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직장인으로 어느 하나 소홀해지고 싶지 않아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현모양처, 슈퍼우먼, 무수리’란 별명이 자동으로 붙었다.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몸이 아파도 지각이나 결석 한번을 안 했다. 직장에서도 예스맨으로 불리며,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막내며느리지만 시부모님과 같이 살며 식사는 물론 간식까지 준비해놓고 출근을 했다. 걱정하시기에 저녁에는 외출도 삼가고, 휴가나 여행도 한동안 가지 않았다. 시부모님 두 분 모두 돌아가시기 전까지 일 년 넘게 집에서 병간호도 했다. 이런 삶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만 더 참으면서 착하게 살면 행복할 줄 알았다. 야속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웠고 죄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제는 보살펴드려야 할 시부모님도 안 계시고, 아이들도 더는 내 손길이 필요 없게 됐는데, 나는 오히려 화가 나고 우울했다. 주위에서는 힘든 일이 모두 끝났다고 부러워하는 데 정작 나는 무기력해졌다. 이런 내 모습이 나조차도 점점 불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