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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존재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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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생각통 작성일19-04-30 05:48 조회1,8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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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존재가 되라



성승현(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순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性)이란 방탕하고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지키지 못할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을 것이고,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순결’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20대, 막 연애를 시작할 나이가 되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정신적 교감은 좋지만, 육체적 관계는 아직!’이라며 스스로를 방어했다. 우연히 대학 선배로부터 혼전순결이란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관념인지를 듣게 되었는데, 그때의 충격이란.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을 뿐이다. ‘순결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구시대적 산물’이라는 앎으로 바뀐 것이다. 앎은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고, 감각하지 못했다.

앎은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고, 감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경직된 삶에 답답함을 느낄 때 만난 것이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강렬하게 잡아당긴 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었다. 도취, 심연, 혼돈, 황홀경, 생명력 등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라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느꼈던 것이다. 니체가 ‘삶을 변호하는 본능으로서의 본능’으로 『비극의 탄생』을 썼듯이, 경직된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내 본능은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니체가 말하는 비극은 따로 있지 않다.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 있고, 만남과 동시에 이별이 있는 것처럼 비극은 필연적이다. 그렇기에 ‘비극’을 곧 ‘삶’이라고 표현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에 대한 태도다. 비극을 ‘소크라테스적’으로 겪을 것이냐,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겪을 것이냐! 

소크라테스적으로 겪는다는 것은 ‘앎’을 통해 비극을 겪는 것을 말한다. 니체는 비극이 에우리피데스(그리스 비극 작가)를 정점으로 ‘소크라테스적’으로 변했다고 본다. 말로써 모든 것이 설명되고, 학습 가능한 것이 됐다. ‘이론적 인간’의 탄생이다. 하지만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론을 탄탄히 해도, 그것은 삶 위에서 매번 미끄러진다. 삶은 가상이고 착각이고 오류의 필연성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측하지 못한 고통 앞에서 어떤 이론도 통하지 않는 경험을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이론적 인간들은 ‘인간’을 해결 가능한 과제들이라는 협소한 영역 속에 가두고, 지식과 학문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지식이나 학문으로 무장을 해도 개별적 실존의 끔찍함을 들여다보게 되면, 겁을 먹고 마비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식으로 세운 개별적 삶에 대한 환상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의, 축제, 술과 같은 단어를 떠올려 보라. 이성적인 것, 형식적인 것은 사라지고 야생 혹은 본능만이 남는다. ‘힘에의 의지’만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도 표현한다. 니체는 이를 ‘개별화의 속박이 분쇄되고 존재의 어머니들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개별적으로 자신을 규정하며 옭아맸던 개체로써의 ‘자기’를 ‘포기’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개체는 찢김을 당하고 죽는다. 하지만, 그 개체는 지식과 학문으로 무장했던 현상으로써의 ‘나’일 뿐이다. 그 현상이 죽으면 삶을 추동하는 ‘힘에의 의지’만 남게 된다. 

지식과 학문으로만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어떤 존재로도 변이되지 못하는 신체, 사물의 가장 깊은 핵심에 이르지 못하는 신체, 그런 신체를 고집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제,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자신’이 되어보는 그런 경험의 길을 가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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