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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나의 『들풀』 사용 설명서-루쉰 『들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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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연 작성일17-12-29 14:32 조회3,25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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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들풀』 사용 설명서



성연 (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재미와 의미. 티비앤 광고가 아니다. 이것은 내 삶의 모토였다. 재미와 의미가 영원히 교환되어도 좋았을 어느 날, 삶에 질문이 생겼다. 왜 이렇게 허무한가. 공부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살아온 일상을 무너뜨린 허무는 그 후,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루쉰의 고독은 적막이다. 적막은 루쉰을 지금의 루쉰으로 만든 그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다. 삶의 방식은 사는 법, 일상이다. 적막과 일상. 이 둘의 관계를 푸는 데 나는 『들풀』의 이상한 시들과 함께 갈 것이다. 왜냐하면 루쉰이 가장 적막한 한 시기를 통과하는 한복판에서 솟아오른 것이 『들풀』이기 때문이다. 이 길은 『들풀』에 대한 그간의 오독을 막아줄 것이다. 더불어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의 오독 또한 막아줄 것이 틀림없다. 일단 그렇게 믿고,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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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개의 방, 두 번의 적막
   
직장에 다니고는 있는데 딱히 희망도 없고, 쓸데없이 바쁜데 모조리 전시행정 같은 일이라면? 게다가 정국은 살얼음판이라면? 1916년 즈음의 루쉰이 딱 이랬다. 루쉰이 이 시기를 ‘무료’라 이름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공무원 루쉰의 무료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기인한다. 다른 공무원들은 정말로 무료해서 혹은 위안스카이 정권 하의 혹독한 시기를 견디려고 서화에 빠지고 노래를 부르고 여자와 다도에 빠졌다. 이때 루쉰이 한 일은 비문 베끼기. 1916년 베이징 보수서옥의 방 한 켠, 그의 ‘마비’와 ‘죽은 척’은 공부였다.
   
1923년 10월의 적막은 ‘환멸’이다. 사건은 정신적 동지였던 동생 저우쭤런과의 결별이다.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파국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동생과의 결별보다 더 근본적인 환멸은, 갑자기 닥쳐오는 비극적 사건 속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내적 고통이었다. 이러한 내적 고통에 대한 “절망적 항전”이 루쉰의 일상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일상을 살았다. 글쓰기와 강의, 청년들과의 만남, 밥 먹고 병드는 모든 일상과 일상 아닌 일상까지 모두 포함하는 그런 일상을, 씨산타오후퉁 21번지, ‘호랑이 꼬리’에서 루쉰은 베이징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무료’와 ‘환멸’은 일상을 파괴하는 수동적 힘이다. 무료와 환멸의 수동적 힘은 어떤 순간 능동적 힘으로 전도된다. 비결은 바로 일상이다. 두 번의 적막의 공통점은 일상으로서의 공부와 글쓰기였다. 적막과 일상이 만나면 변신을 부른다. 루쉰의 두 개의 방은 두 번의 적막을 통과하는 변신의 장소다. 비문 베끼기에서 『광인일기』로, 다시 『광인일기』에서 다른 방식의 글쓰기로의 변신. 그리고 그 사이에 『들풀』이 있다.

2. 적막한 자의 꿈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우리는 꿈 없이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루쉰을 읽기 전과 후로 나뉜다. 루쉰을 읽기 전 꿈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루쉰을 읽고 난 후의 답 역시 꿈은 필요한 것이다. 단, 그 꿈은 반드시 “지금의 꿈”이어야 한다. 중년의 루쉰에게 이런 깨달음을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1925년 『들풀』에 수록된 시 「희망」을 보자.


전에는 내 마음도 피비린내 나는 노랫소리로 가득하였다. 피와 쇠붙이, 화염과 독기, 회복과 복수. 헌데 문득 이 모든 것이 공허해졌다... 희망, 희망, 이 희망의 방패로 공허 속 어둔 밤의 내습에 항거하였다. 방패 뒤쪽도 공허 속의 어둔 밤이기는 마찬가지이건만, 그러나, 그런 식으로 나는 내 청춘을 줄곧, 소진하고 있었다....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마찬가지이다. (『들풀』, 「희망」, 그린비, 43쪽 인용)
   
   

청춘의 루쉰에게 희망은 “피비린내 나는 노랫소리”였다. 당시 중국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희망에는 피비린내가 난다. 혁명의 바람은 목숨을 내건 강력한 희망이었다. 서구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 급변하는 중국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혁명을 위해 죽거나 혁명에 의해 죽거나. 현실은 “폐허와 무덤”이었다. 폐허와 무덤은 지금도 모습을 달리하며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반복된다.
  
