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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리고 찾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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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물길 작성일19-07-19 11:06 조회1,6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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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도 저 세상도 버리고 찾은 길
  
금성 김주란


‘부처님’ 없는 불경
『숫타니파타』는 내가 처음 읽은 초기불경이다. 초기불경이란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붓다, 즉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나 갠지즈강 유역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던 고따마 싯다르타의 말씀을 담은 경전을 말한다. 『숫타니파타』는 그 중에서도 최초의 경전이라 불리운다. 그런데 여기서 “불경이란 본래 모두 부처님 말씀이 아닌가? 왜 따로 ‘초기불경’이라 부르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가만 따져보니 팔만대장경 그 어마무시한 분량의 불경이 고따마 싯다르타라는 한 존재의 언술일 수는 없는 건 너무 당연한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초기불경을 제외한 모든 불경은 진본이 아닌 위작, 가짜 불경인가? 반야심경, 법화경, 금강경... 이 위대한 경전들이? 

  이 난센스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알고 보니 여기가 아주 불교다운 지점이었다. 종교, 학문 아니 하다못해 거리의 음식점에서조차도 ‘원본’, ‘원조’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만큼은 다르다. 왜? 진리에는 진짜와 가짜가 없기 때문이다. 붓다, 한자어로 부처라고 음사되는 이 단어부터가 ‘스스로 깨어난 자’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이다. 그러니 진리를 깨친 이라면 모두 ‘붓다’이며, 그러한 ‘붓다’로서의 언설은 다 진리를 담은 경전이다. 불경하면 통칭 팔만대장경이라 한다. 팔만대장경은 하늘에 달이 뜨면 천 개의 강에도 달이 비추이듯, 2,500년의 시공간적 조건 속에서 진리는 매번 새롭게 태어났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는 부처님,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시고 보디가야에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펴신 후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신 그 분의 말씀에 담긴 의미가 줄어들지는 않을 터. 초기불경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이 금빛 연좌에서 내려와 피가 돌고 맥이 뛰는 한 사람으로서 오만 사람을 만나는 현장을 따라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불교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초기경전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지적, 영적 감응은 차차 생긴 것이고, 사실 제일 먼저 인 감정은 뭔가 생경스럽고 이상하다는 느낌이었다. 그 불편함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그건 『숫타니파타』를 다 읽도록 부처님, 아니 붓다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대신, 머리를 빡빡 깎은 젊은 ‘고따마 존자’가 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때로는 신과 야차들과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뒤늦게 무릎을 쳤다. 당시 인도사람들에게 그는 한 명의 사상가일 뿐 아니겠는가. 그들은 전지전능한 부처님에게 방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길 위의 유행승 고따마에게 묻는다. 그 질문과 대답을 통해 스스로 검토하고 이해하고 알게 된 사람들, 그리하여 눈을 뜬 사람들만이 비로소 ‘고따마 존자’라는 호칭을 철회하고 ‘세존’-세상에서 제일 존귀한 스승이라 부른다. 믿음이 먼저가 아니다. 이해로부터 비롯한 믿음이 있을 뿐. 아, 이 또한 너무나 불교다운 점이 아닌가. 

도시, 욕망과 구도의 교차로
  한 젊은이가 길을 떠났다. 히말라야 산기슭에 자리한 부족의 성문을 나선 그의 발걸음은 동쪽으로 향했다. 그가 가려는 곳은 고향과는 사뭇 다른, 크고 강력한 마가다왕국의 수도 라자가하였다. 이 청년의 이름은 고따마. 숫도다나 왕의 장자로서 어릴 때부터 완벽한 후계자 교육을 받아온 그였다. 그런데 어째서 일국의 태자가 맨발로 성을 나온 것일까? 진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왕이라는 신분과 지위는 진리의 길을 여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왕위까지 버리고 구도의 길을 가는 이가 향하는 곳이 고요한 숲이 아니라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 한 복판이라니, 그건 무슨 까닭일까?
 
  청년 고따마의 고향 까삘라밧투는 인도 북중부에 있었다. 인도의 문명은 서부 지역에서 먼저 발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고대문명의 발상지가 바로 거기이다. 코카서스 산맥 아래에서 남하한 아리안족이 정착한 곳도 인더스강 유역이다. 인도문명의 근간을 형성한 베다사상의 지반은 그러니까 서부지역인 셈이다. 그러나 힘은 흘러가는 것. 기원전 5세기 중반, 인도의 중심은 전통의 서부를 떠나 점차 동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농업 기반의 부족연합체는 힘의 균형과 화합을 중시했다. 이런 공화국들은 회의나 만장일치제를 통해 운영되었다. 서로 잘 알아온,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공동체에게 적합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와는 더 이상 맞지 않았다. 왕은 강력해진 군사력으로 상인들을 보호했다. 먼 거리를 보다 큰 규모로 휩쓸고 다니는 상인들은 캬라반을 조직했다. 

