌려보는 활동이다. 나의 내부로 들어와 자신에게 일어났던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여 그것과 만나는 시간이다.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내가 하는 근심이 정말 근심해야 할 일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들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활발한 생동감을 주는 것인지, 고집으로 고착시키는 것인지도. 그래서 이 시간은 나의 평온과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을 멀리할 용기를 내고 힘을 기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 나를 두는 것이 참된 고독이며 자신을 위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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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로를 넘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보다는 나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빌려 온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것에 의해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몽테뉴 수상록, 육문사, 민희식 옮김, 459쪽)

몽테뉴는 20년간 수상록을 썼다. 달라진 생각을 덧붙이기도 하고 새로운 장을 쓰기도 하면서 보낸 시간이 그렇다는 것이다. 처음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망상을 기록해 두어 나중에 자신이 그것을 보고 부끄러이 여기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연구하는 일이 자기 정신의 가장 중요한 연구라고도 했다. 20년이라는 긴 시간은 자신을 연구한 시간이었다. 그 연구의 원칙이 위에 있는 글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몽테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생각해 주기를 기대하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믿는 대로 글을" 쓴다고 했다. 자신의 "목적은 오직 내 생각을 나타내는 것뿐"(위의 책, 210쪽) 이라고. 이 당당함이 그의 힘이라 생각한다. 그 힘은 몽테뉴 자신에게서 나온다.

몽테뉴를 만나면서 많은 것에 놀랐지만, 특히 그의 호기심과 집중력은 특별났다. 몽테뉴는 수상록 외에도 프랑스 북동부,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를 17개월 동안 여행한 기록, 여행일기를 남겼다. 여기에는 기후나 풍습은 기본이고 만나는 사람, 온천물 온도나 자신이 실험한 마시는 방법, 자신이 묵었던 여관의 테이블 수와 침대 수, 각 종파의 다른 예식 법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는 사소한 경험이나 생각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몽테뉴는 그것들을 충분히 곱씹어 잘 소화되게 만들어 흡수하여 에너지로 만들었다. 그런 과정이 그의 생각을 선명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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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선명하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닌 것들은 없앤다는 것이다.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으니. 그것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생각이니 같은 것을 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어떤 이론을 만들거나 결론을 내리지도 않았다. 스치고 지나가는 많은 생각과 경험들에 멈추어서 집중하여 관찰하고 시험할 뿐이었다. 

몽테뉴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 속에 자신을 풍부하게 할 재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부딪히고 생각했던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만나는 생각과 내 몸의 오감에 집중한다. 다른 사람의 멋진 말이나 지식은 그 자체로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의 경험과 생각으로 버무리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이 자신의 것에 의해 풍요로워지는 방법이 아닐까?

그리하여 몽테뉴가 만난 것은 멈추지 않는 자기였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아니라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내일도 그럴지는 모른다. 내일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내가 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시험할 뿐이다. 그것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을 아는 자가 몽테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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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다. 나를 고민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내 시선의 방향이다. 바깥을 통해 나를 보려는 순간 내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다른 것과 비교된 나로 보인다. 내가 선명하지 않는데 어찌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겠는가? 시선의 방향을 바로 잡는 것,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은 나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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