오늘날 우리의 희망에도 피비린내가 난다. 미래의 황금세계를 위해 각종 고시를 무기삼아 현재를 죽이고 사랑을 지운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력을 죽인다. 자기 착취적인 희망의 대가로 피어나는 희망은 꺾이면 바로 절망이 된다. 자본-권력자/청년들/구경꾼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트라이앵글은, 희망과 절망의 반복으로 소진되어 버리는 삶을 자발적으로 희망하게 만든다. 꼭 정규직 진입을 위한 사투로서의 희망이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무엇이든, 꿈을 장래 희망이라는 협소한 범위로 규정짓는 순간, 우리는 희망의 노예가 된다. 
   
노예에게 희망은 마취다. 노예가 희망에 마취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희망이 깨지는 두려움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든다. 여기, 연예인을 꿈꾸다 나이 들고 절망적이 된 사람이 있다 하자. 그에게 마침 감이당에서 연극단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의 선택은? 그의 희망이 노예의 마취가 아니라면 길을 찾지 못한 이때, 지금 할 수 있는 것으로 지금의 꿈을 실현하면 된다. 만약, 노예의 마취라면 “깨인 듯 취한 듯, 죽고 싶게 또는 살고 싶게”  살아가면 되겠지. (『들풀』, 「빛바랜 핏자국 속에서」, 그린비, 96쪽 인용)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 아니라 꿈이다. 희망의 꿈과 밤의 꿈은 동음이의어다. 희망으로서의 꿈은 밤의 꿈만큼 허구일 수 있다는 뜻이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말은 꿈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폐허와 무덤이 현실이기에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하는 것이다. 단, 그 꿈은 미래에 붙들린 꿈이 아니라 지금의 꿈이어야 하며, 현실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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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절망의 인접 항은 허망이다. 절망이 허망해졌다는 것은 더 이상 희망에 갇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목적으로서의 희망을 꿈꾸지 않고, 그렇기에 절망할 것도 없는 것. 이게 허망이다. 그러므로 허망은 허무가 아니다. 허무를 넘어서 희망도 절망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전제로부터의 해방이다. 희망은 오류다. 오해하지 말자.

꿈은 현실이고 현실은 꿈이다
희망 아닌 꿈 얘기를 해보자. 꿈은 허구다. 그것은 상상이자 비현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루쉰의 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꿈에는 현실, 비현실이 따로 있지 않다. 꿈은 목적 없는 행위이고 밤은 자기 해체의 시간이다.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들풀』의 꿈은, 자기 해체를 위한 하나의 장치다.  

나는 내가 좁은 골목길을 가는 꿈을 꾸었다. 개 한 마리가 등 뒤에서 짖었다. 내가 오만하게 돌아보며 꾸짖었다. “야! 닥쳐! 쥔 믿고 유세하는 개새끼!”...“나는 부끄러워. 아무리 해도 구리와 은을 구별할 줄 모르겠고, 무명과 비단을 구별할 줄 모르겠고, 관리와 백성, 주인과 노예...를 구별할 줄 모르겠으니 말이야.“ (『들풀』, 「개의 힐난」, 그린비, 68쪽 인용)


개는 “주인 믿고 유세하는 개새끼”다. 한마디로 노예다. 그런 노예가 ‘나’에게 인간의 분별심을 디스한다. 개의 디스로 생각해봐야할 두 가지는 ‘수치심’과 화자인 ‘나’다. 우선 수치심은 사회규범에 어긋났을 때 느끼는 도덕적 덕목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성찰에 가깝다. 왜냐하면 수치심은 기존의 자신에 균열을 내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균열은 타자로부터 온다. 타자를 가르는 조건은 타자라는 외부가 나를 균열 내는 존재인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러한 균열은 확고했던 ‘나’를 부순다. 
   
