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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이제 콩이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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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8-07-09 23:56 조회2,8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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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콩이만 남았다

 


 윤순식(감이당 장자스쿨)





  지난해 가을, 갑작스러운 엄마의 사고로 홀로 남겨진 친정아버지. 그동안은 엄마가 계셔서 별로 신경 쓸 것이 없었는데 이제 여러 가지가 걱정이다. 하루 세끼 식사며 빨래, 또 그 적적함은 어찌하실까. 더욱이 홀시아버지를 이십 년 가까이 모셔 본 나는 한집에 사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그 어색함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묻고 주말마다 친정으로 내려갔다. 그러던 지난 설날, 평소 깔끔하던 아버지 방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나는 불쑥 화가 났다. 나와 같은 처지가 된 올케언니. 그녀에게 청소 안 했느냐는 원망 섞인 말이 먼저 나갔다. 올케언니는 아버지가 방 청소를 하신다고 했다. 평소 며느리보다는 딸처럼 행동하는 그녀의 태도가 눈에 거슬렸던 나는 한마디를 더했다.


  “언니, 나도 모셔봐서 아는데 언니가 체크해야죠. 

옷도 좀 자주 갈아입으시라고 하고”


  올케언니도 웬만해선 기가 죽지 않는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은 누구 앞에서든 다 한다.

  “아유 아가씨, 아빠가 다 잘하셔요.

 방 청소는 못 하게 하시고, 빨래도 잘 내놓으세요.”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시작해 버렸다. 나도 여기서 물러설 순 없다.


  “그래도 언니가 좀 더 신경을 써야죠. 아버지 방에서 냄새나잖아요. 

살도 좀 빠지신 거 같고. 엄마 없는 티가 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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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올케언니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그냥 입을 다문다. 저 표정. 나도 익히 안다. 언젠가 둘째 시누이가 시아버지 식사에 대해 뭐라 할 때 내가 지었던 바로 그 표정이다. 억울하다는.


  “너는 쓸데없이 왜 새언니한테 뭐라고 하니?”


  조금 전에 창고에 가신다던 아버지가 어느새 방문 앞에 서 계신다. 아버지 표정이 좋지 않다. 뭔가 맘에 드시지 않을 때 나오시는 표정이다. 분명 우리가 나눈 대화를 다 들으신 모양이다. 급기야 나를 보고 한 말씀 하신다.


  “내가 환자니? 내 방 청소도 못 하게. 뭘 그걸로. 됐다. 

성가시니까 나가서 언니나 도와라”


  이런 아차 싶다. 또 옛날의 나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사람의 도리’가 무척 중요한 사람이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하던가. 당연히 속마음을 표현하기보다는 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내 감정을 누르거나 참으면서 살았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선택했던 ‘사람의 도리’는 명분을 핑계로 ‘내 맘대로 하겠다’는 마음이 깔려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결혼하면서 나는 ‘착한 며느리’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막내아들이었지만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남편의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식사는 물론 간식까지 준비해 드렸고 밤에 나가는 것을 걱정하셔서 저녁에는 약속도 거의 잡지 않았다. 가지 말았으면 하는 시아버지 말씀에 휴가도 10여 년 동안 가지 않았고 친정 식구들 여행에도 남편만 참석했다. 또 두 분 모두 돌아가시기 전까지 일 년 넘게 집에서 병간호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는 ‘착한 며느리’가 되면서 남편과 시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막내며느리였지만 집안 대소사의 결정권은 항상 나에게 있었고 주위의 칭찬이나 대접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남편도 내가 하는 일엔 거의 토를 달지 않았다. 몸과 마음은 좀 고됐지만 내 말에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삼년 전 홀로 계시던 시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끝나버렸다.

  이제 시댁에서 내 위치는 그냥 막내며느리다. 뭔가 내 말이 먹히지 않게 되자 시댁 모임만 가면 짜증이 났다. 제일 큰 사건은 제사 문제였다. 시어머니 제사는 15년 동안 내가 집에서 모셨지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제사는 자연스럽게 큰 집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시댁 식구들은 두 번 정도 큰 집에서 지내보더니 불편하다는 이유로 형님이 다니던 절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해 버렸다. 물론 나는 반대했다. 아직 건강한 며느리가 둘이나 되는데 집에서 모시지 않는 것이 불효라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몇 년 동안 나만 고생한 것 같아서 억울했다. 그동안 내 말을 잘 받아주던 남편도 내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화를 냈다. 그런데 남편도 이제는 같이 짜증을 낸다. 나는 그게 또 서운해서 한동안 우울했다. 나는 뭔가. 그동안 나는 뭐를 위해 그렇게 애쓰며 살았나. 열정과 희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무너지자 분노와 우울을 넘어 무력감이 내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마음속은 늘 번잡스러웠다. 누군가를 보살핀다는 명목 아래 내 삶은 늘 타인의 인정 여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지어졌다. 다행히 나는 얼마 전부터 이렇게 살지 않기로 했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계속 살다간 한평생 나를 속여 가며 남 탓만 하면서 살기 십상이다. 그렇게 시작한 고전과 의역학 공부로 나는 나 스스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하며 자연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혁명이라고 했던가. 습관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그동안 공부하면서 그런 습관이 어느 정도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예전의 습성이 기어 나오고 말았다.

  오늘 아침 외출하는 큰애에게 날씨가 추운데 겉옷이 너무 얇으니 바꿔 입으라고 한마디 했다. 딸아이는 이내


  “네네 네네”


  나도 안다. 딸아이가 저렇게 대답하는 건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소리다. 더는 듣기 싫다는 말이다. 나도 더 뭐라 하지 않고 딸아이에게 두었던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콩이(강아지)를 본다.


  “콩이, 엄마한테 와”


  하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콩이도 요즘에는 행동이 좀 느려지긴 했다. 가끔은 불러도 바로 오지 않고 빤히 나를 쳐다볼 때가 있다. 그래도 콩이는 아직 내 말을 잘 듣는 편이다. 이제 콩이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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