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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쇠철방에서 나온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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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물길 작성일19-04-30 19:55 조회1,8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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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철방에서 나온 사자

                                                                                 김주란(감이당 금요대중지성)


나는 68혁명 다음 해에 태어나, 87년 민주항쟁 다음 해에 대학에 들어갔다. 한 끗 차이로 어긋난 이 미묘한 타이밍 때문이었을까? 나는 시위에 참여는 하면서도 혁명을 믿지 않았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한 권의 책이었다. 나를 흔든 그 책은 맑스의 <자본론>이 아닌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법칙>이었다. 엔트로피 법칙이란 무질서도의 증가를 나타내는 열역학의 개념이다. 쉽게 말해 뜨거운 물은 시간이 갈수록 식고, 방은 어지럽혀지기 마련이라는 뜻. 물론 누군가 다시 물을 끓이고 방을 치우면 된다. 문제는 질서를 다시 회복하려면 더 큰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두 체제 모두 무한한 생산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보게 되었다. 헌신적인 노동운동과 용감한 정치투쟁에 뛰어드는 이들에게 존경을 보내면서도, 불처럼 벼락처럼 세상의 판을 바꾼들 근본적인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생명의 윤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생협공동체 운동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다. 처음 생협은 운동성이 분명했다. 소비행위를 통해 지구를 살리는 유기농 생산활동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고,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는 소비 행위자체를 성찰하자는 철학이 있었다.  회원끼리의 모임을 통해 함께 활동하고 공부하는 공동체 생협은 특히 그랬다. 회원이 늘자 생태나 음악 동아리, 교육, 작은 도서관운동, 정치참여 등 회원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생기 넘치는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생협 간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작은 생협들이 사라지더니 광고를 하는 생협까지 생겼다. 결국 생협은 ‘더 싸고 더 편리’하게 ‘쇼핑’하는 쇼핑몰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진술은 ‘유체이탈화법’에 가깝다. ‘더 싸고 더 편리한 쇼핑’을 원했던 건 바로 우리 자신이니까. 너도 나도 비슷한 욕망에 갇혀있는 처지에 누가 누구에게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어느 글에선가 루쉰은 쇠철방에 갇혀 있을 때 홀로 깨어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물었다. 그때 나로선 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가족이나 공동체란 어쩌면 서로의 잠을, 서로의 욕망을 지켜주기로 약속한 관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숫타니파타>를 만났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구절을 읽는데 가슴이 뻥 뚫렸다. 너무 시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가 이런 사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껏 자신을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여겨왔는데 웬걸, 실은 인간에 대해 너무나 왜소한 전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서로 대충 봐주고 위로하면서 사는 게 최선이라고 믿었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이야말로 제 스스로 만든 쇠철방에 갇힌 꼴이다. 

그런데 <숫타니파타>는 이 한 구절의 시로 우리가 저마다 갇혀있는 ‘쇠철방’의 정체를 폭로해버린다. 소리와 그물은 사슴과 물고기에게만 쇠철방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사자, 걸리지 않는 바람에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누가 북을 치거나 말거나 사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지만 되풀이해서 장난을 치면 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지를 박차고 포효한다. 사자는 그렇게 혼자 일어나고 혼자 포효하지만 그 진리의 고고성은 천지 간 모든 존재에게 울려 퍼진다. 그러나 혼자서 가지 않으려고 할 때, 우리는 한 걸음도 갈 수 없다. 그럼 다시 쇠철방이다. <숫타니파타>가 묻는다. 너 어쩔래? 나는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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