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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장자스쿨] 금강경의 출현, 아라한에서 보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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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우 작성일19-07-08 21:02 조회1,7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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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의 출현, 아라한에서 보살로


   

이여민(토요 대중지성)



살면서 마주치는 인생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인생 중반에 만난 이 질문이 나를 불교 공부로 이끌었다. 모든 이의 병(괴로움)을 고쳐주셔서 의왕(醫王)으로도 불리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면 두려움이나 고통에서 곧바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 이는 직접 괴로움을 이겨낸 부처님의 생애와 그로 인해 탄생한 불교의 역사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출가 전 부처님은 인도의 작은 도시 국가 중 하나인 카필라국의 왕자였던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rtha)였다. 12살에 농경제에 참석하여 편안하게 즐기고 있는 자신과 다르게 힘겹게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과 자연에서 서로 먹고 먹히는 새와 벌레의 관계를 보고 의문을 품었다. ‘왜 자연에서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어야 하지? , 어떻게 하면 사회적 신분을 떠나 모두가 함께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을 가지고 계속 살아가던 싯다르타는 29세에 왕궁을 떠난다. 그리고 길 위에서 수행을 이어가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이때부터 고타마 싯다르타는 스스로 깨달은 자, 부처가 되어 45년간 인도 전역을 걸어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펴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심지어 그의 삶에 마지막 순간,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수행의 기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찾아온 120세의 수바드라의 질문에도 가르침을 전한다. 이렇게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세상에 나누어 주는 일을 평생 동안 했으며, 이 말씀을 모아 놓은 것을 근본불교라고 한다.

 

새로운 불교, 대승의 탄생

부처님 열반 후에 부처님 살아생전 말씀을 모아 놓은 근본 경전, ‘니까야’ ‘아함경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지면서 불교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에 새로운 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대승불교가 그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500년 뒤에 새롭게 태어난 대승불교(大乘佛敎, Mahayana Buddhism) 원어의 앞쪽 어절 마하야나는 대승을 뜻한다. 그리고 대승은 문자 그대로의 뜻은 큰 탈 것, 뛰어난 탈 것이며, ‘탈 것이란 가르침을 비유하는 것이다. 즉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실어 나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승이 있으면 소승이 있다. 소승은 스스로 아라한이 되기를 목표로 살아가는 수행자의 집단을 말한다. 그렇다면 소승과 대승은 왜 분리된 것이며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부처님의 열반 후 300년이 지날 때 즈음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Asoka, BC268?-232?)왕은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택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탁발 수행을 하던 승려들에게 토지를 하사하였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승려들은 걸식하면서 세상을 돌아다니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일보다 사원 속에서 불교를 이론화(아비달마 불교)하고 선정 수행을 통해 자신이 아라한이 되려고 했다. 이것이 소승불교의 시작이다. 이론화된 불교는 분쟁을 낳았고, 선정을 통해 성취하려는 아라한에 대해서는 저마다 견해가 달랐다. 아라한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다투고 서로 다른 이론으로 논쟁하는 가운데 불교는 여러 부파로 분열하였다. 그러면서 승려들은 절 안에 머물게 되었고 대중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 당시 기존 브라만교가 불교의 철학을 흡수하고 인도 토착신앙을 품어 사상을 재정비하면서 힌두교로 탄생하였다. 결국 대중들은 대거 힌두교로 떠나게 된다. 이에 불탑을 돌며 부처님을 그리워하던 재가 불자들과 기존 교단에 속하지 않은 승려들이 모여 새로운 불교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이것이 보살을 수행 주체로 하는 대승불교 탄생의 배경이다.

그리고 그 당시 아쇼카왕은 불교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상좌부와 시대에 따라 계율을 바꾸려는 대중부로 분열된 불교를 화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아쇼카왕은 중재와 통합에 실패하자 목적을 변경하여 상좌부 불교의 손을 들어주고 대중부 스님들을 쫓아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한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대승불교의 초기 공동체는 아주 적은 소수의 집단이었으며 소의경전인 금강경도 작자미상이다. 이 사실은 중국의 현장법사가 인도로 경전 공부를 하러 왔을 당시 소승불교 사원이 월등히 많다는 기록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세월이 흘러 상좌부 소승 불교는 남방으로 전해져서 미얀마, 버마 등지에서 아직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대승불교는 북쪽으로 전해져서 중국과 한국에서 꽃을 피우고 지금까지 번성하게 된다.