확고했던 ‘나’는 낮의 루쉰이다. 이 논쟁의 명수는 자신의 확고한 칼로 적을 겨눈다. 그러나 낮의 상대는 적이지만 밤의 상대는 자기 자신이다. 그는 묻는다. 나도 주인 믿고 유세하는 노예 아닌가. 내가 죽어라 싸우고 있는 적들의 모습이 혹시 나에게도 있지 않은가. ‘나’ 역시 『들풀』의 시 속 자신의 꿈에서 죽은 뒤 “그들이 뭐라 하는지 듣고 싶어 하고, 남들의 평판 따위 코웃음 칠 수 없는”(「죽은 뒤」, 그린비, 86쪽 인용) 사람이라는 사실을 낱낱이 드러낸다. 이러한 자기 해체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나’에 대한 해체다. 소설가, 혁명가, 선생, 논쟁의 명수. 자신이 추구해왔던 가치에 의해 달라붙은 이름을 떼어내는 작업이 자기 해체다.     
  
개와 나의 동일시는 ‘나’와 ‘타자’를 뒤섞는 행위다.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지 않는 ‘나’는 어떠한 정체성도 없이 거리, 골목길, 침대, 얼음산,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개, 거지, 귀신, 시체, 그림자, 늙은 여인, 죽은 불이라는 내 안의 타자들을 만난다. 자기 안의 타자들과의 만남으로 자기를 균열내고 자기를 바로 보는 것, 그것은 현실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비유가 아니라, 실재다.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 되는 이 지점이 루쉰의 꿈속인 비현실과 꿈밖의 현실이 구별 불가능한 이유다. 꿈은 뒤틀린 시공간이다. 연속적 시간의 흐름은 끊어지고, 공간적 비약이 마구 일어나는 것이 꿈이다. 『들풀』의 꿈속, 사람들과 장소들이 바뀌고, 꿈들이 생성 소멸하는 그 길의 끝에서 ‘나’는 ‘나’의 죽음과 만난다.

적막한 자의 내장

...호탕한 노래 열광 속에서 추위를 먹고, 천상에서 심연을 보다. 모든 눈에서 무소유를 보고 희망 없음에서 구원을 얻다.........떠도는 혼 하나가 긴 뱀으로 변하다. 독이빨로, 남을 물지 아니하고 제 몸을 물다. 마침내 죽다... .......떠나라!.........(『들풀』, 「빗돌 글」, 그린비, 75쪽 인용)

   
여기서 ‘나’는 깨인 자다. ‘나’는 열광에서 추위를, 천상에서 심연을, 희망 없음에서 구원을 볼 수 있는 자다. 그런데 ‘나’는 그런 ‘나’도 넘어선다. 
「빗돌 글」의 ‘나’는 뱀 대가리를 물어뜯으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뱀은 자기 안의 “그리움과 결별, 애무와 복수, 양육과 멸절, 축복과 저주”(「무너지는 선의 떨림」, 그린비, 78쪽 인용)이다. 나와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가치들을 몰락시키는 것이 뱀이 자기 몸을 물어뜯는 행위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몸만 죽은 것은 죽은 게 아니다. 그는 “심장의 본디 맛”에 대해 말한다.
   
   “...심장을 후벼 스스로 먹다. 본디 맛을 알고자. 아픔이 혹심하니 본디 맛을 어찌 알랴?...”
“...아픔이 가라앉자 천천히 먹다. 이미 성하지 않으니 본디 맛을 어찌 또 알랴?...“(『들풀』, 「빗돌 글」 , 그린비, 75쪽 인용) 
   
   

이 정도면 해체의 끝이다. 뱀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는 것도 죽음과 같은 경험이다. 하물며 자신의 내면 온갖 알 수 없는 욕망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두려워 도망칠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제 몸을 물어뜯는 뱀은 아직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감정과 가치들을 상징한다. 심장의 본디 맛은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간다. 심장의 본디 맛은 인간의 심연, 즉 암흑과 공허다. 루쉰은 「그림자의 고별」의 주석에서 “암흑과 공허만이 실재” (「그림자의 고별」 , 그린비, 31쪽 주1) 인용) 라 말했다. 인간적 가치와 습속, 무의식과 전제들이 모두 해체된 그 자리, 내장까지 파헤쳐지고 더 나아가 몰락조차 몰락되어 마지막 한 점의 티끌로 사라지는 것. 이것만이 실재이며, 여기까지 가야 비로소 자기 해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말로는 가치를 내려놓는다고 해도 다음 순간, 우리는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있지 않았는가. 인간에게 덧씌워진 가치와 습속의 반복에 대한 경계가 루쉰의 내장, 심장의 본디 맛이다. 언어와 사유만으로는 가치를 전복할 수 없다. 자기 해체는 ‘인간’이라는 전제를 떠나는 것이다. 자기와 인간을 넘어 허망의 상태인 ‘나’조차 먼지가 되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것의 죽음을 의미한다. 자기 해체로서의 죽음은 변화 없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한 소멸의 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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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의 언어들은 이상하고 지독하다. 그것은 마치 악몽처럼 내장을 파헤치고 있다. 하지만 악몽은 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 심연을 응시하는 것은 나와 대상을 명확하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행위다. “밝음과 어둠, 과거와 미래, 벗과 원수, 삶과 죽음, 사람과 짐승, 희망과 절망”같은 모든 대립 항은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 암흑을 향한 루쉰의 무지(無地)에서의 방황, 무지에서 방황한다는 그 ‘나’조차도 사라지는 경지. 이것이 더욱 더 적막해지려는 루쉰의 꿈이다.

