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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금성]사랑불능의 시대, 여성성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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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나비 작성일19-04-30 11:11 조회1,8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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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불능의 시대, 여성성이 필요해      


김희진(감이당 금요대중지성)


  내가 한창 홍루몽 세미나를 하던 2018년, 대한민국에서는 미투 고발이 팝콘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놈들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를 느꼈지만, 집에서 아들들에게 눈에 힘을 주고 ‘똑바로 커야 한다’고 엄포를 놓거나 남편을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하며 단속을 할 뿐, 진지하게 사건의 심층을 들여다보거나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페미니즘이 아니어도 난 여성이니까 내 안에는 어떤 이념에 물들지 않은 여성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미투 이슈가 있을 때마다 세미나는 그 이야기로 채워졌다. 『홍루몽』은 연애소설이며, 여성성이 넘쳐나는 텍스트기 때문이다. 한 가문의 규중처녀들이 모여 사는 별도의 정원이 주 무대인데, 그 수많은 자매들과 시녀들 사이에 딱 한 명의 소년인 보옥이 끼어 있다. 그야말로 지금 남자들이 들으면 아방궁이라며 침 흘리며 부러워할 조건 아닌가! 보옥이 역시 여자를 너무나 좋아하여, 남자는 상대도 않고 오직 누이·누나와 시녀들과만 어울리려 한다. 헌데 보옥은 이상하다. 그는 만나는 여자들 하나하나마다 그 훌륭함에 감탄하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녀들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여념이 없다. 여성을 대상화 하며 단지 성적 욕망만을 채우려는 보통의 남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이 아름다운 소년! 보옥의 감수성 넘치는 여성 예찬은 웃기고도 기상천외하다.  

   그런데, 오래전 공부를 시작한 첫 해에 이 책을 처음 봤을 때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보옥의 정체가 뭔지를 모르겠으니 무슨 내용인지 어리둥절하고, 주제나 맥락 파악이 안 돼서 가만히 앉아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의식적인 거부가 아니라 그냥 못읽겠는 것! 새롭거나 이질적인 것과 섞이지 못할 때, 우리가 보통 하는 말은 ‘재미없다’다. 그래서 나의 홍루몽 첫 경험은 ‘재미없어’에서 끝나버렸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근래 세미나에서 다시 만난 홍루몽은 요즘 남자의 폭력문제와 대비돼서인지 흥미진진하게 읽혔고, 불교적인 깨달음의 내용과 예술성 높은 묘사의 경지는 나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나와 홍루몽 사이의 이질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뭐지? 이 불편한 감정은? 난 이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고, 결국 초조하게 무언가를 찾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추잡한 폭력과 관음증이 난무하는 사랑 불능의 시대에 진저리치며, 여자 마음을 공감해주는 남자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여자들의 머리 한 번 빗겨주길 소원하며 남자로 태어난 걸 한스러워하는 보옥이 과연 여성이 원하는 캐릭터일까? 다정함만 빼면, 보옥은 사실 무능력하고 책임감 없고 비겁하기까지 하다. 지금 시대의 대안적 모델로 고전 속의 보옥을 소환하기에는 용납되지 않는 행동들이 참 많다. 아니, 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여자들은 오히려 로마시대의 전사나 중세의 기사도를 선망하지 않던가. 로미오처럼 부드럽더라도 사랑할 땐 한 여자에게 광적으로 몰입해야 한다. 그렇다. 어느 시대에도 없던 남자의 캐릭터가 바로 보옥이였고, 그는 어떤 선망의 모델로서 거론될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보옥은 분명 매력적인데도, 내가 갖고 있던 ‘남자다움’이라는 상(象)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불안했다. 남자다움에 대한 기대와 편견은 나같은 보통 여성들, 그리고 그 멍에를 지고 있는 남자들의 무의식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다. 보옥은 남자를 싫어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여자도 싫어한다.  

   홍루몽의 넘치는 여성성은 ‘여자여자한’ 분위기도, 여자 편을 드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모두 뛰어 넘는 지점, 바로 목적 지향적이고 주류적이며 견고한 사고의 틀을 깨는 것이 바로 홍루몽의 여성성이다. 스스로 여성적이라고 착각하던 내가 내내 부딪혔던 지점이다. 서로의 성 역할에 대한 불가능한 환상과 피해의식의 피로감 속에 공격과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홍루몽의 여성성이 필요하다. 이제 그만 내 지긋지긋한 편견과 고정관념의 감옥을 허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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