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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고집불통 망나니 들여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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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웅 작성일19-04-30 09:39 조회2,2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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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불통 망나니 들여다보기


이기웅(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나는 오랫동안 ‘통제되지 않는 나’ 때문에 힘들어 했다. 분노, 질투와 같은 감정들은 한번 일어났다하면 제 멋대로 작동하여 타인과의 소통을 망쳐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이런 괴로움을 해소하고자 술에 취하게 되면 심하게 고집을 부리곤 했다. 심지어 정신을 잃고 길바닥이나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잠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술버릇 때문에 아내와 가족들이 힘들어했다. 내 안에는 ‘고집불통 망나니’가 하나 더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나를 창피하게 여겨 감추려고만 했었다. 나에게 있어서 통제되지 않는 무의식 세계는 괴로움 그 자체였다. 

내 안에는 '고집 불통 망나니'가 하나 더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우연히 나는 딸이 깔아준 팟캐스트를 통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게 되었다. 질문자에 대한 스님의 설법들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나는 그해 봄 정토회 불교대학에 입학하여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불교를 통해 괴로운 내 삶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회사를 마치고 귀가하면 매일같이 금강경을 필사했고, 그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 통째로 외웠다. 금강경을 필두로 반야심경, 법성게, 천수경 등 모두 암송했다. 경전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괴로움의 근원은 ‘나’에 집착하는 ‘아상(我相)’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그 뜻이 가슴으로 와 닿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불교대학 도반의 소개로 인문의역학을 공부하는 감이당에서 주역 등과 화엄경 유식 등 많은 경전들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중 심(心)·의(意)·식(識)을 심도 있게 다룬 정화스님의 유식30송이 내게 깊은 인상을 주어 여러 번 읽었다. 어쩌면 유식공부를 통해 나의 무의식세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식에서 말하는 무의식세계의 실체는 무엇일까? 무의식세계는 8식과 7식이 있다고 한다. 8식(아뢰야식)은 과거 경험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씨앗(업습기)으로 저장한다. 7식(말나식)은 그런 8식을 바라보며 ‘자아’라고 인식하고 집착하여 모든 의식세계를 자기식대로 채색한다. 따라서 말나식은 끝없는 갈애(渴愛)를 일으키는 ‘자아’의 근본바탕이며, 모든 분별의 원인이 된다. 결국 아뢰야식에 켜켜이 쌓인 습기와 그 것을 자아라고 고집하는 7식이 나의 무의식의 실체였다. 결국 제멋대로 작동하여 나를 괴롭히는 무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습관의 종자를 바꾸고, 분별하는 나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데 도달했다.    

어떻게 습관의 종자를 바꾸고, 무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해결의 실마리는 7식의 조종을 받는 제6의식에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사건을 만나면 먼저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에 따라 좋거나 싫은 감정이 생긴다. 좋으면 가지고 싶고 싫으면 멀리하려는 의지작용이 생기며, 결국 실행에 옮겨 선악(善惡)의 업을 짓게 된다. 유식에서는 의지작용이 생기기 바로 전단계인 올라오는 감정에 집중하라고 한다. 즉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자아’에서 분리시켜 바라보라는 것이다. 요동치는 감정들은 집착하면 할수록 그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고 자신을 더 세게 옭아맨다. 그러나 감정에서 적당히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감정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사라진다. 사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모든 욕망이나 그 욕망에서 파생되는 감정들을 다 없앤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요동치는 감정을 없애려하거나 통제하기 보다는 자아에서 감정들을 분리시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감정을 제어하기가 수월해 보인다. 온갖 감정들과 함께 살면서도 거기에 예속되지 않는 삶! 이렇게 수행해 간다면 켜켜이 쌓인 습기를 닦아내고, 제 멋대로 작동하여 나를 괴롭게 했던 무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유식을 통해 ‘고집불통 망나니’를 치료하고 좀 더 열린 세계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의 유식공부가 나를 설레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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