3. 적막한 자의 생활
   
이제 희망도 해체하고 ‘나’도 해체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살아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생활, 일상의 문제다. 일상이라는 말은 흔히 쓰이지만, 일상을 잘 사는 사람은 흔치 않다. 꿈이 자기 해체로서의 적막이었다면 일상은 적막의 구체적 예시다. 『들풀』이 숨겨놓은 일상의 세 가지 기술. 그것을 찾는 일은 인접한 장소에서 낯선 장소를 발견하는 유쾌한 체험이다.

루쉰에게 이런 면이? 

어떤 집에서 아들을 낳았단다. 만 한 달이 되자, 아기를 안고 나와 손님들에게 보였다. -물론 덕담을 듣고 싶어서였지.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아이는 훗날 큰 부자가 되겠네요’...”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아이는 훗날 벼슬을 할 겁니다’ ...” “한 사람이 말했다. ‘ 이 아이는 훗날 죽을 거요.’ 그 사람은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아프게 맞았다.” (『들풀』, 「입론」 , 그린비, 80쪽 인용) 
  
    

거짓을 말하기 싫지만 얻어맞기도 싫다면?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딜레마다. 뭐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보다는 정직하게 말 하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이때, 「입론」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 “옴마! 야가! 얘 좀 보세요. 얼마나....아이구! 하하! Hehe! he,hehehehe!” 기가 막히다. 루쉰 글이 맞나 의심스럽지만 루쉰 글 맞다. 무겁고 비장하기만 한 루쉰은 그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책정해놓은 기성의 논리다.
   
유머는 효과다. 유머는 그것을 듣는 대상에게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 기술이다. 유머의 효과는 기존 통념에 대한 폭로다. 폭로를 통한 유머는 우리에게 낯선 감각으로 세상을 보게 해준다. 「입론」의 유머를 보자. 1. 아기의 부모는 덕담이 듣고 싶다. 2. 이 아이는 훗날 죽을 것이다. 3. 옴마! 야가! 얘 좀 보세요. 얼마나....아이구! 하하! Hehe! he,hehehehe!. 1과 2 사이에는 덕담을 해야 좋은 것이라는 통념이 있다. 그걸 어기고 사실을 말하면 얻어맞는다. 1과 3 사이에는 웃음이 있다. 웃음에는 예측 불가능한 통쾌함이 있다. 1에서 2로 가지 말고 3으로 가라! 이것이 「입론」의 유머가 주는 루쉰의 메시지다. 
  
또 다른 시 「총명한 사람, 바보, 종」을 비교해 보면, 1. 종은 창을 내주기를 원한다. 2. 총명한 사람은 탄식한다. 3. 바보는 창문을 내주지만 쫓겨난다. 4. 주인은 종의 고자질을 칭찬한다. 1과 2 사이에는 연민이라는 덕목이 있지만, 창문을 내지는 못한다. 1과 3 사이는 창문은 낼 수 있지만 바보의 진정성은 배반당한다. 4에 이르면,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함에 절망적인 기분이 된다. 
   
「입론」의 유머는 심각한 이슈를 경쾌하게 표현한 반면, 「총명한 사람, 바보, 종」은 썩소를 날리게 만든다. 「입론」의 유머는 사람은 죽는다는 필연도, 부귀하게 될 거라는 거짓도 모두 부정하며 덕담의 규정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다. 「총명한 사람, 바보, 종」의 유머는 규정성을 믿는 자의 방식이다. 바보는 창을 내야한다면 냅다 창을 낸다. 자신의 방에 창을 내기를 바라는 종의 소원은 바보의 행위로 인해 가능해지지만, 종과 주인의 세상은 바보를 버린다. 
   
