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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생사를 넘어 자유로워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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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여씨 작성일19-04-30 06:51 조회1,6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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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를 넘어 자유로워지리


안혜숙(금요대중지성)


어느 새벽녘 걷잡을 수 없는 마라(Mara악마:망상이라는 의미)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 소리의 요지는 힘든 공부의 길을 가지 말고 몸 편한 길을 가라는 거였다. 이러다 정말 일찍 죽을 수도 있다면서...ㅋ 빡빡하게 짜여있는 공부일정을 보고 ‘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잠시 쉬어갈까’라는 생각을 한 순간, 그 틈새를 놓칠세라 불쑥 올라온 거였다. 헌데 뭐 그 정도가지고 죽음까지 들먹이며 호들갑인가. 그렇다. 호들갑에 오버하는 것 맞다.^^ 이유는 이렇다. 오래 전 큰 수술 후 몸이 안 좋았을 때, 어느 사주쟁이 아줌마가 내 명이 64세 아니면 74세라고 했다. 지금 내 나이 63세, 그 시점을 몹시 의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따져보면 태어난 시도 분명하지 않은 사주였고, 십년이라는 널널한 시간차를 두고 명을 말하고 있는 것도 우스웠다. 문제는 그럼에도 내가 그 말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걸 방해하는 게 마라의 역할이다. ‘오래 살아야 공부도 오래할 수 있어!’라고 속삭이는 마라의 정체는 곧 내 욕망의 다른 소리다. 이 욕망 앞에서 흔들렸던 내 마음. 그 순간의 마음은 참으로 황량한 바람이 부는 황무지 같았다. 그것이 언제이든 언젠가 죽음은 실제상황이 될 터이다. 정말 죽음을 이렇게 정신없이 휩쓸려가듯 맞닥뜨릴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건 나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백 살을 산다고 죽음 앞에서 저절로 편안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붓다는 이런 나의 마음을 『법구경』에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 악마의 영토는 벗어나야 하리.”(게송34) 이 마음의 경험은 충격이었다. 공부를 몇 년을 했건만 나는 여전히 죽음의 문제 앞에선 땅바닥에 내쳐져 헐떡이는 물고기와 같았다.   

『법구경』은 가차없이 죽음을 대면하게 하는 게송과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없이 버려진 채, 머지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혀지리라.”(게송41) “죽음이 닥치지 않는 곳은 공중에도 바다 한 가운데도 없고 산의 협곡에 들어가도 없으니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게송128)… 누구나 언젠간 쓸모없는 나무 조각처럼 버려지고, 죽음 또한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어느 것도 영원한 건 없다는 이 무상함의 진리. 이 당연한 사실들을 붓다는 왜 이토록 적나라하게 반복해서 노래한 것일까. 이제야 알았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가슴으로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진정 온몸으로 터득해 몸이 바뀌는 일이다. 허나 그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바로 그랬듯이 말이다. 붓다는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거다.

『법구경』의 많은 인연담들은 등장인물들의 생과 사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자신의 처한 자리와 근기에 따라 붓다로부터 각자 다른 해법을 배운다. 그 구체적인 해법 속에서 터져나온 ‘진리의 가르침’들! 그것은 곧 ‘진리의 길’이기도 하다. 자신의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을 알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滅道)! 그 길은 몸으로 진리를 체득하는 길 자체임을 『법구경』은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붓다가 넘어서고자 했던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 나는 이제 그 고통의 당사자가 되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어가고자 한다. 텍스트 속 인연담의 주인공이 되어. 붓다는 내게 어떤 해법을 알려줄까. 그것이 무엇이건 그 길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겁다. 나는 이미 사람들이 어떻게, 마침내, 생사를 넘어 자유로워졌는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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