 

아라한에서 보살로

대승 불교의 수행 주체는 보살(菩薩)이다. 보살이란,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한역이다. 보디(bodhi)는 깨달음이고 사트바(sattva)는 중생이다. 이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보살은 중생(사트바sattva)이지만 깨달음(보디bodhi)을 향해 가는 수행자 모두를 일컫는다. 출가자인 승려만 깨우칠 수 있다는 소승불교의 제한성을 깨고, 깨달음의 마음을 낸 사람, 즉 보살로 수행 주체가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수행의 목표도 더 넓어진다. 상구보리(上求菩提),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말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중생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으면 성불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고 하였다. 지장보살과 유마거사처럼 중생 속에서 중생을 위해 수행하여야 한다는 뜻을 품는 것이 대승불교이다. 소승불교에서는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자라는 개념이 없고 다만 모든 번뇌를 끊고 다시는 생사의 세계를 윤회하지 않는 아라한이 수행의 최고 목표이다.

이 대승불교의 탄생과 함께 초기 경전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금강경이다. 금강경은 부처님께서 이 시대에 오셨다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하는 물음으로 부처님 근본 교설을 녹여내어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금강경은 첫 대목에 1250인의 승려들과 함께 걸식하여 식사하고 발을 씻고 명상을 하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그린다. 지금으로 따지면 부처님이 여의도 공원에 기거하시면서 밥 빌러 차례로 일곱 집을 방문하시고 돌아오셔서 고요히 앉아계신 것이다. 이렇게 금강경은 당시 부유한 승원에 앉아 대중과 격리되어 혼자 아라한을 성취했다고 논쟁하는 승단을 향해 사람들 속에서 하루를 보내며 소통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우리는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부처님께서 걸으신 길을 가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가르치고 행하셨던 그 길, 즉 보살의 길을 함께 가려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것이 금강경의 주제이다. 금강경은 부처님 근본 교설을 낱낱이 쪼개어서 분석한 당시의 아비달마 불교를 비판하며, 부처님이 하신 말씀조차도 뗏목에 비유하여 강을 건너가면 버려야 한다고 했다. 결국 금강경은 항상 사람들과 함께 했던 부처님의 행적을 그대로 담으면서 부처님의 사상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도록 만들어진 경전이다. 금강경은 30분 정도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다른 경전에 비해 양이 아주 짧아서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노래처럼 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 담긴 내용은 심오하다. 그래서인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중국 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등에 번역되어 있고 주석이 800가지가 넘을 정도로 많은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금강경은 진리를 공부해 번뇌에서 벗어나겠다고 마음을 낸 사람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먼저 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옳다거나 나만 잘 살겠다는 마음이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보살은 나, , 인간이라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자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나라는 실체는 없고(無我) 인연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緣起)이 지금이라는 말씀을 압축한 것이었다. 그러니 보살로서 남을 위해 수행하는 마음을 내면 무아(無我)를 실천하게 되고 괴로움을 줄이는 첫 발걸음이 되는 것임을 설파하고 있다.

 

괴로움을 떨치고 싶다면? 시작은 금강경.

내 의원을 방문하는 중장년층 환자들을 보면 딱히 큰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증상을 호소하며 괴로워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왜 그럴까? “젊고 건강한 나(我相)”에 집착한 나머지, 늙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재의 불편함을 괴로움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을 놓지 못하니, 앞으로 다가올 죽음 역시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집착은 억울함과 불안감을 낳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몸에 좋다는 온갖 건강식품을 마구 먹는다. 영양제 과다 섭취 부작용을 설명하는데 진료 시간의 대부분을 쓸 정도다. 의료 기술이 최첨단으로 발달하고 건강보험이 제도화되었지만 이런 불안의 역습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눈에 보이는 형상들은 모두 허망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형상이란, 젊음과 건강, 물건, 고정관념, 가치관 등을 의미하고, 이것이 허망하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둘러싼 형상들이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유동하는 흐름 속에 있음을 알고, 그 형상을 더 이상 붙들지 않는 것, 이것이 곧 보살의 삶을 사는 것이며 동시에 아상을 깨는 것이다. 금강경이 말하는 괴로움 해결법은 바로 이러하다.

지금 현대인들은 비대해진 아상을 끌어안고 괴로워하고 있다. 늙지 않는 나, 더 많이 가진 나, 꽃길만 걷는 나 등등 수도 없다! 아상을 놓지 못해 삶이 괴로운 모든 이들에게 금강경을 권한다. 금강경을 읽게 된다는 것은 내 괴로움의 원인, 곧 병인(病因)을 진단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병인을 알게 된다면 치료법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제 금강경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지혜를 세세히 공부해 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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