유머는 웃음으로 덕담과 세상의 모순을 가볍게 터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도한 의미의 무게를 거부한다. 유머는 언어의 일탈이고 규범의 일탈이다. 덕담에는 사회적 기대치에 어긋나는 hehehehe라는 언어를 넘어선 언어로, 모순에는 바보의 희극적 상황과 비극적 현실의 씁쓸한 웃음으로 세상을 비튼다. 절망과 웃음이 혼재된 세계에 대한 진정성. 세상은 그렇게 유머가 된다. 

누구의 것도 아닌, 복수
누군가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복수의 대상인 적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적이 원하는 게 내가 죽는 것이라면 안 죽는 것이고, 못 살기를 바란다면 별일 없이 사는 것이 복수다. 여기 두 남녀에게 복수는 구경꾼들이 원하는 것인 구경거리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듬을 생각도 죽일 생각도, 전혀 없어 보인다. 행인들은 이리하여 무료함을 느꼈다..두 사람은 그 가운데에서, 온몸을 발가벗은 채 비수를 들고 메마르게 서 있다. 죽은 사람 같은 눈빛으로, 행인들의 메마름을 감상한다. (『들풀』, 「복수」, 그린비, 38쪽 인용)

   
 광야에 비수를 든 벌거벗은 두 남녀. 구경꾼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가 없다. 구경꾼들의 바람은 이들이 보듬거나 죽이거나 치정극이 벌어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얘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서로 물어뜯고 피를 흘리겠지? 빨리 무슨 일이든 좀 일어나라구. 하지만 구경꾼이 원하는 피의 대살육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무료함을 느끼다 흥미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면 이제 두 남녀의 복수는 완성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복수의 대상만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원한에 가깝다. 원한과 복수의 다른 점은 복수에는 자기 살해가 있다는 점이다. 복수는 상대를 죽이는 것과 동시에 나도 죽는다. 그것이 없는 한 복수는 반복된다. 두 남녀의 경우, 구경꾼을 흩어지게 만든다 해도 그들이 죽지 않는 한, 구경꾼은 또 온다. 두 남녀의 복수는 구경꾼의 바람을 메마르게 하고 그들과 함께 자신들도 메말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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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군중에게 물었다. 정녕 이 사람을 죽이기를 원하는가. 군중은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예수의 복수는 자신이 사람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의 바람을 배반한다. 자신의 죽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사람의 아들’을 못 박아 죽인 사람들 몸에 ‘신의 아들’을 못 박아 죽인 것보다 더한 핏자국과 피비린내”(「복수 2」, 그린비, 40쪽 인용) 라는 영원한 고통, 죄책감을 심어준다. 
   
루쉰식 복수는 복수의 대상과 주체 그리고 복수 그 자체까지 사라지게 해야 완성된다. 원한은 죽지 않고 영원히 반복된다. 주체의 죽음이 없기에 ‘나’는 영원히 살아남아 똑같은 상황, 똑같은 복수를 되풀이하며 살게 된다. 자기 살해로서의 복수는, 상대와 함께 자신도 죽음으로써 복수의 윤회를 끊는 것이다. 복수가 삶의 기술이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루쉰의 복수는 철저하지만, 처절하지는 않다. 복수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복수 자체의 것도 아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복수. 복수마저 사라지는 복수의 끝에 생명고양의 환희, 사랑이 있다.

시시한 사랑
나는 불쌍한 중국인. 사랑! 나는 네가 무엇인지 모른다. 1919년 겨울, 루쉰이 받았던 일면식도 없는 한 청년에게서 온 편지의 첫 구절이다. (『열풍』, 「수감록 40」, 그린비, 460쪽 참조) 이 편지의 “불쌍한 중국인”은 루쉰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그해 겨울, 사랑은 루쉰에게 요원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꼭 다음 세대의 일만은 아니었다.
   
루쉰에게 사랑이 닥쳐왔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사랑은 “몇 해 더 지나면 지난날의 색깔이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고, 어찌하여 이것이 책갈피에 끼여 있는지도 알지 못 할” (「마른 잎」, 그린비, 94쪽 인용) 마른 잎 같은 것이었다. 이 시를 쓴 1925년은 쉬광핑과 한참 사랑에 빠져 있던 시기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사람이 쓴 시 치고는 쓸쓸하기 짝이 없다. 왜일까.
  