  도로가 건설되고, 수레와 말, 낯선 사람들이 새로운 물건을 가지고 나타났고 먼 곳의 소식이 흘러 들어왔다. 엄청난 부자가 된 사람들 이야기, 큰 도시의 진귀한 풍물들 이야기, 그 이야기들과 새로 난 길을 따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도시였다. 라자가하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번성한 곳이었다. 부자와 부자가 되려는 사람이 모여드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도시의 거리에는 슈라마나들이 있었다. 베다라는 오래된 신앙과 사상에 반기를 든 새로운 사상가들, 사람들은 그들을 ‘수행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뜻의 슈라마나(śramaṇa, 한역하여 사문이라고 함)라고 불렀다.

  고대 인도사상의 토대를 이루었던 베다는 세계의 창조가 위대한 푸루샤의 희생에 기초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에 따르면 카스트라는 신분질서는 우주 탄생 과정에 따른 자연질서이며 학문과 제사를 담당하는 브라만은 제 1계급으로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언제나 공경과 공양을 받아야했다. ‘리시’라고 불리는 베다의 선인(仙人)들은 자신들이 들은 우주와 세상에 관한 지식을 비밀스럽게 전수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불의 제사’를 지내서 조상과 신들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우주와 세상이 유지된다고 믿었고, 그런 신성한 행위를 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여겼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신성한 불이 아닌 탐욕의 불을 신봉하게 되었다. 브라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갈수록 더 큰 제사, 더 많은 희생물을 바치는 제사를 지내라고 요구했다. 숫타니파타에는 이러한 브라만의 타락사에 대한 고따마 붓다의 상세한 설법이 실려있다.

  재밌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한 주체가 브라만 자신이라는 것이다. 브라만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는 반증이다. 베다가 위대한 점은 이렇게 내부적으로 계속 새로운 사상을 배태할 수 있다는 점에도 있을 것이다. 이제 사제라는 대리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제식주의를 반성하고 내면의 제사, 즉 영혼을 수련하는 삶을 살 것을 전했다. 범아일여(梵我一如), 아트만이 브라만이다. 이 말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깃든 신성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카스트제도와 지식의 전유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의 의미가 ‘무릎과 무릎을 맞대고 전한다’는 뜻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한계를 명백히 보여준다. 

길은 우리 안에 있다
  우파니샤드사상은 고따마 붓다 시대보다 약간 앞선 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제사 등의 외부적 요식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자력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 놀라운 사상은  베단타, 즉 베다의 끝이라고 불리었다. 하지만 자아와 신성을 영원불변의 무엇으로 실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와는 좁혀질 수 없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슈라마나들은 또 다른 주장들을 펼쳤다. 오늘날의 원자론처럼 세상이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졌으니 죽으면 그뿐이라는 주장(아지따 께사깜발린/짜르와까, 로까야따), 실타래가 굴러가면 언젠가는 실이 다 풀리듯 840만 대겁의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해탈한다는 숙명론적 주장(막칼리 고쌀라/아지위까/무인무연론),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있다고도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판단중지의 태도를 취하는 사상가(산자야 벨랏티뿟따). 어떤 판단도 ‘어느 관점에서 보면 ~일 것이다’라는 상대주의를 취하는 사상가(니간타 나따뿟따/자이나교)등. 

  이들은 거리에서 가르침을 펴고 고행을 하며 각기 세력을 구축해가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 기반은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이들의 생계는 탁발, 즉 걸식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서는 카스트에서 벗어나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자신의 사상에 입각한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다. 불교에서 62사견이라고 불리는 이 슈라마나들의 사상은 저마다 차이가 있으나 유물론적 입장이 다수이며, 쾌락이나 고행에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불교와 대립된다. 그렇다면 베다와도 우파니샤드와도 62사견과도 다른, 고따마가 주장하는 진리란 대체 어떤 것일까? 불교의 진리는 보통 고, 무아, 무상이라고 하는 3법인이나 사성제나 연기 등으로 말해지는데, 초기불경인 『숫타니파타』의 맨 처음을 장식하는 <뱀의 경>은 이렇게 노래한다.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무화과 나무는 원래 꽃이 피지 않는 나무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실체도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없는 꽃을 찾으러 다녀봤자 소용없듯이 존재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믿는 일은 허망할 따름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고따마 붓다는 어떻게 얻었을까? 처음에는 스승이 필요했다. 하지만 결국 진리의 길은 홀로 가는 것이다. 도시로 온 고따마는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기존의 모든 사상을 배우고 검토했다. 선정도 배우고 지독한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원하는 깨달음을 찾을 수는 없었다. 6년의 방황 끝에 고따마는 스승과 도반을 떠나 오로지 자신만의 답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이제까지 존재한 모든 사상과 수행방식을 실행하고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해방되는 궁극의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허물을 벗은 뱀처럼 다른 존재가 되는 길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고따마 붓다의 질문은 정말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길은 있었다. 붓다란, 그 오래고도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깨어났고, 선언했다. “이제 그 길은 열렸다.”고.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 우리 각자, 저마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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