이 쓸쓸한 사랑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우리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한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한편에는, 사랑하는 두 남녀가 온갖 우여곡절 끝에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고 마침내 사랑에 골인하게 되는 로맨틱 코메디류의 사랑이 있다. 또 다른 한편에는 둘 사이에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으로 인해 파국으로 끝나는 비극적 사랑이 있다. 둘 다 운명적이고 둘 다 낭만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에 대한 판타지다. 남녀 간의 사랑에 이런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니다. 이런 방식의 사랑이야말로 ‘사랑’이라는 통념은 정작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을 이상화시키는 사람에게는 낭만적이지 않은 사랑은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사랑에 대한 냉소주의 역시 사랑을 알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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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은 알고 있었다. 사랑을 보존하려는 마음은 사랑은 보존될 수 없다는 것의 반증이다. 루쉰이 알고 있던 사랑의 무상성은 단지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변한다, 고로 사랑에 가치를 두지 말자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닥쳐온 이 사랑을 어떻게 잘 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루쉰은 그 고심의 끝에 생활 즉 일상을 둔다. 낭만적 사랑에는 없는 신체성이 시시한 사랑에는 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가듯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한다. 베이징과 샤먼, 광저우와 상해를 돌아다니는 급박한 생활에는 루쉰과 쉬광핑의 사랑이 있다. 강연하고 글을 쓰고 조언을 하고, 밥 먹고 치우고 울고 웃는 이 시시한 일상에 깃든 시시한 사랑. 사랑과 생활의 구분 불가. 그것은 자신에게 닥쳐온 이 사랑을 낭만도 냉소도 없이 잘 사랑할 수 있는 그들의 비결이었다.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사랑은, 사랑을 하는 주체에도 사랑의 대상에게도 있지 않다. 사랑의 주체와 대상의 소멸은 사랑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분명 시간은 사랑을 지운다. 하지만 그것은 ‘낭만적’을 지울 뿐이다. 낭만적 사랑이 사라진 그 자리에 사랑은 일상으로 끝없이 재창조된다. 사랑의 무상함은 허무가 아니라 생명고양의 환희의 증거다. 사랑은 변하는 것 사이에 담겨 있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본령이다. 
 
4. 다시, 적막

이제, 처음 질문의 답을 해보자. 일상을 열심히 살았던 나는 왜 허무해졌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기대 때문이다. 재미와 의미라는 기대, 공부의 성과라는 기대. 두 가지 모두 희망, 절망의 메커니즘으로 살았던 결과가 나의 허무의 원인이다. 
   
루쉰이 “나는 적막하다. 그러나 나는 평온하다.”고 했을 때의 그 평온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건은 일종의 일상 아닌 일상이다. 사건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사건과 일상을 분리하기 때문이다. 적막은 사건을 일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예전, 적막이 고독과 허무로 다가왔을 때 나는 “오 분간의 열정”으로 살았다. “통곡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해치우거나 재미와 의미만을 추구하면서 허무해하였다. 이제 공부든 뭐든 일상으로 살아야 하니 오 분간의 열정으론 택도 없다. “혹은 연극도 구경하면서 실행도 10년간 하거나, 혹은 이성 친구도 사귀면서 실행도 50년간 하거나, 혹은 사랑도 속삭이면서 실행도 100년간 하는 편이 더 낫다.” (『화개집』, 「여백 메우기」, 그린비, 150쪽 인용) 백 년간의 실행. 이것은 루쉰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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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동안 『들풀』 읽기는 내가 책이 되는 체험이자 루쉰 체험이었다. 지금까지 무겁고 비장했던 루쉰과 수동적 허무로 오독되었던 『들풀』은 제 자리를 찾았다. 내 삶의 오독 또한 멀리 추방이다. 나의 『들풀』 사용 설명서는 이제 막 제대로 사용된 듯하다. 이쯤에서 선언해야겠다. 나는 졌다. 희망 앞에 나는 영원한 실패자로 살아갈 것이다. 실패이기에, 바로 그렇기에 다시, 적막.....적막.....









댓글목록

李秉善님의 댓글

李秉善 작성일

일상을 꾸준히 살아가겠습니다.

성연님의 댓글

성연 댓글의 댓글 작성일

병선샘~ 다음 기회에 공부 꼭 같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